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선거운동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18일 화요일 저녁, 국민원로는 종로와 명동을 다녀왔다. 대통령 후보자들의 선거유세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10년 만에 육안으로 접하는 대통령 선거 유세현장이다. 5년 전에는 투표일 두 달 전부터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했었다. 당시, 내 방을 선거캠프 삼아 하루에 16시간씩 일하며 창출하려 노력했던 정권은 지금은 쫄딱 망했다. 그냥 망하기만 하면 좋았으련만 혼자 망하기 억울해서인지 차기 정권을 자격 없는 인물에게 공짜로 헌납까지 했다.
오후 7시 10분쯤에 종각역 앞의 국세청 건물에 도착했다. 거기서 문국현 후보의 유세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예정보다 30분 정도 늦게 진행된다는 소식이다. 선거운동 최종일은 축구시합과 비슷한 양상을 띤다. 전략이고 전술이고 없다. 상대팀 골문을 향해 닥치고 센터링이다. 유권자들 모인 장소에서는 무조건 악수하고 보는 것이다. 문후보가 어디에선가 일정에 없던 즉석유세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종로에서 더 지체했다가는 다른 후보들의 유세는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명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선거운동 끝나는 날의 명동유세는 대통령 선거의 불문율처럼 굳어져 있다. 명동으로 걸어가는 중간에 청계천을 지나게 되었다. 청계광장 방면에서 이명박 후보의 유세가 열리고 있었다. 청계 이명박 선생다운 발상이다. 잠시 들러볼까 하다가 괜히 머릿수 하나만 보태주는 듯해 이내 생각을 접고 말았다. 방송카메라는 반대자도 지지자에 포함시킨다.
명동에 당도하니 예상대로 시끌벅적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선거운동에 관심이 없이 쇼핑에만 열중” 따위의 상투적 뉴스멘트는 쓰지 않으련다. 어차피 선거할 사람은 다 한다. 명동성당 가까운 지점에서 좌우의 육박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호 3번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운동원들과 기호 12번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이 50미터도 채 안 되는 간격을 사이에 두고서 목청대결과 율동싸움을 열심히 벌이는 중이었다. 그 중간에 자리를 잡고서 후보자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양쪽에서 확성기를 고음으로 틀어대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대충 분위기만 살피고 철수를 결정했다. 그럼에도 들어야 할 얘기는 거의 들었다. 양측의 연설내용은 대단히 비슷했다. 이명박은 부패했고, 정동영은 무능하다는 주장이었다. 대한민국 좌우의 거리는 국민들의 생각과는 달리 별로 멀지 않다. 한 블록도 안 되는 지근거리에 위치한 이회창과 권영길의 유세차량은 이를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명동을 벗어난 다음, 낙원상가 뒤편에 사무실이 있는 낯익은 후배를 만나 감자탕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반주로 소주를 마셨다. 남부럽지 않게 욕을 먹는 후배다. 내 주변인간들의 특징은 서로가 서로를 욕하는 관계라는 거다. 우리는 남을 욕하는 만큼 남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남한테 욕을 얻어먹는 만큼 또 남들을 욕한다. 따라서 모두들 큰 불만은 없다.
술을 몇 잔 마시던 나는 후배에게 북한문제와 대미관계가 언제까지 우리나라의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중심주제의 역할을 독점해야 하는지 물었다. 사실 후배의 대답을 들으려는 목적의 질문은 아니었다. 내 스스로 이미 답변을 준비한 터였기 때문이다.
“북한문제와 대미관계는 우리가 핸들링할 수 있는 여지가 극히 좁은 이슈야. 이걸 가지고 편을 가르는 건 아주 띨빵한 행위지. 우리는 우리가 핸들링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지지고 볶아야 해. 그걸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눠야 해.” 난 기분이 유쾌해지면 평상시보다도 더 말을 더듬는다. 대부분의 말더듬이들은 긴장을 하면 말을 더듬는데 나의 경우는 정반대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남북정상회담이 왜 열렸겠어? 부시가 오케이를 해준 덕에 열렸지. 부시가 승낙 안 하면 盧가 무슨 재주로 김정일을 만나겠어? 물론 통일도 좋고, 민족자주도 좋지. 하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가 당장 핸들링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야. 하지만 그린벨트 계속 묶고, 고교평준화 정책 유지하는 건 우리가 충분히 핸들링할 사항들이야. 우리가 핸들링 가능한 범위 안에선 좌우의 차이가 의외로 굉장히 적어. 마치 권영길과 이회창 유세차들처럼 말이지.”
나의 열변 아닌 열변은 지칠 줄을 몰랐다. “북한문제와 대미관계를 중앙에 두는 건 되게 멍청한 짓이야. 그게 우리가 핸들링할 수 있는 건가? 남들이 보면 손가락질할 노릇이지. 예컨대 회사 남자직원들끼리 같은 데서 근무하는 여직원을 놓고 싸운다고 생각해봐. 이치에 닿는 일이지. 그렇지만 자기네가 전연 터치할 수 없는 김태희를 두고 다툰다고 상상해봐. 미친놈들 소리 들어도 싸. 우리나라 진보와 보수는 꼭 김태희 때문에 갈등하는 꼴이라니까. 그 틈새를 비집고 노□□, ○○박 따위의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며, 그렇다고 중도는 더욱더 아닌 잡X들이 제 세상 만난 것 같이 득세하는 거야.”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김태희 탓에 싸움박질 하던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모종의 빅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 단순히 절충하고 조합하는 차원을 넘어 과감하게 줄 것 주고, 받을 건 받는 정책적 대교환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뜻이지. 보수우파세력이 국방과 치안을 책임지고, 진보좌파진영이 노동과 환경을 전담하는 구도로.” 이후의 논의는 무의미한 뒷담화와 영양가 없는 농담 따먹기가 주류를 이뤘으므로 더는 별도로 기록하지 않겠다.
어떤 문제이건 종국에는 여자문제로 귀착되기 마련인 듯싶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둘러본 대선유세 현장의 관건이 김태희였다니! 차라리 ‘며느리 전성시대’의 이수경을 화제로 올릴 걸 그랬나? 영화에서 화끈한 베드신을 연기했다는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국민원로에게 딱 알맞을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결론이자 교훈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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