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문제적 침팬지 ‘시저’의 모습은 사뭇 충격적이다. 수십년 전 인간 찰턴 해스턴이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특수 분장의 원숭이들에게 노예로 부려지던 모습에서 받았던 충격과는 또 다른 충격이다. 원작의 전작, 즉 프리퀄(prequel)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단순히 ‘지능이 뛰어난 원숭이’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인간보다 더 고귀한 자존심과 존엄성을 지닌 침팬지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당혹감을 안겨주는 한층 더 진화된 논쟁점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개발 연구소에서 일하는 윌(제임스 프랭코)은 숙원으로 매달리던 신약 개발에 성공한다. 이 약은 뇌 세포가 손상된 부분을 스스로 재생할 수 있도록 뇌 기능을 활성화하는 강력한 신약으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이다. 여러 마리의 침팬지에게 임상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실험용 침팬지는 모두 안락사를 시키게 된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뛰어난 지능을 보였던 침팬지에게 새끼가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 윌은 차마 안락사를 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키우게 된다. 바로 그 침팬지가 시저다. 시간이 흐를수록 놀라운 지능과 감성을 보이는 시저는 뜻하지 않게 이웃을 공격하게 되고 영장류 보호시설에 갇히게 된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그 후 보호시설에 갇힌 시저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고 탈출해 우뚝 서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가 원작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역시 진화된 기술이다. 골룸으로 유명세를 탄 앤디 서키스가 킹콩에 이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도 시저 역을 맡아 모션 캡쳐 연기의 진수를 보인다. 함께 식탁에 앉은 자리에서 알츠하이머를 앓는 윌의 아버지가 포크를 거꾸로 집어 들 때 근심어린 눈으로 바로 잡아 쥐어주는 장면, 이웃 남자가 소동을 일으킨 윌의 아버지를 향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순간 분노를 터트리는 장면, “냄새나는 원숭이”로 인간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때의 모멸감과 자신은 인간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고 정체성 혼란에 빠져드는 순간, 침팬지들의 리더로 윌을 위기에서 구해내던 순간 등 시저가 인간보다 더 당당한 자존감을 뿜을 수 있었던 것은 앤디 서키스의 연기력과 한층 진화된 CG 기술력 덕분이다.
그 덕분에 시저는 대사 없이 눈빛 하나로 슬픔과 기쁨, 분노, 온갖 복잡다단한 감정을 충분히 전달하면서 관객의 감성을 사로잡는다. 영장류 보호시설에 갇힌 채로 고통과 분노를 참고 영리하게 무리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게 되는 시저의 ‘고귀함은’ 침팬지들에 온갖 희롱과 물리적 학대를 일삼는 천박한 인간과 대조되며 더 빛을 발한다. 금문교 다리에서 대치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해치려는 다른 침팬지를 만류하는 시저의 ‘윤리성’은 더욱 고차원적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는 한 침팬지의 모습에 몰입하고 감동만 하기에는 그러나 어딘지 꺼림칙하고 불편한 감을 떨치기 어렵다. 침팬지를 통해 인간애를 역설하는 것, 침팬지를 통해 인간을 조롱하는 것, 침팬지를 통해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는 것, 인간만이 꼭 만물의 영장이냐는 회의...
본질적으로 보다 진화된 세상을 구현하려는 욕심 때문에 낳은 부작용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로 귀결되어선 곤란하지 않을까? 아무리 인간의 탐욕이 세상을 망친다고 해도 지구는 태양을 돌듯, 인간의 욕심이 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회의하는 순간 인간의 가치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지능이 뛰어난 원숭이의 노예가 된 인간이라는 원작이 준 충격보다 감성을 뛰어넘어 자존감과 품위까지 갖춘 원숭이의 당당함이 인간을 압도하는, 그래서 인간을 노예화할만한 ‘정당성’마저 부여하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주는 충격과 불편함은 그래서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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