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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예술-승화로서의 영화를 욕망하다

[누벨바그] [2] 트뤼포, 예술-승화로서의 영화를 욕망하다

 

 [피아니스트를 쏴라]는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영화에 있어서 트뤼포의 개인적 선호도의 영역이 어느 곳에 닿아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한마디로 그는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 “할리우드 B급 영화들에 대한 경의에 찬 혼성 모방”으로서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트뤼포 자신의 시네마테크 세대 영화광적 기질이 유감없이 힘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나는 장르들(코미디, 드라마, 멜로드라마, 심리적인 영화, 스릴러, 사랑 영화 등)을 혼합함으로써 장르의 폭발(탐정 영화)을 기대하고 있었다. 대중들이 분위기의 변화를 가장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언제나 열정을 가졌다”라고.

*사진설명 :ⓒ피아니스트를 쏴라

[피아니스트를 쏴라]의 오프닝 씬은 괴상하기 짝이 없다. 한 남자가 파리의 밤거리,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뒤쫓는 차를 피해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그는 영화의 주인공 샤를/에두와르의 친형 쉬끄다. 컷의 수도 많고 카메라의 움직임도 격렬하다. 그러다 쉬끄는 밤길에 미끄러져 전봇대에 얼굴을 부딪치고서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 때 길을 지나던 한 남자가 쓰러진 쉬끄를 부축해 일으키고 함께 거리를 걷기 시작하는데, 그 전까지의 급박하고 조급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다. 행인은 집에서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대화의 흐름은 순식간에 사랑과 결혼에 대한 주제로 급변해버리고 만다. 행인과 헤어진 쉬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자신을 뒤쫓던 누군가를 피해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렇듯 [피아니스트를 쏴라]의 오프닝 씬은 적어도 멜로와 탐정 느와르, 두 장르간의 혼합이다.

장르의 관습적인 클리셰들을 인용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를 쏴라]의 영화 속 현실세계는 구체로서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추상으로서의 그것에 가까운 질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것은 트뤼포의 영화적 취향을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적인 예로 작용한다. 제임스 모나코가 트뤼포의 영화적 근원을 언급할 때 반복적으로 제기했던 문제. 이른바 “예술의 리얼리티가 거리의 리얼리티보다 유효하고 매력적이라는 믿음”의 문제. 트뤼포는 영화라는 추상적 공간의 세계, 예술의 영역으로 도피해 들어간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의 주인공 샤를/에두와르는 피아니스트다. 허름한 동네 귀퉁이 카페에서 보잘것없는 피아니스트의 신분에 불과한 그는 그렇지만 한 때 대중의 인기와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유명한 피아니스트였기도 하다. 허나 공연기획자의 은밀한 유혹의 덫에 걸린 아내 테레사의 씻을 수 없는 과거로 인해 에두와르와 그녀의 관계는 파국으로 끝난다. 이름을 샤를로 바꾸고 무명의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는 그에게 이번에는 식당 여종업원 레나가 다가선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에게 사랑은 파멸로 귀착되고 만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전 아내 테레사의 자살에 뒤이어 레나마저도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샤를/에두와르와 여자들은 번번이,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샤를/에두와르가 의존할 수 있는 사후적 대상은 오로지 피아노, 즉 음악-예술의 세계일뿐이다. 그의 욕망은 근원적으로 채워지고 충족되지 못하는 비극을 남긴다. 이름 하여 샤를/에두와르의 비극으로서의 ‘질병’.

*사진설명 :ⓒ피아니스트를 쏴라

샤를/에두와르의 삶은 일백 퍼센트 충만해지지 못하고 매번 굴절된다. 그의 비극으로서의 삶은 기이하게도 매번 순환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테레사-에두와르’로서의 삶에서 ‘샤를-레나’로서의 삶까지. 끔찍하게도 그의 삶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비극적으로. 샤를/에두와르의 질병 역시 마찬가지로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쇠락한 에두와르가 샤를이 되어 피아니스트로 일하던 카페의 폐쇄적인 그렇지만 더없이 안온한 세계가 그러하였듯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 공연기획자가 근무하던 사무실을 찾아간 에두와르가 사무실 문 앞 도어벨 앞에서 들려오던 어느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에 순간 전이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까지 전이되던 그 폐쇄적인 세계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질병은 음악-예술로 승화된다. 그런데 그의 질병은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인가.

예술은 충족되지 못한 자신의 욕망 혹은 리비도적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승화된다. 하이네는 이렇게 읊었던 적이 있다. “질병은 모든 창조적 욕구의 / 궁극적 근거. / 창조하면서 나의 병이 나았고 / 창조하면서 나는 건강해졌네.” 이제 ‘질병은 창조가 된다’는 모순적 진리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한 문명적 인간의 내재적 근간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욕망의 무한한 낙원인가, 패배주의자 혹은 도피주의자의 음습한 늪지대인가.

 

이종찬 문화평론가

 

출처:네오이마주 http://www.neoimag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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