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보선 승리 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정책 야합 식의 야권연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3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농업대책의 핵심인 피해지원 대책이 충분하게 이뤄졌다"고 평가하면서 "기업형 슈퍼마켓(SSM)대책의 골자는 관련 부분 재협상과 유통발전법 강화"라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정부측에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 했지만, 결국 민주당의 요구가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실"이라며 "물론 100% 만족하는 협상은 아니지만 좋은 협상이었다"고 평가했다.
민주당, 야권연대 당시 "한미FTA 폐기, 한EU FTA 비준저지 합의"
협상의 실무를 맡아온 전병헌 정책위의장은 "FTA 자체를 원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선대책 후비준이라는 당론 기조가 유효한 것을 전제로 해서 야당으로선 최선의 노력으로 차선을 확보한 협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야권연대의 양 축인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애초에 민노당은 전병헌 정책위의장의 말과 달리 사실 상 FTA 원천 반대 입장이다.
이정희 민노당 대표는 "국회의 입법권을 제약하는 FTA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4.27 재보선 합의문의 내용"이라며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합의에 얽매여 야권연대 약속을 저버리면, 국민들은 다시 실망할 것이고 야권연대는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재보선 정책연대 합의문은 “한미FTA 재협상안 폐기와 전면적 검증 없는 한-EU FTA 비준 저지”를 명시했기에 이루어졌고, “한미, 한-EU FTA 독소조항 등에 대한 전면적 검증 실시”와 “한-EU FTA에 의한 입법권, 사법권 침해 사례 방지 및 통상절차법 제정”도 포함되어있다.
이렇게 합의해놓고 재보선에서 야권연대의 힘으로 당선된 민주당 측은 1주일도 안 되어 이를 뒤집은 셈이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도 "한ㆍEU FTA 협정문에 따르면 EU 측은 소매 분야(Retail Service)에 대한 경제적수요심사(Economic Need Test)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우리 측은 소매유통분야를 전면 개방했다"며 "유통법상의 대형마트 및 SSM 영업허가제는 한ㆍEU FTA에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지적했다.
트위터 등 인터넷의 좌익 네티즌들의 반응도 격앙되었다. “한EU FTA 강행처리 철회하라. 민주당의 신뢰는 결국 이 정도인가”, “민주당은 서민들과의 약속보다 한나라당과의 원만한 국회운영이 더 중요하단 말인가”, “한-EU FTA에 대한 민주당과 한나라달의 합의가 '배신'이라고? 언제는 뭘 믿었다는 것인가? 길길이 뛰는 당신들이 애처로울 따름이다”라며 민주당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애매모호한 입장 취해온 손학규 대표에 불똥 튈 가능성
지난해 당권 도전 때부터 갑자기 민노당식 종북좌파로 전향한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도 비판에 합류하고 있다. 민노당, 민변 등 좌파 시민사회는 한eu FTA 비준 저지와 민주당 규탄을 위한 기자회견 등을 준비하고 있어, 야권연대 갈등은 조만간 손학규 대표로 불똥이 튈 전망이다.
손학규 대표는 한나라당 시절에는 FTA에 적극 찬성하다, 민주당으로 넘어온 뒤부터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손대표는 한 EU FTA 합의 직전 “국민의 이익을 기초로 해서 국민이 정치에 대해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좋은 정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처리할 것”이라며 역시 선문답으로 일관한 바 있다.
그러나 손대표는 다른 장소에서는 “맹목적 FTA 반대는 아니다”라는 입장도 표명한 바 있어, 여전히 FTA 찬성 기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고 있다.
특히 손대표는 박지원 원내대표와 달리 15년 한나라당 경력 탓에, FTA 문제로 이른바 한민공조에 손을 들어주게 되면, 민노당, 진보신당과 좌파시민사회는 물론 정동영, 천정배 등 민노당 성향의 민주당 최고위원들로부터 집중 공세를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현재 손학규 대표는 특보단 회의에서 비공식적으로 "아쉬움이 남지만 합의안에 `한ㆍEU FTA 재협상을 한다'는 문구도 들어 있으니 보완해서 국민을 설득해 나가자"고 말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손대표의 공식입장이 어떻게 나올지는 지금까지의 그의 첫신으로 볼 때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국가적 정책 사안들이 한 EU FTA 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보다 사회적으로 100배는 파장력이 큰 한미FTA 비준안이 조만간 국회에 올라오게 된다. 이미 미국 측은 “미국 의회에서 비준을 먼저 처리할 테니 한국 측도 조속히 처리해달라”는 입장을 정부에 전한 바 있다.
야권연대의 합의문에도 한 EU FTA는 비준 저지인 반면, 한미FTA는 비준안에 대해서는 폐기로 명기되어있다. 종북주의 노선으로 맹목적 반미를 주장하는 민노당의 입김이 개입된 야권연대 정책안이었다.
실제로 노무현 정권 당시 FTA 총책임자였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경제적 영향력은 한 EU FTA가 훨씬 크지만, 한미FTA 반대 시위가 훨씬 더 거셌다”며 “이들은 FTA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미국을 반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후술한 바 있다.
한미FTA와 북한인권법은 민노당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
북한인권법안도 폭탄 사안이다. 북한 주민의 인권을 위한다는 명분을 정면에서 반대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당의 법사위 위원들도 모두 처리하자는 입장이었지만, 박지원 원내대표가 “빨갱이라도 좋다”는 망언을 하며 가까스로 처리를 막아냈다.
그러나 5월 중에 새로운 원내대표가 취임하게 되면, 원내대표의 독단으로 처리를 막을 수만은 없다. 문제는 북한 김정일 체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민노당 입장에서는 이를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민노당 입장에서는 조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로 이런 문제들 때문에 이번 순천에 출마한 김경재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민노당과 야권연대를 하면 민주당은 총선과 대선에서 패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현 민주당 지도부는 이러한 중요 정책사안에 대해 선거 전에는 민노당식 정책에 동의해놓고, 선거 후에 일방적 파기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일관해왔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직결된 FTA와 북한인권법 등에서 민주당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야권연대의 지속성은 물론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의 중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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