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미국문학사의 한 페이지에는 도스 패써스(John Dos Passos)란 이름의 작가가 존재한다. 1차 대전 이후 소위 ‘잃어버린 세대’(the lost generation)의 작가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그는, 그 당시의 미국의 자화상을 소설장르로 표현해내고자 했던 이다.
20세기 초 미국 전체의 역사를 보여주고자 그는 'U. S. A' 삼부작을 기획하는데, 이 연작은 그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 어떻게 자신이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자신이 속해있던 동시대의 기운을 그는 그려내고자 했던 것이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연출한 민규동 감독의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도 마찬가지다. 대신 그는 패써스의 경우처럼 연작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한 작품 안에서 여러 개별적 인물들의 에피소드 형식의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
<내 생애...>에서 감독은 서울이라는 장소를 빌려 도시-공간의 전체적 밑그림을 그려나간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각 등장인물들의 자연스런 연결접속 관계다. 이 영화 속에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은 특정한 장소를 통해, 또 특정한 인간관계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의 도시-공간 안에 통일된다.
종합병원이라는 하나의 장소에서 난치병에 걸린 아이 지나, 정신과 의사 유정(엄정화)이 있고, 입원한 수녀 수경(윤진서), 또 그녀가 좋아하는 가수 정훈이 있다.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은 공간 안에서 직간접적으로 관계 맺어진다.

지하철 외판원 창후(임창정)와 그에게 카드요금 독촉전화를 하는 전직 농구선수 성원(김수로)이 있는가 하면, 창후는 동시에 선애와 신혼부부의 관계망을 형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정리하는 데만도 상당한 양의 지면이 요구될 판이다. 게다가 세대 간의 관계망 역시 포착된다. 아이들 커플과 신혼 커플, 조 사장(천호진)과 유정 커플 그리고 곽 회장과 오 여인의 노년 커플 등이 그것이다.
앤써니 밍겔라의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부분적으로 그려나가던 그림이 점차 전체의 그림으로 종합되어가는 오프닝 시퀀스와 마찬가지로, <내 생애>의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는 각 인물들의 모자이크 화면 구성을 통해 종국에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공간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지도를 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내 생애>는 참으로 욕심이 많은 영화다. 그 겹겹의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극 속에서 매끄럽게 매듭지어 나가는 데만도 적지 않은 힘이 들 터인데, 공간의 현실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인 듯 성(gender)과 계급(class)의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 사장의 이혼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그의 동성애적 성향과 관련이 있고, 연체된 카드요금으로 인해 시도 때도 없는 독촉전화로 시달림을 받는 창후에게서 볼 수 있듯 그들은 한 사회 내 소수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조 사장의 동성애적 취향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상당수의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려 대기도 했다. 서로 다른 계급적 기반을 가진 유정과 창후는 우연히 경찰서에서 마주치는데, 이 때 유정은 그의 남루한 옷이 자신의 옷에 조금이라도 스칠까봐 창후의 뒤에서 찜찜하다는 듯이 옷을 툭툭 털고 지나간다.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간단치 않은 관계망들과 사회·정치적 차이들을 모두 보듬어 안고 극적 서사를 이끌어 나가기에는 확실히 이 영화에 주어진 시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극영화로는 다소 부담됐을 129분의 러닝타임으로도 감독이 원했던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에 그것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때문에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자연스런 연결접합의 느낌을 가져다 주기보다는 관객의 호흡을 가쁘게 만드는 쪽에 가깝다. 숨 쉴 사이 없이 모든 사건이 앞뒤가 완벽하게 딱딱 맞아 들어가는 듯한 드라마의 짜임새는 결국 드라마의 작위성이라는 문제를 일정부분 노출할 수밖에 없다.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그들의 일주일
이 모든 영화적 갈등을 봉합하는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수경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그녀의 간절한 기도로 인해 <내 생애>는 중요한 국면을 맞이한다. 일주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토요일 아침. 정훈은 무사히 병원에서 깨어나고, 가정부 태훈은 조 사장에게 돌아온다.
창후는 선애와 별 탈 없는 태아의 존재를 확인한 뒤 곽 회장으로부터 취업하지 않겠느냐는 전화를 받게 되고, 오 여인은 곽 회장의 프로포즈에 환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유정의 곁에 아들 지석이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 해피엔딩인 것이다. 그렇지만 민규동 감독은 이것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령 일주일이라는 의미는 성서에서 천지가 창조된 시간이기도 하고,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죽음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여러 가지 은유를 담고 있는 것이다.” 각 등장인물들의 또 다른 일주일이 이후 또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으니, 결국 중요한 것은 그저 지금까지 있었던 그 일주일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대중영화의 상업성이라는 측면을 고려한 감독 나름의 (고심의 흔적이 내비치는) 결론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영화의 제목인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일정부분 혹은 상당부분 반어적인 것으로 볼 구석이 다분히 존재한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난관 앞에 봉착한 수경의 신에 대한 간절한 기도에서 볼 수 있듯, 결과적으로 영화 속 그 어떤 인물도 자신의 힘이란 것이 결국엔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원(김수로)은 자신의 휴먼다큐를 찍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한탄한다. 얼마 전 그가 전화로 협박한 어느 요금 체납자가 지하철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한 뒤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상속된 유산으로 돈을 갚으라는 독촉전화를 또 다시 해야만 했다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몸서리를 친다.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세상에 무기력하다. 그들은 그저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할 뿐이다. 그들에겐 힘이 없다. 외부의 그 어떠한 처분도 감내해야만 할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한 차원의 질서(신)가 존재하고 있으니 영화적 속내는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등장하는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라는 니체의 경구만 보아도 이러한 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영화를 보고 발그레 켜진 극장 암등을 뒤로 하고 출구로 빠져나오면서 왜 그렇게 필자의 기분이 우울했는지에 대한 고심의 결과일 것이다.
커플 혹은 사랑이라는 ‘끔찍한’ 키워드

그렇다면 니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구차하게도 이 ‘끔찍한 생’을 갈구하는 것인가란 의문이 마지막으로 남는다. 단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생을 포기할 용기가 없어서일 뿐일까. 등장인물들 모두가 하나같이 커플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단서를 찾아보기로 하자. 전도유망한 전직 농구선수였던 수로는 3점 차로 뒤져있던 시합종료 몇 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3점 슛으로 동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날리고, 폼 나는 2점짜리 덩크슛을 자신의 연인에게 선사한다.
<아는 여자>의 야구선수 동치성(정재영)이, 기묘한 동거녀 이연(이나영)이 투수가 땅볼을 잡아 1루가 아닌 관중석으로 던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던 어이없는 질문으로 인해 정말로 공을 관중석으로 던져버린 것처럼. 사랑인 것일까.
심야버스 안 자신의 어깨에 기대 반쯤 잠이 든 상태로 연인의 손을 잡은 성원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가 사랑하게 됐구나.” 사랑은 당사자들도 모른 시간대 어딘가 쯤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야속한 성훈에게 수경은 말한다. “넌 선인장 같아. 너 밖에 몰라.” 그런 수경에게 성훈은 말한다. “투덜대면 뭐가 이뤄져?” 그래,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상호간 감정의 끊임없는 교류다. 구차하고 유치하고 때론 졸렬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사랑임에도 불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인 것이다. 그러니 니체의 말은 이렇게 고쳐 쓸 수 있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사랑’이여, 다시.”
이종찬_문화평론가
출처:네오이마주 http://www.neoimages.co.kr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