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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4)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12월 26일판, 번역 : 황철수).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 항목은 지금껏 한국에는 전혀, 또는 거의 소개된 바가 없는 관련 일본인들(군인, 종군기자, 외교관)의 반박 증언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관련해서는 앞서 번역된 ▲ ‘난징사건(南京事件)’(한국어 번역), ▲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한국어 번역),  ▲ ‘난징사건의 피해자수(南京事件の被害者数)’(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은, 난징사건과 관련한 여러 증언들에 대해 설명하는 항목이다.


목차 


1 일본인에 의한 증언 

   1.1 도쿄재판 

   1.2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 

   1.3 ‘대학살’은 없었다는 증언


2 중국인의 증언 


3 구미인의 증언 


4 참고문헌 

 



1 일본인에 의한 증언(日本人による証言)

1.1 도쿄재판(東京裁判)

도쿄재판에 출두한 일본인 증인들의 증언은 선서가 이뤄진 증언이며 검사에 의한 반대 심문이 이루어졌다. 반면, 중국인 증인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반대 심문이 이뤄지지 않았다.

 • 상하이 파견군 법무관 겸 검찰인 츠카모토 코지(塚本浩次)는 “내가 처단(処断)했던 사건에서 장교가 네다섯 명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나머지는 군인에 의한 산발적인 사건이 대부분이었다. 죄종(罪種)은 주로 약탈, 강간이며, 상해와 절도는 적었고, 이에 기인하는 치사(致死)도 극히 적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살인도 두세 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방화범을 처단한 기억은 없으며, 또 집단적 학살범을 처리한 적도 없다”고 증언했다. 

 • 중지나(中支那) 방면군 참모인 나카야마 야스토(中山寧人)는 당시 정보 수집을 관할하고 있었다. 나카야마 야스토는 “난징에 몇 번 갔었지만, 세간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은 큰 사건은 당시 듣지 못했으며 또 본 적도 없다” “순찰 당시에 봤던 두 곳에서 시체는 모두 군인의 시체였으며, 난징 성 안쪽에서도 성 바깥쪽에서도 민간인의 시체는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또한, 난징사건에 대해 들은 것은 종전 이후라며, 난징사건과 관련해 다음의 4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서, 1) 시민에 대한 학살 사건은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 2) 포로의 학살도 “알려진 이외의 것은 없다”, 3) 외국의 권익, 특히 재산에 대한 침해는 일부 있었지만 이는 중국병사가 했는지 일본병사가 했는지 불분명하고, 4) 부녀자에 대한 불법 행위와 약탈은 “소규모로는 있었다고 생각되며,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선서진술서에서 증언했다. 



 • 나카자와 미쓰오(中澤三夫) 제 16사단 참모장은 “일본군에 의한 물자 취득 사실은, 헌병을 통해 소수의 통보는 받았다. 그러나, 주민의 도망과 함께 자재도 대부분 같이 반출되고, 가옥도 빈집 같은 것이 많았다. 따라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약탈했다는 사실은 전혀 들은 바 없으며, 물론 사령부로서도, 그러한 불법 행위를 명령하고, 묵인하고, 허용한 사실도 전혀 없다. 중국 전쟁터에서의 약탈, 파괴는 대부분이 후퇴하는 지나군(支那軍)에 이어서 정신틈입(挺身闖入, 기회를 보아 재빨리 달아남)하는 궁민(窮民)의 상투 수단이라는 것을 나는 약탈의 피해자인 지나인(支那人)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생략)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계획적인 강간이 이루어진 사실은 전혀 없다. 소수의 산발적인 풍기범은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법에 따라 처벌했다“고 증언했다. 

 •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중지나 파견군 사령관)은, “당시에 내가 아군 장병들의 군기 풍기의 숙정, 기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취한 제반 조치는, 앞서의 증인인 나카야마 야스토가 상세하게 증언했기 때문에 다시 설명하지는 않겠다. 난징 점령과 관련하여 취했던 세심한 배려와는 별개로, 점령 당시 이상한 상태에서 흥분한 일부 젊은 장병 사이에서 폭행을 한 사람이 있었던 듯 하고 이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덧붙여서 말하면, 난징 함락 당시, 나는 난징을 떠났고 대략 140마일 간 쑤저우(蘇州)에서 와병 중이었으며, 내 명령에 반해서 이러한 폭행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알지 못했으며, 게다가 보고도 전혀 없었고, 17일 난징 입성 후에야 처음으로 헌병 대장에서 이것을 듣고서 각 부대에게 명령하여 즉시 엄격한 조사와 처벌을 하도록 했다. 다만, 전시의 지나병 및 일부 불만을 가진 민중이, 전란을 틈타 상습적으로 폭행 약탈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며, 난징 함락 당시 폭행 약탈 중에 지나군민의 행동으로 인한 것 또한 적지 않았다. 이것을 전부 일본군 장병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은, 사실을 강요하는 것이다. (중략) 난징 함락 후 1938년 2월까지 상하이에 거주했지만, 그동안, 12월 하순 난징에서 약간의 불상사건이 있었다고 소문을 들었을 뿐이지, 아무도 이러한 사실에 대해 공적보고를 받은 적이 없으며, 이 법정에서 검찰 측의 주장과 같은 대규모 학살 사건에 관해서는 1945년 종전 이후 도쿄에서의 미군 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듣고 알게 된 것이다 (중략) 난징 공략 전투에 즈음하여, 지나군민이 폭격, 총포, 화재 등으로 많은 사상은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검찰 측이 주장하는, 계획적 또는 집단적 학살을 한 사실은 절대 없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도쿄재판에서 마츠이 이와네는 (부하 장병들의 전쟁범죄를 막지못한) 부작위(不作爲)의 책임을 추궁당하고 BC급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1.2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虐殺があったとする証言)

당시 실제 종군했던 일본의 전 군인, 외교관, 기자 등의 증언이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학살 숫자나 목격한 현장이 증언자에 따라 다른 것에는 주의하라.

육군(陸軍)

 • 하타 켄스케(秦賢介)는 1957년, 야마다 지대(山田支隊)가 무푸산(幕府山)에서 2만 명의 포로를 학살했다고 썼다. 그러나, 후쿠시마민유(福島民友)신문의 ‘향토부대전기(郷土部隊戦記)’에서 야마다(山田) 여단장, 모로즈미(両角) 연대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증했다. 야마다 지대에 종군한 후쿠시마민보(福島民報)의 야나이 마사고로(箭内正五郎)는 당시 하타 켄스케는 난징에도, 상하이에도 간 바가 없었으므로 전후에 군인들이 술꾼들에게 한 말을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즈키 아키라(鈴木明)는 하타 켄스케의 글은 픽션이라고 했으며,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도 “부정확한 소문”이라고 평하고,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는 하타 켄스케를 ‘거짓 증언자’로 보고 부정했다. 

 • 다도코로 고조(田所耕三)는 1971년에 아사히 예능(アサヒ芸能)에서 “우리는 하관(下関, 난징성 서북단 선착장)에 있었다. 철조망 철조를 뜯어내서 붙잡은 무리들을 열 명 정도 씩 묶어 우물에 던져놓고 기름을 두르고 태워버렸다. (생략) 여자가 가장 큰 피해자였다. 노인도 전부 그랬다. 트럭으로 부락(部落)을 덮치고, 여자들을 약탈하고 군인들끼리 나눴다. 군인 15명에서 20명에 여자 1명. 지나의 여자는 기술이 좋았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필사적인 것인 것이겠지만, 상당히 좋았다” “본보기를 위해 포로를 죽이기도 했다. 귀를 잘랐다. 코도 잘랐다. 입안에 대검을 꽂아 잘라버렸다. 눈 아래에 대검을 옆으로 꽂으면, 티눈 같은 물컹물컹한 흰 것이 다섯 치(寸) 정도 늘어진다. 이런 것도 해야지, 그 외에는 아무 재미가 없으니까. 상륙 이후 오랜만의 놀이니까. 장교? 모르는 척 하더라고”라고 증언했다. 그 후에 다도코로 고조의 이러한 증언은 호라 도미오(洞富雄)와 아이리스 장(Iris Chang), 모토 히로시(本宮ひろ志)의 ‘나라가 불탄다(国が燃える)’에서도 인용되었다. 또 ‘뉴스위크(Newsweek)’ 1997년 11월 30일자는 이런 다도코로 증언(제 114사단)을 소개하면서, 1971년의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과정에서 파키스탄 군인에 의한 뱅골 여성에게 대한 집단 강간을 제외한다면, 난징사건에서의 집단 강간은 세계 역사상 최대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난징사건 연구자이자 ‘난징전사(南京戦史)’(가이코샤(偕行社)) 편집위원인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에 따르면, 미토(水戸)의 병사라면 제 102연대로서, 하관까지 가지 않았으며 또한 며칠 후 난징에서 전진했다면서 다도코로 고조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거짓 증언자’라고 결론지었다. 후에 다도코로 고조는 아라 켄이치(阿羅健一)와의 면회 자리에서 “(르포라이터가) 난징에서 잔인한 이야기에 집착했기 때문에, 잠깐 동안 난징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해주면, 르포라이터는 숫제 눈 색깔이 바뀌어서는 그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런 태도를 보고서 나는 더 부풀려서 이야기를 했다. 르포라이터는 더욱 흥분했다. 그것이 그 증언이며, 나 자신은 성 안쪽에 들어간 적도 하관에 간 적도 없다. 그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말이었다”고 하면서 증언이 허위였다고 밝혔다.

 • 아카호시 요시오(赤星義雄, 보병 13연대 이등병)는 1979년, 창가학회(創価学会) 청년부 반전(反戦) 출판위원회의 책을 통해, 14일 하관의 양자강(揚子江) 유역에서 “넓은 강폭에도 가득히 무수한 시체가 떠있었다” “5만 명 이상” “대부분이 민간인인 시체가 흐르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서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유속을 시속 몇 킬로미터 정도로 본대도 몇 시간만 지나도 난징에서 (그러한 시체들은) 볼 수 없게 된다’ ‘물이 탁하고 일부만 수면 위로 나와 있는 익사체를 멀리서 보고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또 나이 등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하관은 중국군에 의해 불타고 주민들이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성문은 9일에 폐쇄되고 주민은 출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정작 양자강 위에 있었던 미국, 영국, 일본의 함선, 연락선의 승무원, 편승한 신문기자, 정박장 사령부의 일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었다’ 등의 의문을 제시했다.

 • 다카시로 모리카즈(高城守一, 치중(輜重) 6연대 소대장)도 동 창가학회 청년부 반전 출판위원회 책에서 “난징에 이틀 동안 있었다” “1937년 12월 14일 하관(샤칸(シャーカン))의 병참까지 물자를 가지러 갔다” “하관에는 몇 척의 수송선, 호위함도 보였다” “(양자강에) 민간인으로 생각되는 수많은 시체가 떠올랐다” “열 명 전후의 쿨리(クーリー, 중국의 하층 인부)가 사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엄청난 양말(糧秣, 병량과 마초)이 양육(揚陸, 물속의 물건을 뭍으로 건져올림)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군함의 돌입은 12월 13일 15시 40분으로 “군함 이외의 화물선이 난징까지 운항하는 것은 기뢰 제거가 진행된 18일 이후이며 14일이라는 것은 이상하다”고 비판했다. 정박장 사령부 근무인 카지타니(梶谷) 일기에 이러한 날짜 및 업무가 기록되어 있다.

 • 나카가와 세이치로(中川誠一郎, 가명, 야포 6연대)도 동 창가학회 청년부 반전 출판위원회 책에서 중화문(中華門) 공격에 가담하고 함락 후에, “난징성을 그냥 지나가고 즉시 우후(蕪湖)로 향했다” “도중에 하관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맣게 탄 수백 대의 자동차와 수백 명에 달하는 주민의 시체를 보았다” “‘이 고기도 맛있다’라며 나온 고기를 몇 명의 병사가 먹었다” “그것은 중국 병사의 허벅지살이었다고 나중에 들었다”고 인육식을 증언했다.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이 증언자의 “늙은 농부를 때려죽인 장면도 봤다” “2백 여명의 패잔병 ... ‘포로를 데리고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가?’라고 일갈하고 며칠 후 이들을 몰살했다고 들었다”는 회상을, 하관 석방 포로의 운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서 채용했다. 그러나 중화문은 난징성의 남쪽이며 우후는 난징에서 남남서 90킬로미터 근처에 있다. 하관은 난징의 북서쪽 끝이며 성 바깥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갔을 경우에는 하관을 통과하지 않는다. 게다가 응소(応召, 병력 기재 없음)하고서 포 취급 훈련도 거치지 않고 6일 만에 분대장이 되었다는 것, 또 우후에서는 야포를 떠나 선무반(宣撫班)의 반장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증언자의 군력(軍歴)은 부자연스럽다. 

 • 나카야마 시게오(中山重夫, 육군 전차대 상등병・수리병)은 1984년 6월 23일 아사히신문에서 “난징 입성 이틀 전, 교외의 위화타이(雨花台)에서” “백기를 들고 오는 중국인을 호(壕) 위에 앉히고는 일본 병사들이 차례로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단번에 죽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을 군홧발로 차서 호에 떨어뜨리고서는 흙으로 묻었다. 노인이든 아이든 분별 없는 살육이 이어졌다" “4시간 정도 응시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전쟁에 대한 이야기꾼으로서 기록 영화로도 소개되었다. 하지만, 우네모토 마사미(畝本正巳)와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의 조사로서, 나카야마가 소속되어 있던 전차 제1대대(이와나카 요시하루(岩仲義治) 대좌)는 중산문(中山門)의 정면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으며, 이에 위화타이에서 목격을 한다는 것은 장소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했던 것이 밝혀졌다. 또한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가 아사히신문에 관련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 소네 가즈오(曽根一夫)는 1984년경 수기에서 “분대장으로서 체면 때문에 포로 참수를 했다” “분대의 선두에서 결사(決死)의 도하(渡河)를 했다” “분대원을 이끌고 약탈, (분대원 뒤에서) 윤간, 살인을 했다” 등등을 기록했다. 쓰루분카(都留文科)대학 교수인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가 집필한 교과서 ‘세계사 B’(1993년 검정)는 소네 가즈오의 문장과 유사한 문장을 인용하고서는 ‘약탈’은 군의 명령이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이타쿠라 요시아키가 원본 제시를 요구했지만 가사하라 도쿠시도, 출판사인 히토츠바시슈판(一橋出版)도 이를 무시했다.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문부성에 개정을 요구하고, 잡지 ‘쇼쿤!(諸君!)’에 논고를 발표하는 등 각 방면에서 움직였고 출판사 측이 ‘군의 명령’이 소네 가즈오 책에서의 인용임을 인정하고 내용을 수정했다. 이타쿠라 요시아키의 반증은, 연대가 하야진(夏野鎮)까지 행군했고 “소네 가즈오 씨는 이 징발대에 참가하지 않았다” “행군 중에 마부는 말과 함께 있었고 ... 소네 가즈오 씨가 징발에 참여해서, 비행을 체험하거나 실제 이를 목격했을 리가 없다”, 즉 자신이 나간 적도 없는 징발에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우회에서 대사(隊史), 전투상세보도, 진중일지 등 다른 자료와의 고증을 통해서 소네 가즈오가 보병 분대장이 아니라, 야전 12중대 제1분대의 전마(前馬), 1등병의 신병으로서 마부였던 것으로 판명됐다. 이밖에 난징으로 가는 도중의 학살 원인을 (시점을) 2주 늦춘 양말(糧秣, 군량과 마초) 부족에 돌린 점, 가상의 하관 대학살, 전우의 잔학담부락 습격에 대해서도 해당 전우는 부정하고 있으며, 일기도 창작이었다. 한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요망에 답해주는 거의 절호(要望)의 증언 기록”으로 소네 가즈오의 수기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다른 ‘전문기(伝聞記, 소문)’가 아닌 소네 가즈오의 수기를 포로 살해의 예, 쯔진산(紫金山) 근처 주민 살해, 쿠냥(クーニャン, 젊은 여성) 사냥, 잔학행위의 심적 요인을 설명하는데 인용했다.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하타 이쿠히코에게 소네 가즈오의 수기 전체 삭제를 요구했다. 

 • 아즈마 시로(東史郎)는 1987년 경, 자신의 일기를 일본 공산당 신문 ‘아카하타(赤旗)’에 연재하고 이를 저서 ‘우리의 난징 플래툰 - 한 소집병이 체험한 난징대학살(わが南京プラトーン―一召集兵の体験した南京大虐殺)’로 간행했다. 그는 “1938년 1월 23일, 난징 전출을 위해 갔던 하관이라고 생각되는 부두에서 물가에 적병의 시체가 많이 있었다” “매일 트럭으로 패잔병을 강속으로 밀어넣고 총을 쏴서 죽인다고, 그 병사로부터 들었다” “숨어있는 여자를 발견하면 100% 강간했다” “1명이 아니라 5명이 강간했다” “그 다음에는 죽이고, 불태웠다” “죄책감은 없었다” “(상관인 전 육군 제16사단 보병 제20연대 오장(伍長)이) 중국인을 우편낭에 넣고선, 휘발유를 들이부어 불태우거나, 수류탄을 우편낭 줄에 묶어 연못 속에 던졌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아즈마 시로는 전 상관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제소됐고, 전 상관이 했다고 하는 우편낭에 의한 살인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일기도 몇 년 후에 쓴 것으로 최고재판소에서 판정됐다. 1993년, 가사하라 도쿠시는 병사가 편안히 잠자기 위한 목적으로 부락 농민을 죽였다면서 교과서 ‘세계사 B’에서 아즈마 시로 수기를 인용했다. 우에스기 치토시(上杉千年)는 그 부적당함을 설파했다. 또한 이타쿠라 요시아키에 따르면, 정박장 사령부는 12월 28일까지 항만의 시체 처리를 끝냈다. 패잔병 소탕의 경우 제2차 편의병(게릴라) 사냥은 1월 5일에 완료했다. 아즈마 시로에 대한 검증 없는 인용은 내용의 진위를 둘러싼 재판이 계류 중이기도 하여 대체되었다. 한편, 아즈마 시로는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영웅으로 각지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2015년,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의 공립 고등학교의 세계사 수업에서 아즈마 증언이 교재로 사용되었다.

 • 오타 토시오(太田寿男)가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서 1954년에 진술했던 내용이 1990년에 보도되었다(산케이신문 1990년 9월 4일. 마이니치신문 1990년 12월 14일 석간). 진술에서는, A 소좌가 1937년 12월 14일부터 15일까지 6.5만 체의 시체 중 3.5만 체를 양자강에 흘려보냈고, 3만 체는 강 건너 편에서 소각했다. 오타 토시오는 16일부터 18일까지 1.9만 체, A 소좌는 1.6만 체의 시체를 흘려보냈다. 난징 정박장 사령부가 14일에서 18일까지 처리한 시체는 10만 체(산케이신문). 동 사령부 이외의 난징 공략 부대에 의한 5만 체의 시체 처리와 합하면 15만 체의 시체를 처리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진술이 사실이라면 중국 측 주장 ‘15만 5천 여 명’과 합해 ‘난징대학살 30만 명’이 증명된다면서 ‘침화일군난징대학살사고(侵華日軍南京大屠殺史稿)’에 요지가 게재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서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해당 진술서는 ‘인죄(認罪, 죄를 스스로 고백, 인정토록 함)’를 강요하고 ‘사상개조’의 정도에 따라 죄의 경중이 결정되는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장기 구금 중(사건으로부터 17년 후인 1954년)에 쓴 진술서라고 지적했다. 또한, 마이니치신문 다케다 마사히로(竹田昌弘)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난징사건 연구자이자 가이코샤(偕行社)의 ‘난징전사(南京戦史)’ 편집위원인 우네무토 마사미(畝本正己)가 정박장 사령부 근무인 카지타니(梶谷) 일기에는 “오타 토시오 소좌가 도착한 것이 12월 25일”이라고 되어있어서,* 오타 토시오의 진술은 허위라고 설명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오타 토시오의 진술을 그대로 보도했다. 이에 대해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명백한 범죄”라면서 마이니치신문사에 항의했지만 회사는 사과하지 않았다. 카지타니 일기에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가 있는 것, 장기구금 중에 나온 진술인 것, 1차 자료에 의한 검증 등으로 판단하였을 때 오타 토시오의 진술은 “객관적으로 신빙성 제로”라고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결론지었다. 산케이신문도 부하의 일기를 이유로 신빙성을 부정했다. 또, 마이니치신문은 아이치(愛知)대학 교수인 에구치 게이이치(江口圭一)가 “(오타 토시오의 진술) 내용은 믿을 만하다”라고 했다고 보도했지만, 정작 에구치 게이이치는 카지타니 일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과 관련해선 설득력이 부족하다면서 기사를 쓴 다케다 마사히로 기자에게 쓴소리를 했다. 후에 마이니치신문은 카지타니 일기에 대해 보도했다. 한편, 와세다대학 교수인 나카하라 미치코(中原道子)는 오타 토시오의 진술을 ‘진실’이라고 했다.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나카하라 미치코의 저작 7개, 논점 11가지에 대해서 진실이라는 증명을 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일중(日中) 양국 전문가의 연구를 근거로 한 것”이라는 이와나미(岩波) 출판사 측에서의 답변만 있었다.  나카하라 미치코는 이타쿠라 요시아키의 요구를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태도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며, 자신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 올바른 역사를 전하고 있다”면서 이타쿠라 요시아키의 요구를 일축했다. 

[* “정박장 사령부에서 근무하는 카지타니 겐로(梶谷健郎) 군조(軍曹)가 당시 쓴 일기(방위청방위연구소전사부(防衛庁防衛研究所戦史部) 소장)에는, 12월 25일에 ‘상열(常熱)에서 오타 소좌 외(外) 온다’고 되어 있고, 공술서(供述書)에서 말하는 16~18일의 시신 처리는 불가능하다. 아다치 소좌도 입성식(17일), 위령제(18일)에 참석해 다수의 시체처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26일부터 이틀간 처리한 숫자는 기껏해야 1000구 정도. 아녀자의 시체는 없었다”(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사실은 이랬다 난징사건(本当はこうだった南京事件)’(1999) ]

 • 후나바시 쇼키치(船橋照吉)는, 1991년 경 ‘이시하라 발언을 허락하지 않는 교토 집회 실행위원회(石原発言を許さない京都集会実行委員会)’의 책자 ‘역사를 위조하는 것은 누구인가?(歴史を偽造するのは誰か?)’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이타쿠라 요시아키에 의한 재조사에서는 “기본 사항이 애매하고, 중요 사항도 빠뜨리고 있다”면서 또한, 이타쿠라 요시아키가 보병 9연대의 실전 기록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자, 후바나시 쇼키치는 결국 “나는 치중특무병이었다”고 하면서 ‘진실’을 말하고서 일기 위조를 인정했다. 후나바시 쇼키치는 “아즈마 시로(東史郎), ‘아카하타(赤旗)’의 기자인 시모사토 마사키(下里正樹, ‘숨겨진 연대사(隠された連隊史)’ 저자), 요시다 다모츠(吉田保, ‘교토기관지인쇄센터(京都機関紙印刷センター)’ 대표) 등으로부터 설득당해 할 수 없이 했던 것이라면서 여비를 지불할테니 중국에 가자는 권유가 있었다”라고 이타쿠라 요시아키에 말했다. 치중특무병(輜重特務兵, 오늘날의 운전병과)이라면, 최전선에서 토치카 공격을 했다거나 포로를 기관총으로 학살했다 등은 가상의 이야기가 된다. 

 • 2002년, 사회운동가 마쓰오카 다마키(松岡環) 편찬의 증언집 ‘난징전・닫힌 기억을 찾아 - 전 군인 102명의 증언(南京戦・閉ざされた記憶を尋ねて-元兵士一〇二人の証言)’(샤카이효오론샤(社会評論社))가 간행됐고, 뉴스스테이션(TV 아사히 계열(ANN)의 생방송 보도프로그램)에서도 방송됐다. 이 책의 부자연스러움이나 실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지아(亞細亞)대학 교수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와 근현대사 연구자인 아라 켄이치(阿羅健一) 등 부정파 뿐만 아니라, 전 아사히신문 기자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와 난징사건 연구자인 오노 켄지(小野賢二) 등의 긍정파도 비판했다. 



해군(海軍)

 • 오쿠미야 마사타케(奥宮正武)는 1997년의 저서를 통해서 1937년 12월 25일, 부두 하류의 창고군(倉庫群)으로 약 30명의 중국인들이 뚜껑 없는 트럭으로 운반됐고, 구내(構內) 광장에서 포박된 중국인 수십 명이 군도와 총검으로 살해되고 양자강에 버려졌다고 했다. 12월 27일에도 같은 처형이 있었기 때문에 혼란 없이 중국인을 어떻게 데려 왔는지 하사관에게 물었더니, 하사관은 ‘성내에서 전쟁터 뒷처리를 하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배고픈 자는 손을 들어라’고 한 후 손을 든 자를 식사장소로 데려가듯 트럭에 싣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오쿠미야 마사타케는 전했다. 또, 일본도나 총검으로 처형하는 것은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면서 상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는 대답도 했다고 증언했다.

 • 2014년, 과거에 제24구축대, 우미카제(海風)의 신호병이었던 미타니 쇼(三谷翔)가 사회운동가인 마쓰오카 다마키(松岡環)의 모집에 응하고서는 증언을 하게 되었다. 미타니 쇼는, 1937년 12월 12일에 우론산(烏竜山) 포대를 양자강에서 공격했고, 12월 13일에 중산(中山) 부두 쪽에서 중국인 시체를 실은 4척의 뗏목을 목격했으며, 함락 4일 후 중산 북로(北路) 광장에 있던 50~60체 시신 중에는 “다수의 노인, 여성, 어린이도 있었고, 그래서 곧 일반 시민임을 알 수 있었다”는 증언을 중국망(中国網) 매체의 인터뷰를 통해 했다. 미타니 쇼는 이후 12월 18일 오후 군함 브리지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는데 하관 남안(南岸)에서 기관총 총성이 들려서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중국인이 처형되고 있었다고 하면서, 그 후에도 며칠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트럭으로 20, 30명이 연행되어 처형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난징을 떠난 것은 12월 25일이지만 그때까지 하관 해안에서는 매일 이러했다”고 증언했다. 미타니 쇼는 “중산 북로만 이러했던 것이 아니라 난징 전체가 지옥이었을 것이다. 육군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며, 정말 지나쳤다”고 말했다. 강소성(江蘇省) 사회과학원의 쑨자이웨이(孫宅巍)는 이 증언은 때, 지점, 시체 처리 방법 등 기존의 대학살의 사실과 부합하고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타니 쇼는 2015년 ‘일본테레비(日本テレビ)’의 NNN 다큐멘타리에서도 인터뷰를 통해 증언했다. 

보도원(報道員) 

 • 이마이 세이고(今井正剛, 아사히신문)는 1956년에, (1937년 12월 15일 밤) “수백, 수천 명” 중국인이 하관(샤칸), 양자강 부두에서 사살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아마 그 중 몇 퍼센트만이 패잔병이었고 그 외, 그 대부분이 난징시민이었을 것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며 패잔병이 아닌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했다. 또, 이른 아침에 시체를 처리하고 있던 쿨리들도 사살되었고, 어느 장교는 약 2만 명을 사살했다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완전한 섬멸 소탕”이라고 했다. 그러나, 1937년 12월 17일 도쿄 아사히신문의 좌담회에서는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당시 좌담회에 참석했던 하시모토 도미사부로(橋本登美三郎)도 학살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고 전후에 답하고 있다. 또, 이마이 세이고와 동행했던 아사히신문 기자 모리야마 다카시(森山喬)도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도쿄 아사히신문의 아다치 가즈오(足立和雄)는 “이마이 씨는 스스로 직접 보고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위험한 전선에는 나서지 않고, 항상 후방에 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마이 씨는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을 각색하여 쓰는 것을 잘했다”고 증언했다. 다케모토 타다오(竹本忠雄)와 오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는 당시 이마이 세이고의 일정에서는 현장을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말하고 있다.

 • 모리야마 요시오(守山義雄)는 1964년 이전(증언 초출(初出) 불명)에, “비전투원인 시민을 많이 죽였다. 많은 부녀자를 폭행하고 죽였으며 적어도 4만 명이 살해됐다”고 증언했다. 또, 전시 독일 유학생이었던 시노하라 세이에이(篠原正瑛)는 모리야마 요시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일본군은 노인, 여성, 어린이 등 삼만 수 천 여명의 중국인을 성벽에 몰아넣고서는 성벽 위에서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몰살하였기에 성벽 안쪽에는 피바다가 되어서 장화에 피가 흘러들어갈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난징에서 모리야마 요시오와 동행한 도쿄 아사히신문의 아다치 가즈오(足立和雄)는 “(장화에 피가 흘러들어갔다 등) 그런 것은 보지 못했고, 나중에 모리야마 요시모 씨로부터 들은 일도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 오야 소이치(大宅壮一, 종군 기자)는 1966년에 “난징 입성 전후, 입성까지의 과정에서 상당한 대학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30만 명이라든지, 건물의 3분의 1이라든지, 숫자는 조금도 신용할 수 없지만 말이다”라고 말했다.

 • 요미우리신문의 마가라(真柄) 카메라맨은, 입성식 이틀 정도 전에 제방이 있는 작은 강에서 중국인 2백 명 정도가 “기관총으로 살해당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난징대학살’이 아니었겠는가”하고 증언했다.  

 • 영화 ‘난징(南京)’의 제작자 시라이 시게루(白井茂)는 “학살의 현장을 두 번 보았다. 한번은 울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총살을 하고 있었다. 숫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양자강이 아닌 강에서, 기관총으로 쏘는 것도 보았다. (생략) 강을 건너고, 저쪽으로 헤엄을 쳐서 건너간 자도 있었다. 이백 명 정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위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대학살’이라는 소문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 영화 ‘난징’의 녹음기사인 후지이 신이치(藤井慎一)는 “이장먼(挹江門) 근처는 엄청난 시체 때문에 시체 위에 판자를 깔고서 그 위에 자동차가 다니는 정도였다. 공습의 흔적이 생생했다. 작은 강 옆의 문 안쪽에서 포로로 보이는 사람을 쏘는 것을 보았다. (생략) 시라이(白井) 씨와 함께 있었다. (생략) 그 이외에도, 은행 뒤에서 백 명 이상이 살해되는 것을 보았다. (생략) 학살의 소문은 들었던 것처럼 생각되지만, 목격한 것은 이 것뿐이다”라고 증언했다.

문관(文官)

 • 히다카 신로쿠로(日高信六郎, 외교관)는 도쿄재판에서 법정증언을 했으며, 1966년에는 “잔학 사건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관련하여 상부의 명령이 철저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포로의 처우에 대해서는, 일본군 고급 참모들의 경우에 마츠이 씨처럼 그 문제로 고심은 했었지만, 실제로는 입성 직후이기도 하고 두려움도 있어서 함부로 죽여 버린 것 같다. 양자강 연안에 포로들의 시체가 줄지어 방치되어 있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중략) (중략) 병사의 단속이 안 된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한번 잔학 행위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잔인한 것에 익숙해져, 또 일종의 가학적인 심리가 되는 것 같다.  (중략) 짐짝을 시민이 이송토록 하고, 그것이 끝나면 ‘수고했어’라고 하는 대신 그냥 쏘아 죽여 버린다. 불감증이 생겨서 별로 놀라지 않는 형편이었다”고 증언했다.

1.3 ‘대학살’은 없었다는 증언(「大虐殺」がなかったとする証言) 

육군(陸軍)

 •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중지나 방면 군사령관은 도쿄재판에서 “(대학살에 대한) 공적인 보고를 받은 적은 없으며 종전 후 미군 방송을 통해 처음 알았다”고 증언했고, 진술서에서 “순찰 시에 약 20명의 중국 병사의 전사 시체를 봤는데, 도시의 질서는 대체로 회복됐었다”며, “난징 입성 후, 비행(非行)이 있었다고 헌병 대장에게서 듣고서는 각 부대에 조사와 처벌을 시켰다”고 증언했다. 당시 마츠이 이와네의 부하는 비행 건수가 10건에서 20건 정도였다고 재판 전 심문에서 진술했다.

 • 상하이 파견군 오니시 하지메(大西一) 대위는 1937년 12월 13일 오후부터 난징에 입성, 난징 함락 후 1년간 특무기관장으로 체류했다. 당시 상하이 파견군의 학살 문제에 대해 “화제가 된 적이 없다”, “강간은 몇 건 있었지만 폭행과 약탈은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 상하이 파견군 촉탁, 군사령관부 오카다 다카시(岡田尚)는 강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일반시민을) 학살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성내에서의 화재도 기억이 없다”, 포로나 패잔병을 “(살해) 했던 적은 있다”며 당시 상황에서 “과연 그것을 학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라고 증언했다. 그런 후에 자신은 중국을 무척 좋아한다면서 만주국 건설에도 반대했다고 했다. 일지사변(日支事変)으로 일본이 지나친 면도 있었지만, 난징을 방위하는 중국군이 항복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중국 측의 문제로 그 책임자인 탕성즈(唐生智)가 도망친 것을 비판했으며 항복 거부가 없었다며 포로 살해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오카다 다카시는 1937년 12월 12일에 쑤저우(蘇州)에서 탕수이전(湯水鎮)으로 가는 길에 여군을 포함한 중국병 포로 1천 명에서 2천 명이 크리크(クリーク, 작은 샛강)의 둑에 앉혀져 처형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 제 10군 참모 다니다 이사무(谷田勇)는 1937년 12월 14일 오후 3시, 하관 부두에 시체 1000명~3000명이 있었는데 이는 제 16사단이 몰아붙인 것으로 “이것을 훗날 학살이라고 칭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하면서, 12월 19일까지 난징에 머무는 동안에 “시체의 숫자는 수천 내지 1만 정도로 하물며 집단 학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 측이 종전 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주장한 수십 만 명이라는 숫자는 과대한, 의도적인 과장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 제 10군 참모 가네코 린카이(金子倫介)는 난징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후, 도쿄재판에서 이를 듣고 놀랐다. 뭔가 숨기고 있다든가 말을 꺼리고 있다든가가 아니라 정말로 난징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 제 10군 참모 요시나가 수나오(吉永朴)는 “난징대학살은 백발삼천장(白髪三千丈, 고생했음을 과장되게 하는 말)식으로 나중에야 중국인들이 말하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 제 10군 참모 데라다 마사오(寺田雅雄)는 제 10군의 군기가 나쁘지 않았다면서 당시 난징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 제 10군 참모 센토 도시조(仙頭俊三)는 “12월 12일, 포구(양자강을 끼고 하관 건너편)에 진출했을 때 포구에는 아군의 15류(十五榴, 96식 15센티미터 탄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양자강 양쪽 연안에 부유한 적의 시체들은 목격했는데 수백 정도였을까, 중류(中流)에는 그다지 시체는 없었다. 하관 안벽(岸壁)이 선혈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목격했으며 시체는 손발이 묶여 있었다. 학살이라는 것은 당시는 전혀 몰랐다. 군기는 구니사키 지대(国崎支隊)의 경우에 나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 시종무관(侍従武官) 고토 미쓰죠(後藤光蔵)는 난징에 입성했을 때 “난징에는 사람 하나 없는 거리가 됐으며, 나는 어느 집에 숙박했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 상하이 파견군 특무부원 경리장교 오카다 이쓰지(岡田酉次)는 “중국군 중에는 여성 병사도 있었다, 저항하는 패잔병도 있었고 편의병도 있었다”면서 “이들이 살해당하는 것도 보았다. 그 시체에 대해서 나중에 학살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하고 증언하고 있다.

 • 참모본부 서무과장 이사야마 하루키(諫山春樹)는 참모본부 서무과가 모든 보고를 훑어보지만 일본군의 군기가 나빴다고 당시에 화제가 된 적은 없었고 “당시 학살 사건이 화제가 된 적도, 함구령을 내린 적도 절대 없다”고 증언했다. 

 •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 편성반 중지나 파견군 참모(1938년) 오오쓰키 아키라(大槻章)는, 학살 사건에 대해 “그런 흔적은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군사령부 참모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화제가 된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학살이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학살같은 것은 명령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있었다면 당시 화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 야포병 제 22연대장(종전시 제 21사단장) 미쿠니 나오토미(三国直福)는 당시 일본군 군기의 혼란이나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증언, 또한 자신이 광둥에서 전범 재판에서 피고가 된 경험과 관련해, 재판은 형편이 없었으며, 죄목은 미쿠니 나오토미가 왕징웨이(汪兆銘) 정권을 세웠다든가(미쿠니 나오토미는 자신이 난징 특무기관장이었지만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시민에게 폭행을 했다 등이었는데, 이에 대해 증거를 요구하면 그 증거란 것이 중국군이 시민에게 피해를 내놓으라고 명령한 것으로서 장소도 날짜도 사단이 있던 곳과 대부분 일치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 상하이 헌병대의 오카무라 데키죠(岡村適三)는 당시 사건에 대해 군기(軍紀) 문제도 특별히 들어 본 적이 없다, 일본군이 위세를 부린다는 것은 들었다고 증언했다. 

 • 제 16사단 보병 제 20연대(후쿠치야마(福知山) 연대) 대대장 모리오 미가쿠(森王琢)는 “우리 대대는 난징성의 동쪽 정문 중산문(中山門)을 공격했다. 격전이었지만 13일 오전 3시 10 분 포격으로 성벽을 무너뜨리고 그 기세로 성벽까지 기어오르고 군기(軍旗)를 세웠다, 그 때는 성 바깥 쪽 언덕에 있었으며 성 안쪽에는 사단장과 함께 15일에 입장했다. 숙영지를 보려고 육군성 선배를 만나서 그날 오후 둘이서 전장 시찰에 나섰다. 산릉(山陵), 자금산(紫金山) 등을 보고 걸었다. 이듬해 1월 19일 명령에 따라 전진했지만 그 전까지는 난징과 그 주변을 경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난징대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시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있었든지 없었든지 간에,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화재가 있었다는 사람, 없었다는 사람이 있다. 있었다고 하는 경우에는 불탄 자리로써 그것을 밝힐 수 있지만, 없었던 경우에는 아니라고 밝히기가 어렵다. 이와 마찬가지로, 난징학살이 있었다, 여성이 난폭한 일을 당했다, 화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 대부분은 거짓말이라는 점을 말씀드린다”고 증언하고 있다. 

 • 제 6사단 보병 제 23연대 중대장 요시카와 세이지(吉川正司)는 “돌입 다음날인 12월 13일에 성내 소탕을 했지만 성내에서는 적병을 한 명도 보지 못했고 일반인도 없는 완전한 죽음의 도시였다. 연대는 이후에 주력을 수서문(水西門) 동남쪽 지역의 시가지로 옮겼고 제 1대대로서 12월 21일까지 수서문 밖에서 주둔하고 경비를 섰지만 이듬해인 38년 1월 13일에 우후(蕪湖)로 전진할 때까지 학살 사건 등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음을 단언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 제 6사단 보병 제 23연대 제 2중대장 사카모토 나지무(坂元昵)

 • 제 6사단 보병 제 23연대 안라쿠 히데오(安楽秀雄)

 • 제 6사단 보병 제 23연대 나카야마 아리라(中山有良)

 • 제 6사단 보병 제 13연대 오장 후루사와 사토시(伍長古沢智)

 • 제 6사단 보병 제 47연대 수의무조장(獣医務曹長) 조코 센(城光宣)은 1937년 12월 13일 중화문을 통해 입성했는데 “성내는 텅비었다”며 군인도 주민도 없었다고 했다. “무저항의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 학살이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데 학살이 있을 수가 없다”면서 성내에서는 시신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중국 전선에 5년간 복무했지만, 중국인 마을에 주둔하는 경우, 일본군과 주민을 분리하기 위하여 마을의 중앙에 선을 긋고, 주민 측으로부터 출입 금지를 엄명(厳命)받았으며 헌병이 있었기에 위반은 절대로 못했다. 군기는 그만큼 엄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30만 명 학살은 날조이며 (일본군이) 폄하되는 것은 참을 수 없고 난징재판으로 사형에 처해진 다니 히사오(谷寿夫) 중장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불쌍하다”고 말했다.

 • 제 6사단 제 13연대 제 3대대 포병 소대 나가타 나오타케(永田尚武)

 • 제 9사단 제 18여단 사령부 사이토 도시타네(齋藤敏胤)

 • 제 9사단 보병 제 7연대 기타 도메지(喜多留治)는 12월 14일부터 소탕전에 참가하였으며 안전구역의 보안도 담당했다. 기타 도메지는 안전구의 민간인으로 변장한 편의병 소탕에 대해서 엄중한 명령이 있었고, 주민에 대한 배려와 장교의 지휘에 반드시 따르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소탕은 이 사단의 가나자와(金沢), 도야마(富山) 연대가 담당하고, 다른 부대가 안전구에 들어가지 않도록 ‘가나자와’  ‘도야마’라는 구호를 사용하는 등 경비가 엄중했는데, 그러한 경비를 제치고 일본군이 약탈이나 강간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증언했다.

 • 제 9사단 보병 제 7연대 제 11중대 나야 마사루(納谷勝)

 • 제 9사단 보병 제 36연대 오장(伍長) 곤도 헤이다유(近藤平太夫)는 함락 후에 “노점이 몇 군데 나와 있었고 일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신발수리점, 이발소 등이었다” “노점에서 도장을 만들었으며 성내는 매우 평온했다” “주민들이 평화롭게 장사를 하는 동안, 매일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고 있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증언했다. 

 • 노나카 쇼자부로(野中祥三郎)

 • 제 16사단 보병 제 20연대 오장 하시모토 고지(橋本光治)는 1937년 12월 13일에 입성, 12월 23일까지 성 안팎 패잔병 소탕 작전에 참가했다. 하시모토 고지는 전후에 당시 부하로 상등병이었던 아즈마 시로의 저서를 통해 우편낭에 중국인을 넣어 살해한 이로 지목되었다. 이에 아즈마 시로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최고재판소 확정). 하시모토 고지는 “전쟁 중에도 군기는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 잔학 행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했으며, 또한 “부녀자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엄명되어 있었고, 야간 외출이 금지되었으며, 임무 이외에 자유로운 시간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 제 16사단 치중병 16연대 제 6중대 이나가키 기요시(稲垣清)는 12월 16일에 입성하고 주민들의 모습을 보았으며 시계 수리를 위해 시계점을 방문했다고 증언했다. 

 • 제 16사단 제 33연대 제 2대대 5중대 제 1소대장 이치카와 나오히라(市川治平)

 • 보병 제 65연대(모로즈미 교사쿠(両角業作) 부대)의 구리하라 도시이치(栗原利一)는 12월 17일 ‘무푸산사건(幕府山事件)’에서의 포로 살해에 대한 증언을 남겼지만 “이것은 학살이 아니라 전투로서 자행한 것”이라며 “죽인 사람 중에 일반인은 한 명도 없다. 당시 일본군의 전과는 우리 쪽의 계산인 13,500명을 포함하여 7만 명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현재 중국에서 말하는 것처럼 30만,  40만 대학살 등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제 36사단 보병 제 224대 나이키 나오츠구(内貴直次) 소위는 함락 6년 후인 1943년 여름에 난징에 체류했지만 “도시는 상점이나 사람으로 넘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만약 대학살이 있었다면 주민의 원한을 사고 우리는 평온하게 주둔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 육군사관학교 58기 와다 타이치(和田泰一) 소위는 “당시 기록을 읽어보면 사실이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대학살설을 용인해온 우리 책임도 크다”고 말했다. 

 • 독립경장갑차 제 2중대 소대장 우네모토 마사미(畝元正己)는 다음과 같이 난징전의 실태를 말했다. 그는 강남(江南) 평야 200마일 난징추격전과 관련해, 일본군은 한 지역에 오래 주둔하는 일이 없었고, 약탈과 폭행은 실시하지 않았으며, 도시의 전화(戦禍)도 공방전에 의해 생긴 것으로 일본군에 의해서만 일어난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당시 일본군이 패잔병을 깊이 쫓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촌락과 산중으로 도주한 패잔병들이 편의병으로서 게릴라화하고 후방 부대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괴롭혔다고 했다. 우네모토 마사미는 일본군이 보급이 부족하여 장병이 귀수화(鬼獣化)됐다고들 하는데, 실은 일본군은 상하이-난징간의 200리를 약 한달(11/11~12/13)에 걸쳐서 진격했었기 때문에 하루 행정(行程) 평균 7리로서 보급작전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우네모토 마사미는 일본군이 상륙 후에 계속 추격전에 나섰을 당시에는 보급 부족 때문에 현지 물자에 의존했지만, 12월 10일 이후에는 후방병참이 뒤따랐다고 증언했다. 

 • 또한, 상하이 파견군 참모 오오니시 하지메(大西一)는, 마츠이 이와네 사령관으로부터 쑤저우(蘇州)의 문화와 주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일본군 입성을 금지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제 9사단 사령부는 성내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그 다음 날에 도착한 군사령부는 쑤저우성 외부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해군(海軍)

 • 제 3함대 제 11전대 포함(砲艦) 세타(多艦) 함장 데라사키 다카하루(寺崎隆治)는 “그때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저항하는 중국 군인은 사살했으며, 혼란 때문에 도망치는 주민과 반항하는 시민도 다소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발생한 전사체를 두고서 전후에 난징학살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난징재판에서 처형된 다니 히사오(谷寿夫) 중장에 대해서도 “국제통이며 국제법에 정통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해보더라도 난징학살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 제 3함대 제 11전대 포함(砲艦) 히라(比良) 함장 도이 신지(土井申二)는 보탑교(宝塔橋) 거리의 치안 회복을 하고 홍만자회(紅卍字会)의 천한삼(陳漢森)에서 사례장을 받았다. 도이 신지는 “학살은 없었다, 사례장도 그렇지만 중국은 과장해서 표현한다”고 증언했다. 

 • 해군 무관부 제 3함대 사령부 시게무라 미노루(重村実)는 입성식을 위해 12월 17일에 도착했지만 자신이 목격한 것은 중국인이 민가에 들어가서 변기 등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모습이었으며, 일본 병사에 의한 잔학 행위는 보지 못했지만 편의병은 살해했다고 들었다면서 “이때 군인인지 시민인지 그것을 중국인에게 지적토록 했다”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 제 2연합 항공대 참모 겐다 미노루(源田実)

 • 해군 제 12항공대 3등 항공병조의 하라다 가나메(原田要)는 95식 함상 전투기로 광화문(光華門)을 공격했지만 함락 후에 성내에서는 노점이 섰고 “난징은 대단히 평화스러웠다는 인상이었다” “아주 평화로운 진주”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수십만 명의 대학살은 믿을 수 없다. 만약 대학살이 있었다면 중국인이 우리에게 화목하게 대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문관(文官)

 • 당시에 난징의 일본 대사관에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원장 욘 라베(John Heinrich Detlef Rabe)와 협상에 임하고 있었던 외교관보 후쿠다 도쿠야스(福田篤泰)는 “20만, 30만 학살은 물론 천 단위 학살도 절대로 없다. (생략) 집단 환시(環視)다. 그런 짓을 하면 그야말로 큰 문제다. 단언하건대 거짓말이다. 선전모략이다”라고 말했다.

 • 기획원 사무관(육군성에서 파견) 오카다 요시마사(岡田芳正)는 난징사건에 대해서 당시에 들어 본 적이 없으며 전후에 처음 들었다고 하면서 “난징사건이라는 것은 중국이 지금까지 해왔던 선전전을 전후에까지 계속 하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 외무성 영사관보 이와이 에이이치(岩井英一)

 • 함락과 동시에 난징에 들어가서 이듬해 난징 총영사관에서 근무한 영사관보 가스야 다카오(粕谷孝夫)는 사건에 대해 직접 들어본 적은 없고 섭외부장 히로타 유타카(広田豊) 대사로부터도 들은 바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종군승려 오타니 고쇼(大谷光照) 법주는 12월 14일 난징에 들어가서 17일의 입성식에 참석하고 18일 위령제를 실시했지만 “학살은 보지 못했고, 소문도 듣지 못했다. 또 이미 그때는 전투가 완전히 종식되어서 도시가 평온했고 시민의 도난도 거의 없었으며 학살이 일어날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성 안쪽과 성 바깥쪽에서 적절하게 숙영했고 여유롭게 휴식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보도원(報道員)

 • 오사카 아사히(朝日)신문의 야마모토 오사무(山本治)는 “아사히 신문에서는 화제가 된 적이 없었다”, 또 시라카와 이카이(白川威海) 상하이 지국장으로부터도 들은 바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 도쿄 아사히(朝日)신문 하시모토 도미사부로(橋本登美三郎, 당시 상하이 지국 차장)은 사건은 전혀 듣지 못했으며 만약 사건이 발생했더라면 기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 함락 후부터 한 달간 난징에 있던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 가나자와 요시오(金沢喜雄) 카메라맨은 “나는 난징에서 많이 걸어 다녔지만, 학살은 본 적도 없고 군인으로부터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했으며, 또 신문사내에서는 한 번도 화제가 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 도쿄니치니치신문 사토 신주(佐藤振寿) 카메라맨은 “학살은 보지 못했다” “함락 사흘 후 16 일・17 일이 되자 큰 거리에는 상점도 열렸다” “소문으로 3천 명의 포로를 하관에서 전투 차원에서 살해했다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사토 신주는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을 촬영했지만 100인 참수가 불가능한 것은 명백하고 전후 도쿄재판에서 기사는 픽션이었다고 센카이(浅海) 기자가 명확하게 말했다면 좋았겠지만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오사카 마이니치(毎日)신문의 고토 고사쿠(五島広作)는 제 6사단(다니 히사오 사단장)에 종군하고 1938년 1월 10일까지 난징에 있었지만 중국인 학살 명령은 들어 본 적이 없고 그래서 ‘도쿄 재판이후의 허구’가 아닌가 한다고 증언했다. 또,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고 소문은 당시 들었기 때문에 아사히, 요미우리, 도메이 각사에 문의했지만 어느 회사도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중국의 선전공작인 듯 하다고 생각했었다고 증언했다. 

 • 호치(報知)신문 니무라 지로(二村次郎) 카메라맨은 양자강의 시체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학살된 것은 아니고 다만 수가 많았기 때문에 화제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 호치신문 다구치 리스케는 난징 성내에서 본 시체는 2, 3체 정도로 하관(下関)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 요미우리(読売)신문 히구치 데쓰오(樋口哲雄) 카메라맨은 “(학살) 흔적을 본 적이 없다. 학살이 있었다고들 하는데,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당하니까 그런 것을 학살이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의 스즈키 지로(鈴木二郎)는 전후 검사 측 증인으로 “100인 참수는 학살이 아니다”라고 증언하고 그 후 ‘100인 참수 경쟁’에 대한 글을 발표해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스즈키 아키라(鈴木明)와 논쟁이 벌어졌지만, 중산문(中山門) 위, 격지사(励志社) 앞 등에서 각각 몇 명 정도 패잔병 처형, 하관의 시체 1000체 이상을 목격하였으나, “이 모든 것이 학살이었느냐고 한다면, 모든 것이 학살이라고 반드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패전국의 운명이며, 학살이 되고 만다”, 난징 전체의 학살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모르겠다”고 증언했다. 

 • 요미우리신문 모리히로(森博) 카메라맨은 “포로에게 줄 식량이 없고 수용할 곳도 없다, 풀어주더라도 다시 군인이 되기에 이는 곤란하다”면서 포로를 양자강에서 살육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난징에서 시민에 대한 학살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 도메이통신(同盟通信) 아라이 마사요시(新井正義)는 “중국 병사의 시체 중에 편의(便衣)를 입은 자도 있었고, 그중에 포로의 시체도 있었을 것이지만, 20만 대학살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일본군이 포로에게 쌀을 주는 것을 보았다”며 “입성식 직후에는 소매점에서 감미료도 잘 팔고 있었다, 학살에 대해서는 도쿄재판에서 처음 들었다”고 증언했다. 

 • 도메이통신 아사이 다쓰죠(浅井達三) 카메라맨은 “당시 회사 내에서 사건이 화제가 되지 않았다, 파라마운트 뉴스릴(Paramount Newsreel)의 아서 멘켄(Arthur von Briesen Menken) 기자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했다. 아사이 다쓰죠는 전후 도쿄재판도 촬영했는데 마츠이 이와네 대장이 기소되는 것에 대해서 “책임자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러나 “20만 명 학살이라 하지만 숫자 측면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난징 인구의 대부분이 없어지는 숫자이므로”라고 증언하고 있다.

 • 도메이통신 호소나미 다카시(細波孝)는 탕산(湯山)이라고 추측되는 포로의 연행을 본 후에 입성식 전날 또는 당일 새벽에 하관에서의 토치카, 그리고 양자강에서 시체를 보았다고 했다. “그것을 보고 국제법 위반인가 생각도 했지만 일단 전투의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에는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당하니까”라고 증언했다. 또 상하이 지사장 마쓰모토 시게하루(松本重治)와 그곳 대학에서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아서 네 명이서 같이 갔었지만, 아무 것도 사건의 흔적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 신아이치(新愛知)신문의 미나미 마사요시(南正義)는 13일 중산문에서 입성하자마자 일본군 시체 2, 3체가 가로수 플라타너스에 매달려 불에 타는 것을 봤지만, 중국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는 등의 말은 아무도 한 적이 없고, 보지 못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중국이 날조하여 말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고, 또 포로 살해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결전에서 포로란 없다(決戦に捕虜なし)’라는 말이 있었고, 포로라는 개념이 일본군에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국도 도망을 갈 때 집을 불태우고, 물건을 부수고 도망치고, 편의대도 하고 간첩도 하고, 그래서 포로가 되어서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없었다. 서로 간에 포로라는 개념이 없었고, 살아남는다는 생각도 없으니, 누굴 포로로 했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다. 그런 것은 나중에 이런 국제법에 비추어서 말하는 것이다. 전쟁터를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학살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편의대를 학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학살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 후쿠오카니치니치(福岡日日)신문 미토마 미키노스케(三苫幹之助)는 함락 직후 난징에 들어갔지만 “대학살 이야기는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 흔적조차 전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미토마 미키노스케가 쓴 1939년 후쿠오카니치니치신문의 기사에서는 중국 시민의 증언으로, 일본군이 도착하기 이전 난징안전구의 이호로(イホロ) 난민구에서 중국군 병사가 총을 들고서는 밤낮으로 검찰에 나서면서 음식과 물품을 강탈하고 독신남성은 노역을 위해 납치하고 밤에는 여성을 납치했다고 한다. 

 • 미야코(都)신문 고이케 슈요(小池秋羊)는 “중국 군인 전사체를 수십 체 보았지만 학살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난징 전부를 본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또 고이케 슈요는 “일본의 보조헌병(補助憲兵)이 난민구에 잠입한 패잔병을 적출하고, 10명, 20명 단위의 연행을 하는 것을 보았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교외에서 사살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고 했으며, 또, “제 16 사단의 군인이 식량 등을 약탈하는 것은 목격했고, 그것을 상하이 이브닝 포스트와 노스차이나데일리뉴스 등의 외신기자들이 기사로 썼다”고 했다. 고이케 슈요는 그 기사를 당시 상하이에서 보았다고 했다.

 • 후쿠시마민보(福島民報) 야나이 마사고로(箭内正五郎)는 제 65연대(야마다 지대(山田支隊))에 종군했지만 “군기가 흐트러진 적도 없고 상하이와 비교하면 난징은 그리 격렬하지 않은 전선이었다, 전후에 알려진 대학살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 해군 종군 회화(絵画) 통신원이자 화가(画家)인 스미야 에쓰지(住谷磐根)는 부두에서 패잔병 약 1000명을 총검으로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고,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시체가 약 800체 정도로 아직 움직이는 중국 병사도 있었다며 “이것이 후에 난징학살이라고 불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군으로서는 중국병을 섬멸해야 했다. 그것이 전쟁이고, 그렇지 않으면 일본군이 당한다. 그런 전체를 모르면서 일부분만 다루어도 실수가 될 수 있다. 난징학살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런 것이다” “시민들은 피난구에 있었고 중국 군인은 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위 난징대학살은 있을 수 없다, 자전거를 타고 성 안쪽을 스케치하고 다녔지만, 학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 외무성 정보부의 와타나베 요시오(渡辺義雄) 카메라맨은 입성식 전날, 또는 이틀 전에 현지에 도착하였는데 “하관에서 중국 군인을 처형했다고 들었다” “후에 장교와 하사관으로부터 들으니 포로를 감옥에 넣었지만 다 들어가지 못했고 식량도 부족해 할 수 없이 처형했다” “포로와 범죄인으로 총 1만 명 정도였다고 들었다”고 했다. 와타나베가 직접 본 것은 중국 병사의 시체뿐으로 일본군에 의한 만행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 육군 보도반원 고야나기 쑤구이치(小柳次一) 카메라맨은 양자강에서 300명의 중국 병사를 죽였다고는 들었다면서 “전쟁터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고, 전후에 알려져 있는 것 같은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 요미우리신문 상하이 특파원이었던 하라 시로(原四郎)는 함락이 된지 석 달 후에야 학살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당시 군이 함구령을 내리지도 않아서 의문이 들어 각 지국에 문의했지만 불분명했기 때문에 중국의 선전 공작이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었다고 증언했다.

 • 잡지 ‘대아시아주의(大亜細亜主義)’ 종군기자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는 1938년 8월에 난징에 머물렀다. 다나카는 당시 종군한 오야 소이치(大宅壮一), 사이죠 야소(西條八十), 구사노 신페이(草野心平), 기무라 키(木村毅),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이시카와 다쓰조(石川達三)도 “20만 - 30 만 대학살”을 목격하지 못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오야 소이치는 전후에 학살은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목격 증언은 아니다.

 • 아사히신문 후지모토 가메(藤本亀) 기자는 12월 13일, 광화문을 통해 난징에 들어갔지만, “종군 동안 특별히 어떤 사건도 보거나 듣거나 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 오사카 마이나치신문 니시노 겐(西野源) 기자는 제9 사단과 함께 광화문 방면에서 난징에 입성했는데 “학살은 당시 들어 본 적이 없다”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유설(流説)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라고 증언했다. 

 •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특파원으로 종군한 작가 이시카와 다쓰죠(石川達三)는 1946년 “여자를 능욕하고, 살해하고, 민가의 물품을 약탈하는 등등의 폭행이 도처에서 있었다. 입성식에 늦어 정월에 난징에 도착했을 때 거리는 시체로 가득했다. 큰 건물에 일반 중국인 수천을 몰아넣고 바닥에 수류탄을 놓고 기름을 흘려서 불을 붙여서 초열지옥 속에서 고통 속에 죽게 했다.  또 무장해제한 포로를 연병장에 모아 기총 일제 사격으로 살해했다. 마지막에는 총알을 사용하는 것이 아깝다고 하여, 양자강에 긴 선창을 만들고 강 중간으로 갈수록 낮아지게 해놓고선 이 위에 중국인을 행렬시켜서 선두부터 차례차례 일본도로 목을 쳐 강 속으로 떨궜다. 도망갈 곳을 잃을 수많은 포로들이 덧문이나 책상을 꽉 잡고서 강을 흘러가는 것을 하류에서 대기한 구축함이 기총 일제 사격으로 한꺼번에 살해했다. 전쟁 중의 흥분 때문에 병사들이 무궤도한 행동으로 이탈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난징의 경우는 아무래도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미에(三重) 현에서 온 가타야마(片山) 아무개라는 종군 승려는 독경(読経)도 하지 않고 살인을 하고 있었다. 왼손에는 염주를 들고 오른손에는 쇼블(シヤベル, 삽)을 들고서 민중 속에 뛰어 들어가서는, 도망을 치는 무기도 없는 지나 병사들을 죽이면서 걸었다. 그 수가 20명 이상이다. 그의 양심은 그런 일에 대해서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고 부대장이나 사단장에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나에 가면 쉽게 사람도 죽일 수 있고 여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본인 전체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만 이러한 학살과 폭행을 마츠이 사령관이 알고 있었는지 그 여부는 모르며 ‘일반 주민이라도 저항하는 경우에는 가차없이 죽여도 좋다’는 명령이 수뇌부로부터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것이 사단장에서 온 것인지 부대장에서 온 것인지 그것도 알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훗날, 이시카와 다쓰죠는 다나카 마사키(田中正明)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살의 흔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이시카와 다쓰죠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에게도 대학살은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사망 석 달 전인 1984년 10월에 아라 켄이치(阿羅健一)에게 “내가 난징에 들어간 것은 입성식으로부터 2주 후다. 대학살의 흔적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수만의 시체 처리가 2,3 주로 끝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믿을 수 없다”고 답했다.

 • 마에다 유지(前田雄二, 도메이통신사 사회부 기자) 1937년 12월 16일, 아라이(新井), 그리고 사진의 하라이가와(祓川) 등과 군관학교에서 처형 현장을 목격했다. 포로들을 한 명씩 교정으로 끌어내고, 하사관이 그것을 전방의 방공호 방향으로 달리도록 하고선 기다리는 군인이 총검으로 배후에서 찌르고 벙커에 떨어지면 다시 한번 찌르는 ‘처형’을 세 곳에서 병행하고 있었으며 옆의 장교는 “신병교육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후에는 교통은행(交通銀行)의 뒷면 연못 기슭에서 포로가 처형되는 것을 통신원 나카무라 다로(中村太郎)와 함께 목격했다. 12월 17일 밤에는 양자강 연안에서 일천, 이천의 시체를 보고, 성내의 경비사령부 참모에게 묻자 “소수의 일본 부대가 다수의 투항 부대를 호송하는 중에 역습을 받았기 때문에 격멸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마에다 유지는 훗날 이런 것들은 전투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으로, 수십 만 명, 삼십 만 명이라고도 불리는 ‘대학살’에 대해서는 “장강 연안이나 강문(江門), 그리고 ‘처형’, 나 자신이 봤던 사실, 이 중 일부는 전투로 이어지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사실들이 핵심이 되어 소문이 퍼지고 전쟁 피해까지 겹치면서 거대한 숫자로 불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도쿄 아사히신문 기자 아다치 가즈오(足立和雄)는 1965년 “일본군 대부대가 난징을 목표로 사방에서 쇄도해 들어왔다. 이와 함께 수많은 종군 기자도 난징에 모여 들었다. 그 가운데, 모리야마와 나도 포함됐다. 아사히신문 지국 옆에 불탄 자국으로 이뤄진 광장이 있었다. 그곳에 일본병으로부터 감시받는 중국인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난징에 머무르던 거의 모든 중국인 남자들이 편의대라고 칭해지며 생포된 것이다. 우리 동료가 그 중 한 명을 사변 전에 아사히 지국에서 사용하던 사람이라고 증언하고 도와줬다. 그 일이 있고나서 아사히 지국에는 구명을 원하는 아녀자들이 몰려 왔지만 우리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편의대는 그의 아내와 아이가 울부짖는 눈앞에서 차례차례로 총살당했다. ‘슬프다’라고 나는 모리야마 씨에 말했다. 모리야마 씨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일본은, 이로써 전쟁에 승리할 자격을 잃었어’라고. 일본 내지에서는 아마 난징 공략 축하 행사에 들끓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에 떨고 있었다”라고 썼다. 하지만, 1987년에 아다치 가즈오는 “‘대학살’은 보지 못했다. 다만, 군의 편의대 소탕은 지나친 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증언했다. 또 ‘모리야마 요시오 문집(守山義雄文集)’에 기고한 ‘나와 난징대학살(私と南京大虐殺)’이라는 제목은 “실수였다”고 훗날 반성을 했다. 또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면서 후배인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의 주장에 대해서도 유감스럽다고 비판하고 있다. 

 • 도메이통신사(同盟通信社) 특파원 고야마 다케오(小山丈夫)는 1938년 여름 외신기자 난징시찰단으로부터 학살 사건에 대한 질문은 받은 바가 없으며 고야마 다케오 본인도 도쿄 재판에서 처음으로 사건을 알았다고 증언했다.



2 중국인의 증언(中国人の証言)

 • 도쿄재판에서 중국인 증인들에 대해서는 반대 심문이 이뤄지지 않았다.

 • 리슈잉(李秀英) - 리슈잉에 대해서 마쓰무라 도시오(松村俊夫)는 “그의 증언 내용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실제 체험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저서에 썼다가 (리슈잉 측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민사재판이 1999년 9월에 제기되었다. 도쿄지방재판소는 판결에서 “(마쓰무라 도시오로서는 리슈잉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없었다”고 하면서 마쓰무라 도시오에게 150만 엔의 지불을 명령했다. 2005년 1월에 최고재판소 상고 기각이 이뤄지고 원고인 리슈잉 측의 승소가 확정했다. 

 • 샤수친(夏淑琴) - ‘신루커우사건(新路口事件)’의 증언자다. 샤수친의 증언에 대해서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사건 발생 시간이 증언과 어긋나는 점, 샤수친 본인의 나이에 관한 정보가 애매하다는 점 등을 들면서 거짓 증언이라고 주장했으며, 사건의 피해자와 샤수친은 다른 사람이라고도 했다. 샤수친은 중국과 일본에서 각각 히가시나카노 슈도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에서는 최고재판소까지 싸운 결과, 원고인 샤수친이 승소했다. 


3 구미인의 증언(欧米人の証言)

 • 존 매기(John Gillespie Magee) -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원이다. 도쿄재판에서 증언했지만 그 평가와 관련해 논쟁이 있다. 존 매기가 촬영한 필름(매기 필름)은 2015년 10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됐다.

 • 마이너 설 베이츠(Miner Searle Bates) -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원. 난징재판에서 증인이 되었다.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당시 미국의 일부 신문 사진 캡션에 써있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마이너 설 베이츠가 중국 국민당 정부의 고문이라고 지목했다. 또한 도쿄니치니치신문 1937년 12월 26일자 보도에 따르면 마이너 설 베이츠가 “질서있는 일본군의 입성으로 난징에 평화가 온 것은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모순된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또한 같은 해 12월 17일자 제11면은 마이너 설 베이츠와 관련 “일본과 지나의 이익을 위해 활약을 계속하는 친일가(日支親善のため活躍を続けてゐる親日家)”라고 보도되기도 했음을 밝혔다. 마이너 설 베이츠의 난징재판 증언 기록은 2015년 10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됐다.

 • 루이스 S.C.스마이스(Lewis S.C. Smythe) -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원이다. 난징재판에서 증인이 된다. 

 • 베른하르트 신드버그(Bernhard Arp Sindberg) - 난징대학살 기념관의 주청산(朱成山) 관장은 베른하르트 신드버그가 난징대학살의 목격자라고 한다. 그러나, 베른하르트 신드버그는 약탈과 강간의 피해를 입은 서하산사(棲霞山寺) 승려의 보고를 번역했을 뿐이다.*

[* 제60호 문서 서하산사(棲霞山寺)로부터의 각서 ‘난징대잔학사건 자료집 제2권’ p194-195 “이하는 중국어로의 번역이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원문대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편지는 내가 사는 곳에서 5마일 떨어진 서하산사에서 받은 것으로 고승 중 한 명이 썼으며, 지역 유지 20명이 서명했다. B.A. Sindberg 1938년 2월 3일”]


4 참고문헌(参考文献) 

- 아즈마 시로(東史郎) ‘우리의 난징 플래툰 - 한 소집병이 체험한 난징대학살(わが南京プラトーン―一召集兵の体験した南京大虐殺)’ (아오키 쇼텐(青木書店), 1987)

- 아즈마 시로(東史郎) ‘아즈마 시로 일기(東史郎日記)’ 쿠마모토슈판분카카이칸(熊本出版文化会館), 2001년

- 아라 켄이치(阿羅健一) ‘난징사건 일본인 48명의 증언(南京事件日本人48人の証言)’ 쇼가쿠칸분코(小学館文庫) 

- 아라 켄이치(阿羅健一) ‘1000개 이상의 오인・오기(1000箇所を越える誤認・誤記)’ - ‘난징사건 연구의 최전선(南京事件研究の最前線)’ 히가시나카노 슈도 편(編), 덴카이샤(展転社) 2005년, 103쪽 

-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사실은 이랬다 난징사건(本当はこうだった南京事件)’ 일본도서간행위원회(日本図書刊行会), 1999년 12월. ISBN 978-4823105043

- 이구치 가즈키(井口和起)・기시카 쥰이치(木坂順一)・시모사토 마사키(下里正樹) ‘난징사건 교토사단 관계자료집(南京事件 京都師団関係資料集)’  아오키쇼텐(青木書店) 1989년

- 이마이 세이고(今井正剛) ‘난징성 안쪽에서의 대학살(南京城内の大虐殺)’ 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56년(쇼와 31년) 12월호

- 이마이 세이고(今井正剛) ‘난징성 안쪽에서의 대량살인(南京城内の大量殺人)’ 다카나시 마사키(高梨正樹) 편(編) ‘목격자가 말하는 쇼와 역사 5  일중전쟁(目撃者が語る昭和史5 日中戦争)’ 신진부쓰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 1989년 p.53-55

- 오노 켄지(小野賢二)・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편(編) ‘난징대잔학을 기록한 황군 병사들 제 13사단 야마다 지대 군인의 진중일기’ 오쓰키쇼텐(大月書店) 1996년 

- 가이코샤(偕行社) ‘난징 전사 자료집(南京戦史資料集)’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편(編) ‘현대역사학과 난징사건(現代歴史学と南京事件)’ 가시와쇼뵤(柏書房) 

- 시노하라 세에에이(篠原正瑛) ‘서쪽에 나치즘 동쪽에 군국주의(西にナチズム 東に軍国主義)’ ‘일중문화교류(日中文化交流)’ 1970.8.1 No157 P5 

- 시모사토 마사키(下里正樹) ‘숨겨진 연대사(隠された聯隊史)’ 아오키쇼텐(青木書店) 1987년 

- 시모사토 마사키(下里正樹) ‘속 숨겨진 연대사(続隠された聯隊史)’ 아오키쇼텐(青木書店) 1988년 

- 욘 라베(ジョン・ラーベ, John Heinrich Detlef Rabe) ‘난징의 진실(南京の真実)’ 고단샤분코(講談社文庫) 2000년

- 창가학회(創価学会) 청년부 반전(反戦) 출판위원회 편(編) ‘양자강이 울고 있다  구마모토 제6 사단 출병의 기록(揚子江が哭いている 熊本第六師団出兵の記録)’, 다이산분메이샤(第三文明社). 1979년 

- 소네 가즈오(曽根一夫) ‘사기 난징학살(私記南京虐殺)’ ‘속 사기 난징학살(続私記南京虐殺)’ 사이류샤(彩流社) 1984년 

- 소네 가즈오(曽根一夫) ‘전 군인이 말하는 전사에 없는 전쟁 이야기(元兵士が語る戦史にない戦争の話)’ 츠네토모슈판(恒友出版) 1994년

- 다케모토 다다오(竹本忠雄), 오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 공저 ‘재심 ‘난징대학살’ 세계에 호소하는 일본의 원죄(再審「南京大虐殺」 世界に訴える日本の冤罪)’ 메이세이샤(明成社, 2000) 

-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 ‘난징사건의 총괄(南京事件の総括)’ 쇼우갓칸분코(小学館文庫)

- 난징사건조사연구회(南京事件調査研究会) 편역(編訳) ‘난징사건 자료집 1 미국관계자료편(南京事件資料集 1アメリカ関係資料編)’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난징사건 - ‘학살’의 구조(南京事件―「虐殺」の構造)’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주코신쇼(中公新書)’ , 1986년 2월. ISBN 978-4121007957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난징사건 - ‘학살’ 구조(南京事件―「虐殺」の構造)’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주코신쇼(中公新書)’, 2007년 7월, 증보판. ISBN 978-4121907950

-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난징학살’의 철저검증(「南京虐殺」の徹底検証)’ 덴카이샤(展転社), 1998년 8월. ISBN 978-4886561534

- 히로타 고키(広田弘毅) 전기(伝記) 간행위원회 편(編) ‘히로타 고키(広田弘毅)’ 1966년(1992 년 복각) 

-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난징의 길(南京への道)’ 아사히신분샤(朝日新聞社) 1987년 아사히분코(朝日文庫) 1990년

- 마쓰오카 다마키(松岡環) 편저(編著) ‘난징전 - 닫힌 기억을 찾아(南京戦-閉ざされた記憶を尋ねて)’ 샤카이효론샤(社会評論社), 2002년

- 미니 보트린(ミニー・ヴォートリン, Wilhelmina Minnie Vautrin) ‘난징 사건의 나날 미니 보트린의 일기(南京事件の日々  ミニー・ヴォートリンの日記)’ 오쓰키쇼텐(大月書店), 1999년 

- 와타나베 마사오(渡辺正男) ‘상하이・난징・한커우 55년만의 진실(上海・南京・漢口 五十五年目の真実)’ 별책 분게이슌주(文芸春秋)  1993년 신춘(新春) 특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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