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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검증위원회] 일본 아사히신문 ‘위안부 보도’에 대한 검증보고서 (영향1)

‘강제연행’과 ‘성노예’라는 허위 날조로써 만들어진 정치적 프로파간다, ‘반일좌익’ 아사히신문 위안부 보도 (4/5)






제3부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가 대외적으로 초래한 영향
(第3部 朝日新聞の慰安婦報道が対外的にもたらした影響)


제1장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미국 신문에 미친 영향
(第1章 「92 年 1 月強制連行プロパガンダ」の米紙への影響)

- 시마다 요이치(島田洋一) (집필 담당) -

머리말(はじめに)

본 장은 위안부 문제가 미국의 신문에서 어떻게 보도되어왔는지, 그 가운데 아사히신문 보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검증하려는 시도이다. 

조사 대상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 3개. 다른 유력 신문도 있지만 시간적 제약 때문에 3개로 한정했다.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서비스인 Lexis Nexis 를 이용해 “comfort women”(위안부)을 키워드로 해당 기사를 검색해 내용을 체크했다. 대상 기간은 1980년 이후 2014년 12월 31일까지, 분량은 3종 신문을 합쳐서 편수로 약 520개, A4 약 1500매 상당이다.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가 준 대외적 영향에 대해서 아사히 ‘제3자위원회’ 보고서는 하야시 카오리(林香里) 씨가 가장 장문의 보고서를 제출하고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오카모토 유키오(岡本行夫) 씨가 개별적으로 자신의 시각을 보태고 있다. 

‘제3자위원회’의 보고서를 받고 2014년 12월 26일에 회견을 연 아사히신문의 와타나베 마사타카(渡辺雅隆) 사장은, “국제사회에의 영향은, 일정 정도 영향이 있었다는 지적으로부터, 지극히 한정적이라고 하는 지적까지 폭넓었다. 이 문제는 그만큼 역시 매우 어려운 문제가 여러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 중, “지극히 한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가 대외적으로) “별로 영향이 없었다”, “한정적”이라는 결론을 낸 하야시 카오리 씨의 의견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하야시 카오리 씨는 주로 정량적 방법을 사용해 조사를 실시했다고 말했다. ‘정량적 방법’이란, “어느 특정의 인물이나 말이 기사에서 반복 인용되거나 등장하거나 하는 현상을, 수치로 기술해 나가는” 분석 수법으로 정의된다. 

그의 조사 대상은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한국 5개국, 15개 신문이며, 그중에서 미국 신문에서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USA투데이, 월스트리트저널 등 4개 신문이 채택되었다. 타당한 선택이다. 

우선 ‘국가별 정보원(情報源)’ 조사를 바탕으로 그는 “모든 신문에 일본으로부터의  정보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위안부 문제에서는 한국보다 일본의 정보원 쪽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 분명”, “나라를 단위로 본다면 위안부 보도의 주요 무대는 종합적으로 봐서 일본이고 일본의 존재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일본 언론 중 전체적으로 아사히신문은 일본의 전후 역사인식이나 보상문제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매체라는 분석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즉 해외 언론의 위안부에 관한 보도에서는 일본으로부터의 발신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크고 또 그 안에서 아사히신문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이 ‘정량적 방법’이 알려주는 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야시 카오리의 보고서 결론은 아사히 보도가 대외적으로 별 영향이 없었다고 돼 있다. 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이유는 그의 방법상의 혼란과 이데올로기 우선의 자세에 기인한다고 생각되지만(자세한 것은 후술), 이하, 제3자위원회보고서의 문제점도 포함해 미국 신문에 대한 영향에 관한 검증을 진행해 나가고 싶다. 글 중의 밑줄은, 모두 필자(시마다 요이치)에 의한 것이다.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미국 신문에 미친 영향(「92 年 1 月強制連行プロパガンダ」の米紙への影響)

1992년 1월 11일 아사히신문은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中央)대학 교수가 방위청 도서관에서 위안소에 대한 군 관여를 보여주는 자료를 발견했다고 크게 보도했다. 그중 강제연행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었지만, 아사히는 제목과 용어설명 메모, 사설 등을 동원해 마치 강제연행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견된 것처럼 인상을 조작했다. 즉 오해를 노린 지면 조성, 본 보고서에서 말하는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이다. 아사히 제3자위원회조차도 “총리 방한 시기를 의식하고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 문제가 되도록 기도하고 기사로 한 것은 분명”하다고 그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는 틀림없이 미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주요 3개 신문이 위안부에 관한 상당한 기사를 쓰는 것은 모두 그 직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 주요 3개 신문은 아사히가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내세우기 이전에는 위안부 문제를 거의 무시하고 거론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크게 거론한 것은 그 이틀 뒤인 1992년 1월 13일이다. 제목은 ‘일본 육군이 조선인을 강제로 유곽에서 일하도록 종용한 것을 인정(Japan Admits Army Forced Koreans to Work in Brothels)’으로, 이후 위안부 문제로 자주 기사를 쓴 데이비드 생거(David Sanger) 기자의 서명이 들어있다. 

기사는 우선 일본 최대의 신문 중 하나인 아사히신문이 방위청 도서관에서 완곡하게 위안소라고 불리는 시설을 운영하는 데 군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육군 문서가 발견됐다고 보도하면서 “대부분의 여성은 조선에서 강제연행이 되고(forcibly taken)”, "강제 매춘(forced prostitution)에 대한 당국의 관여를 일본이 인정하지 않는 문제는 일본 한국과의 관계, 그리고 정도는 작지만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속적인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많은 여성들이 살해당하거나 가차 없이 매를 맞았다(Many of the women were killed or brutally beaten)”)고 기술한다. 

즉 요시미 요시아키 씨의 발견은 매우 폭력적인 강제 매춘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구체적으로 인용되는 점에서도 기사에 대한 아사히의 부채질의 영향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데이비드 생거 기자는 이 기사에서, “Yoshiaki Yoshida”라고 오기하고 있다. 아사히의, 요시다 세이지, 요시미 요시아키 두 사람의 이용에 있어서의 공통성에 비추어 보면, 이 합성 표기는 시사(示唆)가 풍부한 ‘프로이트적 실언(Freudian slip)’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뉴욕타임스는 이어 같은 해 1월 27일자 일본발 기사(데이비드 생거 기자)에서도 “10만, 20만 명의 여성이 결국 유인되거나 연행됐다. 대부분이 조선으로부터의 어린아이나 10대였다”라고 한데다가 “외무성의 그 누구도, 요시미 요시아키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No one in the Foreign Ministry was ready for Yoshiaki Yoshimi)”, “요시미 요시아키가 미야자와 수상 방한 직전에 아사히신문의 기자에게 전한” 자료에 의해서 “거의 하룻밤 사이에 정부의 논의는 붕괴되었다(Almost overnight, the Goversument's arguements collapsed)”라고 아사히에 대해 언급하면서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두 신문의 체질적 유사성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아사히의 ‘부채질’에 뉴욕타임스가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워싱턴포스트도 위안부에 대한 최초의 정리된 기사는 역시 아사히의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의 영향을 받은 1월 16일자의 ‘전쟁 중 잔혹 행위가 서울 방문에 그림자를 드리워(War Atrocities Overshadow Visit to Seoul)’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한국 국민의 일본에 대한 적의는 최근 몇주, 제2차대전 중 일본의 잔학 행위 중 가장 추악한 것의 하나―‘위안부’의 노예화―(one of Japan's ugliest World WarⅡ atrocities: the enslavement of the comfort women)에 관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의해서 높아진” 운운으로 시작되는 기사는 “지난 주말, 도쿄에서 일본의 역사가가 위안부 계획은 일본의 군부에 의해서 고안되어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료를 공개했다”고 기술, 아사히의 보도로 촉발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기사는 또 “미야자와는 일본에 의한 여성 성노예화(enslavement of the women)에 대해 한국 국민에게 공식 사죄하였다”고 썼다. 당시의 미야자와 정권이 아사히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여 대외적으로 오해를 확대시켰음을 알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 이틀 후인 1월 18일에도 ‘‘위안부’―야만 행위(‘Comfort Women’:A Barbaric Act)’란 제목의 기사에서 “이는 무관심한 혹은 부주의한 사령부 아래에서 전시 중에 자행된 잔학 행위와 같은 종류가 결코 아니다(This WASN'T a case of atrocities being committed on the watch of an unsuspecting or negligent military command during a time of war)”라고 하면서 조선 여성의 “노예화”, “강제 성매매”는 군에 의한 계획적 행위였다고 단정하고 있다. 

즉, 국가와 시대를 불문하고 일어날 수 있는 병사 개인 차원의 성범죄와도 전혀 성질이 다른,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특수한 조직적 전쟁범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는 이어 위안부를 둘러싼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한 이유로, “희생자 몇 명의 집단 소송”, “미야자와 총리 대망의 방한(long-sought visit to Korea)”이 가까웠다는 점 등과 함께, “지난 주말 한 일본의 역사가에 의해서 유죄를 입증하는 군의 기록(incriminating military records)이 발견됨”을 꼽았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 위안부에 대한 최초의 정리된 기사는 아사히의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 며칠 뒤인 1992년 1월 15일자의 ‘일본 지도자의 방문에 서울에서 수백 명이 항의’라는 제목을 붙인 AP(Associated Press)의 배포 기사이다. 

항의의 참가자는 대부분 “일본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창부로서 봉사를 강요받았던(forced to serve as prostitutes) 조선인의 친척들”로 “수만 명의 ‘위안부’ 징발을 수행한 군의 역할에 대해서 일본은 월요일에 첫 공식사과를 한국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약 3개월 후, 같은 해 4월 25일자 “옛 ‘위안부’들이 전쟁의 공포 위에서 침묵을 깨다 (Ex-"Comfort Girls" End Silence on War Horrors)‘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문제는 대부분 묻혀 있었다. 유죄를 입증하는 군 기록(incriminating military records)이 올해 초 밝혀지기 전까지는”이라는 한국 활동가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새해 휴가 직후 일본 정부 당국은 불확정적인 수의 조선인 여성이 고향에서 납치되어(abducted) 일본군 병사에 대한 봉사를 강요받았음을 인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워싱턴포스트 기사와 똑같이 유죄를 입증하는 군 기록이라는 표현이 동원됐다. 아사히 시나리오의 충실한 반영이라 하겠다. 

또 여기에서도 아사히의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와 사죄 외교를 펼친 미야자와 관저와 외무성의 자세가 상승효과로 왜곡을 확대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 같은 해 7월 8일자 ‘일보 전진’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강제로 성노예가 되었다(forced to be sex slaves)고 하는 많은 한국 여성의 최근 주장을 뒷받침하는 서류를 정부와 군의 파일에서 발견한 한 역사가의 폭로(revelations)”가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고 기술하여 반년이 지난 아사히의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그 효과를 정착시켰음을 보여준다. 

또한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반일 캠페인의 선두에 서온 ‘워싱턴 위안부 문제 연합(Washington Coalition for Comfort Women Issues, 한국계 미국인이 중심이지만, 중국계의 반일 단체 ‘세계 항일전쟁 사실유호(史實維護) 연합회(Global Alliance for Preserving the History of WWII in Asia)’와의 관계도 돈독하다) 홈페이지를 보면 중요 사항 연표 1992년 1월의 항에 ‘아사히신문’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특필되어 있다(이탤릭 볼드 강조는 시마다 요이치. 이하 동일). 

Jan 1992 The ‘Asahi Shimbun’ publishes the Japanese archive documents obtained by Professor Yoshimi, a well-known Japanese historian and researcher, establishing the direct role of the Japanese military in maintaing a huge network of military brothels known as ‘Comfort Houses’

  

즉, 미국 내 반일운동에서 아사히신문의 기여도를 해당 반일단체가 인정한 형태다. 

또한 요시다 증언에 관하여 연합의 연표는 1991년 11월 항에 홋카이도(北海)신문의 기사를 들어 언급하고 있다. ‘요시다 세이지’를 거명한 후, 위안부는 “일본군에 의해서 물리력 내지 기만에 의해” 전시 고용됐다고 하고 있다. 

Nov 1991 Yoshida Seiji, Japanese ex-labor mobilization director, of Yamaguchi Prefecture confirms in the newspaper ‘Hokkaido Shimbun’ that he took part in the wartime employment, by force and deceit of Comfort Woment by the Japanese military.


워싱턴의 반일단체에 요시다의 증언을 알렸다는 점에서 아사히신문은 꼭 주범의 필두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2년 1월에 일어난 위안부 문제 ‘빅뱅’(하타 이쿠히코 씨의 용어)에 관해서는 분명히 아사히가 ‘단독 정범’이며 앞서 본 대로, 미국에 요시다 증언이 거론되기에 이른 것도 그 이후의 일이었다. 

하타노 스미오 씨는 아사히의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의 영향으로서 다음의 점도 지적하고 있다. 

영자 신문에서는 1월 13일자 재팬타임스가 일찍이 “일본군 수십만의 위안부를 매춘부로 강제연행”이라고 전했다. 이 신문은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계속 보도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위안부를 “성노예”로 세계에 발신하고 있는 교도통신(共同配信) 영문판의 책임도 크다. 재팬타임스의 위안부 관련 기사도 상당 부분 교도통신의 배포에 따르고 있다. 

요시다 세이지 증언과 그 대외적 영향(吉田清治証言とその対外的影響)

아사히신문이 요시다 증언을 반복해서 다루고, 또한 그 허위성을 인식한 이후에도 취소하지 않은 문제의 영향에 대해서 하야시 카오리 씨는 제3자위원회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정량분석을 제시했다. 

키워드 검색으로 “Seiji Yoshida”를 검색했는데, 전체 7회 출현하고, 기사 수로 하면 6개의 기사가 나온다. 그러나 6개 중 3개는 아사히신문의 요시다 증언 기사 취소에 관한 것이어서 그동안 위안부 문제의 이미지 형성에 관한 기사는 3건 뿐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시다 세이지 씨는 각국 주요 신문에는 지극히 한정적으로 밖에 언급되지 않았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야시 카오리 씨는 말한다. 

그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요시다 세이지”라고 하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아도, 분명히 그 증언에 의거하거나 참조했다고 생각되는 기사는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워싱턴포스트 1992년 7월 10일자, ‘‘위안부’ 관련 새로운 충돌―강제한 증거는 없다는 일본의 주장을 다수가 비판’(폴 블루스타인(Paul Blustein) 기자)이라는 기사를 보자. 이는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의 두 번째 사죄담화(1992년 7월 6일)가 나온 지 며칠 만에 쓴 것이다. 

가토 관방장관은 이때 위안소에 대한 편의 제공과 단속 차원에서 정부가 관여했다고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명했지만 강제연행을 표시하는 문서는 없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역사가들은 20만 명에 이르는 위안부가 동원되어 그 대부분이 병사하거나 살해됐다고 믿고 있다”고 우선 실체 불명의 “역사가” 일반의 설을 꺼낸 뒤(이는 오늘날에도 미국 신문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패턴) 다음의 증언을 대고 있다. 

어느 전 일본제국 육군 병사는 조선 마을들에서의 새벽 습격에 참가하여 울부짖는 어린아이들로부터 젊은 여자를 떼어내 트럭에 실었다고 말하고 있다.(One former Imperial Japanese soldier has stated that he participated in dawn raids on Korean villages, dragging young women away from their screaming children and loading them into trucks.)


요시다라는 고유명사는 없지만 분명 요시다 증언에 의거한 것일 것이다. 가토 관방장관이 강제연행을 인정하지 않자 요시다 증언을 들어 다시 한번 일본 정부에 인정하라고 압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사는 이어 아사히신문 사설을 인용한다. 

일본에서 2번째로 큰 일간지인 아사히신문은 이번 주 ‘엉거주춤’이라고 동 신문이 부르는 방식을 정부가 취한 것을 공격한 세력의 하나이다. “(정부는) 관여는 인정해도, 강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라고 아사히는 쓰고 있다.


이 아사히 사설은 제3자위원회에서도 비판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다음은 동 위원회 보고서에서 인용해 둔다. 

가토 담화에 관한 아사히신문 사설(1992년 7월 8일 ‘과거 극복에 나설 때(過去の克服に取り組む時)’)은 “정부가 왜 ‘관여’ 등 애매한 단어를 쓰는 걸까. 발표된 문건을 보면 당시 정부나 군이 사실상 관리·운영에 임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이 깨끗한 태도인 것 아닌가”, 위안부를 모으는 방법에 관한 정부의 조사는 “강제연행을 나타내는 문서는 없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관여’는 인정해도, '강제'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정부의 엉거주춤한 자세가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 이렇게 아사히신문은 위안부 문제의 초점이 징모 단계에서의 강제·강요에 의한 연행(‘협의의 강제’)인 것 같은 보도를 거듭한다.


위 워싱턴포스트의 기사에서 기자는 분명히 아사히의 사설에 의거하여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아사히가 부정했다면 사용하지 못했을 요시다 증언도 강제연행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쓰이고 있다. 

아사히의 누차의 ‘선동’에 첩첩이 영향을 받아 미국 신문이 강제연행을 사실로 인정하는 기사를 쓰고, 또 사실로 인정하도록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고 총괄해도 아무 부자연스러움도 없을 것이다. 

조사대상 미국 신문 기사 중 요시다 증언에 대해 가장 자세한 내용은 위 아사히 사설로부터 한 달 후 뉴욕타임스에 실린 1992년 8월 8일자 ‘일본의 전 군인이 전시 매춘 문제 고발'(Japanese Veteran Presses Wartime-Brothel Issue)’ 기사이다(데이비드 생거 기자).
 


이 기사는 요시다 세이지가 “일본 정부로서는 악몽”이라고 할 만한 “TV 카메라 앞에서 열심히 고백하는 자칭 전쟁범죄자(a self-proclaimed former war criminal)”라고 하는 소개로 시작해, “울부짖는 유아를 여성의 팔에서 떼어냈고 여자들을 트럭에 밀어 넣었다”, “금세기 아시아 최악의 인권 유린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요시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여성들의 증언을 제외하면, 요시다 씨의 이러한 회상은 일본이 단순히 유곽을 운영했을 뿐 아니라, 몇 만 명이라는 위안부를 계속 공급하기 위해 유괴 부대(kidnapping squad)까지 조직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언이다(the most potent bit of testimony yet)”라고 해설하고 있다. 

기사는 이어서 요시다 세이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여성에 대한 ‘일소작전’(sweep)을 기억하는 제주도민은 없다는 한국 신문의 조사 결과를 언급하고 있다면서, 하타 이쿠히코 씨의 반론 소개로 넘어갔다. 단, 위안부의 존재를 창피해 하는 사회에서 과연 주민들의 증언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청취 조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유보가 덧붙여졌다.

기사는 16세 때 7명의 일본군 병사에게 잡혀 트럭에 실려갔다는 노청자 씨라는 여성의 증언도 다룬 뒤, “그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그녀가 말하는 지역에는 당시 일본군 병사는 거의 없었다”, “‘나는 요시다의 희생자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그의 코멘트로 끝을 맺고 있다. 

또한 이 기사는 “요시다 씨의 증언과 같은 것이 바로 이 문제를 신문 1면에서 계속 취급하게 한다(Stories like Mr. Yoshida's keep the issue on the front pages.)”고 기록하여 미국 기자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기울임에 있어서 요시다 증언의 의미가 컸음을 시사하고 있다. 피해자의 증언과 함께 가해자의 증언(자백)이 있으면, 제3자의 심증은 단번에 유죄로 기울어진다. 요시다 증언의 무게는 거의 자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뉴욕타임스 기사에 대해서 하야시 카오리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시다 씨는 이른바 위안부 ‘강제연행’ 증언자로서 제시되고 있지만, 기사의 후단에서는 현대사 연구자 하타 이쿠히코 씨의 반론을 게재하여 요시다 증언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아사히신문이 거의 같은 시기에 요시다 증언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고 사용하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보고서 76페이지)

  

게다가 그는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 시점에서 아사히신문은 아직 요시다 세이지 씨의 발언을 그대로 게재하고 있었다.(독자 투고나 익명으로의 요시다 씨의 언급을 제외하면, 결국 92년 8월 13일까지 요시다 세이지 씨라고 하는 인물을, 이미 증언에 대해 의심이 있다고 명시하지 않고 계속 보도했다.”(동상) 

 

이것은 적확한 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신문에서는 아사히에 의해 선동되어 기사를 각색하는 경향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아사히의 기사에 비하면 아직까지도 균형이 잡힌 경우도 많다. 

또한 하야시 카오리 씨의 조사대상 밖인 로스앤젤레스타임스도 1993년 8월 5일자 ‘일본, 제2차대전 중의 성노예의 강제를 인정하다(Japan Admits That WWII Sex Slaves Were Coerced)’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모집계의 한 명인 요시다 세이지에 의하면, 인신 거래자들은 처음에는 유인을 위해 가짜 구인광고를 사용했지만 1943년 이후는 더 이상 여성들이 속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노예사냥을 하기 시작했다.(Although the flesh traders initially used false job advertisements as lures, starting in 1943 they began slave hunts when women could no longer be tricked, according to one of the recruiters,  Seiji Yoshida.)”고 하면서 요시다라는 고유명사를 거명하여 그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이날 나온 고노담화에 따른 기사이지만 강제연행에 관해 이 담화가 낳은 오해를 요시다 증언이 더욱 증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가 이 시점에서 요시다 관련 기사를 취소했다면, 적어도 증폭의 정도는 작아졌을 것이다. 

힉스의 책에 대해서(ヒックス本について)

하야시 카오리 씨는, “George Hicks”를 키워드로 한 정량분석도 실시하고 있다. 호주 언론인인 조지 힉스는 ‘The Comfort Women. Japan's Brutal Regime of Enforced Prostitution in the Second World War’(1995년 출판)의 저자로, “90년대 중반 당시는 아직 영어로 자료가 적었던 시기에 출판된 만큼 그 영향력은 강하다고 알려졌다. 이 책은 요시다 증언을 비교적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국내에서 문제시되고 있다”고 하야시 카오리 씨가 기술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 책은 위안소를 군 성노예 체계로 규정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서도 중요 문헌으로 인용되고 있다. 

하야시 카오리 씨는 “모두 4편의 기사가 Hicks를 인용했다. Hicks의 이 책은 위안부에 관한 영문 문헌이 거의 없었던 90년대에 서양 기자들이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위안부 ‘강제연행’의 이미지가 구미(서양) 기자들 사이에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용되고 있던 기사의 수는 한정적이었다”라고 한다. 

확실히 힉스의 이름을 언급한 기사는 많지 않다. 이 중 가장 상세한 내용은 뉴욕타임스 1995년 9월 10일자 서평이다(마이클 샤피로(Michael Shapiro) 컬럼비아대학 교수 집필). 

이 서평은 대략, “책 내용을 소개함과 함께, Hicks의 책이 영어로는 최초의 위안부에 대한 해설서임을 평가하고, 동시에 그 필치가 일본과 한국에서 이미 나온 자료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무미건조(arid)’하다고 하면서, 특히 생존해 있는 한국의 피해자들로부터 스스로 조사하고 그 증언을 취했다면 더욱 강력해질 수 있었다고 끝을 맺고 있다”(하야시 카오리 씨)고 하는 내용이다. 

또, 서평은 “초기의 위안부는 봉급이나 새로운 식민지에서의 모험에 끌린 일본인 창부였으나, 그 수가 불충분하자 일본이 통치하던 나라에서 군에 의한 조직적인 납치, 강요, 사기적 모집이 시작됐다. 80%가 조선인이었다”고 쓰고 있는 등 사실 인식에 있어서도 힉스의 책에 의거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하야시 카오리 씨가 “다소 무미건조(arid)”’라고 번역한 부분은 서평 원문에는 ‘다소’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고 단순히 arid라고 했을 뿐인 표현이다. 만일 서평자가 요시다 증언의 허위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면(즉 아사히가 조기에 요시다 증언을 취소하는 등 행동을 취했다면), 한층 더 혹평에 가까운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힉스 책의 영향력도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고노담화의 영향(河野談話の影響)

1993년 8월 4일 고노담화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일본이 위안부 강제연행과 성노예화를 공식 인정했다는 형태로 미국에서 보도됐다. 

예를 들어 워싱턴포스트 1993년 8월 4일자는 ‘일본, 성노예들에게 사죄(Japan Apologizes to Sex Slaves)’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 정부는 오늘 제국 육군이 사로잡은 많은 아시아 여성에게 일본군 병사의 성노예로서 봉사하도록 강요했음을 인정하였다(the government of Japan today conceded that the Imperial Army forced large numbers of captive Asian women to serve as sex slaves)”라고 기술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1993년 8월 5일자 ‘일본, 군이 강제로 여성을 전쟁 창관(娼館)에 넣었음을 인정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도 “오늘 정부는 사실상 노예로 제국군 병사들에게 성 제공을 강요당했다는 여성들의 비통한 고발이 진실이었다고 인정했다”고 적고 있다. 고노담화로 오해가 훨씬 크게 세계에 확산된 모습이 역력하다. 

1993년 8월 8일자 뉴욕타임스의 ‘일본의 불편한 과거(Japan's Uncomfortable Past)’라는 제목의 기사는 “도조(東条)의 일본은 독일의 동맹국이고, 추축국의 전쟁머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과 관련 히틀러의 인종차별적 경멸을 공유했다(shared Hitlers racist contempt)”며, 조선의 젊은 여성이 성노예로 끌려간 조직적 강간(systematic rape)을 그 일례로 들고 있다. 고노담화를 계기로 일부 미국 언론 보도에서는 일본군 위안소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명확하게 동일시하는 데까지 왜곡이 진행된 셈이다.
 
그런데 아사히 제3자위원회는 고노담화에 대해서, 부정적이기는커녕 일관되게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위원회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고노담화를 비판하고 재검토를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광의의 강제’, ‘협의의 강제’에 대해(「広義の強制」「狭義の強制」について)

하야시 카오리 씨는 정량분석을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외 기사는 일본 정치인 중 “아베 신조 수상의 인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아베 수상에 대한 구미 언론의 주목도가 발군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어 “정보원(情報源)”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주제로도 아베 수상은 주목도가 높다”고 하고,“아베 수상에 가깝다고 꼽히는 사람들이 고노담화 수정을 시사하거나 위안부 문제의 ‘협의의 강제성’을 쟁점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때마다 아베 수상도 거론됐고 해외 언론 보도가 더욱 주목하게 된다는 구도가 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최근의 구미의 신문 기사를 종합하면, 아베 수상을 비롯하여 일본의 공인(公人)이 역사 자료에서의 조선반도에서 ‘협의의 강제성’의 부재를 주장하는 만큼, 해외에서는 그 자세가 위안부 문제를 경시(downplay)하고 속임수(whitewash)를 쓰고, 죄를 발뺌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기사의 양이 늘어나는 사이클에 들어 갔다. 특히 구미에 있어서, ‘강제연행’에 구애되는 것이야말로 일본 정부가 전쟁 책임에 대해 자각이 없음을 상징하는 언설이라는 도식이 형성되는 것 같다.(하야시 카오리(林香里), ‘데이터로 보는 ‘위안부 문제’의 국제 보도 상황(データから見る『慰安婦問題』の国際報道状況)’, 22페이지)


확실히, ‘광의의 강제성’, ‘협의의 강제성’이라고 하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이것은 원래 아사히신문의 용어이지만). 강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한 오해를 증폭시키고 눈속임이나 일시적 변동이라는 비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위안소는 군이 용인하고 편의를 봐준 창관(娼館)이고, 여성의 강제연행이나 성노예화 같은 사실이 없다고 단적으로 주장해야 할 것이다. 

네덜란드 여성과 관련된 스마랑섬 사건 등은 예외적인 일탈행위이며, 이는 미군에서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간수병 행패와 같은 현상이다. 모두 혐오스러운 사건이지만, 군의 조직적 행위가 아니며, 상부에서 알게 되면서 중지시켰다. 특히 미국인들에게 스마랑은 곧 아부그라이브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공통점을 설정하기 쉬울 것이다. 



또한 아사히 ‘제3자위원회’ 보고서에서, 키타오카 신이치 씨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올해(2014년) 8월 5일 보도에서 아사히신문은 강제연행 증거는 없었지만, 위안부에 대한 강제는 있고 그녀들이 비참한 일을 당한 것이 본질이라고 말했다. 이것에는 동감이다.

그러나 아베 1차 내각 당시 아베 수상이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입장을 보였을 때 이를 강하게 비판한 것은 아사히신문이 아니었는가. 지금 입장과 아베 수상이 수상으로서 공적으로 발언한 입장, 그리고 고노담화 계승이라는 입장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아사히신문에는 이러한 종류의 발뺌, 바꿔치기가 적지 않다.(94쪽)


의도하는 바는 알겠지만, “강제연행 증거는 없었지만, 위안부에 대한 강제는 있음”이란 표현은 역시 오해를 부를 것이다. ‘광의의 강제’와 마찬가지로 사실관계 및 일본의 입장을 밝히는 데 있어서 역시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기타오카 신이치 씨는, 오카모토 유키오 씨와의 연명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번에 인터뷰한 해외 지식인도 일본군이 직접 집단적, 폭력적, 계획적으로 많은 여성을 납치하고 폭행하고 강제로 종군위안부로 삼았다는 이미지가 상당히 정착되어 있다. 

(중략) 한국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과격한 언설을 아사히신문이나 기타 일본 언론이 이른바 엔도스(배서)해 왔다. 그 가운데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사히신문이다. 그것은 한국의 과격한 위안부 문제 비판에 탄력을 주었고, 더욱 과격화시켰다. 

제3국에서 보면 한국 언론이 일본을 비판하고, 일본 유력 언론이 그에 동조한다면 일본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사히신문이 위안부 문제의 과장된 이미지 형성에 힘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이다.(52쪽)


이는 적확한 지적이라 하겠다. 또한, ‘이번에 인터뷰한 해외 전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술하겠다. 

납치 문제에 대한 악영향(拉致問題への悪影響)

워싱턴포스트는 2007년 3월 24일자 ‘아베 신조의 횡설수설(Shinzo Abe's Double Talk)’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위안부 문제와 납북자 문제를 같은 차원에 두고 논하고 있다. 

“아베는 평양의 불성실한 대응을 비난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기묘하고 불쾌한 것은 그와 병행하여 제2차대전 중의 몇 만명의 여성 납치 강간, 성노예화(abduction, rape and sexual enslavement)에 대한 책임 인식의 취소를 그가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위안부 문제에 관한 역사 기록은) 북조선이 일본인을 유괴한 증거와 같은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no less convincing)”, “만약 그가 납치된 일본인의 운명을 아는 데 국제적 지지를 얻고 싶다면 일본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책임을 지고, 그리고 그가 비방한 피해자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와 같은 내용이다. 잘못된 사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고압적인 문장이다. 같은 기술은, 미국 신문에서, 그 밖에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워싱턴포스트 2007년 4월 27일자 기사는 “아베는 3월 여성을 강제로 아시아 전역의 사창가에서 일하도록 한 행위에 대한 일본군의 직접 관여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국제사회의 많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또한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를 둘러싼 오랜 논쟁으로 스스로를 희생자로 묘사하는 일본의 노력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뉴욕타임스도 2007년 3월 27일자 ‘전시 성노예 문제에서 국가 역할을 부정한 일본 지도자, 결국 사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위안부 문제에서 아베 수상이) 국가에 의한 강제를 부정한 것은 위선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아베는 북조선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알려진 17명의 일본인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인기를 얻게 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한다. 

위안부 강제연행·성노예화라는 오해의 확산이 납북자 문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이들 미국의 보도에서도 분명할 것이다. 아사히의 책임은 이 점에서도 크다. 

아베 씨는 납북자 문제는 물론 위안부 문제에서도 아무런 사실을 왜곡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아베의 실언 문제가 아니다. 배후에 있는 구조적 요인이 검증돼야 한다. 

그것은 다음에 살펴볼 2007년 7월의 미 하원 ‘위안부 일본비난’ 결의의 성립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미 하원 ‘위안부 일본비난’ 결의에 대해서(米下院「慰安婦日本非難」決議について)

하타노 스미오 씨는 제3자위원회 보고서의 ‘흔들리는 고노담화(揺らぐ河野談話)’라는 절에서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07년 1월, 마이클 혼다 의원 등이 미 하원 외교위원회에 이른바 ‘위안부 결의안’을 제출하고, 2월의 공청회를 거쳐서 6월 하순, 찬성 39표, 반대 2표로 채택되어 2007년 7월 30일 미국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일본군이 아시아의 여성을 위안부로 삼아 “강제적으로 성노예”로 만들었다고 강력히 비난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사과와 역사 교육의 철저 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위안부 제도를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사건 중 하나”으로 규정하고 있다. 당초 공동제안 의원이 그다지 늘지 않았던 것은 일부 공화당 의원의 반론이나 가토 료조(加藤良三) 주미대사의 항의서한이 주효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4월 이후 찬동 의원을 급증시킨 최대의 요인은 본 위원회에 의한 인터뷰에 응한 복수의 미국인 유식자(有識者)가 지적하듯이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日本の前途と歴史教育を考える議員の会)’(‘의원 모임’)을 중심으로 한 44명의 국회의원과 유식자가 워싱턴포스트지(2007년 6월 14 일자)에 게재한 의견 광고 ‘THE FACTS(진실)’였다. 4월 26일 같은 워싱턴포스트에 한국계 시민의 입김으로 실린 의견광고 ‘THE TRUTH ABOUT “COMFORT WOMEN”’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의견 광고 ‘진실’은, 일본군에 의해서 강제로 종군위안부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위안부는 섹스슬레이브가 아니다, 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미 하원 외교위원회 랜토스 위원장이 “위안부 제도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비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듯이 이 의견 광고는 미국 사회에서 역효과였다.(67~68페이지)


이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글이다. 

우선 하타노 스미오 씨는 일본의 유지가 워싱턴 포스트에 낸 의견 광고가 위안부 결의안에 대해 “참여 의원을 급증시킨 최대 요인”이라고 하지만 제시된 유일한 논거는 “본 위원회에 의한 인터뷰에 응한 복수의 미국인 유식자의 지적”이다. 그러나, 이 ‘전문가 인터뷰’의 자료적 가치는 후술하는 것처럼 극히 낮다. 



덧붙여 “최대 요인”이라고까지 말하는 이상, 하타노 스미오 씨는 적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지적이 어느 ‘유식자(有識者, 전문가)’로부터 나왔는지를, 주(注)나 부록(付録)의 형태로라도 나타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검증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번에 필자가 조사한 3개 신문에는 의견광고에 대한 의회의 반발을 보도하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카토 료조 주미대사의 항의서한이 주효”에 대해서도 누가 그렇게 평가했는지, 근거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아 이 또한 검증할 길이 없다. 

가토 대사 서한은 일본 역대 총리들이 거듭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하는 등 ‘도피성 반론’으로 일관하고 있고, “잔학성과 거대함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적 군대 매춘인 ‘위안부’ 시스템은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로 윤간과 강제 낙태, 모욕, 성폭행을 포함, 사지 절단 및 사망, 자살에 이른 것이고” 운운하는 결의안에서 보이는 중대한 사실 오인에 대해 전혀 반박하지 않고 있다. 대사 서한이 오히려 일본은 사실관계에 이견이 없다는 오해를 정착시켜 결의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켰을 가능성마저 있다. 

“이 의견광고는 미국 사회 속에선 역효과였다”고 하타노 스미오 씨가 재단하지만, 미국사회는 일본사회 등과 달리 직설적인 정의감으로 움직인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반대로 인권문제에서 미국은 유독 위선적이라는 뜻인가. 어쨌든 너무 단순한 견해일 것이다. 

참고자료로서 비슷한 시기에 미국 하원에 제출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비난’ 결의안의 경위를 살펴보자. 

2007년 10월 10일 워싱턴포스트는 ‘무의미하기 보다는 나쁜-90년 전 터키에서의 학살에 관한 의회결의가 미국 오늘날의 안전보장을 위태롭게 한다](Worse Than Irrelevant-A Congressional resolution about massacres in Turkey 90 years ago endangers present-day U. S. security)’는 제목의 사설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비판했다. 

즉, 100만 명이 넘는 학살사건은 분명 심각한 인도주의적 주제이지만, 결의추진파인 민주당 하원의원들은 선거구 내 아르메니아계 유권자의 환심을 사려는 ‘왜소하고 편협한 이해(petty and parochial interests)’에 끌려다니고 있으며 분노한 터키가 미군기에 대한 편의공여를 거부하는 안보상의 중대 위험을 감안할 때 “이 결의안 통과는 위험하고 심지어 무책임할 것이다(its passage would be dangerous and grossly irresponsible)”. 

키신저, 베이커, 슐츠, 올브라이트 등 전 국무장관 8명이 초당적으로 반대 공동성명을 내는 등의 움직임도 있어서 결국 결의안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다. 

만일 얼마 전, 터키의 유지(有志)가 ‘THE FACTS(진실)’라고 제목을 붙인 의견광고를 냈다면, “미국 사회 안에서는 역효과”가 되어 결의가 단번에 통과에 이른 것일까.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터키는 시종 민관 모두 강한 반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이 미국 유력 언론으로 하여금 역사상의 인도적 문제보다 현 안보를 중시하라는 취지의 사설을 쓰게 하고 결의추진파 의원들을 고립시키는 주요 요인이 됐다. 

반면 일본은 종합적인 외교전략에서 졌으므로 종합적인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외무성의 경우, 가토 류조 대사 서한은 ‘성공’ 운운하며 면죄할 대상이 아니며, 가장 먼저 검증의 도마에 올려야 한다.

톰 랜토스 하원 외교위원장은 당시 지역구의 중국계 반일단체들로부터 결의 촉진을 위한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 혼다 의원도 선거구 안팎의 중국 로비와 오래전부터 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저널리스트 후루모리 요시히사(古森義久) 씨의 상세한 리포트가 있다(후루모리 요시히사, ‘중ㆍ한 ‘반일 로비’의 실상(中・韓「反日ロビー」の実像)’, PHP, 2013년). 결의 배후에 관계 의원의 선거구 사정이 있었다는 점에서 대터키 결의도 대일 결의도 다름이 없다. 일본의 종합적인 외교력이 강했다면 거꾸로 혼다 의원 등이 미국 메이저 신문으로부터 왜소하고 편협하다거나 심지어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는 전개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의 의견 광고가 실제로 한방 뒤집기를 낳은 것이라면 일본 외교는 그만큼 취약했다는 얘기다. 의회 유력 소식통과의 신뢰관계, 긴밀한 커뮤니케이션 루트가 구축되어 있으면 있을 수 없는 전개이다. 어쨌든 가장 반성해야 할 것은 외무성일 것이다. 

앞으로도 일본의 좌파 세력은 ‘위안부=성노예’ 운운하며 계속 선전하고, 그에 대해서 보수파는 팩트를 들어 반박하도록 점점 정부를 압박할 것이다. 외교 당국은 그것을 근거로 해서 국제 정보 전략을 세워야 한다. “유지가 의견 광고만 하지 않았다면”과 같은 식은, 무위무능의 호도로서도 너무나 재주가 없는 일이다. 

덧붙여 제3자위원회 위원으로 외무성 OB인 오카모토 유키오(岡本行夫) 씨는 미 하원 결의 당시, 산케이신문에의 기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2007년 7월 23 일자 ‘세이론(正論)’).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미국 하원에 계류 중인 대일 사과요구 결의안. 4월 말 아베 수상이 방미했을 때의 사죄 자세에 의해 사태는 진정되고 결의안 통과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유지가 사실관계를 반박하는 전면광고를 워싱턴포스트에 낸 순간 결의안 채택의 기운이 타올라 39 대 2라는 큰 표차로 외교위원회를 통과해 하원 본회의 통과도 확실한 상황이 됐다. 

옳은 의견의 광고였을 텐데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이 결의안에 관해서는, 이미 사실관계가 쟁점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현상을 어떤 주관을 가지고 일본인이 제시하려고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으로부터의 반론은 당연하지만, 역사를 어떠한 주관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타인에 의해 받아들여지는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마지막 몇 줄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일본인들은 과거사에 대해서 사실로 반론을 하지 말고 오로지 사죄와 반성의 자세로 가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미 사실관계가 쟁점이 아니게 되었다”는 단지 외무성적인 패배주의의 표명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일본 측 주장이 상식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외무성이나 정치인 다수의 무위에도 불구하고 느리기는 하지만 서서히 늘고 있다. 

오카모토 유키오 씨는 1991년 1월까지 외무성 북미국 북미 제1과장, 퇴임 후에도 총리보좌관, 내각관방 참여, 총리외교고문 등을 역임하고 있다. 아직 사실관계가 쟁점이었던 시기에 일본 외교의 일익을 담당했던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기타오카 신이치 씨도 2004년 4월부터 2006년 8월까지 유엔 차석대사를 맡아 국제 홍보활동의 최일선에 있었다. 하타노 스미오 씨도 외교자료관에서의 오랜 근무 등 외무성과 무관하지 않다. 

위안부 문제는 아사히가 먼저 부추기고, 보수파가 괜한 반론으로 악화시켰다, 입을 다물고 외교부에 맡겨야 했다, 이런 것이 제3자위원회 다수파의 결론 같다. 그러나 이는 조심스럽게 말하더라도 현저하게 검증이 안 된 것으로, 설득력이 없다. 

향후, 아사히에 관한 검증을 거쳐, 외무성 역할의 검증이 필요하게 되지만, 3명에게는, 의견 광고 ‘THE FACTS’를 희생양으로 만들려는 퇴영적 자세가 아닌, 진지한 자성에 입각한 적극적 관여를 요구하고 싶다. 

아베 수상과 ‘보수파’의 고노담화 비판에 대해(安倍首相と「保守派」の河野談話批判について)

하타노 스미오 씨는 제1차 내각에서 아베 수상의 발언도 간과할 수 없는 결의 촉진 요인이었다며 미 하원 결의에 관한 아베 총리의 책임도 언급한다. 

아베 씨는 (2007년) 3월 1일 “당초 정의됐던 ‘강제성’의 정의가 바뀌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기자들에게 말했고, 3월 5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는 “관헌이 집에 침입해 사람을 납치하듯이 데려간다는 그런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했다. (중략)

아베 수상의 일련의 발언은 워싱턴포스트(WP)와 뉴욕타임스를 통해 비판받았다. 워싱턴포스트(3월)는 수만 명의 여성을 납치, 강간하고 성노예로 만든 데 대한 책임을 경시하고 있다고 못 박았다. 

아베 수상의 발언은 ‘광의의 강제성’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 거론한 아사히신문의 사설(2007년 3월 6일 ‘‘위안부’ 발언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말라(『慰安婦』発言 いらぬ誤解を招くまい」)는 “이른바 종군 위안부의 모집, 이송, 관리 등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강제성을 인정해야 할 실태가 있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고노담화도 그런 인식에 서 있다. 세세한 정의나 구분에 더 매달리는 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입장의 총리로서 떳떳한 태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가 아베에게 못을 박았다고 쓰는 것은 하타노 스미오 씨가 미국 신문의 잘못된 비난에 동조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붓놀림일까. 어쨌든 간에 식견을 의심받게 될 것이다. 

확실히 미국 신문에는, 아베 수상의 발언이 하원결의를 촉진했다는 기술이 적지 않게 보인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스 2007년 5월 12일자 기사(노리미츠 오오니시(ノリミツ・オオニシ) 기자)는 아베 수상이 “일본군이 여성을 성노예로 강제한 것을 부정하고 다른 아시아 지역과 미국에서 분노를 불러일으킬 때까지는 이 결의는 거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같은 신문 2007년 3월 8일자의 ‘부정이 전직 일본군 성노예의 상처를 다시 열다(Denial Reopens Wounds of Japan's Ex-Sex Slaves)’라는 제목의 기사는 마이크 혼다 의원의 “일본의 역사가들이 발굴한 증거와 위안부 증언”에 따르면 아베 수상의 주장이 옳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는 반론을 이끌고 있다. 

더욱이 이 기사는 “일본의 역사가들은 군인의 일기와 증언, 미국 기타 국가 공식 기록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에서의 젊은 여성의 강제, 납치, 유인, 때로는 유괴 등에 일본군이 직간접 관여한 사실을 뒷받침해 왔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는 요시다 증언과 아사히의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의 영향이 역력하다. 그런 점에서 아사히의 2007년 3월 6일자 사설은 아사히 자신이 부추긴 화재에 대해 진압을 시도하는 아베 수상을 떳떳한 태도라고 할 수 없다고 타이르는 모습에선 냉소할만한 하찮음이 느껴진다. 

이때 아사히가 요시다 증언을 ‘시원히’ 취소했다면 하원결의 과정 역시 달랐을지도 모른다. 국익 훼손이라는 점에서 따져야 할 것은 아베 발언이 아니라 아사히의 작위와 부작위이다. 

또한 상기 뉴욕타임스의 기술에 반하여 미국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공식 기록’ 중 위안부 강제연행이나 학대를 나타내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나중에 다루는 마이클 욘(Michael Yon)의 보고). 반대로 위안부 생활 실태가 ‘성노예’와는 거리가 먼 것임을 나타내는 문서는 존재한다(미군에 의한 버마에서의 미군에 의한 위안부 청문조서―1944년(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Korean Comfort Women)). 



아베 수상의 발언이 하원결의를 촉진했다는 취지는 이후의 기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결의로부터 1년 남짓 후의 워싱턴포스트 2008년 11월 12일(블레인 하든(Blaine Harden) 기자)는, “그의 성명이 미하원으로 하여금 성노예의 취급에 대해서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를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His statement pushed the U. S. House of representatives to pass a resolution calling on Japan to apologize for its treatment of sex  slaves.)”고 쓰고 있다. 

더구나 하타노 스미오 씨는 아베 수상의 발언뿐 아니라 정권이 작성한 정부 답변서도 미 하원 결의의 촉진 요인이 됐다고 비판한다. 

아베 내각은 3월 16일, 고노담화 때까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답변서를 각의(閣議) 결정했다. 그는 일본 정부에 사죄를 요구하는 하원 결의안에 대해 사실관계, 특히 일본 정부의 대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확인했다. 이러한 아베 내각의 자세는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것, 사과의 뜻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하원 결의안에 대한 찬동 의원을 단번에 증가시켰다.(68~69페이지)


외국의 현 단계의 오해에 상응하여 정부답변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여기서 보이는 발상은 전형적인 패배주의다. 

덧붙이면, 하야시 카오리 씨의 보고에도 하타노 스미오 씨와 공통된 인식이 역력하다. 

2014년 현재 아베 수상은 고노담화를 계승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지만, 그 옆에서 측근으로 꼽히는 사람들 및 정부에서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고노담화 수정을 시사하거나 위안부 문제의 ‘협의의 강제성’의 부재와 함께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서방 언론은 그때마다 그것을 보도하면서 보도량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는 구도를 알 수 있다.(78페이지)


보도량을 늘리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정보 발신의 기회 증대로도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워싱턴포스트 2002년 8월 15일자는 ‘위안부 강제연행은 날조된 사실(史實)이다’라고 하는 이날의 요미우리 신문의 사설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의견이 “더 주류가 되고 있다(becoming more mainstream)”고 쓰고 있다. 

2007년 단계에서 “아베 수상의 견해는 일본의 주류”라고 쓰는 상태에 있었다면 위안부 결의안에 대한 미국 의원들의 대응도 또 다른 것이 됐을지도 모른다. 

비교적 최근의 기사에서는, 예를 들면, 워싱턴포스트 2012년 12월 11일자에, “일본 최대 부수의 요미우리신문이 사설에서 일본이 성노예를 강제로 끌고 간 증거는 없다고 썼다”라고 하는 기술이 있다. ‘성노예’라는 규정은 문제지만, 어쨌든 사실을 발신하면 해외에도 전해지는 일례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워싱턴포스트 2014년 3월 7일자 ‘성노예 사과의 재검증 움직임, 일본, 지역을 화나게 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도 위안부에 대해서, “집에서 강제로 끌려가(coerced from their home)……일본군과의 성교를 갖도록 강요받았다(forced to have sex with Japanese soldiers). 대부분의 여성이 14세에서 18세 사이였다”고 하는 오인은 있지만, 동시에 고노담화에 대해서 “이 사과는 일본군이 관여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한심한 정치적 양보라며 일본의 유력한 방면에서 점점 모멸감이 커지고 있다. 이 감정은, 이전에는 극우적 소수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일본의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해외에서 퍼진다면, 적어도 ‘지일파’를 자인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주류’를 적으로 돌리는 논의를 쉽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시다 세이지의 망령’에 대해서(「吉田清治の亡霊」について)

아베 수상 및 보수파에 대한 하타노 스미오 씨의 비판적 자세는 계속 ‘요시다 세이지 씨의 망령’이라는 항목에서 “이 집단”은 “잘못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한층 강하게 나타난다. 

요시다 씨는 한때 일본 매스미디어에 자주 등장했는데 물론 가토 담화나 고노담화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채용된 것은 아니다. (중략) 문제는 국내외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 잘못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거기에서는 위안부 강제연행을 고백한 요시다 증언은 고노담화의 유력한 근거로 인식되고 담화가 “강제연행”을 인정한 것이라는 고정 관념이 형성된 것이다. (중략) “강제연행”의 유력한 근거였던 요시다 증언이 부정된 것을 가지고 이 집단은 “강제연행”을 일본의 공적 입장으로 인식하는 고노담화의 재검토(철회)를 언급하게 된다. 강제성을 둘러싸고 일한(日韓) 양측 주장의 미묘한 균형을 표현하고 국제적 평가도 자리 잡아 가던 고노담화는 그 신임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강제연행’의 실행자로서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 증언의 ‘망령’이 할 수 있는 업이었다.(71페이지)


“요시다 씨는 한때 일본의 매스 미디어에 자주 등장했다”고 하타노 스미오 씨는 말하지만, 요시다 증언의 영향은 길게 꼬리를 드리웠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제3자위원회의 보고서에서도 하야시 카오리 씨가, “한국의 기사를 보면, 수는 적다고는 해도, 극히 최근(2012년)에도 요시다 증언에 근거해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 이야기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미국 신문에서도 요시다 증언의 그림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다룬 뉴욕타임스의 두 기사(1996년 5월 13일, 15일자)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를 “대부분 마을에서 유괴된 10대 소녀들(mostly teen-age girls kidnapped from villages)”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요시다 증언과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의 사례로는 워싱턴포스트 2014년 5월 31일자의 ‘제2차대전시에 위안부에 대한 경의가 페어팩스를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하다’라는 기사는 위안부는 “집에서 납치되어 ‘위안소’에 보내졌다(abducted from their home and sent to"comfort stations)”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요시다의 망령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망령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살아나는 좀비, ‘요시다 세이지의 좀비’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제3자위원회’ 보고에서의 방법상의 혼란(「第三者委員会」報告における方法上の混乱)

이하, 제3자위원회 보고에서 볼 수 있는 방법상의 혼란에 초점을 맞추어 검증해 나가겠다. “요시다 세이지” 및 “힉스”를 키워드로 한 정량분석(전술) 후, 하야시 카오리 씨는 다음과 같은 정리하고 있다. 

구미(서양)의 위안부 보도의 일련의 기사를 확인해보면 굳이 “요시다 세이지”라는 이름이 붙지 않거나 Hicks의 저작을 인용하지 않았더라도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연행’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인도네시아에서의 이른바 ‘스마랑 위안소 사건’ 등 조선반도 이외에서 발생한 피해자 증언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세계 각지에 사는 위안부가 인용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일본군의 강제성의 이미지는 이 2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구미 미디어 속에 있는 ‘위안부’라는 이미지가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른 것인지, 다른 정보원에 의한 것인지 미디어 효과론 상의 실증적인 추적은 이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하야시 카오리, 전술 보고, 33페이지)


하야시 카오리 씨는 한국 신문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정량분석 결과를 기술했다. 

한국의 기사를 보면, 수는 적다고는 해도, 최근(2012년)에도 요시다 증언에 근거해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 이야기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참조되는 아사히신문이 97년 시점에서 보다 명확하게 요시다 증언을 취소했다면 오늘날 한국의 논의 흐름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동상 48쪽)


확실히 위안부에 관한 “일본군의 강제성의 이미지는 이 2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므로 아사히신문이 미친 영향의 정도에 대해서 “미디어 효과론 상의 실증적인 추적은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는 중간총괄은, 비록 부족하더라도 양적분석의 한계를 의식한 나름대로 성실한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해외 지식인의 의견’에서의 자료 비판 결여(「海外有識者の意見」における資料批判の欠如)

그런데 하야시 카오리 씨의 논의는 여기서 묘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또한 세계가 품고 있는 일본의 이미지에 대한 영향이라고 하는 물음은, 위안부 문제와는 상관없이 장기간 겹겹이 중층적이고 섬세한 면이 있으므로, 이러한 대략적인 데이터에서는 보이지 않는 국면이 있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제3자위원회의 지시로 아사히신문의 취재망으로 인터뷰를 한 해외 유식자의 의견도 별도로, ……열거해 두었다. 

영어권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종합하자면 요시다 세이지 씨의 가공의 강제연행 이야기는 일본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이미지에 일정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견도 대부분의 지성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일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과 같은 과거의 ‘위안부 강제연행’이미지, 혹은 위안부 제도가 있었던 것 자체가 상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보수 정치가나 우파 운동가들이 이 ‘강제성’의 내용에 집착하고 고노담화에 의문을 나타내거나 무효화하려고 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일본의 이미지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에서 그들은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하야시 카오리, 전술 보고, 25페이지)


양적분석의 한계를 전문가의 의견에 의해 보완한다는 방침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필요한 자료 비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3자위원회가 인터뷰한 영어권의 ‘해외 전문가’는 이하와 같다. 

- 캐시 마사오카(Kathy Masaoka), 민권과 보상을 요구하는 닛케이(NCRR) 공동대표
- 제럴드 커티스(Gerald Curtis) ,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 조지프 나이(Joseph Nye), 미국 하버드대 교수
- 신기욱(Gi-Wook Shin), 미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
- 대니얼 스나이더(Daniel Sneider), 미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부소장
- 테사 모리스 스즈키(Tessa Morris Suzuki) , 호주국립대 교수
- 데니스 핼핀(Dennis Halpin), 미 존스홉킨스대 객원연구원
- 배리 피셔(Barry Fisher), 변호사(미국)
- 필리스 김(Phyllis Kim), ‘캘리포니아주 한미포럼(KAFC)’ 홍보 담당
- 마이크 모치츠키(Mike Mochizuki),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
-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부소장
- 민디 코틀러(Mindy Kotler), 미국 아시아 정책 포인트 대표
- 윤미향(Mee-hyang Yoon),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 래리 닉시(Larry Niksch),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시니어 어소시에이트
(110페이지)


내가 아는 한, 이들 대부분이 위안부 문제에서 아사히신문 또는 한국 측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반일운동단체의 간부들도 포함돼 있다. 더구나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아사히신문 취재망(즉 아사히 기자일 것이다)에서 인터뷰하게 했다니, 우선 이 시점에서 이중의 편견이 걸려 있다. 

개별적으로는, 예를 들면 민디 코틀러 씨를 “지일파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하야시 카오리 씨)고 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보수파뿐 아니라 주미 일본대사관 등의 인식에서도 그는 통상 반일운동가로 분류된다. 

한국어에 능통한 데니스 핼핀(전 하원 외교위원장 정책스태프) 씨도 북조선 문제에서는 균형 잡힌 논리를 펴지만, 역사 문제에서는 코리아 측의 편에 치우친 언행으로 친구들(나도 그중 한 명)을 당황하게 만들 때가 많다. 

래리 닉시 박사(전 의회 조사국 조사원)도 온통 영문 자료에 의거하고 있어 위안부 논의의 상세를 아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예를 들면, 제임스 아워(James Auer, 전 미 국방부 일본 부장) 씨나, 미 정부의 중요 보고서를 발굴한 마이클 욘(Michael Yon, 저널리스트) 씨라는, 일본 측의 주장에 이해를 나타내 온 사람들도 청취 대상에 포함해 균형을 잡았어야 했다. 마이클 욘 씨가 특종한 미국 정부 보고서(2007년 4월)는 일본군 위안소와 조직적 전쟁범죄를 연계시키는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나치 전쟁범죄와 일본제국 정부 기록에 대한 각 부처 작업반 미국 의회 앞 최종보고(The Nazi War Crimes and Japanes Imperial Government Records Interagency Working Group)’-IWG 리포트). 

게다가 제3자위원회 보고에서의 문제는 인터뷰 전 기록이 공개되지 않고 하야시 씨가 독자적으로 취사선택한 다음과 같은 단편만이 “발췌 열거”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 누구의 발언인지도 분명치 않다. 반복하지만, 여기서의 ‘유식자’에는 한국계 반일 단체의 간부도 포함되어 있다. 기록을 위해 발췌 전문을 인용해 놓자. 

• 일본은 우선 자기 방위를 그만두어야 한다. 고노담화를 계승하고 한국에 아직 있는 위안부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 세계가 “일본은 아무것도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부당한 비판을 세계로부터 받고 있다고 해도, 정치가라면 국익을 생각하고 일본의 이미지를 좋게 하고 싶으면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발언해서는 안 된다. 

• 일본의 고노담화 수정, 아사히신문 공격이 오히려 일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다. 미국 전문가 그룹은 일본의 보수 세력과 정부에 크게 실망하고 비판적이다. 

• 고노담화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다시금 이 문제를 거론하려 함으로써 일본 정부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 대처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문제를 최우선 사항에서 제외하고 주목도를 낮추는 것이다. 

• 일본의 인상을 손상시킨 문제의 원인은, 나는 외부의 관찰자가 봤을 때 ‘이 문제에 대해서 일본정부가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생각되는 형태로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현재의 일본의 인상을 손상시키고 있는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

• 고노담화를 철회하거나 수정하려던 2006년과 2007년의 움직임이 미국에서 일본의 이미지를 나쁜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 (요시다 증언을 보도한 기사로 인해) 일본의 이미지가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금의 논쟁이 일본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고 있다. 아베 정권이 강제연행 여부나 성노예라는 표현, 군의 직접 관여 여부에 매달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stupid) 일이다. 고노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를 각의(閣議) 결정을 통해 부정하려는듯 일을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아베 씨의 생각을 외교관에게 실행시키려는 움직임은 일본의 명예를 회복하기는커녕 일본의 평판을 악화시키고 있다.(하야시 카오리, 전게 보고, 34-35쪽)


이들 발언자 불명의 ‘발췌’에 근거하여, 하야시 카오리 씨는 다음과 같이 총괄한다. 

인터뷰한 사람들은 주로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지일파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두 일미한(日米韓) 국제관계에 영향력을 가진 전문가들이다. 그녀/그들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요시다 세이지 씨에 의한 강제연행 이야기는 일본의 이미지에 거의 영향이 없었다는 의견인 반면 위안부 문제는 일정한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의견이 많이 보인다. 

즉, 그녀/그들이 “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이미지를 손상시킨다”고 할 때 요시다 세이지 씨로 대표되는 ‘강제연행’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고, 일본의 보수 정치가나 지식인들이 이 ‘강제성’의 내용에 매달리거나, 고노담화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일본의 이미지 저하로 이어진다고 말했다.(상동, 34페이지)


즉, 위안부 ‘강제연행’라는 오해를 넓힌 아사히신문 등이 아닌, “일본의 보수정치가나 지식인들”이야말로 "일본의 이미지 실추"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의 시비를 검토하기 전에 한 가지 보충을 해 둔다.  해외 전문가 중 래리 닉시의 이름은 하야시 카오리 씨가 따로 인용하는 한국 신문기사에도 나온다.(동아일보 2006년 10월 25일자)

[위안부 결의안은 역사 날조에 근거한다] 요미우리 미 하원 멸시 파문

▽ 미국 의원들 실망=미국 국회 의원들을 위해 위안부 보고서를 작성한 래리 닉시 의회 조사국(CRS) 선임연구원은 23일 요미우리 사설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 

그는 전화 인터뷰를 통해서, “일본 헌병 출신 요시다 세이지 씨가 군 위안부 동원에 참여했다고 쓴 고백록(‘나의 전쟁 범죄’, 1983년)이 출판됐으며 요시미 요시아키 박사가 1992년 일본 방위청 도서관에서 발굴한 자료에서도 ‘점령 지역에 군 위안부 시설을 설치’로 명령을 내린 것이 확인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론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래리 닉시 씨는 2006년 시점에서도 여전히 요시다 증언을 중시하고 있었다. 위에 ‘발췌’된 여러 의견과 분명하게 어긋나지만, 하야시 카오리 씨는 자신의 리포트 속에 있어서의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제3자위원회는, “아사히의 취재망”에 대해 래리 닉시 씨의 현재 및 당시의 인식을 묻도록 지시한 것인가. 

래리 닉시 씨는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에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아사히 취재망은 래리 닉시가 요시미 요시아키 발굴 자료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물어본 것인가. 

이상을 정리하면, 아사히 제3자위원회의 ‘해외 전문가’ 인터뷰는 대상 선정부터 질문의 작성, 결과 정리, 공개의 방법까지의 전 과정에 있어서 매우 엉성하고 경향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타노 스미오 씨는 “강제연행을 했는지 아닌지 하는 좁은 시점에서 문제를 파악하려는 경향”을 비난하는 아사히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당초의 요시다 증언에 의거한 ‘협의의 강제성’에 기운 보도로부터 요시다 증언의 위험성이 밝혀져 고노담화를 지렛대로 삼아 논점을 바꿔치기했다고 지적받아도 어쩔 수 없다.(보고서 63쪽)


이 2단계의 불공정한 자세는, 아사히 제3자위원회가 선택한 ‘해외 유식자’의 대부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안부 강제연행론을 들고 일본을 비난하면서 강제연행을 한 증거가 없다고 반박하면 그것은 중요 논점이 아니며 작은 일에 구애되면 반성의 질을 의심받는다는 등으로 바꿔치기하는 패턴이다. 

불공정한 논의의 정식화 및 확산이라는 점에서도 아사히의 책임이 컸던 것이 아닐까. 



구미와의 ‘시점의 차이’라는 픽션(欧米との「視点の違い」というフィクション)

위안부를 “전쟁 이전의 일본에 정착했던 공창제의 전쟁터판”으로 보는 것이 아베 정권이며, 반면 “구미(서양)의 보도의 논조의 대부분은 위안부 문제를 보편 인도주의적 ‘여성 인권 문제’의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다”고 하야시 카오리 씨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구미의 주류파는 “매춘이나 인신매매로 생계를 꾸려갈 수밖에 없는 여성과 아이들을 주변화하고 고착화하며 재생산하는 사회의 역학관계와 권력을 문제 삼는다. 즉, 그녀들의 권리를 수탈하고 인신거래를 정당화하는, 전투지나 식민지가 의존하는 기저구조를 문제 삼고, ‘성노예’는 이 사회구조를 조명하는 말이다”라고 하는 것 같다.(여담이지만, 이런 언어 감각으로 어떻게 하야시 카오리 씨가 ‘미디어론’을 다룰 수 있는지 의아하다.)

이어 그는 “‘위안부’라는 말의 설명에 ‘성노예’라는 말을 갖다 댈지 어떨지는 일본 정부의 견해와 해외의 논조 사이에 갭이 가장 단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본 정부와 일본의 보수파가 거듭 주장했음직한, ‘강제연행’ 여부를 둘러싸고 위안부들의 개별 구체적인 사실 레벨의 판단에 초점을 맞추고 국가의 책임을 쟁점화하지 않는 입장을 외신의 미디어로부터 이해받는 데는 구미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점, 이해의 근도(筋道)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향후도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하는 예측을 써두었다. 

즉, 여성 인권에 관해 의식이 뒤떨어진 아베 정권이나 “아베 수상과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강제연행 여부에 구애받기 때문에, 의식이 진보한 ‘구미’로부터 반발과 경멸을 산다고 하는 취지일 것이다.(이것도 여담이지만, ‘구미’에서는 매춘을 합법화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 이 사실을 하야시 카오리 씨는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

그런데 구미가 문제 삼는 것은 매춘이나 인신매매를 낳는 기저구조인데 비해 그 ‘관점’, ‘근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 보수파가 ‘강제연행’을 쟁점으로 삼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비난받는다고 하는 하야시 카오리 씨의 설은 옳은 것일까. 

이와 관련해 그는 외무성 원로로 ‘전 제네바 국제기구 대표부 공사를 지낸 미네 게이키(美根慶樹) 씨’의 발언을 특별히 끌어들이고 있다. 코멘트 없이 길게 인용하는 걸 보면 하야시 카오리 씨도 같은 의견일 것이다. 

아마 그런 운동(여성의 권리보호: 하야시 카오리 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사람들은 그것이 섹스슬레이브였다고 할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녀들은 더 물어보면 미군이 한 것도, 그것도 섹스슬레이브였다고.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한 일, 그건 너무 심한 섹스슬레이브였다고 할 것 같아요. 다만, 그것은 ‘섹스·슬레이브’라고 하는 말이 적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에, 이 투쟁의 포인트를, 초점을 맞춰 간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하야시 카오리, 상게 보고, 30쪽)


그럼 왜 특히 일본군 위안부만 ‘성노예’로 지탄받는가. 미국과 한국의 언론과 정치인들이 왜 자국 정부에 요구하지 않는 공식사과와 국가 보상을 일본에만 요구하는가. 그러한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하야시 카오리 씨는 성노예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노예’라는 말은 90년대 이후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 의제 설정된 세계적인 성폭력 및 인신매매 반대 운동의 확장 속에서 서서히 침투하고, 일본의 위안부 문제가 이 문맥에 이끌려 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하고 추측된다.(상동, 31쪽)


여기서도 문제는 국제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문맥”이라는 것에 왜 “일본의 위안부 문제”만이 “이끌려 갔다”는 것인가, 반면에 미군과 한국군은 “(이끌려 가지) 않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답은 명백하여, 구 일본군에만 강제연행과 비정상적인 학대(성노예화)라고 하는 픽션이 부착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공평을 기하면 하야시 카오리 씨 자신은 한국에서의 ‘미군 위안부’도 문제를 삼고 있다. 

미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그 근저에는 일본군 위안부와 동류의 문제가 발견된다. 한국 정부는 미군기지 주변에 외화 획득을 위해 미군을 위한 위안소를 추진했다. 즉, ‘미군 위안부’ 제도는 한국 정부의 협조 없이는 성립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른바 기생 관광으로 불리는 것으로 외화 획득을 위해서 한국 정부는 국책 섹스 투어를 추진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조선반도 식민지배의 문제인 동시에 전후 한국의 근대화와 급속한 경제 성장의 왜곡으로도 부상한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와 군대에 의한 폭력과 함께 그에 가담한 조선 측의 권력, 그곳에 몰려가 이득을 취하던 민간업자, 그리고 여성들의 참혹한 상황을 묵인하는 일본,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의 가부장제 및 남존여비 문화 등이 맞물린 데서 비롯되었다. 위안부 문제를 요시다 세이지 씨에 초점을 좁히면 문제의 전체상을 조명함에 있어서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고 오히려 문제 해명을 지연시킨다.(상동, 49페이지)


이념 냄새가 강하고 생경한 글이지만 일본만 부당하게 폄하하지 않은 점은 평가할 만하다. 다만 그렇다면 강제연행을 둘러싼 오해를 불식시키지 않는 일도 그의 논법에 입각한다면 “문제의 전체상을 충분히 조명하지 않아서 오히려 문제 규명을 지연”시키고 있는 일이 아닐까. 

더욱이 하야시 카오리 씨의 ‘여성 인권’ 개념에는 남편과 아버지, 아들이 납치 강간범의 누명을 썼기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는 그 아내와 딸, 어머니에 해당하는 여성의 인권은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그의 “여성에게 있어 잔혹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너무 좁은 것 같다. 

하야시 카오리 씨는 ‘결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미의 보도에서는 위안부들의 개인적 경험을 인도주의적, 보편적 관점에서 다시 파악하려는 시도가 발견된다. 즉, 거기에는 위안부를 비롯한 전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경험을 근대의 국가권력의 폭주의 구조적 부산물이라고 포착하는 관점이 존재했다. 

이러한 기사에는 제국주의나 군사독재정권이 여성, 피식민자, 피지배자들의 권리를 주변화하면서 차별구조를 내재시켜 국가발전을 이끌었다는 비판적 세계관이 존재한다. 차별의 구조는 일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럽, 미국, 아시아 등 널리 근대국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성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여성이나 아동의 인신거래 문제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 구미의 각 신문에는 이러한 시선에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려고 하는 것이 있었다.(상동, 50페이지)


우선, “위안부를 비롯한 전시 성폭력 피해”라는 표현은 오해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기타 단어에 대한 의문은 제쳐놓지만 이상은 구미의 위안부 보도 실태와는 전혀 무관한 하야시 카오리 씨 개인적 이념의 의견 진술에 불과하다. 

하야시 카오리 씨의 논술과 달리 위안부 문제를 다룬 미국 세 신문의 기사 중, “일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럽 미국 아시아 등 광범위한 근대국가의 문제”로 포착한 내용 등은 하나도 없다. 

반대되는 내용의 기사라면 수없이 많다. 예를 들면 뉴욕타임스 1995년 10월 27일자 ‘점령 미군을 두려워하여 일본 여성들을 유곽에 가도록 권장(Fearing GI Occupiers, Japan Urges Women Into Brothels)’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점령 미군이 일본에서 이용한 “매춘부(prostitutes)”와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해서, “물론 양자는 거대한 차이(enormous difference)가 있다. ‘위안부’는 대개 집에서 끌려 나와 전선의 유곽으로 강제로 들어간 조선의 10대들이었다(mostly Korean teen-agers who were dragged away from their home and forced into front-line brothels)”라고 적고 있다. 

반면 “(미군을 상대로 한) 일본 여성들은 경제적 곤경에서라고는 해도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일하고 있으며 통상적인 유곽보다 몇 배의 보수를 받았다”고 쓰고 있다. 분명히 일본군과 미군의 경우를 다르게 보고 있어, “보편적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를 발견할 수 없다. 덧붙여 이 기사의 “집에서 끌려 나와” 등등의 기술에서, 요시다 증언의 그림자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극히 최근의 예에서도 워싱턴 포스트 2014년 2월 12일자 ‘일본의 부정주의(Japan's denialism)’이라는 제목의 사설은 위안부는 “수천명이라고 하는 여성(대부분 조선인)을 노예화하고 군 기지로 수송하고, 성 행위를 강요한 일본 특유의 시스템(uniquely Japanese system)”이라고 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2009년 1월 8일자의 전후 한국에서 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기사는 한국인 창부의 “우리 정부는 미군의 일대 포주(Big Pimp)였다”라고 한 발언을 전하면서 “그녀들은 일본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면서 한국 자신의 역사는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 역대 한국 정부의 위선을 고발하고 있다”라고 하고 있지만, “여성들은 미국과 한국 당국에 의해 매춘을 강제당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와는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다. 

앞서 언급한 뉴욕타임스 1995년 9월 10일자 힉스 책의 서평 기사도 “여성을 강제 성매매시킨 군은 일본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잔학한 효율성에 대해 모델이 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they created a system that was a model of brutal efficiency)”고 분명히 일본 특수론의 입장에 선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도 앞에서 인용되었지만 워싱턴포스트 1992년 1월 18일자, ‘‘위안부’―야만 행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도, “이는 무관심한 혹은 부주의한 군 지휘부 아래에서 전시 중에 자행된 잔학 행위와 같은 종류가 결코 아니다”라고 하면서 특수한 일본군만의 조직 범죄로 여기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차별의 구조는 일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럽 미국 아시아 등 광범위한 근대 국가의 문제였다”, “국제 사회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인도주의적 ‘여성 인권 문제’의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다”라는 하야시 카오리 씨의 주장에는 아무런 자료적 근거도 없다. 반대로, 특수한 일본군만의 시스템으로 파악해 비판하는 기사가 압도적 다수라는 것이 자료적 현실이다. 

그의 이데올로기에 가까운 내용은 유일하게 로스앤젤레스타임스 1995년 12월 11일자 ‘인권의 시각-매춘은 지불된 강간’이라는 제목의 재니스 레이먼드(Janice Raymond) 매사추세츠대 교수(여성학 의학윤리)의 기고문뿐이었다. 

재니스 레이먼드 씨는, 동년 9월, 오키나와에서 미군이 일으킨 12세의 소녀 집단 폭행 사건에 관해, 리처드 매키(Richard Macke) 미 태평양군 사령관이 “렌터카 요금으로 여성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은 어리석다(stupid)”고 발언한 것을 보고,“매키의 발언은 병사들의 휴식과 레크리에이션을 위해 매춘을 관대하게 보고 장려해 온 군의 전통에 기인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재니스 레이먼드 씨도 미군이 장려하는 것은 ‘매춘’이지만, 일본군의 경우에 대해서는 ‘징용(conscription)’된 ‘성노예제(sexual slavery)’로서 ‘강간’으로 규정한다. 

다만 “문제는 강간과 성매매의 거리다. 전시에 있어서나 평시에 있어서도 그 거리는 크지 않다”, “돈 거래가 있었기 때문에” “사고 파는 강간”이 합의에 근거한 섹스로 바뀐다는 생각을 용서할 수 없다“라는 식의 주장이 계속되는데, 일본군 위안부는 명확한 강간이라는 인식은 일관되다. 

심지어 미국 신문에서는 1990년대 보스니아의 인종청소 과정에서 벌어진 조직적 강간과 일본군 위안소를 동일시하는 글마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타임스 1995년 12월 14일자 기사는 “수천 명의 여성이 전쟁 전술 및 보상으로의 강간에 바쳐졌다”, “보스니아라는 공포와 비극”과 동일한 차원의 것으로 일본의 위안소를 “조직화된 강간 시스템(organized system of rape)”이라고 규정하고, 여성들은 “매우 빈번히 즉결로 납치되었다(most often summarily abducted)”고 기술했다. 

구미는 하야시 씨가 말하는 어떤 고상한 “비판적 세계관”에 근거한 “시선”으로서 사실에 근거한 속에서 일본보다 더 깊은 의미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실을 오인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하야시 카오리 씨는 “일본의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사실 자체―즉 전시에 여성들이 강제 성매매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를 평가하고 있다기보다는 전후 일본이 어떻게 위안부 문제를 대면하고, 그 책임을 지고 있느냐 하는 현재의 자세를 문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도 했다. 

“강제적으로 성매매를 당했다는 사실”이 “사실 그 자체”라는 인식부터가 우선 이상하지만, 이 허구에 입각해 “그 책임을 지고 있는가”로 일본의 “현재 자세”를 문제 삼는다면 하야시 카오리 씨의 입지는 더욱 아사히와 같아질 것이다. 

‘접근법의 차이’라고 하는 픽션(「アプローチの違い」というフィクション)

앞서 본 대로, 그는 “아사히신문에 의한 요시다 증언의 보도 및 위안부 보도는 국제 사회에 대해서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한정적이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 하야시 카오리 씨의 의견은 정량분석에서 도출된 것은 아니다(그의 정량분석의 결론은 “지금은 알 수 없다”이다), “해외 전문가의 의견”의 무비판이고 자의적인 이용 및 자료적 현실에서 유리된 이데올로기 우선의 자세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야시 카오리 씨는 리포트의 앞에서 정량분석 의의를 강조하고, “특히 위안부 보도처럼 나라나 국제관계를 분단하는 격렬한 논쟁의 주제에서는 논자의 입장이나 상황에 좌우되는 주관적 체험, 실감, 의견에 기초한 논의를 하면 그것에 찬동, 공감하는가 어떤가로 논란에 대한 평가가 바뀌고, 향후의 저널리즘의 기본 방향에 대해서 하등의 공통 인식과 제언을 만들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 조사자는 그런 종류의 보도검증을 함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더 혼란시키는 것도 강하게 우려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야시 카오리씨 자신이 확실히 이 “염려”를 현실화 해 준 것 같다. 

2014년 12월 22일의 제3자위원회 기자회견장에서 위원 간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기타오카 위원, “일본의 어떤 문제를 비판하는 나라가 있고, 게다가 일본 국내 미디어가 비판적인 기사를 쓰면 제3국은 옳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야시 위원, “제 의견은 미디어론으로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의견의 차이, 방법론의 차이라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오카모토 위원, “국제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야시 선생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접근이 다른 것이군요. (하야시 씨가) 지극히 방대한 작업을 치밀하게 한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나와 기타오카 선생님은 감각적인 면이 있어서 구미에 갈 때마다 항상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질문에 노출됩니다.


오카모토 유키오 씨의 일견 솜씨 좋은 정리에는 반하여 하야시 카오리 씨의 의견은 정량적 “접근(어프로치)”을 “치밀하게 한 결과” 도출된 것이 아니다. 

‘미디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반의 데이터 분석뿐이고, 후반에는 그 이데올로기 과잉은 제쳐두더라도 자료적 현실과 관련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미디어론으로서 실격이다. 

또한 미국 의회에 위안부 결의안이 상정되던 시기에 보도된 워싱턴포스트 1997년 3월 18일자 기사(AP통신)는 아베 수상의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발언을 거론하는 중에 “최대 야당의 대표인 하토야마 유키오”의 “일본은 진실을 마주 대하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베는 본질을 드러내며 일본을 위험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하는 발언을 인용하고 있다. 

일본의 명예가 걸린 문제를 놓고 분별없는 정쟁으로 달려온 정치인들의 책임도 앞으로 검증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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