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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바르] [3] 끌로드 샤브롤의 후기 영화들

문명의 원죄 혹은 죄의식


트뤼포가 ‘장르의 폭발’이라 불리는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여러 혼합 장르들의 변주를 꾀했다면, 샤브롤은 일관되게 단 하나의 장르에만 집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른바 ‘범죄 영화’(films policiers)로 통칭되는 영화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의 범죄 영화는 다소 괴이한 외피를 두르고 있다. 형식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장르 영화로서 샤브롤의 영화들은 장르의 규칙을 고스란히 따르면서도 주제적 측면에서는 독창적인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때문에 범죄물, 스릴러 혹은 필름 누아르 형식의 영화들에 천착했다는 이유만으로 끌로드 샤브롤을 누벨바그 세대 감독들 중에서 가장 ‘상업적’인 감독으로 쉽게 결론짓는 행위는 성급한 결론이다. 샤브롤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이렇게 말했다. “흥미를 불러일으키면서 사람들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그것이 바로 스릴러 장르의 아름다움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스릴러는 단순한 오락 장르가 아니다.”

샤브롤의 ‘범죄 영화’는 그것을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즉각적이고 폭발적인 감정의 쥐어짬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어느 중간 경계쯤에서 아주 서서히 관객의 심리를 조여 오는 쪽에 가깝다.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이러한 긴장감의 근저에는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영화에서 필경 ‘나’와 ‘나 아닌 존재’ 사이의 구분이 또렷이 갈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며 감정이입할 수 있는 동일시의 대상을 우리는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즉 샤브롤의 영화적 세계는 정/반의 변증법적 구조를 취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내적이고 보편적인 양상을 띤다. 전형적인 히치콕 영화에서 보듯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에 발생되는 심리적 긴장감을 샤브롤의 영화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의 영화에서 양자는 구별되지 않는다. 아니 가늠할 수 없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모든 이가 항상 유죄이고 죄인이 되는 것이다. 모나코는 이를 두고 ‘프리츠 랑 유형의 죄의식’이라 일컬은 바 있는데, 샤브롤은 바로 이 인간의 ‘원죄’(original sin)를 둘러싼 문제들을 속 깊숙이 파고든다.

*사진설명 :ⓒ의식

<의식>(‘95)에서 샤브롤은 계급의 문제를 다룬다. 어느 한적한 교외의 저택에서 가정부 일을 하게 된 소피에게는 한 가지 결정적인 콤플렉스가 있다. 그녀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한다. 하지만 주인집에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다. 소피는 같은 동네 우체국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잔느(이자벨 위페르)와 가까운 사이가 되는데, 이후 주인집과 소피와 잔느 일행 사이에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균열의 정체는 계급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일종의 오해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알아버린 주인집 딸에게 소피는 부당한 협박을 하게 되고, 우편이 매번 개봉된 흔적과 함께 도달하는 것과 관련하여 주인집 일가가 잔느를 직접적으로 의심하게 되면서 그들 간에는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잔느는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과거 자신의 딸을 살해한 혐의를 가지고 있는데 주인집은 이를 근거로 잔느를 더더욱 경계하고 의심한다. 결국 딸을 협박한 소피에게 주인집은 해고 통보를 전하고, 극의 말미에 가서 그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른바 개미와 베짱이의 비유로 대변되는 계급적 원죄. 베짱이가 겨울에 빈털터리가 되어 오갈 데 없는 신분이 된 것은 그가 여름 내내 일하지 않고 놀았기 때문에 비롯된 당연한 귀결이라는 식의 논리.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배제된 프롤레타리아의 진짜배기 전사(前史) 혹은 계급적 원죄.

*사진설명 :ⓒ악의 꽃

<악의 꽃>(‘03)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내밀한 성적 문제인 ’근친상감‘의 모티브를 다루고 있다. 미셸은 이복 오빠인 프랑수아와 은밀한 연인 사이다. 숙모인 린은 그런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 사실을 묵인하고 있다. 그녀 역시 과거 같은 전사가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한 미셸의 할아버지이자 린의 아버지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심지어 자신의 친아들마저 처형해 버리는데, 문제는 린이 바로 그 아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아버지인 제라르 역시 의붓딸인 미셸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져대며, 설상가상으로 그런 제라르와 재혼한 미셸의 엄마는 재혼 전 제라르의 형제와 부부 사이기도 했다. 가족사 전체를 관류하는 원죄로서 이러한 근친상간이라는 죄의식은 <악의 꽃> 전체의 분위기를 은밀하게 그렇지만 총체적으로 휘돌고 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기승전결 식의 명확한 사건 전개 속에서 드러나지는 않는 반면, 눈에 띄지 않는 일상생활의 진부한 관습 및 의식 속에 속해 있는 것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라는 식으로 계급을 나누고, 근친상간을 금하는 등의 외부적 기준은 전술한 두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든 개인을 속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는 개인 내면의 ‘공격성’을 발현시키는 것으로 영화 속에서 결론지어진다. 개인감정의 불일치와 좌절이 종국에는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제 ‘원죄’의 근원은 밝혀졌다. 원죄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사회적’ 규범체계에 다름 아니다. ‘자연’과 ‘문명’ 사이에 가로막힌 ‘스크린’. 샤브롤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영화에서 이 양자 사이의 희미한, 그렇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간극의 본질을 스크린에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간극을 스크린에서 ‘발견’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이종찬_문화평론가

 

 

출처:네오이마주 http://www.neoimag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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