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버섯을 따러 동악산에 올랐다가 풋고추와 열무김치로 차려낸 단출한 반찬으로 시장한 배를 채우는데, 때마침 켠 TV에서 엊그제 토요일 저녁 찾아온 친구 때문에 시청을 하지 못한 SBS 연인의 향기 15회분 재방송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의사의 손을 떠나버린 담낭암 말기로 6개월 시한부라는 절망적인 생을 살고 있는 딸(김선아)의 암 투병 사실을 뒤늦게 알고 가슴을 치며 오열하는 엄마(김혜옥)의 눈물 연기 속에서 엊그제 멀리서 찾아온 친구가 오버랩 되었다.
지난 토요일 저녁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에 온 친구가 동악산에 은거한 나를 찾아와 뜻밖에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자식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고 한숨을 쉬는데, 아무리 아는 친구의 상담이라 해도 자식에 관한 일이라, 그 부모 앞에서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가끔 자폐증을 앓고 있는 큰 딸의 존재와 일상을 햇살에 반짝이는 잔물결 같은 잔잔한 글로 공개하는 소설가 ㅇㅇ님을 보면서 평생을 애끓은 마음으로 살면서 창자가 끊어져도 수 천 번은 끊어졌을 그 안타까운 고통을 미루어 짐작만 하고 있을 뿐, 지금까지 한마디 위로의 말씀조차 감히 드리지 못했는데, 멀리서 이 동악산 촌부의 거처를 물어물어 찾아와 눈물을 쏟고 간 폭삭 늙어버린 친구의 모습은 나 역시 자식을 가진 한 아이의 아비로 먹먹하기만 하였다.
가만히 하늘과 땅은 만물을 대함에 스스로 생긴 그대로를 지켜볼 뿐, 특별히 어느 것을 편애하지 않는다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의 관점에다 우리네 인생을 놓고 보면, 면벽참선에 빠진 승려나, 십자가에 매달려 구원을 바라는 목사나 둘 다 집착이며 편집증 환자이기는 마찬가지이고, 우리 사회에서 자기의 생각 속에 빠져 그것이 전부인양 미쳐서 살아가고 있는 과대망상증과 편집증 환자들이 그 얼마인가?
자식의 문제로 자신의 인생은 이미 포기된 지 오래고, 가정과 살아가는 일상이 엉망이 돼버린 그 친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내일 추석에 자네 고향마을 뒷산에 있는 선영(先塋)에 성묘하러 가거든 산을 보고 그 산이 되라.”고만 하였다.
산에 가면 곧은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휘어지고 비틀어진 나무도 있고, 병들었거나, 가지가 부러진 나무도 있고, 어느 것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이, 저마다 제자리에서 제각각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나무들을 말없이 지켜만 볼뿐, 어느 것을 편애하거나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간섭하지 않는 산처럼 그렇게 살라고 하였다.
모쪼록 어제저녁 즐거운 명절에 심란한 이야기로 미안하다는 짤막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간 친구가 지금껏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자식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고, 진실로 남들보다 조금 부족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기를 바란다.
산이 그러하듯이 채울 수 없는 모자란 자식의 실체를 인정하고, 자식에 대한 고통과 번민의 마음을 내려놓고, 말없이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 주는 듬직한 아버지, 자폐증을 앓고 있는 큰 딸과 함께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소설가 ㅇㅇ님처럼 진실로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아버지가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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