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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검증위원회] 일본 아사히신문 ‘위안부 보도’에 대한 검증보고서 (검증1)

‘강제연행’과 ‘성노예’라는 허위 날조로써 만들어진 정치적 프로파간다, ‘반일좌익’ 아사히신문 위안부 보도 (2/5)






제2부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를 검증한다
(第2部 朝日の慰安婦報道を検証する)


제1장 검증 동기는 자기변호
(第1章 検証動機は自己弁護)

-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집필 담당) -

고조되는 아사히 비판에 대한 위기감(高まる朝日批判への危機感)

우선, 왜 아사히가 위안부 보도에 대한 검증특집을 내보냈는지부터 살펴보자. 이 점에 대해서는 제3자위원회 보고가, 오보를 정정하여 일본의 명예를 지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고조되는 비판에 대한 위기감이 동기였다고 다음과 같이 내부조사 결과를 통해 적고 있다. 

정부의 고노담화 재검토가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경우에는 다시 아사히신문의 과거의 보도 태도도 문제로 제기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경영 간부를 포함하여 사내에서 강해졌다. 

또, 다른 언론사도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도 자세 등에 비판을 집중하고, 독자 중에도 이에 대해서 불신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고객 사무실 보고서에서도 위안부 보도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확산되고, 이것이 판매 부수와 광고에도 영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판매 및 홍보의 입장에서도 묵과할 수 없다는 의견이 높아지고 있었다.(‘제3자위원회 보고’ 29페이지)


아사히는 2014년 8월 5일자 1면에 ‘위안부 문제의 본질 직시를(慰安婦問題の本質直視を)’이라는 스기우라 노부유키(杉浦信之) 편집 담당 임원의 서명기사를 싣고 검증에 대한 기본자세를 밝혔다. 거기에서 스기우라 노부유키 씨는 검증을 실시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위안부 문제가 정치 문제화되는 가운데 아베 정권은 고노담화 작성 과정을 검증하고 보고서를 6월에 발표했습니다. 일부 논단, 인터넷에는 “위안부 문제는 아사히신문의 날조다”라는 이유 없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게다가 위안부 기사를 쓴 전 아사히신문 기자를 실명으로 비방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독자 여러분으로부터는 “사실인가”, “왜 반론하지 않는가” 하는 문의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보도를 돌아보며 오늘과 내일의 지면을 통해 특집을 내보냅니다. 독자에 대한 설명 책임을 다하는 것이 미래를 향한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는 첫걸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97년 3월에도 위안부 문제의 특집을 내보냈는데, 그 후의 연구 성과도 근거로 하면서 논점을 정리했습니다.(밑줄은 인용자. 이하  동일). 


밑줄을 그은 부분에서 아사히의 진심이 드러난다. 자신들은 이유 없는 비판, 불명예스러운 중상에 노출된 피해자라는 인식이다.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에 대한 비판이 지금 와서 아사히 독자 속에까지 침투되어 온 데 대한 위기감도 엿보인다. 



아사히를 지명하여 비판했던 요미우리(朝日を名指しで批判していた読売)

여기서 아사히는 속임수를 쓰고 있다.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를 비판하는 것은 “일부 논단, 인터넷”만이 아니다. 같은 전국 일간지인 산케이신문은 1997년부터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 비판을 반복하고 있다. 97년 1월부터 3월까지 산케이는 사설에서 반복하여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를 실명으로 비판했다. 요미우리신문도 2013년 5월, 실명으로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의 잘못을 비판했다. 동업 타사로부터 지명, 비판받는 영향은 컸을 것이다. 

요미우리의 아사히 비판을 소개한다. 회견에서 하시모토 토오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군의 규율을 유지하려면 위안부가 당시는 필요했다”라고 말한 것 등을 보도하는 기사와 함께 위안부 문제를 해설하는 기사를 5월 14일, 15일, 2일 연속으로 게재했다. 그 두 기사에서 아사히의 오보를 분명한 표현으로 지적한 것이다. 15일자 기사를 인용하자. 

[Q&A] 종군위안부 문제는 언론보도를 계기로 정치 문제화(従軍慰安婦問題とは 報道きっかけに政治問題化)

 Q 종군위안부 문제란?

 A 1992년 1월 아사히신문이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종군위안부의 모집을 감독, 통제하고 있었다”고 보도한 것을 계기로 정치 문제화했다. 특히 “주로 조선 여성을 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을 했다”고 사실관계를 잘못 보도한 부분이 있어 한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2013년 5월 15일). 


또한 요미우리는 1998년 논설위원 칼럼에서 “92년 1월, 일본 신문이 정신대 동원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이라고 하는 대대적인 역사 위조 보도를 했다(九二年一月、日本の新聞が、挺身隊動員は従軍慰安婦強制連行、とする大々的な歴史偽造報道をした)”고, 비록 아사히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치열한 비판을 하는 등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2013년 5월에 드디어 “아사히신문이. . . 사실관계를 잘못 보도했다(朝日新聞が…事実関係を誤って報じた)”라고 했다. 이것은 전에 없는 엄격한 동업 타사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상 요미우리의 아사히 비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스기우라 노부유키 씨의 기사는 그러한 비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사히가 과거에 위안부 문제로 잘못된 보도를 내보낸 것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같은 잘못을 다른 신문도 저질렀다고 변명하였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되기 시작했던 90년대 초에는 연구가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위안부 증언이나, 많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도한 기사의 일부에 사실관계상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전체상을 모르는 단계에서 일어난 실수이지만, 보강 취재가 불충분했던 점은 반성합니다. 비슷한 오류는 당시 국내 다른 언론이나 한국 언론 기사에도 있었습니다.


본 보고서 총론에서 검토했듯이 사실 오인이 다량 발생한 이유는 연구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아사히가 2차 대전까지의 일본군에 대해 매우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었던 점이 거기에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편향된 시각은 오사카 본사가 91년에 행한 연재기획으로 확산되고, 92년 1월 이후에는 도쿄 본사도 동조했다. 그 점은 제2부 제3장에서 상세히 논하였다. 

아사히의 역비판(朝日の逆批判)

그리고 아사히는 이후 태도를 크게 바꾸어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두고 “(이러한 비판은) ‘위안부 문제는 날조’라는 주장과 ‘옛 위안부에게 사과할 이유가 없다’라는 논의”, “피해자를 ‘매춘부’ 등으로 깎아내림으로써 자국의 명예를 지키려는 일부의 논조” 등으로 몰아붙이고서는, “보고 싶지 않은 과거를 외면하고 감정적 대립을 부추기는 내향(內向)의 언론”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비판에 나섰다. 

일부 부정확한 보도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를 혼란시켰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이유로 하여 이루어지는 “위안부 문제는 날조”라는 주장과 “옛 위안부에게 사과할 이유가 없다”라는 논의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를 ‘매춘부’ 등으로 깎아내림으로써 자국의 명예를 지키려는 일부 논조가 일한(日韓) 양국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하고 문제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지 않은 과거를 외면하고 감정 대립을 부추기는 내향의 언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을 우려합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위안부로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유린당한 것이 문제의 본질(慰安婦として自由を奪われ、女性としての尊厳を踏みにじられたことが問題の本質)”이라고 논점 바꿔치기를 한다. 이는 당초 아사히가 여자정신대 제도에 의해 위안부가 노예사냥을 당하듯이 강제연행이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에 어긋난다고 비판을 받은 뒤, 1997년경부터는 위안소에서의 비참한 생활을 겪은 경험이 문제라며 ‘광의의 강제’론을 꺼낸 것과 일맥상통하는 궤변이다. 독자가 신문에 요구하는 것은 본질론 설교가 아니라 사실을 바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사히는 사실관계의 잘못을 논의하는 비판자가 문제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며 입장을 바꾼다. 



총론에서도 언급했으나 놓칠 수 없는 것은 스기우라 노부유키의 기사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스니아 내전에서의 민병대에 의한 강간사건(ボスニア紛争での民兵による強姦事)”과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위안부 제도는 병사들의 강간사건을 막기 위해서 당시 합법이었던 공창 제도가 전쟁터로 옮겨간 것이며, 인종 청소를 외치면서 벌어진 보스니아에서의 강간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을 이렇게 같은 맥락에서 논하다니, 아사히는 어디까지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것인가. 

전시 중 일본군 병사들의 성(性) 상대를 강요당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위안부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유린당한 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민병대에 의한 강간사건이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전쟁 당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지금 국제적으로 여성 인권 문제라는 맥락에서 파악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이런 현대적인 주제에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사히는 검증특집을 게재한 것과 동시에 주간지 등에 의한 아사히 비판에 대해 항의하기 시작했다. 검증특집 1일차가 게재된 8월 5일에는 같은 날 발매된 사진 주간지 ‘FLASH’ 8월 19일·26일호에 대해, 또 검증특집 게재 2일차인 6일에는 역시 같은 날 발매된 ‘슈칸분슌(週刊文春)’ 8월 14일·21일 호에 대해 항의했다. 아사히는 이들 매체가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의 위안부 보도를 “근거 없이 조작으로 몰아붙이고 아사히신문사의 명예와 신용을 현저히 훼손하였다”고 주장하였고, 또 편집부에 사과와 정정기사 게재를 요구하는 문서를 발송하여 “아사히신문 보도를 근거 없이 ‘조작’으로 몰아붙여 명예와 신용을 현저히 훼손했다”고 항의하였다. 이어 이 소식을 지면에 기사로 보도했다. 그 기사 중에서 자사 홍보부의 “5일자 아사히신문의 특집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상(慰安婦問題を考える:上)’에서 보도한 바와 같이 위안부 문제를 보도하는 기사에서 아사히신문 기자의 조작은 없습니다”라는 틀에 박힌 같은 코멘트를 이틀 연속 보도했다. 

이로써 알게 되는 사실은, “이유 없는 비판”을 받고 있는 자사와 우에무라 기자가 피해자라는 아사히의 뻔뻔한 자세가 전면에 나타난다는 게 바로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 검증특집이었다는 것이다.


제2장 1992년 1월 11일·12일을 정점으로 하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
(第2章 1992 年 1 月 11 日・12 日をピークとする「強制連行プロパガンダ」)

-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집필 담당) -

무책임한 ‘강제연행’, ‘군(軍) 관여자료’ 보도 검증(無責任な強制連行、「軍関与資料」報道検証)

그렇다면 아사히의 검증 동기에 대한 검토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검증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아사히의 자사 기사 검증은 헤드라인 ‘위안부 문제 어떻게 전했는가(慰安婦問題どう伝えたか)’ ‘독자의 의문에 답하겠습니다(読者の疑問に答えます)’의 아래에 △ ‘강제연행(強制連行)’, △ ‘‘제주도에서 연행’이라는 증언(『済州島で連行』証言)’, △ ‘군 개입을 나타내는 자료(軍関与示す資料)’, △ ‘‘정신대’와의 혼동(『挺身隊』との混同)’, △ ‘위안부 최초의 증언(元慰安婦 初の証言)’이라는 5가지 항목으로 제시되었다. 5개의 항목 모두에서 아사히가 작문(作文)을 했다는 의문이 먼저 제시되고, 검증이 이어지며,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에게(読者のみなさまへ)’라는 제목으로 그 항목의 결론을 내려 끝맺는다. 자사의 보도를 반성하고 검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자의 의문에 답한다는 피해자 의식에서의 적반하장이 이러한 형식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에 열거된 5개 항목은 모두 1992년 1월 이전에 아사히가 보도한 내용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들 항목의 보도를 통해서 아사히는 1992년 1월에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다수의 조선 여성을 강제연행하고 위안부로 삼았다”는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완성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강제연행에 관한 아사히의 검증은 아래와 같이 자기변호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정부는 군대나 경찰 등이 납치하듯이 끌고 가서 강제로 위안부로 삼는,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입증하는 자료는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제연행은 없었습니까?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 대만에서는 일본군의 의향을 받은 업체가 “좋은 일이 있다” 등으로 속여서 많은 여성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 등이 조직적으로 유괴범처럼 연행한 자료는 못 찾았습니다. 한편, 인도네시아 등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던 지역에서는 군이 현지 여성을 강제로 연행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공통하는 것은 여성들이 본인의 뜻에 반하여 위안부가 되는 강제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완성한 92년 1월 11일의 ‘군 관여 나타내는 자료’ 보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검증했다. 

아사히신문이 1992년 1월 11일 조간 1면에 보도한 ‘위안소 군 개입 나타내는 자료(慰安所 軍関与示す資料)’라는 기사에 대해서 위안부 문제를 정치 문제화하기 위해서,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 총리가 방한하기 직전의 타이밍을 노린 “의도적인 보도”라는 등의 지적이 있습니다.

기사는 기자가 구체적인 정보를 안 지 5일 후에 게재되었고,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 시기를 노린 것은 아닙니다. 정부는 보도 전부터 자료의 존재를 보고받고 있었습니다. 한국 측에서는 91년 12월 이후 위안부 문제가 총리가 방한할 때 현안화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알려지면서 정부는 검토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아사히가 1991년부터 92년 1월에 걸쳐 대 캠페인을 벌여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내외에 강력하게 발신한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91년 1월 11일·12일 보도가 조성한 허위(91 年 1 月 11 日・12 日報道が造成した虚偽)

본 보고서 제3장에서 밝힌 대로 아사히는 1991년, 오사카 본사가 중심이 되어 위안부 문제의 캠페인을 벌였다. 그 가운데 요시다 세이지 증언을 사실로 강조하면서,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한 공적 제도인 여자정신대가 조선에서는 위안부 동원에 이용되었다고 말하는 사실 오인을 반복하고, 91년 8월에 이름을 내걸고 나선 옛 위안부도 여자정신대로 끌려갔다고 경력을 위조하는 등 여러 사실을 오인했다. 그리고 92년 1월 11일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방한 직전에 군 관련 자료 발견으로 크게 보도했고, 거기서도 용어해설에서 위안부는 여자정신대로 끌려갔다고 후술하는 것처럼 사실을 오인했다. 



원래 크게 보도됐던 자료는 육군성 부관 이름으로 1938년에 파견군에게 나온 통달로서, 조선이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 업자가 유괴와 똑같은 일을 하거나 “군부의 이해가 있다”고 하면서 군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경찰에 조사를 받은 등의 일이 있었고, 따라서 업자를 뽑을 때 헌병이나 경찰과 연락을 긴밀히 하여 군의 위신을 지키도록 요구한 것이다. 즉, 유괴에 가까운 모집을 중지시키려는 관여이므로, 강제연행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선의의 관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기사 속에 용어해설을 붙여 아래와 같은 강제연행 선전물을 썼다.

1930년대 중국에서 일본군 병사에 의한 강간 사건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반일감정과 성병을 막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했다. 전직 군인이나 군의관 등의 증언에 의하면, 개설 당초부터 약 80%가 조선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서 주로 조선인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연행을 했다. 그 인원은 8만이라고도 하고 20만이라고도 한다.


이 용어해설 위에는 ‘군 관여가 명백하다 사죄와 보상을(軍関与は明白 謝罪と補償を)’이라는 제목 아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中央)대학 교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거기에서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위안부가 증언을 하고 있는 현 단계에서 ‘관여’를 부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일한(日韓)협정으로 보상청구권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보상과 개인 대 국가의 보상은 다르다. 위안부에 대해서는 사과는 물론 보상을 해야 한다.


고 말하고 이 자료가 위안부 증언을 뒷받침하는 것인 것처럼 주장했다. 

다음 12일에는 사설에서 “정신대의 이름으로 권유 혹은 강제연행되. . . 었다고 하는 조선인 위안부(「挺身隊(ていしんたい)」の名で勧誘または強制連行され、…たといわれる朝鮮人慰安婦)”라고 썼다. 사설에서 위안부에 대해서 ‘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이 됐다’는 사실 오인을 전개한 것은 아사히뿐이다. 1월 12일자 사설 ‘역사에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歴史から目をそむけまい)’의 첫 부분을 인용한다. 

일중전쟁과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 군인을 대상으로 매춘행위를 하도록 강요된 조선 여성 등 이른바 ‘위안부’에 대해서, 군 당국이 모집을 감독하거나 위안소 설치 등에 관여했음을 뒷받침하는 공문서류가 발견됐다.
 
‘정신대’의 이름으로 권유 혹은 강제연행이 되어 중국으로부터 아시아 태평양의 각지에서 병사 등을 상대하게 되었다고 하는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정부는 그동안 “민간업체가 데리고 다닌 것 같다” 등으로 군과 정부의 관여를 부정하는 자세를 취하여 왔다. 그러나 이런 시설이 일본군의 시책 아래 설치되었다는 것은 말하자면 주지의 사실로 이번 자료도 그런 의미에서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경험은 누구든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특이한 상황 아래에서라도, 식민지 지배 하의 조선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빌려와 남자에게는 노무와 병역을, 여성에게는 병사의 위안을, 이러한 역할을 강요한 것은 겨우 반세기 전의 우리나라였다. 이 사실의 무게는 우리가 계속 져야 한다. 역사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11일자 기사, 용어해설, 요시미 요시아키 이야기 그리고 12일자 사설을 읽으면, 독자들은 요시다 세이지가 말한 강제연행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견됐다는 인상을 갖도록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가해자로서 요시다의 증언, 피해자로서의 김학순 증언, 이를 뒷받침할 공문서, 이렇게 3종의 세트가 모두 ‘여자정신대로 위안부 강제연행’을 증명한다는 허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바로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내외에 퍼뜨린 것이 1991년부터 1992년 1월 사이의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로서, 그 정점이 11일자 기사와 12일자 사설이었다. 

일본의 다른 신문을 리드한 아사히(日本の他紙をリードした朝日)

아사히는 다른 신문도 당시에는 같은 오보를 내고 있었다고 변명하지만, 보도 시기의 앞섬과 보도량에서 당시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는 타 신문을 압도했다. 아사히는 타 신문에 앞서 1982년에 요시다 세이지 씨를 크게 다루었다. 요시다 씨가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한 단행본을 낸 것은 1983년인데, 그 1년 전에 이미 ‘조선의 여성 나도 연행, 전직 동원부장이 증언(朝鮮の女性 私も連行、元動員部長が証言)’이라는 큰 제목으로 다룬 것이다. 정확히 요시다 씨의 위안부 사냥 증언은 아사히가 세상에 내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기사에서 요시다 씨가 오사카에서 열린 집회에서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위안부 사냥을 했다고 말했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여자정신대로 강제연행’이라는 아사히가 벌이는 허위 캠페인의 골자가 마련돼 있었다. 

요시다 씨는 “체험한 것만 이야기하겠습니다”라며 말을 꺼냈다. “조선인 위안부를 황군 위문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내보냈습니다. 당시 우리는 ‘징용’이라 하지 않고 ‘몰이’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총론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아사히의 기사가 데이터베이스화 되는 것은 1984년 8월 4일부터지만, 그 이전에 요시다 관계기사만 봐도 1982년 1개, 1983년 3개의 위안부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nifty비즈니스’ 신문·잡지 기사 횡단 검색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위안부”로 검색하여 나오는 기사 수를 정리하면 각 신문의 위안부 보도는 표 1과 같다. 

표1 위안부 보도의 양적 변천(1985~1993)


주: “-” 표시는 그해 기사의 데이터베이스가 없는 것을 나타낸다. “아사히%”는 전체 중에서 아사히 기사의 비율. 산케이는 93년부터 기사 데이터베이스가 있기 때문에 93년의 아사히%도 산케이를 제외하고 구한 비율.

표2 1991년의 위안부 보도

 
이를 보면 91년에 아사히가 150개의 기사를 내놓으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92년부터 각 사가 아사히를 뒤쫓듯이 한꺼번에 많은 위안부 보도를 내기 시작한 양적인 흐름이 잘 나타난다. 

아사히 오사카 본사가 진원지(朝日大阪本社が震源地)

아사히의 91년 150개의 기사 가운데, 오사카 본사(간사이 지방판을 포함한다)가 60개였다. 이는 같은 해 아사히 기사의 40%, 중앙일간지 등 전체의 25%를 차지한다. 오사카 본사에는 외신부나 정치부는 없다. 그런데도 위안부 보도를 이렇게 많이 한 것을 보면 의도적인 캠페인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60개 중 절반이 넘는 35개는 오사카 본사가 기획한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기사였다. 

아사히신문 중에서도 위안부 운동을 주도한 것은 오사카 본사였다. 1991년 오사카 본사는 아사히방송과 손잡고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이라는 대형의 기획을 했다. 전쟁을 겪은 여성들로부터 수기를 받아 연일 이를 게재했다. 그 기획의 책임자가, 오사카 본사 기획보도실장 기타바타케 키요야스(北畠清泰) 씨였다. 기타바타케 키오야스 씨는 이 기획이 끝난 직후 논설위원이 되어 후술하는대로 요시다 세이지 씨를 극찬하는 칼럼과 요시다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들을 꾸짖는 칼럼을 써서 그 2개 모두 취소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 

기타바타케 논설위원의 전직 군인에 대한 편견(北畠論説委員の元軍人への偏見)

그는 일본인이면서도 일본군인들을 증오하고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을 포함한 이른바 피해자들의 증언을 무조건 믿고 일본 공격을 감행했다. 반일 일본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91년 12월 31일 이 기획 마지막 회에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자신과 아사히 오사카 본사의 매우 편향된 인식을 드러냈다. 총론에서 생략한 부분을 포함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을 인용한다.
 
종전으로부터 46년, 평화주의를 내건 현 헌법 실시로부터 44년이 지난 현재, 옛 군인의 어조로 전쟁체험을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대전쟁(大戰) 당시의 비정상성을 남몰래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이 이 사회의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지 않은가. 

일반 사회의 계층 질서는 통하지 않는 군대였기에 남을 거리낌 없이 구타할 수 있었던 자. 평시의 윤리가 무시되는 전시였기에 여성의 성을 유린할 수 있었던 자. 통상적인 권리가 무시되는 비상시일수록 잘 처신해 포식의 특권을 얻은 자. 

그런 이들이 있고 그들은 전시에 대해 향수를 느끼며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사람들에 의한 침묵의 깊은 어둠이 이 일본사회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기타바타케 씨는 이런 이상한 반일 감정의 주인이므로 요시다 세이지 증언과 위안부에 관한 우에무라 다카시의 기사 등 조작 기사를 그 기획에서 크게 보도한 것이다. 또 아기를 안은 어머니를 연행해 강간했다는 황당한 요시다 증언을 사실로 믿었던 것이다.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씨 등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전 군인들은 요시다 세이지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것을 남몰래 그리워하며 침묵하고 있는 극단적인 악인이다.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씨는 요시다 증언을 포함한 이 기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화자찬하며 전 군인들을 깎아내렸다.
 
어느 나라든 국가권력은 국민이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나 충성심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걸핏하면 자국 역사를 장식하려 한다. 하지만, 여성에게 있어서, 그런 기대는 원래 무용한 것이다. 거짓에 입각한 조국애보다는 심각한 반성을 수반하는 진실의 역사야말로 미래의 평화를 보장한다고 압도적인 다수의 여성들은 믿고 있다. 

4천 통의 수기는 깊은 침묵의 어둠을 밝히는 4천 개의 횃불이다. 정치가, 외교관, 군인들이 쓴 비록, 비사, 전기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태평양전쟁의 실상을 밝혔다.(중략)

이제부터는 겨우 완성된 역사책을 매일 유용하게 쓰는 것, 횃불이 다 타지 않도록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억압, 왜곡, 망각, 착오, 침묵의 어둠을 사실의 불빛으로 계속 비추는 것이 중요하다.


아사히는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씨 등이 보도한 요시다 증언 등에 대해 허위라고 인정했다.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씨 등은 허위에 입각한 조국 증오를 부추겨 전직 군인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할 수 있다. 

아사히가 한국을 자극(朝日が韓国を刺激)

아사히가 만들어 낸 ‘위안부 강제연행’이라는 허구가 한국을 자극하고, 실은 12세의 소녀가 근로 동원이 됐다는 사실을 두고 “12살짜리 소녀를 위안부로 강제연행을 했다”고 하는 식 큰 오보를 한국 언론이 내기에(92년 1월 15일) 이른다. 이때 한국에서 퍼진 사실무근의 강제연행 이미지가 한국과 일본의 운동단체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용되면서, 이는 아직도 불식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일본통치시대를 아는 세대가 사회의 주류에서 사라진 지금, 한국에서는 아사히가 1992년 1월 만들어 낸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 이미지가 완전히 정착돼 버렸다. 


자기정당화하는 아사히(自己正当化する朝日)

아사히는 2014년 8월에 행한 검증특집에서 자사의 보도가 일부 잘못이 있던 것은 인정했지만, 그 이유로 당시에 연구가 지연되고 증언자가 거짓을 말했던 것을 들면서, 문제의 본질은 “위안부로서 자유를 빼앗기고 여성으로서의 존엄이 짓밟힌 것”이기 때문에, 자사의 보도는 기본적으로는 옳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제3자위원회는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1997년 시점에서 아사히는 ‘논의 바꿔치기’를 실시했던 것이라고 엄중하게 지적했다. 

일본군 등이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여 강제연행하였다는 이른바 ‘협의의 강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작성된 기사를 정정 또는 취소했어야 하며, 필요한 사죄도 있었어야 했다. 1997년 특집에서 정정·취소를 하지 않고 사죄도 하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었다.(보고서 25페이지) 


80년대 이후 92년에 요시다 증언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까지 앞에 쓴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협의의 강제성’을 대대적으로 솔선수범해 보도해 온 것이 아사히신문이다. 1997년의 특집 지면이 ‘협의의 강제성’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온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강제성’에 대해 ‘협의의 강제성’으로 한정하는 사고를 남의 일처럼 비판하고, 고노담화에 의거하여 ‘광의의 강제성’의 존재를 강조하는 논조는, 나중에 비판도 있었듯이, ‘논의 바꿔치기’다. (동상(同上) 25~26페이지)


그러나 제3자위원회 보고를 받고 이뤄진 와타나베 마사타카(渡邊雅隆)  사장의 회견에서는 기자들이 아사히의 ‘논의 바꿔치기’가 있었다고 인정하느냐고 거듭 질문했지만, “바꿔치기라는 비판은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라고 반복했을 뿐 명확한 대답은 피했다. 제3자위원회 보고도 ‘논의의 바꿔치기’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2014년에도 ‘논의 바꿔치기’(2014 年にも「議論のすりかえ」)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사히는 2014년 8월 5일 검증특집에서 1면에 스기우라 노부유키 편집담당 임원의 서명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 직시를’이었다. 다시 본질론을 꺼낸 ‘논의 바꿔치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전시 중 일본군 병사들의 성 상대를 강요당한 여성이 있었던 사실을 지울 수 없습니다. 위안부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유린당한 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라고.

독자가 신문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본질론이 아니라 사실을 바로 전달하는 일이다. 그런데 아사히는, 사실관계의 잘못을 논의하는 비판자가 문제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고 입장을 바꾼다. 

그리고 제3자위원회는, 이 스기우라 노부유키 기사에 대한 평가에서는 ‘논의 바꿔치기’라는 비판을 일절 하고 있지 않다. 스기우라 기사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사히신문의 진정성’이었지만, 그 논리 구성이 부족하여 비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스기우라 기사를 일정하게 평가했다. 본 보고서 제3부에서 자세히 살펴보는 바와 같이, 제3자위원회 보고는 아사히 보도가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을 지극히 한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 결과, 국제사회가 아직도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믿고 있는 상황으로, 일본과 선인들의 명예가 계속해서 훼손되고 있음을 경시한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국제 오해에 대해서 사실을 파고들어 반박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오히려 역효과라고 공격했다. 아사히에 대해서는 너무나 안이한 검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총론에서도 지적했듯이 문제의 진짜 본질은 아사히와 제3자위원회가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의 악영향과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제3장 아사히 오사카 본사의 편향된 역사인식
(第3章 朝日大阪本社の偏った歴史認識)

- 카츠오카 칸지(勝岡寛次) (집필 담당) -

아사히신문 오사카 본사와 ‘속죄사관’의 토양(朝日新聞大阪本社と「贖罪史観」の土壌)

제 2장에서 본 것처럼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는 아사히 오사카 본사가 주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오사카 본사는 매우 편향된 역사 인식을 갖고 위안부 캠페인을 벌였다. 여기에서는, 오사카 본사가 91년, 거의 1년간 게재한 대형 특집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의 역사관을 분석하고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당시 연구의 지연에서 빚어진 착오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아사히가 취소한 요시다 증언 기사 18편 중 5편은 오사카 본사의 기사다. 위안부 강제연행이 큰 사회 문제가 된 90년대 초두의 3개의 기사는 모두 오사카 본사의 것이다. 또 제3자위원회 보고서는, “그것은 원래 오사카 사회부가 하고 있던 일”, “오사카 사회부의 기사를 도쿄 사회부가 취소한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28 페이지)고 하는 인식이 당시의 아사히신문 사내에 뿌리 깊게 있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보고서는, 이 점에 대해 깊이 있는 검증을 하지 않고 있지만, 현역 아사히신문 기자 유지(有志, 지식인들)에 의한, 다음과 같은 지적도 있다. 

특히 오사카 본사에 배속된 신인은, 그 독자적인 문화에 놀라게 된다. 오사카 본사는 도쿄 본사에 대한 대항의식 때문인지, …오사카는 오사카에서 독자적인 지면을 만드는 것이, 메이지 시대에 아사히가 창간된 토지인 오사카의 프라이드와 연결되어 있었다.(아사히신문 기자 유지(有志), ‘아사히신문 일본식 조직의 붕괴(『朝日新聞 日本型組織の崩壊)’, 분슌신쇼(文春新書), 2015년, 27페이지)


아사히가 (위안부에 관한 오보) 정정, 수정을 하지 않은 이유의 하나로서, 82년에 요시다 증언이 처음 소개된 것이 오사카 본사판이라는 사실이 적잖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중략) 도쿄 본사의 1면 톱 기사가 반드시 오사카의 톱이 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오사카는 자기 소재를 우선한다. (중략) 좋게 말하면 사양하는 마음이 있고, 나쁘게 말하면 “오사카의 일은 오사카에서 처리하자”는 분위기인 것이다.(동상(同上) 150~151쪽)


아사히에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 및 세이부(기타큐슈)의 4개 본사가 있고, 편집권은 각 본사에 있다. 그중에서도 오사카 본사는 아사히의 발상지이기도 해서 전통적으로 “자신의 기사거리를 우선으로 한다”, “독자적인 문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기사거리”, “독자적인 문화”란 무엇인가. 

 
독립검증위원회가 청취조사에서 복수의 기자로부터 청취한 바에 따르면, 오사카 본사에는 정치부도 경제부도 없고 사회부가 조직의 주체가 되어 있지만 기사 작성의 메인은 ‘여름의 고시엔(甲子園)’, ‘원폭 문제’, 여기에다가 ‘재일조선인 문제’라는 세 가지라고 한다. 전국적인 기사거리가 적다 보니 이들은 늘 욕구불만 상태에 있고, 가까스로 전국적인 소재가 되는 재일한국·조선인 문제가 기사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재일동포는 전국의 절반 이상이 오사카에 몰려 있고, 오사카 본사 사회부에는 재일동포 문제 기사를 담당하는 부서가 옛날부터 있다고 한다. 당시 오사카 본사 사회부 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 씨는, 자신이 “오사카 사회부에서는 재일한국·조선인 문제를 담당하는 ‘민족 담당’이었다”고 증언하여(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위안부 문제 ‘날조 기자’라고 불리고서(慰安婦問題『捏造記者』と呼ばれて)’, ‘분게이슌주(文芸春秋)’ 2015년 1월호), 이것이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독립검증위원회에 의한 청취조사에 의해 이하와 같은 것도 알 수 있었다. 재일코리안들은 일본인들을 교육시켜 주려고 하는 강한 마음이 늘 있어서 기자에게 호통을 치기도 한다. 이러한 ‘교육’에 의해 오사카 본사 사회부 기자는 ‘과잉된 속죄의식’, ‘속죄사관’을 항상 갖는 구조가 되어 있다. 과잉 속죄의식을 토대로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를 주도한 것은 그러한 오사카 사회부 출신의 기자들이다.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등도 모두 그렇다고 한다. 이번 아사히의 오보의 배경에는, 그러한 오사카 본사 특유의 구조에 뿌리내린 문제가 있다. 오사카 본사 사회부 기자에게는 일본과 한국에 대한 역사관·역사인식에 과잉 속죄의식이 있으며, 이는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아사히신문 자체가 갖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NHK 기자 이케다 노부오(池田信夫) 씨도, “오사카에는 재일(在日)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동정하는 기사를 쓰는 것이 세일즈의 무기가 되었다”, “아사히는 전통적으로 사론(社論)을 통일하는 ‘민주 집중제’로, 사론에 따른 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니면 출세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군을 악인으로 삼아 ‘여성의 인권’을 외치는 기사를 양산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 아시아에 대한 일본군의 범죄를 영원히 사죄해야 한다는 속죄사관은 가해자였던 아사히신문을 면죄시키는는 데도 중요했다” 등과 같이 쓰고 있다.(이케다 노부오(池田信夫), ‘아사히신문 세기의 대오보(朝日新聞 世紀の大誤報)’, 아스펙트(アスペクト), 2014년, 128, 130쪽)

한편, 아사히신문 기자 유지에 의한 전게서(前掲書)는, 이번 오보의 원인은 ‘좌익적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하다며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사를 내부로부터 관찰해본 결과, ‘반일’ ‘좌익’이라는 우파 진영의 판에 박힌 비판은, 완전히 빗나갔다고 우리는 느끼고 있다. (중략) 회사 전체적으로 보면 개개의 기자 레벨에서는 개헌이나 증세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이미 다수파이다. 회사를 총괄하는 국장급조차 그 치쿠시 테츠야(筑紫哲也)에게 ‘신인류’라고 야유를 받는 논폴리세대(정치무관심세대)가 차지하고 있다. 즉, 아사히의 불상사 원인이 좌익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조건반사적으로 비난하는 우파 미디어나 보수 지식인들의 논조는 전혀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본질은 기업구조 자체에 있다고 본다. 경직된 관료주의, 기자들의 비대한 자존심과 자기보신의 경쟁, 엘리트주의, 감점주의 인사평가 시스템, 계파의 암투, 무오류신화, 상의하달의 일상화. (중략)

아사히의 전통적인 논조 자체에도 물론 문제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십년을 하루같이 이번 스캔들도 그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이념과 무관한 취재현장에 서 있는 압도적 다수의 현역 기자들에게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논평일 뿐이다. 극단적인 이야기, 아사히신문이 그 속에 잔존하는 좌파·리버럴 기자를 한 명도 빠짐없이 배제한 마당에, 지금과 같은 기업구조가 있는 한, 이러한 문제는 반드시 반복될 것이다(앞에서 서술한 ‘아사히신문 세기의 대오보’, 7~8쪽)


한쪽은 ‘과잉된 속죄의식’, ‘속죄사관’이 이번 오보 사건의 배경이라고 하고, 한쪽은 문제의 본질은 아사히의 '기업구조' 자체에 있고 ‘좌익적 이데올로기’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과연 어느 쪽이 올바른 것일까.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오사카 본사가 깊게 관련된 91년의 기획 기사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을 검토하도록 한다. 

오사카 본사가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에서 노린 것(大阪本社が「女たちの太平洋戦争」で狙ったもの)

요시다 증언을 취급한 기사 중, 이노우에 히로마사(井上裕雅) 기자가 집필한 91년의 2개의 기사(5월 22일·10월 10일)와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가 김학순의 경력을 왜곡한 91년 12월 25일자의 기사는 모두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이라는 오사카 본사에 의한 캠페인(기획 기사)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여자들의 태평양전쟁(女たちの太平洋戦争)’이라고 하는 기획은 무엇을 노렸는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문제로 삼고 싶다. 



이 기획은 태평양전쟁 발발 반세기가 되는 해(1991년)를 기해서, 전쟁 중 15세 전후였던 여성들로부터 전쟁체험 수기를 모집한 것이다. “전쟁에 좋든 싫든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 특히 여자나 아이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듣고 “그 성과는 신문사와 방송국이 각각의 미디어를 통해서 독자, 시청자에게 전한다”는 취지였는데, 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의 ‘후기’에 의하면, ‘기획의 안목’은 역시 하나였다. 

응모 대상을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 교전국인 미국, 나아가 유럽 각국으로도 넓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화(戰禍)를 입은 피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과 함께 타국을 침략한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이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여자들의 태평양전쟁(女たちの太平洋戦争)’ ①, 아사히신문사, 1991년, 219쪽) 


이처럼 “피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과는 별도로 “타국을 침략한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 해외로부터도 투고를 받거나 기자를 파견하여 증언을 모았다는 것이 본 기획의 큰 특색이었다. 

또 이 책의 머리말에 따르면 일본의 여자들이 전쟁의 피해자였던 것은 일면의 사실이지만, 그녀들도 군국주의의 군화에 짓밟힌 아시아 여러 나라 여자들의 시점에서 보면 결국 침략국의 소국민(少國民)에 불과했다(동상(同上) 위 1쪽). 

즉,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은 ‘전쟁의 피해자’로서의 일본의 ‘여자들’의 기록을 모으는 데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그녀들도 결국은 “침략국의 소국민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타국을 침략한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밝히는 데에 그 진정한 목적, 진정으로 노리는 바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타국을 침략한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분명히 하기 위한 방도로 채택된 것이 해외, 특히 중국과 한국으로의 기자 파견이었다.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중 중국 기사는 단행본 전체(‘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①~③)의 82쪽(전체의 1/10)을, 한국 기사는 88쪽을 차지하며, 양자가 전체의 5분의 1 정도의 분량을 차지한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후기’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어서 주목된다. 

특파원들로부터의 정보를 실마리로 하고 오사카 아사히에서 몇 사람이 해외취재에 나섰다. 니시가키도 마사루(西垣戸勝) 편집위원은 91년 4월, 충칭, 난징, 베이징, 다롄, 하얼빈 등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이전에 ‘대학살’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난징, ‘세균 부대’가 실재했다고 여겨지는 도시에서, 늙은 남녀로부터 귀를 닫고 싶은 체험담을 자세하게 들었다. /(중략) 니시가키도 기자는 취재 여행이, “일본인으로서 속죄의 행동과 같았다”라고 한다. 동 기자뿐 아니라 아시아, 구미로 출장을 가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취재한 기자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동상, 220~221쪽)


“속죄의 행동 같았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타국을 침략한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이라는 아사히의 보도자세, 즉 앞에서 서술한 ‘과잉된 속죄의식’, ‘속죄사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위 책은 ‘후기’에서는, 중국에서의 청취조사에 대한 독자의 반향을 다음과 같이 집약하고 있다. 

이 책의 중심적인 테마의 하나가 된 니시가키도 마사루 편집위원의 중국에서의 청취조사에 대한 반향은 크게 나누어 두 개의 의견으로 집약되었다. / “언제까지 과거의 부(負)의 유산을 고집할 것인가. 서로 전화(戰火)를 주고받다 보면 쌍방에게 피해가 날 수밖에 없다. 일방적으로 일본군만을 악으로 모는 것은 너무 자학적이며 국민의 자긍심을 잃게 하는 것이다.” / “일본 국민은 피해자였던 동시에 침략한 곳이나 식민지지배한 나라에 대해서는 가해자였다. 사실을 직시하고 그 반성 위에서 앞으로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 않는 한 평화는 달성될 수 없다.” / 두 의견은 어쩌면 현대 우리의 역사인식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양 열강의 식민지지배로부터의 아시아의 해방에 일본은 공헌했다”는 입장과 “잘못은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②, 271쪽)


아사히가 후자의 위치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같은 책에 의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만, ‘함께 이야기하는 페이지(語り合うページ)’(오사카 본사판)에는 200통에 이르는 투고가 있었다”고 하지만, 아사히는 공평하게 양자를 소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독자로부터의 반향으로서, 같은 책에 게재된 투고는 27통인데, 전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은, 그중에서 5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두 개의 입장의 차이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투서를, 1통씩 소개해 두고 싶다. 

일방적으로, 일본군만을 ‘악’으로 하는 편집 태도는 이상한 것이 아닌가. / (중략) 당신들은 재미 삼아 일본군의 어두운 부분만 들춰내고 있지만, 삶에의 집착을 끊지 못하면서 명령이기 때문에 중국 대륙에서, 남방에서, 흩어져 간 수백만 무명 전사의 죽음-즉 우리 아버지나 형의 심정을 헤아려 주었던 적이 있는 것인가. / 바로 그 조상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의 번영이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심각한 자학취미의 보도를 볼 때마다, 내 형의 전사는 무엇이었는지, 눈물이 차오르는 요즘이다.(‘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②, 이토 고이치(伊藤高一), ‘너무 심각한 자학취미-쌍방의 시민에게 피해(余りに自虐趣味──双方の市民に被害)’, 197~198쪽)


과거 일본에 침략당한 국가들의 목소리에 눌려 ‘피해만 강조해도 되는 것인가’라는 반성이 생기면서 가해의 진상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다. / (중략) 전시 동안 사람들은 ‘정의의 전쟁’, ‘천황은 신’이라고 믿도록 강요당하여 전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는 붙잡혔고, 때로는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태로 몰아넣었고, 그 속에서 300만 명의 일본인의 ‘죽음’과 2000만 명의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죽음’이 초래되었다. / 이 역사의 발굴이 어째서 ‘자학 취미’ 같은 것일까. (동상, 199~200쪽)


요시다 증언이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에서 한 역할(吉田証言が「女たちの太平洋戦争」の中で担った役割)

1년도 안된 기간에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에 게재된 투고와 기사는 250여 편이나 되는데(신문 게재기간 91년 2월15일~12월 31일),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은 나중에 단행본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①~③ (아사히신문사, 1992년)으로 정리됐고, 그 후 재편집된 2권의 문고본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①, ②(아사히문고, 1996~1997년)로도 나왔다. 

연재의 최종회(12월 31일자)를 담당한 것은, 이 기획의 책임자였던 오사카 본사 기획보도실장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씨다. 제2장에서도 인용했지만,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씨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국가권력은 국민이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나 충성심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걸핏하면 자국 역사를 장식하려 한다. 하지만, 여성에게 있어서, 그런 기대는 원래 무용한 것이다. 거짓에 입각한 조국애보다는 심각한 반성을 수반하는 진실의 역사야말로 미래의 평화를 보장한다고 압도적인 다수의 여성들은 믿고 있다.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③, ‘후기’, 문고판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②)


“심각한 반성을 수반하는 진실의 역사야말로 미래의 평화를 보장한다고 압도적 다수의 여성은 믿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기타바타케 씨는 이렇게 단언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여기에서는 “압도적인 다수의 여성”이 믿고 있다는 “심각한 반성을 수반하는 진실의 역사”와 “국가권력”에 의한 “거짓에 입각한 조국애”가 마치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처럼 대치되고 있다. 전자야 말로 진실이고, 후자는 거짓으로 정해져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것이 선험적으로(a priori),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여기에는 ‘국가권력=악’이라는 선입견과 믿음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것을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에서 요시다 세이지 증언을 채택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시다 증언은 여성들의 태평양전쟁에서 두 차례 거론된다. 첫 회의 소제목은 ‘가해자 측 증언(加害者側の証言)’(1991년 5월 22일자), 두 번째 제목은 ‘가해자 측으로부터 재차의 증언(加害者側から再び証言)’(1991년 10월 10일자)이다. 이런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이 아사히는 다른 나라를 침략한 ‘가해자’로 일본군을 지목하고 요시다를 그 상징처럼 내세우고 있다.
 
내가 오늘 가장 부끄러운 일, 마음이 아픈 문제 중 하나는 종군 위안부를 구백 오십 명 강제연행을 한 것입니다. 종군위안부 제도는 일본군이 아시아 각지, 태평양 열도에 침략했을 때, 그 주둔 육군과 해군 군인들을 성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점령 직후의 전선에 매춘 조직을 육·해군의 지휘 아래 직접적인 원조 하에 설치했다고 하는 것은 세계사 상에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물론 있어서는 안 됩니다. / 이것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육·해군의 가장 큰 죄라고 저는 믿습니다.(‘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②,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 ‘목검을 휘둘러 억지로 동원-가해자로서(木剣ふるい無理やり動員──加害者として)’, 130쪽)


여기에는 ‘일본군=악’, ‘일본군=가해자’라는 일방적인 단정이 있다.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에서 두 번이나 증언자로 등장하는 것은 요시다뿐이다. 그만큼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에서 요시다의 위상은 컸을 것이다. 피해자 증언은 중국과 한국의 취재를 통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지만 가해자의 증언은 요시다 외에는 전무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한 가해국 일본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서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강제연행했다는 요시다의 증언이 필수 불가결하였던 것이다.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이 미친 영향(「女たちの太平洋戦争」が与えた影響)

그렇다면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이 당시 일본인에게 미친 영향, 특히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이 미친 영향은 어떠했을까.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에는, 그것을 나타내는 투고도 다수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소개해 두고 싶다. 

16세의 여고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읽다가 처음 알았어요. 일본군이, 일본인들이, 무엇을 얼마나 한국이나 조선 사람들에게 저질러 왔는지를. (중략) / 저는 몰랐습니다. 침략당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되었는지. 이 시리즈가 가슴을 깊이 찔렀던 것은 조선인 위안부의 일이나, 공장의 여공들의 실태였습니다. (중략) / 신문 등이나, 텔레비전 특집 등에서, 한국 등 그 사람들이 일본을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③, 나가사키 유코(長崎優子) ‘침략한 사실을 숨김없이 전해(侵略した事実を隠さず伝えて’(183쪽)


충격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40세의 주부도 이렇게 썼다.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종군위안부’에 충격을 받아서, 읽고 잠시 망연자실했다. . . 젊은 여성을 강제연행하고 군인 상대의 위안부로 삼았다니, 이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 정말 파렴치한 일을 한 것이다.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②, 히라타 미하루(平田みはる) ‘쇼크를 받아 망연자실한(ショックを受け、ぼうぜんとした)’, 133쪽)


81세의 남성으로부터 온 다음과 같은 투고를 보면,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은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전쟁을 잘 알고 있는 일본인에게도 씻기 어려운 속죄의식을 심어주었음을 알 수 있다. 

연일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을 읽고 있습니다만, 새삼스럽게 제 인식의 천박함, 시야의 좁음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중략) / 전쟁 말기, 각지에서 소련병이 약탈을 자행하고, 부녀자에 대해 불합리한 만행을 반복했던 것, 그 파렴치한 폭행에 대해 의분을 느끼고 격분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도 많은 조선인 부녀자를 위안부로 강제연행을 한 역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 란에서 가해자로서의 용기있는 증언을 접하고 나서는 엄정한 군기하에 통제되고 있다고 확신했던 옛 군대에 대한 신뢰감이 뿌리부터 뒤집혔습니다. / 구 일본군의 지휘 원조하에 강제연행이 공공연하게 실시되었던 것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참괴증오(慙愧憎悪)의 마음을 넘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속죄할 수 없는 대죄를 저질렀습니다. (중략) / 다시 한번 전쟁의 죄악을 인식하고,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깊이 반성하고, 희생된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동상(同上), 이모토 세이자부로(平田みはる) ‘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싶다-새삼 깨달은 일본의 만행(アジアの人々におわびしたい──改めて思い知った日本の蛮行)’, 134~135쪽)


이제 충분할 것이다.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특히 요시다 세이지의 “가해자로서의 용기 있는 증언”은 많은 일본인들에게 끝없는 충격을 주고 씻을 수 없는 속죄의식을 심어줌과 동시에 그들을 일본군에 대한 증오의 감정으로 몰고 갔다. 

91년의 이 캠페인은 동시 병행으로 진행됐던 위안부 재판을 북돋우기 위해 적절한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런 정지 작업 위에서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가 완성됐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성들의 태평양전쟁’은 이른바 그 선도자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사히의 노림수는 감쪽같이 성공했다. 이 기획을 담당한 야나기 히로오(柳博雄, 오사카 본사 기획보도 부실장)는, 일련의 보도를 되돌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묻혀있던 역사를 파헤칠 수 있었다. 종군위안부 문제도 그 하나다. 사실이 차례차례 발굴되고 운동이 크게 전개되는 것에 접하여 활자 미디어의 크기를 실감했다.(‘기자들은 격동의 세계를 좇는다·국내편(記者たちは激動の世界を追う・国内編)’, 92년 10월 15일자 조간 별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도, 이렇게 코멘트하고 있다. 

숨겨진 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것이 신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그 역사는 ‘없었던 것’이 되어 버린다. (상동) 


아사히는 “파묻혀 있던 사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라고 장담하고, “‘없었던 것’이 되어 버”릴  우려가 있었던 “숨겨진 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할 수 있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은, 92년의 JCJ상(일본 저널리스트회의 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에 의한 그 ‘숨겨진 역사’, ‘묻힌 역사’는 모두 허위보도였다. 아사히의 허위보도는 이후에도 홀로 떠돌아 이제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도대체 아사히는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97년 특집기사에 관한 책임의 소재(97 年特集記事に関する責任の所在)

오사카 본사 기획보도실장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씨는,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최종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겨우 완성된 역사책을 매일 유용하게 쓰는 것, 횃불이 다 타지 않도록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억압, 왜곡, 망각, 착오, 침묵의 어둠을 사실의 불빛으로 계속 비추는 것이 중요하다.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429쪽)


그는 그대로 행동했다. 총론에서도 소개했지만, 아사히의 독자가 요시다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면, 독자를 꾸짖듯이 말하고, “알고 싶지 않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런 생각과 싸우지 않으면, 역사를 쓸 수 없다(知りたくない、信じたくないことがある。その思いと格闘しないことには、歴史は残せない)”라고 쓰고(‘역사를 위해서 – 창 · 논설위원실로부터(歴史のために(窓・論説委員室から))’, 92년 3월 3 일자), 요시다 증언을 계속 옹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시다 증언은 그 직후부터 “마각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씨가 제주도에서 현지조사를 하여 “노예사냥”, “위안부 사냥”을 했다는 요시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 하나 없음을 입증한 것이다.(산케이(産経)신문 92년 4월 30일자). 

아사히는 2014년 8월 5일자 검증기사에서 “1993년 이후 아사히신문은 강제연행이라는 말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도록 해왔다”고 밝힌 바 있다.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당시부터 요시다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는 의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히는 요시다 증언을 즉시 검증하여 취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94년 1월 25일자의 ‘정치를 움직인 조사 보도(政治動かした調査報道)’라는 검증 기사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아사히신문의 통신망이 정력적으로 임해 그 실상을 발굴했”으며, “일본 저널리스트 회의에서 JCJ상을 받은 아사히신문과 아사히방송 미디어믹스의 기획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에 위안부 문제가 등장한 것은 다음 해 91년 5월. 조선에 건너가 강제로 위안부를 송출한 전 동원부장의 증언에 독자로부터 놀랐다는 전화가 수십 통이나 왔다. (중략) 연초에는 미야자와 총리(당시)가 한국을 방문하여 공식 사과하고, 유엔 인권위원회가 거론하기에 이른다”고 말하고, 요시다 증언을 비롯한 자신의 보도가 정치를 움직이고 유엔을 움직인 것을 ‘자화자찬’하고 있다.(제4장에서 자세히 논한다)

아사히의 97년 특집기사 ‘종군위안부 지울 수 없는 진실 / 정부와 군의 관여, 명백하다(従軍慰安婦 消せない真実/政府や軍の関与、明白)’에서도 요시다 증언에 대해서는 “제주도 사람들로부터도 그의 저술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나오지 않아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데 그쳤고, 자신의 과거의 보도에 대해서 정정·사죄하는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날 사설 ‘역사를 외면하지 않는다(歴史から目をそらすまい)’에서는 ‘강제성’의 정의를 임의로 변경하여 “일본군이 직접 압송을 했는가 안했는가라는 좁은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하려는 경향”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보는 것”이며, “위안부 모집 및 이송 관리 등을 통해서 전체로서 강제로 불러야 할 실태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총론이나 제2장에서도 말한 대로, 제3자위원회는 이 아사히의 변명을 ‘논의 바궈치기’라고 강하게 비판했지만, 이 ‘논의 바꿔치기’에 관련되는 책임의 소재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제3자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이 때의 특집 기사는 “편집국장, 담당국 차장 하에 정치부·사회부·외보부의 3부 합동 취재팀을 짜서 진행되었고”, 실질적으로는 사회부 주도였다고는 하지만(21~22 페이지), 담당국 차장 아키야마 케이타로(秋山耿太郎) 씨 이외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전 아사히신문 외보부(外報部) 차장을 지낸 나가오카 노보루(長岡昇) 씨는, 외보부장 키요타 하루후미(清田治史) 씨의 이름을 들고, 그 책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키요타 기자는 ‘오사카 사회부의 에이스’로서 대접받고, 그 후 도쿄 본사의 외보부(外 報部) 기자, 마닐라 지국장, 외보부 차장, 서울 지국장, 외보부장, 도쿄 본사 편집국 차장으로 순조로운 출세의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1997년 위안부 보도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어 아사히신문이 1회째의 검증에 나섰던 그때 그는 외신부장으로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하는 길을 스스로 닫았다고 지금 생각합니다. (중략) 도쿄 본사 편집국 차장 뒤, 그는 종합연구본부장, 사업본부장으로 지반을 굳히고, 마침내는 서부 본사 대표이사에까지 올랐습니다. 위안부를 둘러싼 허위보도, 오보의 제일의 책임자가 이사회에 이름을 올리는 그로테스크함. 역대 아사히신문 사장, 중역들의 책임 또한 무겁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나가오카 노보루(長岡昇), ‘위안부 보도 제일의 책임자는 누구인가(慰安婦報道、一番の責任者は誰か)’ 메일매거진(メールマガジン) ‘코지 라카와 통신(小白川通信) 19’, 2014년 9월 6일자)


당시의 정치부장은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씨이며, 와카미야 씨는 키요타 씨와 반대의 입장이었던 것 같지만(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못다 진 정치부장의 책임(果たせなかった政治部長の責任)’, ‘분게이슌주(文芸春秋)’ 2014년 10월호), 아사히는 이름이 밝혀진 아키야마 케이타로 씨(담당국 차장)·키요타 하루후미 씨(외보부장)·와카미야 요시부미 씨(정치부장) 이외에도 당시의 사장 이하 편집국장, 사회부장의 이름을 분명히 해서 ‘논의 바꿔치기’를 실시한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책임자를 엄격하게 처분해야 할 것이다. 총론에서도 말한 것처럼, 같은 말을 2014년 8월의 검증 기사에서의 ‘논의 바꿔치기’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히의 역사 인식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朝日の歴史認識は今も変っていない)

2014년 8월, 아사히는 마침내 요시다 증언에 관한 과거의 보도(16건, 나중에 2건을 추가하여 현재 18건)를 취소하기에 이르렀지만, 군 위안부의 조직적인 ‘강제연행’ 여부를 밝히지 않은 채 광의의 ‘강제성’으로 바꾼 아사히신문의 입장은 97년 당시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2014년 8월 5일자의 제2회 위안부 검증 기사에서도 편집담당 스기우라 노부유키 씨는 “전시 중 일본군 병사들의 성(性) 상대를 강요당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위안부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유린당한 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라고 했고, 그 해 8월 27일자 ‘위안부 문제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慰安婦問題 核心は変わらず)’에서는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의 최대의 근거로 삼아온 것은 위안부의 삶의 증언이며,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요시다 씨의 증언이 문제의 본질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이 당초 한결같이 강조한 요시다 증언, 즉 일본군의 조직적 강제연행(‘노예사냥’, ‘위안부사냥’)이 있었다는 주장(‘협의의 강제성’)에 대해서는 사과도 하지 않은 채, “문제일 수 없다”고 하면서 어느새 입을 닦아 버리고선, “위안부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유린당한” 것(‘성노예적 상황’, ‘광의의 강제성’)이 “문제의 본질입니다”라고 했고, 제3자위원회가 엄격하게 비판한 ‘논의 바꿔치기’를 아사히신문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본질은 아사히가 말하는 것처럼 “위안부로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짓밟힌 것”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요시다 증언을 종종 인용하여서는, 군에 의한 조직적인 ‘강제연행’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있었다고 보도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부정·사죄하지도 않고, 30년 이상이나 방치해 국제사회에 ‘위안부=성노예’라는 중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군대=악’, ‘국가권력=악’이라는 믿음과 선입견에 의해 “타국을 침략한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밝힌다는 ‘여자들의 태평양전쟁’ 이래의 의도는 오늘날에도 아사히신문사 안에서 견지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사히는 올해 1월 3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아시아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고 인정해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 이후 아베 내각까지 이어져 온 정부의 역사인식의 결정판이자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에 초석이 돼 왔다. 그 가치를 망가뜨리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변함없다. 아사히는 요시다 증언은 부정했지만 이번에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무라야마 담화에 의거하면서 타국을 침략한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밝히는 보도에 오늘도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치를 망가뜨리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절규하면서(!). 

아사히신문의 기자 유지는 “개개의 기자 레벨에서는, 개헌이나 증세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이미 다수파다. 회사를 총괄하는 국장급조차, …논폴리 세대가 차지하고 있다. 즉, 아사히의 불상사의 원인이 좌익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조건반사적으로 비난하는 우파 미디어나 보수계 지식인의 논조는 전혀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전게 ‘아사히신문’). 그렇다면 요시다 증언을 취소하고 나름대로 “사죄”한 후에도 “과잉된 속죄의식”, “속죄사관”을 통째로 내놓은 이 같은 사설이 “성징(性懲)도 없이” 출현한 것인가. 

제3자위원회는 보고에서 아사히신문의 보도가 ‘편향보도’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사히신문의 취재체제를 검증한 결과, 특정한 일부의 전문가나 정보원에게 과잉되게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89쪽). 또 보고의 ‘개별의견’에서 오카모토 유키오(岡本行夫) 위원은, “사실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보도가 되지 않는다, 아사히신문으로서의 방향성을 설정하여 비로소 표제가 붙는다”라는 말을 청취조사나 그 외에 “여러 사람의 아사히 사원”으로부터 들었고, “그러므로 사건에는 아사히신문의 방향에 따라 ‘각도’가 설정되어 보도된다.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다”라는 중대한 지적을 하고 있다.(92페이지)

아사히신문에 묻고 싶다. 당신들은 “타국을 침략한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밝히기 위한 더 이상 없을 절호의 증거로서 요시다 증언에 달려들지 않았는가. 당신들에게는 ‘일본군=악’, ‘국가권력=악’이라는 없애기 어려운 믿음과 선입견이 있었고, 제3자위원회도 지적했듯이, “여성들 전원이 강제로 연행되었다고 하는 믿음과 선입견”(86쪽)이 있었다. 그 결과로서 92년에 요시다 증언에 대해 근본적 의문이 제기된 후에도 “오랫동안 기사의 수정을 막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닐까. 

‘일본군=악’, ‘국가권력=악’이라는 그 믿음과 선입견이야말로 오카모토 유키오 위원이 지적하는 “아사히신문의 방향성에 따르도록 ‘각도’가 붙여져 보도된다”는 바로 그 ‘방향성’, ‘각도’에 들어맞는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들의 사설 외에 오늘날에도 ‘과잉된 속죄 의식’, ‘속죄사관’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위안부 문제뿐만이 아니다”는 것이다. 


제4장 요시다 세이지의 허위증언 보도
(第4章 吉田清治の虚偽証言報道)

-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집필 담당) -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낳은 오보(「92 年 1 月強制連行プロパガンダ」を生んだ誤報)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만들어 낸 오보라는 관점에서 아사히의 위안부 보도는 다시 검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2014년 8월 5일 검증특집에 있는 5개 항목의 나열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먼저 지적해둬야 한다.
 
‘강제연행(強制連行)’ 항목은 그 이외의 4가지 항목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본래는 마지막으로 검증되어야 하지만 아사히는 가장 앞에 두고 있다. △ ‘‘제주도에서 연행’ 증언(『済州島で連行』証言)’, △ ‘군 개입을 나타내는 자료(軍関与示す資料)’, △ ‘‘정신대’와의 혼동(『挺身隊』との混同)△ ‘위안부 첫 증언(元慰安婦 初の証言)’의 4개의 배열 방식도 잘못됐다. 시계열로 본다면 군 관련 자료가 네 번째로 와야 한다. 

본 보고서에서는 제2장에서 강제연행에 대해 검증했으므로 나머지 4항목에 대해 순서를 바꿔 (1) ‘‘제주도에서 연행’ 증언’, (2) ‘‘정신대’와의 혼동’, (3) ‘위안부 첫 증언’, (4) ‘군 개입을 나타내는 자료’ 순으로 검증하기로 한다. 이 4개 항목에 대해서는 제3자위원회도 독자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으므로 그 견해에 대해서도 검증을 아울러 실시한다. 

요시다(吉田) 허위증언 보도를 검증하다(吉田虚偽証言報道を検証する)

먼저 ‘‘제주도에서 연행’ 증언‘ 항목을 검토하자. 이것은 요시다 세이지 증언에 관한 기사의 검증이다. 먼저 아사히의 검증특집으로부터 ‘의문(疑問)’과 ‘독자 여러분에게(読者のみなさまへ)’를 인용한다.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에서 전쟁 중 위안부로 삼기 위해서 여성을 폭력을 써서 억지로 끌어냈다고 저서와 집회에서 증언한 남성이 있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80년대부터 90년대 초에 기사에서 그 남자를 다루었습니다만, 증언은 허위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요시다 씨가 제주도에서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는 증언은 허위라고 판단하고 기사를 취소합니다. 당시에는 거짓 증언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제주도를 다시 취재했지만 증언을 뒷받침할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연구자에 대한 취재에서도 증언의 핵심 부분에 관련된 모순이 몇 개나 밝혀졌습니다.”


다음으로 제3자위원회 보고에서 요시다 증언 기사에 관한 평가의 중심부분을 인용한다. 

1991년 5월 22일 및 같은 해 10월 10일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의 일련의 기사는 시기적으로도 뒤에 위치하고 위안부 문제가 사회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상황 하의 보도로, 아사히신문 스스로 ‘조사보도’(1994년 1월 25일자 기사 참조)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다 씨에 대한 인터뷰 외에 보강조사가 이뤄지거나 시도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문제다. 

하타 씨의 조사결과는 제주도 현지조사 등을 포함한 실증적인 것으로 요시다 증언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조사결과 발표 후에는 요시다 증언을 보도하는 데 있어서 보강조사의 심화나 관련된 비판의 존재를 지면상 밝히는 등, 종전과는 다른 대응이 요구되었다. 

(중략) 그 이후 요시다 증언을 기사로 다루는 것은 신중해야 했고, 지금까지의 요시다 증언에 관한 기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문제가 되었을 터인데도, 요시다 증언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바꾸는 등 미봉책을 취했을 뿐, 안이하게 요시다 씨의 기사를 게재하고, 제주도로 취재를 가는 것과 같은 대응을 취하지 않은 채 요시다 증언의 취급을 줄여 나가는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이는 신문이라는 미디어에 대한 독자의 신뢰를 배신하는 것으로, 저널리즘의 본연의 자세라는 점에서 비난받아야 한다.(보고서 16쪽)


검증 속에서 아사히가 유일하게 기사를 취소한 것은 이 항목뿐이다. 제3자위원회는 이 정도로 취소가 늦어진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하에서 보는 대로 아사히의 검증특집도 제3자위원회 보고도, 문제점의 추궁이 불충분했다. 

80년대부터 요시다(吉田)를 다루다(80 年から吉田を取り上げる)

총론에서도 썼듯이 요시다 세이지 증언에 대해 아사히는 35년 만에 허위로 인정해 취소했다. 아사히가 취소한 것은 18개의 기사다(당초는 16개였지만, 제3자위원회의 지적을 받아 2개를 추가했다). 아사히가 요시다를 가장 먼저 다룬 것은 1980년 3월 7일자 가와사키 요코하마 동부판(川崎横浜東部版)이었다. 거기에서는 위안부 사냥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 뒤 1982년 9월 2일 오사카 본사판에서 오사카 시내에서 열린 집회 중 요시다가 “조선인 위안부를 황군 위문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내보냈습니다(朝鮮人慰安婦は皇軍慰問女子挺身隊という名で戦場に送り出しました)”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그 뒤 1983년에 3건, 84년(오사카 본사판), 86년, 90년(오사카 본사판)에 간헐적으로 요시다 기사가 나왔지만, 그것들의 중심은 노동자 연행이며, 82년 기사와 83년에 요시다가 펴낸 저서에 쓴 제주도에서의 위안부 사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너무 엉뚱한 내용이라 사실관계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91년에 요시다의 위안부 사냥을 자세히 다루는 기사가 2개 실렸다. 후술하는 오사카 본사 기획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의 기사다. 91년 1월 논설위원 칼럼이 위안부 사냥을 거론하고, 같은 논설위원이 그 해 2월에 요시다의 증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의 투서를 꾸짖는 칼럼을 써서 아사히는 요시다의 위안부 사냥에 완전히 보증수표를 써주었다. 91년 오사카 본사 보도와 92년 1월 논설위원 칼럼은 ‘92년 1월 강제연행 프로파간다’를 뒷받침하는 핵심이 되었다. 




취소 기사 명단 공개를 거부한 아사히(取り消し記事リスト公開を拒んだ朝日)

8월 5일 단계에서는, 아사히는 1982년 이래 적어도 16차례 요시다 증언을 기사화했다고 썼다. 그러나 검증특집에서는 16편의 기사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또 누가 썼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본래 오보를 내서 기사를 취소하는 것이라면, 취소하는 기사의 리스트와 그 전문(全文)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9월 11일 기무라 다다카즈(木村伊量) 사장 등의 사과 기자회견에서도 취소 기사 리스트는 공개되지 않았다. 아사히가 명단을 공개한 것은 사장의 사죄회견으로부터 약 1개월 후인 10월 10일이었다. 

공개 방식도 이상했다. 아사히 보도를 비판하는 기자나 전문가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 전날 열린 제3자위원회에 맞추어 지면으로 리스트를 공개했다. 도대체 아사히는 어느 쪽을 향해 사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공표 방법의 검토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한 것을 고려하면 그 공표 방법에도 의도적인 왜곡이 있었다. 

두 가지 예를 든다. 1992년 3월 3일 석간에 실린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논설위원실의 칼럼 ‘창 논설위원실에서 역사를 위하여’에 대해 아사히는 10월 10일자 지면에서 그 내용을 이렇게 소개했다. 

요시다 씨의 고백에 많은 편지가 당도했고,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부정하는 의견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알고 싶지 않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싸우지 않으면 역사는 쓸 수 없다고 맺었다. 


이 칼럼은 후술처럼 요시다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는 편지를 비판했던 것이다. 알고 싶지 않다, 운운은 편지 주인들에게 했던 아사히의 설교였다. 이 소개에서는 칼럼이 요시다 증언에 대한 의문을 나타냈던 것처럼 읽을 수도 있다. 이 소개 자체가 사실을 왜곡해 전달하고 있다. 

또 하나, 1994년 1월 25일자 기사에 대해서, 아사히는 10월 10일에 이렇게 썼다. 

(요시다 세이지 씨의) 증언에 독자로부터 놀라움을 전하는 전화가 수십 통이나 도착했다고 요시다 씨를 익명으로 소개.


그러나 이 기사의 제목은 ‘정치를 움직인 조사 보도(「政治動かした調査報道)’이며, 기사에서는 사실은, “한국에서 나타난 위안부 피해자 세 사람이 개인보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법에 제소하자 그 증언을 자세히 소개했다. 연초에는 미야자와(宮沢) 당시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공식사과하고, 유엔 인권위원회가 거론하기에 이르렀다”고 쓰고 있다. 아사히 보도가 당시의 총리와 유엔에 대해 영향을 미쳤다고 그때는 자랑을 하였는데, 그 사실을 덮고 있다. 

또 오보를 취소하려면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 당시 편집 간부와 사장 등의 이름을 공개해 책임자 처벌을 해야 하지만 아사히는 취소 기사 명단만 냈을 뿐 누가 썼는지조차 밝히지 않았다. 왜 오보가 발생했는지, 왜 정정이 32년간 이뤄지지 않았는지를 밝힌 뒤 책임자 처분이 이뤄져야 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제3자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취소기사 공개과정의 이상함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도 아사히에 대한 관대함을 알 수 있다. 

요시다(吉田)를 세상에 내보낸 키요타(淸田) 기자(吉田を世に出した清田記者)

제3자위원회 보고서는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강제연행 증언에 관한 “1982년부터 1997년까지 총 16개의 기사”를 검증 대상으로 하여, 주요 기사에 대해서 집필 기자, 집필 의도, 취재 경위 등을 밝히려고 했지만, 아사히가 요시다 증언을 이렇게까지 자주 거론한 배경과 동기에 대해서는 전혀 검증하지 않았다. 

1983년의 3편의 기사(10월 19일자 석간, 11월 10일자, 12월 24일자, 이들 모두 요시다가 한국에 사죄비를 건립한다는 기사)에 대해 제3자위원회는 “당시 오사카 사회부 관내의 통신국장을 하고 있던 키요타 하루후미(清田治史)에 의해 집필되었”던 것, “이 건에 관한 취재보도는 오사카 사회부 데스크의 의향도 있어서 서울지국이 아닌 키요타 하루후미에 의해 강제연행의 전체상을 의식한 기획으로 진행했다”는 사실(보고서 7페이지) 등을 밝혔다. 그러나, “오사카 사회부 데스크”란 누구인지, 또 그 “의향”이란 어떠한 것인지, “서울지국이 아니라, 오사카 사회부의 키요타 하루후미에 의해 강제연행의 전체상을 의식한 기획으로서 진행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하는, 보고서를 읽으면 누구라도 떠올리는 많은 의문에 대해서는 전혀 답하지 않았고 깊이 파고들어간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한 요시다 증언의 첫 보도인 82년 9월 2일 오사카 본사판 기사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집필한 기자, 집필 의도, 요시다 씨의 강연 내용에 대한 보충 취재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당초 집필자로 지목된 키요타 하루후미는 기사 게재의 시점에서는 한국에 어학유학 중이어서 집필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고...” 등이라고 말해, 결국 기사를 집필한 기자의 책임에 대해서 불문에 부치고 있다. 

그러나 최초 보도 뒤 다음 해인 1983년의 3편의 기사(상기)가 모두 키요타 하루후미의 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요시다 증언을 다룬 초기 중심인물이 키요타 하루후미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후에 키요타 하루후미의 부하가 되는 전 아사히신문 외보부 차장 나가오카 노보루(長岡昇) 씨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중대하다. 

조사하는 사이에, 일련의 보도에서 제일 책임을 져야 할 인간이 책임 회피로 일관하고, 지금도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자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격한 허탈감 ─ 외신부 시대의 직속 상관으로, 그 후 아사히신문의 이사(서부 본사 대표) 키요타 씨였어요. (중략) 그가 이른바 종군위안부 보도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뒤, 이후 보도의 레일을 깐 제일의 책임자라고 해야죠. . . . 강연을 듣고 곧바로 쓴 제1보의 단계는 차치하고, 1년 후에 ‘사람(ひと)’란을 쓸 때까지는, 보충 취재를 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나가오카 노보루(長岡昇), ‘위안부 보도, 제일의 책임자는 누구인가(慰安婦報道、一番の責任者は誰か)’, 메일 매거진 ‘코이시카와 통신19(小石川通信19)’ 2014년 9월 6 일자) 


제3자위원회 보고서가 “오사카 사회부 데스크의 의향도 있어서”라고 쓴 것처럼, 일련의 기사의 집필에는 키요타 하루후미 본인뿐만이 아니라, 아사히신문 오사카 사회부 전체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키요타 하루후미는 83년 10월, 요시다를 몇 시간 동안 인터뷰했지만, 사실의 증명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요타 하루후미는 “위안부로의 강제동원과 관련된 요시다 씨의 증언 내용이 생생하며 상세하고, 구체적인 조선인 남자에 대해서는 강제연행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서도 같은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기사를 썼다”고 하지만(보고서 7쪽), 키요타 하루후미 자신도 포함하여 그러한 증명 없이 모호한 추측만으로 기사화한 아사히신문 오사카 사회부 전체의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아울러 요시다 증언의 최초 보도 기사(82년 9월2일자) 집필자에 대해서는 아사히신문이 당초 키요타 하루후미라고 밝힌 뒤 취소했고, 이후 제3자위원회의 검증에서도 집필자가 특정되지 않았다. 이 점에 관해서도 나가오카 노보루 씨는 다음과 같이 중대한 지적을 하고 있다. 
 
위안부 보도의 원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기사에 대한 이 잘못된 행로. 어찌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자세한 기사는 차치하고, 신문기자라면, 제2사회면의 톱이 될 기사를 쓰고 기억하지 못한다든가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 후, 여러모로 화제가 된 기사입니다. 동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게 틀림없고 말입니다. 원고를 쓰고, 기사가 될 때까지는 데스크의 붓도 들어갑니다. 편집자나 교열기자의 눈에도 보입니다. 나중에 조사해서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누군가가, 혹은 복수의 인간이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어서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나가오카 노보루, ‘위안부 보도, 아직 거짓이 있다(慰安婦報道、まだ嘘がある)’, 메일매거진 ‘코이시카와 통신19(小石川通信19)’ 2014년 12월 23일)


아사히신문은 위안부 강제연행 첫 오보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과 그 책임 소재를 은폐하지 말고 밝혀야 한다. 

오보의 책임자를 밝히지 않은 아사히(誤報の責任者を明らかにしなかった朝日)

제3자위원회는 취소 기사를 쓴 기자 중 생존자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이 이루어졌던 것 같은 착각을 많은 일본인에게 심어준 계기가 된 오사카 본사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의 요시다 기사(1991년 5월 22일자 기사와 같은 해 10월 10일자 기사)를 쓴 기자에 대해 제3자위원회 보고서는 편집위원이라고만 쓰고 실명을 감췄다. 두 편 모두 서명기사여서 기사 자체를 보면 필자가 이노우에 히로마사(井上裕雅) 편집위원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왜, 제3자위원회가 이노우에 씨의 실명을 보고서에 쓰지 않았는지, 몹시 불투명하다. 

이노우에 씨는, 제3자위원회의 질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억에 없다”를 반복하는 무책임한 대응을 취했다. 

이 편집위원은 상기 기사(5월 22일 기사, 인용자 보충, 이하 동일) 집필 전에 요시다 씨를 만났겠지만, 취재에 이르는 경위를 포함해 그에 대한 기억이 없고, 요시다 씨의 저서나 요시다 씨에 관한 아사히신문의 과거 기사를 참조한 기억이나 요시다 씨의 경력조사 등 보강조사를 한 기억도 없다고 하고, 기사에서 인용한 강연록의 토대가 된 집회에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10월 10일자 기사의) 필자는, 기사 중에 3시간 남짓 요시다 씨를 취재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상기 a의 기사(5월 22일 기사)의 취재와 마찬가지로 별로 기억이 없다. 


제3자위원회는, 이노우에 씨의 애매한 답변을 익명으로 보고서에 기재했을 뿐, 담당 데스크 등에서 사정을 듣는 작업조차 실시하지 않았다. 

원래, 당초 아사히가 취소했던 16건은 ‘제주도에서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고 하는 증언(済州島で慰安婦を強制連行したとする証言)’이라고 특정되고 있다. 그러나 아사히는 1991년 5월 22일자 기사와 1992년 1월 2일자 석간의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논설위원 칼럼에서 요시다가 조선 전역에서 연행한 위안부를 950명이라고 전했다. 또 91년 10월 10일자 이노우에 히로마사 편집위원 서명기사와 92년 5월 24일자 기사에서는 그 수가 약 천명으로 되어 있다. 요시다는 제주도에서 200명을 연행했다고 주장했다. 검증특집은 요시다가 했다고 주장한 제주도 이외의 장소에서의 위안부 연행에 대해서는 검증하지 않았다. 취소한 것은 200명에 대해서만인지, 천 명 전부에 대한 것인지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8월 검증에서 명시하지 않았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취소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제3자위원회는 남성 노동자의 강제연행에 관한 요시다 증언의 기사에 대해서도 “적절한 처치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아사히는 16개 이외에 2개의 기사, △ 80년 3월 7일자 가와사키·요코하마 동부판 ‘연재 한국·조선인Ⅱ(27) 명령을 충실히 실행, 저항하면 목검(「連載 韓国・朝鮮人Ⅱ(27) 命令忠実に実行 抵抗すれば木剣)’과  84년 1월 17일자 석간 사회면(오사카 본사판) ‘연재 아픈 상처 조선인 강제연행의 현재(1) 징용에 신랑 빼앗겨(連載 うずく傷跡 朝鮮人強制連行の現在(1) 徴用に新郎奪われて)’를 취소했다.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지만 왜 처음부터 근로자 동원까지 취소하지 않았는지 아사히의 검증에서 안이함이 드러난다. 

18개 가운데 ‘목소리(声)’란의 편지나 ‘논단(論壇)’, ‘나의 지면 비평(私の紙面批評)’에 기고된 3개는 공개되지 않았다. 외부의 필자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3개에 대해서는, 게재를 결정한 출입 기자, 데스크의 이름이라도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머지 15개 중 서명기사는 키요타 하루후미 기자 겸 서울 특파원이 2개, 이노우에 히로마사 편집위원이 2개,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논설위원이 2개 등 6개다. 

독자를 질책한 기타바타케 칼럼(読者を叱責した北畠コラム)

1992년 1월 23일 석간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논설위원 칼럼은 요시다의 증언을 인용하여 “국가권력이 경찰을 이용하여 식민지의 여성을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상태로 유괴하여 전쟁터로 끌고 간 후 1년, 2년을 감금하고 집단강간하고, 그리고 일본군이 퇴각할 때에는 전쟁터에 방치하였습니다. 내가 강제연행한 조선인 중 남자의 절반, 여자는 다 죽었다고 생각합니다(国家権力が警察を使い、植民地の女性を絶対に逃げられない状態で誘拐し、戦場に運び、1年2年と監禁し、集団強姦し、そして日本軍が退却する時には戦場に放置した。私が強制連行した朝鮮人のうち、男性の半分、女性の全部が死んだと思います)”라고 썼다. 

여성 전부가 죽었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듣고 논설위원까지 지낸 베테랑 기자인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씨는 사실관계에 의문을 갖지 않았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기자로서 훈련이 돼 있지 않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 키타바타케 칼럼에 대해서 독자들로부터 많은 반론과 의문이 제기되었다. 키타바타케씨는 그것을 소재로 동년 3월 3일 저녁에 ‘역사를 위하여(歴史のために)’라는 제목의 아래와 같은 칼럼을 썼다. 

위안부를 강제연행한 요시다 세이지 씨의 고백이 이 란(1월 23일)에 소개됐다. 그 후, 많은 편지를 받았다.(중략) 

일본군의 잔학 행위는 없었다든가, 공표하지 말라는 사람의 논거에는, 공통되는 형태가 있다는 것이다. 

(1) 그런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군율, 군인의 심정에 따르더라도 그럴 수는 없다.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예외이고 일반화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중에는 자기 현시욕과 과장벽 때문에 왜곡된 이야기들도 있을 것이다. 
(2) 자학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말하지 말라.(중략)
(3) 일본군의 잔혹행위를 알게 되면 유족들은 우리 아버지, 형제도 가담했느냐며 괴로워할 것이다.(중략)

이상과 같이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정은 잘 안다. 누구에게나 이치만으로는 움직이고 싶지 않은 정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알고 싶지 않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런 생각과 싸우지 않으면, 역사를 쓸 수 없다.


이 기사는 요시다 증언이 허위이기 때문에 취소한다는 조치로 끝내도 좋은 것인가. 기타바타케 키요야스 씨는 이미 고인이지만 아사히로서는 칼럼에 의문을 제기하는 투고를 낸 분들에게 사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알고 싶지 않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런 생각과 싸우지 않으면, 역사를 쓸 수 없다”라는 칼럼의 결론은 확실히 아사히를 위해서 쓰인 것이라고 읽힌다. 

그런데 제3자위원회 보고는 이 칼럼에 대해 “(1월 23일) 기사의 반향을 근거로 한 기사이지, 직접 요시다 증언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13 페이지)라고 기술하고 있을 뿐이며,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고 있다. 

요시다 기사를 자화자찬(吉田記事を自画自賛)

또 하나, 아사히의 후안무치함을 알 수 있는 기사를 소개한다. 놀랍게도 아사히는 요시다 증언을 사용한 위안부보도를 자화자찬하는 기사를 썼다. 1994년 1월 25일 창간 115주년 기념특집으로 쓰인 ‘정치를 움직인 조사보도(政治動かした調査報道)’ 기사다. 거기에서 자사의 조사 보도가 정치를 움직인 ‘성과(成果)’로서 △ ‘【토건정치】 유착 추궁, 11년 후에 결실(【土建政治】 癒着追及、11年後に結実)’(이바라키현 지사의 토건 정치를 고발),   ‘【부정출장】 선거로 몰아넣은 9개월 ’아마가사키 재생‘ 시민과 함께(【不正出張】 出直し選挙へ追い込んだ9カ月 「尼崎再生」市民と共に)’(아마가사키시 의회의 부정 출장을 고발),   ‘【헌금】 법의 악용, 수지 보고서로부터 파헤친다(【回し献金】 法の悪用、収支報告書から暴く)’(자민당 아이치현 의회 4명을 고발)라고 함께,   ‘【전후 보상】 잊혀진 사람들에게 빛(【戦後補償】 忘れられた人達に光)’을 나란히 자찬했다. 그런데 그 안에 요시다 증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사히의 자찬 기사의 해당 부분을 인용한다. 

 【전후 보상】 잊혀진 사람들에게 빛

전후 오랫동안 전화(戰禍)의 책임을 져야할 측으로부터 잊혀진 사람들이 있었다. 구 일본군에 의해 성의 도구가 된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피해자, 해외 잔류 일본인……. 

최근 급부상한 이러한 전후보상 문제에 대해 아사히신문 통신망은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그 실상을 발굴해 왔다. 

○ 위안부 강제연행. (중략)

일본 저널리스트 회의에서 JCJ상을 받은 아사히신문과 아사히방송 미디어믹스 기획 ‘여자들의 태평양전쟁’에 위안부 문제가 등장한 것은 91년 5월. 조선으로 건너가 강제로 위안부를 송출한 전 동원부장의 증언에 독자로부터 놀랐다는 전화가 수십 통이나 왔다. 

독자끼리의 지면토론이 끝없이 이어지며, 기자는 조선인 위안부와 접촉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한국에 갔다. 그 해 12월 한국에서 나타난 위안부 피해자 세 사람이 개인보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법에 제소하자 그 증언을 자세히 소개했다. 연초에는 미야자와 수상이 한국을 방문해 공식사죄하고, 유엔 인권위원회가 거론하기에 이른다.


기사 제목을 ‘정치를 움직인 오보’로 잡았어야 했다. 아사히는 JCJ상을 반환할 것인가. 아사히는 이 기사를 취소한 바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JCJ상도 반환해야 한다고 생각되지만, 일단 일본 저널리스트회의와 아사히의 견해를 듣고 싶다. 

아사히가 자찬하는 것처럼 요시다 증언을 앞장세운 위안부 보도의 결과, 미야자와 총리가 한국에서 공식사과한 데 이어 유엔 인권위원회가 위안부 문제를 거론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 보고서의 제3부에서 상론(詳論)했다. 

요시다 증언 보도의 악영향을 무시(吉田証言報道の悪影響を無視)

아사히는 그동안 여러 차례 진행한 검증특집에서 요시다 증언을 32년간 취소하지 않은 자사 보도로 인해 허위증언이 국제사회에서 사실로 확산되고 일본의 명예와 국익을 현저히 훼손한 실태에 대해서는 일절 다루지 않았다. 

특히 2014년 8월 6일자 지면에서 한 페이지를 다 써서 ‘일한 관계 왜 잘못되었는가?(日韓関係なぜこじれたか)’라는 검증 기사를 게재했지만 여기에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도, 미국 의회결의도, 최근 속속 들어서고 있는 미국 내의 위안부 기념 동상 등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것들을 언급하면, 아사히가 요시다의 허위증언을 세상에 내보낸 영향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어지므로 도망쳤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본래라면 요시다 증언을 어디보다도 빨리, 어디보다도 많이 보도한 아사히야말로, 이번 기사 취소를 영문(英文)으로 밝히고, 솔선해 오보를 바로잡는 국제홍보에 임해야 한다. 아사히의 오보로 훼손된 일본의 국익을 금전적으로 따지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고액의 비용이 들 것이다. 그 일부 혹은 대부분을 아사히가 부담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제3자위원회는 아사히 보도가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위원회로서의 견해를 정리하지 않고, 몇몇 위원이 각기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 그 결과 아사히에 대한 책임 추궁은 모호해졌다. 아사히는 제3자위원회 보고를 받고, 아래와 같은 견해를 냈지만, 거기에는 반성이나 사죄의 말은 없었다. 아사히 보도의 영향에 대해서는 본 보고서의 제3부에서 다시 상세히 논한다. 

제3자위원회는 아사히신문의 요시다 증언 기사와 위안부 보도가 국제 사회에 미친 영향도 조사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오카모토 유키오(岡本行夫) 위원과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위원이 아사히신문 등의 보도가 한국 내의 비판 논조에 동조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 위원과 하야시 카오리(林香里) 위원의 검토 결과는 모두 요시다 증언 기사가 한국에 영향을 주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하야시 카오리 위원은 또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에 관한 기사가 구미, 한국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다각적인 보도를 계속해갈 것입니다. 해외에도 발신하여 보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해가고 싶습니다.(‘제3자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한 아사히신문사의 견해와 대처(第三者委員会の報告書に対する朝日新聞社の見解と取り組み)’, 2014년 12월 26일자)




요시다 세이지 증언에 관한 아사히신문 취소 기사(18개)·미취소 기사(1개) 일람

(吉田清治証言に関する朝日新聞取消記事(18 本)・未取消記事(1 本)一覧)


- 카츠오카 칸지(勝岡寛次) 작성 -




아사히신문에 의한 기사취소의 경위

    2014년 8월 5일 취소 기사: 16개(No. 2, 4~6, 8~19)

    2014년 12월 23일 취소 기사: 2개(No. 1, 7)

    2015년 2월 18일 현재 취소 기사는 18개(No. 1~2,4~19)


아사히신문에 의한 취소기사 공표의 경위

    2014년 10월 10일 공표 기사: 12개(No. 2, 4~6, 8~9, 11, 13, 15~18)

취소기사 중 4개 미공표(No. 10, 12, 14, 19)

    2014년 12월 23일 제3자위원회 지적에 따라 미공표 기사 1개(No. 10) 추가 공표. 

같은 날 취소기사 2개(No. 1, 7)를 공표

    2015년 2월 18일 현재 취소 기사 중 공표 기사는 15개(No. 12, 14, 19의 3개는 여전히 미공표)


아사히신문에 의한 기사취소의 유무·공표의 유무 내역(2014년 2월 18일 현재)

    ① 취소·공표 기사: 15개(No. 1~2, 4~11, 13, 15~18)

    ② 취소·미공표기사: 3개(No. 12, 14, 19)

    ③ 미취소·미공표 기사: 1개(No. 3)


아사히신문 데이터베이스상의 취소 유무

    2014년 10월 16일 현재 

‘취소’ 기사: 16개 중 12개(No. 4~6,9~11,13,15~19)

‘일부취소’ 기사: 16개 중 1개(No. 8)

취소기사로 지정하면서 미취소 기사: 16개 중 1개(No. 2)

‘저작권 등의 관계’로 열람 불가능한 기사:16개 중 2개(No. 12,14)

    2015년 2월 18일 현재

지역판으로 인해 DB상의 취소를 확인할 수 없는 기사 : 18개 중 1개(No. 1)

취소 기사: 18개 중 13개(No. 2, 4~6, 9~11, 13, 15~19)

‘일부 취소’ 기사: 18개 중 1개(No. 8)

취소기사로 지정하면서 취소하지 않은 기사: 18개 중 1개(No. 7)

‘저작권 등의 관계’로 열람 불가능한 기사: 18개 중 2개(No. 12,14)


* 당연히 취소해야 하는데, 아직도 취소하지 않고 있는 요시다 세이지 증언 기사가 있다. 


* 취소기사로 지정하면서 DB상에서 취소하지 않은 기사가 존재하는 것은 독자를 배신하는 행위이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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