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들렌과 겪었던 결혼생활의 위기와 그 후의 이혼에서 볼 수 있듯 트뤼포는 두 연인이 만들어가는 궁극적 화합과 유대의 공간을 신뢰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살결>(‘64)을 찍을 당시를 전후하여 트뤼포는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던 상황으로 보인다. 영화 촬영 동안에 주연 남자 배우였던 장 드자이와의 껄끄럽지 못한 관계의 여파까지 더해져 실제로 촬영을 마치고 그는 탈진과 의욕 상실로 몸이 수척해진다. 트뤼포는 그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현재의 나는 바다의 이미지에 지친 상태이며, 네 번째 영화는 더 이상 난파 위기에 놓인 배가 아니라, 전원을 가로지르는 열차이기를 바라고 있다. 무질서도 선로변경의 오류도 없는, 균형과 조화를 지닌 쾌적한 여행을 하고 싶다. 나는 약점을 황급히 감출 목적이 아니라 톱니바퀴에 기름을 치는 일, 방향 상실과 속도 지연을 피하면서 차량을 덧붙이는 일에 즉흥 연출을 한정시키고 싶다.”
트뤼포는 (여성과의) 관계의 본질에 가 닿을 수 있기를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소망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트뤼포의 욕망하는 자아와 자아 밖 외부적 현실세계로서의 비자아/타자의 사이는 언제나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트뤼포는 자신을 언제나 유대인이라고 느꼈다. 그 스스로에게 ‘타자’의 각인을 서명해 넣은 것이다.(사생아 신분으로 태어난 트뤼포가 사설탐정에게 의뢰하여 찾아낸 진짜 아버지의 혈통은 실제로도 유대계였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문턱에서 아버지를 만나려던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이는 <400번의 구타>에서 확연히 볼 수 있듯 트뤼포의 유년기적 어두운 과거가 안고 있는 개인사적 배경 즉, 어머니의 무관심과 미성년자 관찰소 구금을 겪었던 경험과 맥이 닿는다. 이를테면 유년기에서부터 받아들인 혹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운명, “타인들로부터, 특히 인내하기 힘든 가족으로부터 ‘유대인’이 된다는 것”. 특히 어머니-여성에게 받은 트뤼포 자신의 유년기 ‘원초 기억’의 상실감 혹은 결핍이 그에게는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77)의 각본 첫머리에 트뤼포는 “조이는 어머니의 애정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 듯 보였다”는, 오스트리아계 미국의 정신분석가 브루노 베텔하임의 메모를 적어 둔다. 때문에 트뤼포가 “어머니에 대한 좌절된 첫사랑을 억압함과 동시에 찬미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여성과의 사랑을 중시하는 남자, 즉 ’바람둥이‘를 묘사하려 하고 있었다”는 드 베크와 투비아나의 서술(그 둘은 트뤼포의 평전을 썼는데 국내에도 지난 2006년 출판됐다)에서 다소 도식적이고 억지스러운 서술에도 불구, 그 같은 원초적 기억이 트뤼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자체만큼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체역학 연구소에 기술자로 근무하면서 비행기, 배, 헬리콥터 모형을 통해 난기류의 영향을 실험하는 영화 속 주인공 베르트랑 모란의 일화에서도 그 같은 흔적을 확연히 감지해낼 수 있다. 자신의 유년기적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모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머니에게는 내 앞에서 상반신을 벗은 채 걸어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나를 도발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생각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확신하고자 함에서였다. 어린 나를 대하는 그녀의 행동은 마치 이렇게 말하려는 듯이 보였다. ‘이 어린 머저리를 낳던 날 다리라도 부러뜨렸다면 좋았을 걸……’이라고.”
때문에 연출자와 여배우 간 (흔히 우리가 ‘염문’이라 부르는) ‘행복한 관계’의 주인공인 트뤼포와,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의 모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형화된 ‘카사블랑카’ 내지는 ‘돈 후안’의 이미지와 또 다른 차원의 그 무엇이다. 그것은 성적 편집광도, ‘낚을 만한’ 여자를 찾아다니는 남자의 정형화된 이미지도 아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그것에 달려 있기라도 하듯 “그는 단지 이성을 정복하고 만족시키고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그것의 진원지는 외로움에 대한 어떤 두려움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을까. 두려움은 필시 현실세계에서의 혼돈을 낳게 마련이다.
“잔일에 대한 편집증, 우유부단함, 미숙함, 사회적 인정과 물질적 안락에 의존하는 존재 방식, 그러면서도 다소 모순적이게도 중산층의 인습과 결혼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는 점” 등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혼란스럽고 부유하며 안정되지 못한 듯한 이미지가 트뤼포란 인간의 내재적 근간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지만 부유하는 인간은 평형과 질서, 조화를 꿈꿀 수밖에 없다. 결핍의 인간은 충만함의 존재를 갈망하고 또 갈망하게 마련이니까. 트뤼포에게 여자가 아닌 여자‘들’의 다리가 그런 욕망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여자들의 다리는 트뤼포에게 “지구의 모든 방향을 측정하면서, 평형과 조화의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 컴퍼스”라는 완전무결한 진리의 근원으로 은유된다. 그렇게 트뤼포는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였다.
이종찬_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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