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31일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두 장관은 양국의 오랜 갈등요인인 과거사 인식 문제를 떨치지 못했지만 양국 관계 강화와 관련해 몇가지 의미있는 논의를 진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방일때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상에게 과거사를 넘어 미래 지향적 논의를 전개하자는 메시지를 던졌던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이날 2시간여 진행된 회담에서 최근 `위안부 발언 파문'으로 불거진 일본 지도층의 과거사 인식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전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두 장관은 양국 정부 및 민간 차원의 협력 방안과 관련,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과거사 논의와는 별도로 양국이 호혜적인 방향으로 협력하자는데는 뜻을 같이 했다.
◇ 日 과거사 인식 오류에 강경 대응 = 송 장관은 이달 초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에 회의를 제기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발언을 계기로 재발된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 작심한 듯 강력하게 각성을 촉구했다.
아울러 송 장관은 당연히 논의될 것으로 보였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일본 방문 및 한.일 정상회담 문제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 총리의 문제 발언이 나오는 상황에서 방일 및 정상회담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한 것으로 풀이됐다.
그의 이날 과거사 문제제기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 시절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등으로 양국이 과거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 표명으로 해석됐다.
특히 이날 회담에서 송 장관의 유감표명에 대해 아소 외상이 위안부 동원이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계승한다는 자국 정부 입장을 재확인한 것은 이날 회담의 중요 관전 포인트였다는 것이 당국자들의 분석이다.
아울러 송 장관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일본 고교 교과서 검정결과에 대해 "독도에 대한 어떠한 영유권 주장도 용납할 수 없다"며 분명한 입장을 표명, 역시 강력한 항의의 뜻을 표했다.
송 장관은 또 최근 전범 합사 논의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개입한 사실이 드러난 야스쿠니(靖國) 신사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아소 장관이 적극적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함으로써 일본 안에서 제기되고 있는 `분사'(分祀) 또는 별도 추도시설 건립 논의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아소 외상은 송장관의 문제제기에 대해 자국 논리로 팽팽히 맞섰던 것으로 전해졌다.
아소 외상은 이날 회담 후 기자들과 만나 "야스쿠니 문제는 종교법인 야스쿠니 신사측이 결정할 문제로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얘기를 송장관에게 했다"면서 "교과서 논의에서 다케시마(독도) 문제가 나왔는데 국정 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가) 일일이 관여할 수 없다는 점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한.일 협력방안 심도 있는 논의 =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공방과는 별도로 두 장관은 양국간 협력방안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 몇가지 의미있는 합의를 했다.
우선 외교.국방부 국장급 당국자들 간의 실무 협의체로 유지되다 2003년 11월 5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던 한.일 안보대화를 5월 중 재개하기로 하는 한편 외교부 북미국장간 회의도 갖기로 합의한 것은 긍정적 성과로 평가된다.
북핵 위기 국면에서 미.일동맹이 급속히 강화되면서 한.일간 정치.군사적 협력은 상대적으로 지지부진했던 점을 감안할 때 한.일 안보대화 복원과 북미국장 회의 개최 합의는 동북아 안보협력 측면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근년들어 이상 징후를 보였던 한.미.일 3각 안보협력 체제와 6자회담에서의 공조체제를 정상화하는데 이번 한.일간 합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란 얘기다.
또한 양국 협력강화는 향후 6자회담 틀에서 논의될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구축에도 힘을 실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송 장관이 납치문제 해결을 대북 에너지.경제 지원 동참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는 일본 측 입장을 비판하는 대신 일단 존중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6자회담에서의 양국 협력 필요성에 일측과 뜻을 같이 한 것도 `앞 날'을 기대케 하는 대목이었다.
아울러 지지부진하던 한.일 역사공동연구와 관련, 역사공동연구위 위원장간 협의를 4월 중 갖기로 합의함으로써 제2기 위원회의 조기 출범을 도모한 것도 고무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21세기 동아시아 청소년 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앞으로 5년간 매년 한국의 청소년 1천명을 초청하겠다는 일본의 계획은 양국 민간교류에 나름의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국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는 해양과학조사 문제와 관련, 지난해 동해 방사능 오염에 대한 양국 공동조사를 준거로 삼기로 한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양국이 주장하는 배타적경제수역(EEZ)이 겹치는 수역에서 공동조사를 하다보면 독도 주변 수역에서 한.일 양측 당국자들이 함께 조사를 진행하는 `민감한' 상황을 맞이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한일 EEZ 경계 획정 협상이 언제 타결될지 예상할 수 없는 터에 해양과학조사를 둘러싼 양국 갈등을 피할 현실적 대안의 측면에서는 공동조사 방안이 `차선책' 정도로는 평가될 수 있다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다.
일본이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재개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한.미 FTA체결이 임박한 상황에서 일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일종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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