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박종면편집국장]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군주에게 자신의 지혜를 팔아 벼슬을 얻었던 유세객(遊說客)들이 많았습니다.
합종 연횡책의 소진과 장의를 비롯, 법가를 대표하는 신불해와 한비자, 저명한 병법가인 손자와 오기 등이 모두 유세객에서 출발해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 명재상이 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 세객과 가장 비슷한 사람을 꼽는다면 아마 정치인일 것입니다. 세객도, 정치인도 모두 말로 먹고 산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다만 정치인은 말하고 설득해야 하는 대상이 다수의 국민인 데 비해, 전제군주 시대의 세객은 섬기고 봉사해야 하는 대상이 군주나 황제라는 점이 차이겠지요.
그 대상이 다수의 국민이든, 1인의 군주든 누구를 설득하고 이해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말을 더듬어 유세에는 서툴렀던 한비자는 일찍이 이를 간파했습니다.
한비자는 유세의 어려움이란 하고 싶은 말을 자유자재로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심정을 통찰하여 그가 바라는 것에 맞추어 납득시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상대방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데 큰 이익에 대해 말한다면 그를 비천하다고 여겨 멀리할 것이고, 반대로 상대방은 이익을 바라는데 고상한 명성에 대해 말한다면 세상물정에 어둡다며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게 한비자의 지적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 상대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 말투조차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이와 관련해 그 유명한 용의 턱 밑에 난 한자 정도 되는 거꾸로 난 비늘, '역린'(逆鱗)에 대해 얘기합니다. "용이란 동물은 유순해서 길들이면 탈 수도 있지만 역린을 건드리면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다. 세객은 군주의 역린을 건드려선 절대 안된다"고 말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강연이 단연 화제입니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평가포럼 강연에서 4시간 동안 6만4000자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원광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도 1시간14분간 2만3000자의 말을 했습니다.
진작에 간파하긴 했지만 노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대단한 세객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세객인지는 의문입니다.
노 대통령이 말한 내용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기자의 시각에서 보면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 후보들이 말하는 집권시 7%대 성장론이나 한반도 대운하 건설, 열차 페리 프로젝트, 6조8000억원의 감세론 등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실현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특히 집권 후 이런 공약을 이행하려 할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을 감안하면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지적은 타당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을 설득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옳은 말을 어쩌면 저렇게 품위없고 경망스럽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곤란합니다. 사전에 충분히 계산된 정치적 발언이라 해도 국민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합니다.
우리시대에도 위대한 세객들이 많습니다. 얼핏 생각나는 사람만 해도 소설가 황석영과 도올 김용옥 교수 등이 있습니다. 황석영은 스스로를 '황구라'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의 사상과 철학, 문학을 좋아하고 즐겨 읽습니다. 그들은 독자와 청중의 마음을 잘 읽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그 말이 상대방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면 '구라'가 되고 '노가리'가 됩니다.
박종면편집국장 m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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