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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의학으로서의 한의학(中醫)

한의학은 역사적, 과학적으로 허위의학에 불과하다. 한의학과 이별의 준비를 해야한다.


본 원고는 중국 창사(长沙) 중난대학(中南大學) 과학철학과 교수인 장궁야오(张功耀, ‘장공야오’로 표기되기도함)가 2014년 6월 21일에 열린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 주최 ‘'과학과 의료윤리로 본 한방문제 - 해외연자 초청 세미나’에서 강연한 내용의 원고를, '과학중심의학연구원(http://www.i-sbm.org)'이 별도로 편집해 공개하는 것입니다.(한의계 경전 '황제내경'은 허위 조작됐다 ) 장궁야오 교수는 2006년에 ‘고별한의한약(告別中醫中藥)’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중국 정부에 한의(中醫)와 한약(中藥)을 국가의료시스템에서 퇴출시킬 것을 촉구하면서 한의학 폐지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주인공입니다.



허위의학으로서의 한의학(中醫)



신사숙녀 여러분,

이 기회를 빌어 여러분들과 의학문제에 대해서 교류할 수 있게되어 무척이나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의 한의학 관련 저자인 허준(許浚, 1539~1615년) 선생이 편찬한 '동의보감(東医宝鉴)'을, 그리고 세종(世宗) 때 지어져 세조(世祖) 때에 교열을 본 바 있는 '의방유취(医方类聚)'를, 정경선(郑敬先)이 소찬한 '의림촬요(医林撮要)'를 읽어본 바 있습니다.

저는 저 저서들을 독해함으로써, 저 저서들이 중국의 한의학 경전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일부는 심지어 중국의 일부 한의학 경전 저서들을 그대로 가져가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허준 선생이 가장 최초로 조선의 의학을 동의(東醫)라고 일컬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명명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면, 중국에는 일찍이 남의(南醫)와 북의(北醫)가 존재한 바 있는데, 조선은 중국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조선의 의학을 동의(東醫)라 이름 짓게 된 것입니다. 이 명칭으로 미루어보아 한의학에 있어 중의(中醫)와 동의(東醫) 간의 상호 관계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헌데 제가 보기에 동의(東醫)는 바로 중국 한의학의 복제품일 뿐만 아니라, 모방의 정도가 무척이나 심하다고 여겨집니다. 복제하였기에, 몇몇 부분은 정말 진짜처럼 모방되어 있으며, 몇몇 부분은 오히려 그다지 진짜 같지는 않습니다. 이 의미에서 말하자면, 동의(東醫)라는 것은 또한 완전히 독자적인 자아를 지녔다고도 볼 수가 없습니다.

동의학 자체의 문제에 관련하여서는, 저는 그다지 많은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늘 저는 여러분과 동의학의 모본(母本)으로서의 중국 한의학 문제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여러분이 모종의 깨달음을 얻기를 바랍니다.
 




1. 신뢰를 얻지 못한 한의학

한의사들은 스스로를 인술(仁术)을 한다며 줄곧 자화자찬해왔습니다. 국제사회로 시장을 넓히는 과정에서, 한의사들은 한의학이 여전히 중화민족의 우수한 전통 문화 구성 부분임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또 여전히 국제사회가 결코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는 중국의 전통의학이라고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한의사들은 중국의 전통의학이 중국을 세계적으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가 되게 하였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철저하게 틀렸습니다.

야생산양은 일년에 한번 새끼를 배고, 또 한 번에 한 마리를 낳습니다. 호랑이는 일년에 한 번 새끼를 배며, 한 번에 두 마리에서 다섯 마리를 낳습니다. 야생산양의 평균 기대 수명은 고작 10세인 반면, 호랑이의 평균 기대 수명은 25세입니다. 생존 경쟁 관계 속에서 이제껏 호랑이가 야생산양을 잡아먹어왔지, 야생산양이 호랑이를 잡아먹어오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야생산양이 호랑이보다 더 많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설마 이를 놓고 야생산양의 의학이 호랑이의 의학보다 더 선진적이라고 말하진 않겠죠? 야생산양은 의학 없이도 번식할 수 있는데, 설마 중국인이 한의학 없이는 (자손) 번영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만일 우리들이 역사를 잠시 되돌아본다면 어렵지 않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유럽인이 동방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해왔을 때, 우리 중국인이 유럽인에게 심어준 인상은 그저 질병에 시달리는 동아시아 병주머니였습니다. 심지어 황제의 가솔과 친척(세도가)들조차 병에 걸린다면 이렇다 할 효과적인 간호와 치료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봤을때, 과연 우리들은 한의학이 어떻게 중화민족에게 효과적인 건강에 대한 보증을 제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조선,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재차 같은 판단을 내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의방유취(醫方类聚)'는 1477년에 출판되었습니다. '동의보감(東醫宝鉴)'은 1613년에 출판되었습니다. 1477년부터 1910년에 일제의 침략자들이 강제적으로 고종황제 이희(李熙)에게 황권을 포기하도록 할 때까지, 연산군 이융(李隆), 광해군 이혼(李晖), 유명무실했던 마지막 황제 순종 이척(李坧)을 포함하여 조선은 열 아홉 명의 황제가 있었으며, 433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 중, 인종 이호(李峼)가 독살당했다는 의심을 제외하고 다들 그래도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열 아홉 명의 황제 중, 가장 오랫동안 장수했던 이는 영종 이금(李昑)으로, 그는 여든 세 해(83세)를 살았습니다. 가장 일찍 죽은 이는 헌종 이환(李奐)으로, 고작 스물 두 해(22세)만 살았을 뿐입니다.이 열 아홉 황제의 평균 수명은 43.37세였습니다.

1477년 이전, 조선은 142년 동안 여덟 명의 황제들이 잇따라 왕위에 올랐습니다. 단종 이홍위(李弘暐)가 핍박에 의해 자살한 것 외, 다른 일곱 명의 황제들은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19세에 병사한 예종 이황(李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일곱 명의 황제들의 평균 연령은 50.14세였습니다. 여러분은 '의방유취(醫方类聚)'와 '동의보감(東醫宝鉴)'이 출간된 이후, 조선 황제의 평균 연령은 오히려 6.67세나 줄어들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방유취'와 '동의보감'이 결코 한국인의 건강에 실제적으로 공헌한 바가 없다고 볼 수 있는 점입니다.
 



저는 고대 한국에서 동의학(東醫)이 어떤 사회적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중국에서 한의학은 줄곧 의식이 있는 중국 지식인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오색찬란한 두건으로 덮어 가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미 여러 차례 이러한 한의학을 (덮어)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기고자 시도한 바 있으며, 또한 한의학의 우매와 미신, 그리고 야만성을 폭로하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이 공개적으로 발표될 수 없어, 그저 인터넷과 같은 경로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전파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예전 선교활동을 했던 예수와 매우 흡사합니다. 한의학 역사의 진상에 대한 폭로를 포함한, 저의 한의학 비판 발언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늘 배척과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에서 한의학을 신뢰하지 않았던 첫 번째 지식인은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년)였습니다. 그는 최초로 인류의 도덕 체계 속에서 한의학을 폐기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부정확한 건강의 기대감들을 갖게 하여 사회적 혼란을 빚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스스로 한의학으로 치료 받는 것을 결연히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인에게 엄한 말로 경고했습니다. 즉, 환자를 대신하여 한의사를 청해 치료하게 하지 말며, 환자에게 한의약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한의약을 선물하는 것은 종래 하나의 도덕으로 간주되었지만, 응당 일종의 살인행위로 여겨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주역(周易)'의 작가 또한 한의학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망(无妄)' 괘(卦)에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즉, 만일 그대가 여전히 스스로 앓고 있는 게 무슨 병인지 알 수 없다면, 가장 좋기로는 어떠한 약도 먹지 않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만일 그대가 약물의 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먹어보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말입니다.

한유(韩愈, 768~824년)는 9세기에 중국인의 존경을 받은 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일찍이 그의 '사설(师说)'이라는 글에서 교육학 원리를 상세히 논술한 바 있습니다. 즉, 총명한 자가 스승이 되면, (학생을) 더욱 총명한 학생으로 가르쳐 교육하겠지만, 우둔한 자가 스승이면, (학생을) 오히려 더 우둔한 학생으로 지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근거로, 그는 사람들이 한의약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서 한의학을 배우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중국 송 왕조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문학가, 시인인 소동파(苏東坡, 1037~1110년)는 일찍이 “서법(書法)을 배우는 자, 종이에 돈을 쏟아 붓고, 의술을 배우는 자, 살아있는 환자의 생명을 헛되이 낭비한다”라고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500여년 이후, 명(明) 왕조 시기에 가장 풍부한 비판정신을 지녔던 문학가 풍몽룡(冯梦龙, 1574~1646)은 “의술을 배우는 자, 환자의 생명을 허비하고, 군사(軍事)를 익히는 자는 사병을 헛되이 사용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들이 표현한 사상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서법을 배우면서는 많은 종이들을 낭비해야 할 것이며, 군사에 대해 배우고자 한다면 많은 군인들을 허비해야 하고, 의학을 배우고자 한다면 많은 살아있는 생명을 헛되이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많은 종이를 낭비하는 사람이 반드시 서법에 능숙해질 것이라 확신할 수도, 많은 군인들을 헛되이 활용한 사람이 반드시 장군이 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살아 있는 사람의 생명을 헛되이 낭비한 사람이 적격한 의사가 되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한의사는 여전히 그들 앞에 있는 각각의 환자들을 “서법 훈련의 종이”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1830년, 중국 해부학의 아버지인 왕청임(王清任, 1768~1831년)이 '의림개착(醫林改错)'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한의학 서적이 인체 생리, 해부 및 병리에 대해 내린 추측은 “곳곳이 앞뒤가 맞지 않고 자체 모순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인식의 기초로 의료행위를 하는 것은 마치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를 가는 것마냥 너무도 위험한 일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의학이 중대한 진보를 이룬 후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일어나 한의학을 필연코 비판하게 될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19세기 말엽, 점점 많은 서방 의학의 이론과 방법들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이로써 한의학은 중국에서 더욱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중, 중국의 가장 유명한 교육자인 오여륜(吴汝伦, 1840~1903년)은 일찍이 “분육(贲育, 역주 : 하늘을 떠받치고 땅에 우뚝 서 있는 거인. 전국[戰國]시기의 용사인 맹분[孟贲]과 하육[夏育]의 병칭)”과 “동자(童子, 갓 태어난 영아)”를 들어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차이를 비유한 바 있습니다. 그는 그의 학생들에게 서양의학과 견주어, 모든 한의학 서적은 불태워 없애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1879년, 한의학(中醫)와 굿(巫术) 사이의 상동 관계를 비추어 보아, 게다가 한의학의 병 치유와 보건 방면에서의 실제적인 무능(无能)과 유해(有害)를 고려하여, 유월(俞樾, 1821~1907년)은 '한의학 폐기론(废醫論)'을 발표하여 중국인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습니다. 즉, 중국인이 한의학에 대해 얼토당토않은 환상을 품고, 이러한 환상으로 사회적 혼란을 빚게 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 굿을 폐기하였듯이 한의학(中醫)도 폐기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19세기말엽, 한의학에 대한 중국인민의 엄격한 비판 및, 서방의학 사상과 그 방법의 대규모적인 유입은 중국이 20세기에 진입한 이후 세 차례 대규모적으로 한의학 폐기 운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제1차는 1914년으로, 중국 정부는 국가의 고등 교육 시스템 속에 한의학 전공을 설치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모든 국가의 의료와 (전염병)예방 체계 건설을 변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2차는 1929년으로, 중국정부 위생위원회는 한의사에게 의료 행위 자격증을 발급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한의대학을 창립하거나 한의약을 육성하는 것을 금지하고, 한의약 관련 간행물과 서적 출판을 금지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4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한의학이 사라지게 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제3차는 2006년에 제가 논문 '고별한의한약(告别中醫中药)'을 발표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으킨 한의학 문제 관련한 대토론입니다. 이 대토론에서 저와 왕징(王澄) 선생은 서명운동을 발기하였으며, 중국 정부에 현(現) 의료 체제를 개혁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또한 한의학을 국가 의료 체제에서 퇴출시켜, 정부의 과학적 지도와 감독관리 하에서 한의학을 민간에서 사용하는 보충의학 혹은 선택의학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촉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일찍이 247명의 중국국민과 해외 화교의 지지를 얻은 바 있습니다. 이 토론을 통해 한의학에 대한 중국인의 각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한의학과 관련된 일부 역사적 진상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2. 부단히 의학 경전을 위조하는 한의학

한의학을 변호하는 사람은 줄곧 오늘날까지 여전히 증거가 부족한 황제(黄帝)와 신농(神农)의 이름을 빌어 한의학이 이미 5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에서 대체로 논리적이라 할 수 있는 글자인 “병(病)”자와 “질(疾)”자는 기원전 13세기 상(商)왕조 시기 남겨진 갑골문(甲骨文) 속에서 최초로 출현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침상에 누워 땀을 흘리는 그림으로 “병(病)”이라는 글자를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화살이 한 사람의 몸에 명중하는 그림으로 “질(疾)” 자(字)를 만들어냈습니다. 중국어에서의 “의(医)”자는 최초로 화살을 담은 가죽 자루 그림을 가리키고 있지, 결코 의학 혹은 의술의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 후 변화 발전 과정에서 이 글자는 “예(翳)”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화살 자루 속에서 화살의 깃털이 드러났음을 나타냅니다. '국어 · 제어(国语·齐语)'에 기재된 “병사는 예(翳, 医)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는 사병이 무기를 차고, 화살을 화살 자루에 가득 꾸려 항상 전쟁할 준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중국인은 의학의 의(医)를 “의(医)”로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그것의 발음을 취하여 만들어낸 것입니다. 많은 중국인은 이 글자가 “의(醫)”자의 간소화에서 온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기실 그렇지 않습니다. “의(医)”는 “의(醫)”보다 훨씬 일찍 출현하였습니다. 후자는 이미 독립적으로 사용되는 한자(漢字)로, 그저 그것의 최초 함의(含義)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습니다. 동한(東漢)시기의 한어(漢语) 언어학자인 허신(许慎, 약 58~147년)은 이 글자를 손에 긴 창과 날카로운 검을 쥔 완전 무장한 사병이 허리춤에 술병을 차고 흉악한 모습을 나타내는 회의(会意)문자로 해석했습니다. 기원후 50년, 한(漢) 문제(文帝) 시기의 왕육(王育, 생졸연원 미상)은 이 글자를 일종의 술(酒)의 명칭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청(清) 왕조 말년, 유월(俞樾) 선생은 이 글자에는 구체적인 함의가 담겨져 있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대략 기원전 9세기부터, 중국은 이미 의술과 의학적 특징을 겸한 “의(毉)”라는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이 글자의 윗부분은 그것의 발음이고, 아랫부분은 그것의 주술(巫术)적 특징을 명확하게 밝혀내고 있습니다. 현대 중국어의 “의(医)”자는 실제로 이 주술에 기반한 “의(毉)”자의 간체화에서 온 것이지만, 중간에 “의(医)” “의(醫)” “의(毉)”의 상호 혼용하였던 경험이 있을 뿐이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한(西漢) 학자 유흠(刘歆, 기원전 50년 ~ 기원후 23년)은 일찍이 '주관경(周官經)'을 원본(底本)으로 '주례(周礼)'를 정리하였습니다. 중국 학자는 주(周)왕조의 관료 체제를 연구할 때 줄곧 이 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책에 기재된 “의사(醫师)”는 오늘날의 내과의사에 해당됩니다. “식사(食师)”는 지금의 영양사에 해당됩니다. “질의(疾醫)”는 오늘날의 외상과 의사에 해당됩니다. “양의(疡醫)”는 현재의 피부과 의사에 해당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작가가 기록한 역사는 이미 그가 처한 시대와 800여 년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현존하는 출토된 문물과 역사적 문헌 가운데에서는 이러한 기록과 관련한 지지와 증거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중국이 이전에 확실히 '주관경(周官經)'이라는 역사적 기록이 있었는지조차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중국의학사 관련 최초 문헌은 창사(长沙) 마왕퇴(马王堆) 한묘에서 출토된 5부의 의학서와 후베이(湖北) 장가산(张家山)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맥서(脉書)'만이 존재할 뿐이며, 이 문헌들은 진실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의 존속 연대는 대략 기원전 189년 전후입니다. 그 나머지 한의학 경전은 죄다 위조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일찍이 18세기에 일부 중국학자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1939년 중국 문헌학자인 장심징(张心澄)은 그의 이전 역대 문헌학자들의 위조 경전에 대한 감정 성과를 수집하여 정리해 '위서통고(伪書通考)'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그 중, 전부 허위로 평가된 고대의학서적으로는 황제내경(黄帝内經)', '맥결(脉诀)', '난경(难經)'을 포함해 총 11부가 있습니다. 그 외, '상한론(伤寒論)'은 “부분 위조됨”이라고 평가 받았습니다.
 



2011년 유네스코(UNESCO)는 중국 정부가 제출한 신청을 비준하였습니다. 1339년 호고림 서당(胡古林書堂)에서 출판된 '황제내경'을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리스트에 올렸습니다.

지적할만한 것으로는, 이 책의 출판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내용은 허위로 조작되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또한 중국 정부가 신청문건 속에 서술한 것처럼 '황제내경'이 한의학의 이론적 기초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실제 상황은 이렇습니다. 중국 정부를 위해 유네스코에 신청 보고서를 작성한 한의약 학자들이 '황제내경'이 대관절 뭘 말하는지를 정말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내경'이 최초로 한 권의 서적 리스트로 여겨진 것은, 중국 역사학자 반고(班固, 32~92년)에 의해 '한서·문예지(漢書·艺文志)'에 기재되면서부터입니다. 같은 역사서 속에 반고는 '황제내경'의 출판 시기와 동일한 시간을 살아온 당시 중국에서 가장 걸출하다고 할만한 지식인들의 사적(事迹) 또한 함께 기재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식인들이 남긴 저서 중에는 '황제내경'의 흔적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후 40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어떤 사람이 '황제내경'를 읽었다는 아주 작은 실마리조차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두 가지 증거의 반박에 부딪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상한론(伤寒論)'과 '침구갑을경(针灸甲乙經)'이 각각의 그 증거들입니다. 이 두 권의 책 속에서, 그들은 '황제내경'과 관련한 내용들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한론'은 그것의 '서언(序言)'과 함께 허위로 조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한론'을 위조한 작가 또한 '상한론·서언'을 날조하였다고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 '서언'에서 작가가 제기한 “'소문(素问)' 9권(卷)으로 저술하다”는 이미 시대를 뛰어넘는 위조라고 평가되어졌습니다. 그 증거로는 중국 고대 의학 문헌에서 처음으로 “소문(素问)”이 출현한 것은 기껏 636년에 출판된 '수서·경적지(隋書·經籍志)'에서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상한론·서언'에서 제기한 이 “'소문' 9권”이 만일 진짜라면, 그것은 이전의 역사 문헌 속에 기재되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줄곧 역사학자는 이 역사 문헌 속에서 “'소문' 9권”과 관련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침구갑을경'에서 제기하고 인용하여 서술한 '황제내경'의 내용에 관해서 우리들은 그저 이 책이 일찍이 11세기에 대대적으로 왜곡되었음을 제기만 해도, 이미 (이 책이 위조되었음을 밝히는데) 충분하다고 봅니다.

'황제내경'은 황제(黄帝)의 이름을 도용하였습니다. 이 결론은 이미 증거를 다시 들 필요도 없습니다. 실제로 황제의 진실성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실증적인 증거를 제대로 획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전설 속의 중국 한(漢)민족의 선조는 몇몇 중국 역사학자들에 의해 기원전 2,700년에 출생했다고 추정되어지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 역사적 인물이라면, 그는 이후의 역사 문헌 속에서도 당연히 나타났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000여년의 역사 문헌과 출토된 문물 속에서, 오늘날까지 전혀 황제의 존재와 관련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공자(孔子), 노자(老子), 맹자(孟子), 관자(管子) 등 중국의 저명한 인물들이 남긴 역사 문헌 속에서도 역시 이 인물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일부 위조된 고대 문헌에서만이 황제를 논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열자·황제(列子·黄帝)'와 '황제내전(黄帝内传)'이 그렇습니다.

독자들이 만일 유심히 관심을 갖는다면, 응당 이러한 사실 즉, '황제내경'의 첫머리 첫말이 '사기(史记)'와 완전히 똑같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놓고 '사기'가 '황제내경'을 그대로 베꼈다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분명 '황제내경'이 '사기'를 표절하였다는 점입니다. '사기'는 기원전 9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내경'을 전국시기의 작품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황제내경'의 제목은 전국 시기의 문풍에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전국시기는 중국의 문자체제가 아직 완비되지 않은 탓에, 게다가 문자를 기록하는 수단(예컨대, 갑골, 금속, 죽간, 목판) 또한 무척이나 비싼 탓에 고대 중국인으로 하여금 가장 절약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시기의 문헌은 표제를 달 때 통상 두 글자를 사용했습니다. 네 글자 이상의 한자를 사용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현재 보는 '황제내경'은 전혀 이렇지 않습니다.

둘째, '황제내경'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전국시기 중국인의 습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중국어 언어사(语言史)에 익숙한 학자라면 전국시기의 중국인이 문서제작 시, 외자로 된 명사를 사용하는 습관이 있으며, 두 글자 명사를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해”와 “태양”을 오직 “일(日)”로 말할 것입니다. 가끔 “양(阳)”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결코 “일두(日头)” 혹은 “태양(太阳)”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홑 글자 명사 사용 습관은 당시 중국인이 홑 글자 명사를 결합 명사(组合名词)로 합쳐 사용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饮)”은 하나의 홑 글자 명사이며, “식(食)” 또한 하나의 홑 글자 명사입니다. 전국시기의 중국인은 결코 그것들을 “음식”으로 결합하여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현재 보는 '황제내경'에는 두 글자 명사가 무척이나 많이 대량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셋째, '황제내경' 속의 숫자 역시 전국시기의 중국인이 표현했던 습관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전국시기의 중국인은 열 자리 이상의 숫자를 표현할 때에, 수의 단위 글자 사이에 “유(有)”자(字)를 덧붙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만일 단위사와 함께 표현한다면, 이 숫자의 전후에 이 단위사가 덧붙여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의 “팔십일(八十一)” 표현 습관은 “팔십일(八十有一)”이었으며, “123인(人)”을 표현해내는 습관은 “123인(人一百有二十有三人)”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이 보는 '황제내경' 에는 이러한 표현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언어사의 기본적인 규칙에 비추어, 후세의 언어표현은 선인의 언어적 습관을 아마도 동시에 수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인의 언어 표현이 후세의 언어 습관에 수용되었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황제내경' 속에는 대량의, 전국시기 이후의 중국인의 언어 습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새벽녘(平旦)”과 “한낮(日中)”은 진(秦)왕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난 표현입니다. “세월 육십갑자(岁甲子)”는 한(漢, 206~220년)왕조에야 존재하게 되며, “인시(寅时)”는 진(晋)대에 이르러서야 존재하게 되는 표현입니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하나의 병에도 그 치료방법이 제각기 다르건만, 모두 병이 치유되었다면, 도대체 이는 어찌된 까닭일까?”('이법방의논편 제12(異法方宜論篇第十二)'와 같은 언어의 현대화 과정은 적어도 당(唐) 왕조의 수준 정도에 해당됩니다.

이상의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현재 우리들이 보는 '황제내경(黄帝内經)'은 여러 차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가까이 '황제내경'을 왜곡한 사람을 들자면, 적어도 7세기 이후의 당(唐) 왕조의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황제내경'은 한 권의 서적이지, 단순한 책 목록이 아닙니다. 그 서적이 출현한 확실한 연대는 수(隋, 581~618년) 왕조입니다. 당시, 전원기(全元起, 생졸 연대 미상)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이것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지적할만한 것으로는 전원기의 주석을 거친 '황제내경'은 고작 8권(卷)본으로, 제7권이 빠져 있습니다. 이 제7권이 빠진 8권본의 '황제내경'이 12세기를 줄곧 전해져 왔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간 동안 중국에는 8권(卷)본의 '황제내경' 외에도 24권본, 18권본, 12권본으로 이뤄진 '황제내경'이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전원기가 주석을 단 8권본의 '황제내경' 또한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 리스트에 열거된 원(元)대에 판각한 고림서당(古林書堂)본의 '황제내경' 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것은 12권본으로 된 '황제내경' 입니다. 이 12권본의 '황제내경' 이 출판되기 전, 북송(北宋) 왕조 또한 의서국(医書局) 교정을 거친 '중광보주황제내경소문(重广补注黄帝内經素问)' 한 부를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24권(卷)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지적할만한 것으로는 오늘날 중국 시장에서 유행하는 '황제내경'은 위에서 열거한 어떠한 판본조차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와 같다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 리스트에 열거된 그 '황제내경' 판본의 보존 가치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가 어떠한 책을 세계기록유산 리스트에 열거하여 보존하든, 그것은 유네스코의 권한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온 학자로서 저에게는 전세계에 이상의 상황을 명백하게 알릴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3. ‘의학(醫)은 추측이다’ 와 황당한 증명에 기반한 한의학

일찍이 1879년에 유월(俞樾) 선생은 한의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폭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이 약으로 치료하여 치유된 것이라면, 정말이지 그 병은 약을 쓰지 않아도 치유되는 지라. 그것이 약을 쓰지 않아 치유되지 않는다면, 약을 쓴다고 해도 역시 치유되지 아니하리라. 어찌 그냥 치유되지 않을 뿐이겠는가. 가벼운 병은 중(重)해지고, 중병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유월은 만일 한의학을 지속적으로 지키려 한다면, 필연코 “이익을 구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에 빠지게 될 것이며, 전체 사회에 환난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때부터 중국은 한의학 계통을 토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22년 노신(鲁迅)은 더욱 단도직입적으로 한의학을 하는 한의사는 “일종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사기꾼에 불과하다”라고 비평하였습니다.
 



중국인민이 서로 다투는 토벌에 직면하면서 한의학은 부득불 과학화의 길을 향해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상황은 오히려 한의가 과학화를 추구하면 할수록 한의학의 문제는 더욱더 폭로되었습니다. 1930년, 한의의 과학화를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는 육연뢰(陆渊雷)는 일찍이, ‘한의학이 만일 지속적으로 과학화된다면, 한의학은 죽게 될 것이다. 한의학이 만일 과학화를 거절한다 해도, 한의학은 또한 죽게 될 것이다’라고 탄식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1950년대 중기, 한의학은 돌연 뜻밖의 행운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한의학은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중국 정부에 의해 돌보아집니다. 중국정부는 심지어 한의학으로 과학의학(科學医學, 서양의학)을 바꿔, 모택동의 사상적 특징을 지닌 새로운 의학을 창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전국적으로 50여 군데의 한의대학과 30여 군데의 한의약 연구 기구를 창립하였습니다. 이러한 대학과 연구 기구는 많은 한의학 관련 학사, 석사 그리고 박사를 배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량의 부교수, 교수 그리고 아카데미의 원사들을 배양해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과학이라는 외투를 걸치고서 고위직 학술 직함(칭호)를 가진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과학을 멸시하고, 과학 규범을 완전히 따르지 않으며, 심지어는 공개적으로 과학과 정쟁을 벌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침없이 거짓말을 하며 한의학을 “동방의 과학”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또한 실험과 논리를 기초로 한 “서방 과학”을 “과학주의 과학”에 속한다고 비평하면서, 자신들이 종사하는 “동방 과학”은 실험이 필요 없고 논리가 필요 없는 “인문주의 과학”이라고 추어올렸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많은 인류의 질병에는 자체 한계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일부 질병에 “약을 쓰지 않고도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효과를 갖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한의사에게 가장 나태한 방식으로 이론을 세우게 하였고, 의술을 펼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유효성”을 취해 민중을 기만하고, 기준을 만들어냈습니다.

한의사가 의학이론을 건립하고 의술을 펼치는 유일한 방법을 네 글자로 개괄하자면, “의학은 추측이다(醫者意也)”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직관적 사유 방법입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몇몇 보여지는 합리적인 사상 틀을 추구하고, 다시 이 사상적 틀을 근거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직관적인 판단들을 내립니다. 초기 중국 지식인(智者)들은 일찍이 확고하게 하늘과 인간이 함께 통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직관을 형성하는 사상의 틀로 삼았으며, 이후 재차 그것을 인체 구조에 대한 추측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다음과 같은 판단을 얻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둥근 게 하늘 같고, 발은 네모진 게 마치 땅과 같습니다. 하늘에는 사계절이 존재하고, 인간에게는 사지(四肢)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오행이 존재하고, 인간에게는 오장이 있습니다. 하늘은 여섯 극(六极)로 나뉘었고, 인간은 육부(六府)를 가졌습니다. 하늘에는 팔풍(八風)이 존재하고, 인간에게는 여덟 마디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아홉 별(九星)이 존재하고, 인간에게는 구규(九窍)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12시가 있고, 인간에게는 12맥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365도(度, 1년 354일)가 존재하고, 인간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습니다.”


이렇게 직관적 판단을 내리면, 인체를 해부할 필요도 없으며, 관찰하여 얻은 현상에 대해 인과 관계 분석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의사가 표방한 “인문주의 과학”이 일종의 나태한 과학임을 명백히 밝힌 것입니다.

이 외, 과학 상식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머리가 둥근(圆) 것은 결코 하늘이 둥글기 때문이 아니며, 인간의 발바닥이 네모(方)진 것이 결코 땅이 네모졌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결코 하늘이 365도(度)를 가졌다고 해서 그로 인해 인체의 골절 또한 365 조각인 것은 아닙니다. 이로써 그들의 “인문주의 과학”은 일종의 지극히 저속하고 황당한 과학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체 구조를 판단하는 것 외, 한의학이 제창한 일부 약품사용원칙, 진단방법과 치료방법은 아래와 같은 나태하고 조약한 방법에서 만들어졌습니다.

—— 설사는 창자와 위가 지나치게 습한 탓으로, 습한 것을 흡수하는 특징을 가진 복룡간(灶心土)으로 설사를 치료해야 합니다.

—— 중국인은 1년을 24 절기로 나누었으며, 그 중 입춘(立春)을 만물이 소생하는 처음으로 여겼습니다. 이를 근거로, 한의사는 입춘 그날의 빗물을 모아 불임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 심뇌혈관 질병이 야기하는 불안정한 걸음걸이나 손떨림을 한의사는 환자가 “중풍(中風)”에 걸렸다고 여겼습니다. 이로써 한의학은 “중풍”을 치료하는 바람을 꺼뜨리는 원칙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물건으로 바람을 꺼뜨릴 수 있을까요? 한의사는 뱀이 바람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보았고, 지네가 뱀을 제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로써 지네는 한의사가 “중풍”을 치료하는 으뜸이 되는 처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모든 고대와 현대의 한의약 관련 출판물에 남발되리만큼 범람해 있습니다.

한의학은 이렇게 그들의 이론, 진단, 치료원칙을 건립했으나, 확실한 것은 신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류 질병 자체의 자아한계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이론과 방법으로, 때론 만족스러운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매번 만족스러운 치료효과를 얻은 후, 한의사는 늘 이러한 치료효과에 대해 엄격한 배중(排中) 분석과 원인관계 판단을 진행할 줄 몰랐으며, 직관적 사유의 틀에서 일부 황당한 증명을 했습니다.

가령 한 사람이 복통, 설사, 복명, 구토, 식욕부진, 소화불량 등과 같은 증상의 질병을 앓는다면, 몇몇 한의사들은 이 환자에게 보화환(保和丸)을 복용할 것을 권할 것입니다. 그것은 산사나무열매(山楂), 신국(神麴), 복령(茯苓), 반하(半夏), 진피(陈皮), 내복자(莱菔子), 연교(连翘)로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 처방제가 치료효과를 가져온다면, 그들은 이렇게 그것이 치료효과를 만들어낸 인과 관계를 다음과 같이 증명해낼 것입니다.


“이는 족태음(足太阴)과 양명경(陽明)의 약입니다. 산사나무열매(山楂)의 시고 따뜻하며 수축하는 성질은 느끼하고 비린내와 누린내가 나는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맵고 따뜻하여 열기가 올라 덮는 성질을 지닌 신국(神麴)은 술과 음식으로 오랜 기간 누적된 독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복자(菔子)는 맵고 달아 흥분을 가라앉혀 얼굴(표면)을 통제합니다. 맥아(麦芽)의 짜고 따뜻한 성질은 곡물을 소화시켜 단단(견고)한 것을 부드럽게 합니다. 체증은 틀림없이 습기를 겸합니다. 복령(茯苓)은 비장을 보양하고 습기가 스며 나오게 합니다. (독소가) 오래 누적되다 보면 울적해져 열이 납니다. 연교(连翘)는 엉긴 것을 풀어 열을 내립니다. 반하(半夏)는 따뜻하게 할 수도 건조하게 할 수도 있어, 위(胃)를 따뜻하게 하고 비장(脾)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진피(陈皮)는 상승과 하강을 조절할 수 있어, 속을 조화롭게 하여 기허(氣虛)의 증세를 치료합니다.”


여기에서 “이는 족태음과 양명경의 약이니라”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만일 한 독자가 구태여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우선적으로 이하의 세 가지 상호 관련 진술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복통, 장에서 소리가 나는 증세, 구토는 족태음비경(足太阴脾經) 질병에 속합니다. 그러나 설사, 소화불량은 족양명위경(足阳明胃經) 질병에 속합니다.

2. 족태음비경과 족양명위경은 두 가지의 다른 순행 경로의 경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몇몇 약물은 그저 이 두 경로만을 순행하여 병을 치료하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만일 이러한 약물이 이러한 경로 운동으로 순행할 수 없다면, 몇몇 보조약물을 더하여 그것을 이러한 경로로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진술은 (사실여부의) 추궁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예컨대, 두 번째 진술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오늘날까지 전혀 해부학과 생리학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의사들 스스로도 이에 대해 여전히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들이 묘사해낸 순행 경로는 너무도 황당합니다. 제가 읽은 한 권의 한의약 관련 교과서는 족태음비경의 순행 경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해놓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발(足)의 큰 발가락 안쪽에서 기원하며, 발의 복사뼈 앞쪽을 통과하여 위로 8촌(寸)을 올라간다. ……”


여기에서의 “팔촌(八寸)”은 확실히 심의 토론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전혀 의심할 여지 없이, 성인인 큰 키의 남자에게 팔촌의 상대적인 격차는 비교적 작습니다. 반면, 갓 태어난 영아 혹은 작은 키를 가진 부녀자에게 이 팔촌의 상대적인 차이는 비교적 큽니다. 가령 이러한 경맥이 확실히 존재한다면, 다른 체형과 신장의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다른 절대적인 차이가 존재할 것이며, 모두 “팔촌”일리가 없습니다.


중국 고대에는 잘린 팔이나 다리로 살아남는 예는 없었습니다. 한의학 경전 저작인 '난경(难經)'의 제1난(难)에는 인체의 경락은 모두 손목에 모일 것이라고 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조건에서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일지라도 지속적으로 온전하게 하나의 건강한 신체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이미 떨어져 나간 사지와 손목에 모여 있을 경락과 혈위가 여전히 존재하는지를 물어보는 것을 허용할까요? 만일 그들이 절단된 사지에 맞춰 끊어졌다면, 한의사가 내놓은 관련 경락과 혈위의 가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일까요?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이 두 경락의 묘사는 '황제내경·영추·경맥편(黄帝内經·灵枢·經脉篇)'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의 원문을 조사해보면 후세에 의해 “발가락”이라고 해석된 부분은, (기실) 원문에서 모두 “손가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원문에 따라 이러한 경락을 묘사해보면, 필연코 순행 궤적 상의 혼란을 빚어 그것들로 하여금 중단 없는 경락의 윤곽을 연결시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손가락”을 “발가락”으로 고친 이후, 이미 원문을 심각하게 왜곡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경락 관련한 진실 묘사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내용이 분명치 않습니다. 저는 지금껏 누군가가 이러한 내용의 애매하고 불분명함에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과학 기술의 현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들이 자신의 아름다운 청춘을 이러한 무미건조하고 불분명한 일에 낭비하는 것을 반대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부 약물 대사(藥物代謝)의 상식을 약간이라도 지닌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즉, 뱃속으로 약물이 일단 들어가면, 위(胃)와 소장(小肠)의 소화 및 흡수를 거친 후에야 인체의 혈액 순환 체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 효과 성분은 혈액순환에 맞춰 전신으로 퍼져 나갑니다. 그러므로 일부 경락운행의 가능성을 따르는 약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의사가 날조한 이 해석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약물은 몇몇 경락을 따라 돌아다닌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황당무계한 해석을 믿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상술한 증상을 지닌 질병에 실험실의 검사가 뒷받침 된다면, 이 병이 장염이라고 진단 내리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의학적 관찰은 이미 많은 장염이 하루나 사흘 이내에 자체 면역력을 통해 증상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게다가 한 두어 주 이내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 또한 증명된 바 있습니다. 약물의 도움 없이 자가 치유될 수 없는 장염은 그것이 어떤 유형의 장염이든지 간에, 과학적인 근거를 지니지 못한, 다시 말해 산사나무열매(산사자)는 수축을 돕고, 신국은 오랜 내장 질병을 제거하며, 내복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복령은 비장을 보양하여 습한 기운을 제거하며, 연교는 해열을 돕는다와 같은 이러한 방법, 즉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 수도 없고 전혀 과학적인 근거도 갖추지 못한 방법으로는 병을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의사는 스스로의 “성공”을 위해 황당무계한 증명을 늘어놓는 오랜 악습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한의대학과 한의약 연구원 설립 또한 이러한 악습에 이렇다 할 만한 아무런 변화조차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중국 정부 위생부는 154군데의 기업에 보화환(保和丸) 생산을 비준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전국적으로 통일된 보화환 생산 기반이 마련되지 못하였습니다. 설령 각각의 기업에 자체적인 보화환 조제방법이 있을지라도, 동일한 기업의 다른 차수의 보화환에는 공교롭게도 통일된 질량의 검사 기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업들은 심지어 중국 정부 위생부가 비준한 관련 보화환의 사용 설명을 거쳤지만, 전혀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보화환의 치료 효능에 “신경성 거식증, 만성위염, 기능성 소화불량을 치료한다”라고 써놨습니다. 그 중 신경성 거식증은 신경계통의 질병과 관련되어 있고, 만성위염은 광범위하게 위(胃)조직 병리 변화의 많은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기능성 소화불량은 적어도 20종의 다른 발병의 원인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종류의 보화환이 동시에 이러한 질병들에 효과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외에, 중국 정부 위생부가 비준 열거한 보화환의 금기 범위를 적용해보면, 모든 보화환에는 그 어떠한 임상 통계의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보화환의 약리적 해석은 펩신의 흡착성을 강화시켜 췌장액 분비량을 증가시킬 것이며, 트립신(trypsin)의 농도와 분비량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 생리학 교재의 보화환에 대한 약리를 근거로 한 견강부회적인 해석으로, 그 어떠한 실험과 임상 관찰의 근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신은 일찍이 구(旧)시대의 한의학을 하는 한의사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사기꾼으로 평가한 바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의 한의학을 하는 한의사들 전체가 고의적인 사기꾼입니다. 구(旧) 한의학과 단도직입적으로 말도 안 되게 터무니없이 다른 점을 들자면, 오늘날의 한의사는 사기칠 때, 많은 사이비 과학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그럴 듯하게 꾸며대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겸해서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과학의 외투를 걸치고 사기를 치는 의학 사기꾼은 더 큰 기만성으로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한의학은 중국의 문화적 부담(짐)입니다.

그것은 줄곧 중국의 의학 발전(진보)을 방해해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회적 혼란을 조성해왔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세계적으로 의학적 재난과 사회적 혼란을 빚어내고 있으며, 희귀한 동식물 자원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일본 의학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일본은 이미 19세기말에 황한의학(皇漢醫學)을 폐기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 또한 유럽 연맹이 '전통 한약 제품 등록 지시(传统草药产品注册指令)'를 엄격하게 실시함으로써, 이미 2011년 5월 1일에 유럽 20년의 한의약을 퇴출시켰음을 아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영국, 캐나다에서는 일찍이 민간에서 보이콧이 여러 차례 발발하여, 한의약이 희귀한 동식물 자원을 남용하는 것에 항의한 바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작년에 개최한 18대에서 이미 60년 동안 견지해 온 “우수한 민족 문화 유산”, “위대한 보고(宝库)”, “중서의(中西醫) 병합(협진)”, “한의약의 발전을 지지하다” 등의 논조를 포기하였습니다.

의학과 생리학의 부단한 발전에 발맞춰, 한의한약이 멸망으로 향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류를 막거나 바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의 강연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장궁야오 교수 관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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