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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南京事件)’ (1)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1)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난징사건(南京事件)’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18년 7월 16일판, 번역 : 박아름). 


본 역사적 사건은 80여년 전 중국에서의 역사적 사건으로, 한국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역사적 사건은 아니다. 하지만 본 역사적 사건은 마찬가지로 관련 평가와 인식에 있어서 ‘학살’ 개념이 동반되었던 우리나라의 제주 4.3 사건, 한국전쟁, 광주 5.18 사건 등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여러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의 수준있는 정치·역사 토론 문화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미디어워치 편집부는 앞으로 일본 위키의 관련 항목들인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난징사건의 피해자수(南京事件の被害者数)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도 차례로 번역 공개할 예정이다.




난징사건(南京事件)’은 1937년(쇼와 12년) 12월의 난징전(南京戦)에서 일본군이 중화민국(中華民国)의 수도 난징(南京) 시를 점령한 후 약 6주간 내지 최대 2개월 이내에 걸쳐서 당시의 일본군이 중국군 포로, 패잔병, 편의병(便衣兵, 게릴라병), 그리고 난징성 안쪽 및 주변지역의 일반 시민들에 대해서 살상과 폭행을 가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아래 ‘# 명칭의 종류와 변천’ 절에서 기술한 것처럼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난징대학살사건(南京大虐殺事件)’, ‘난징학살사건(南京虐殺事件)’ 등 다양한 호칭이 있다.

난징사건에 대해서는 사건 직후부터 구미(欧米, 서양)의 보도기관에서도 보도를 하였으며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 보존한 공식문서 중에도 사건 직후에 해당 행위를 인지한 것을 방증(傍証)하는 문서가 존재한다. 종전 이후에 진행된 ‘난징군사법정(南京軍事法廷)’과 ‘극동국제군사재판(極東国際軍事裁判)’에서도 난징사건에 관한 재판이 이뤄졌다. 



난징사건과 관련해 일본정부는 ‘피해자의 구체적인 규모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어떤 정확한 숫자를 인정하기가 어려우나 일본군의 난징 입성(1937년) 이후 비전투원에 대한 살해와 약탈행위 등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는 역사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사건 규모, 학살 여부, 전시국제법 위반 여부, 희생자수 등에 대해서 여러 논쟁이 존재한다(일본 위키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한국어 번역) 항목 참조). 이에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불명확하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다.

2015년 10월 9일, 유네스코가 중국의 신청을 받아들여서 관련 기록물인 ‘Documents of Nangjing Massacre’가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됐다.*

[* 세계기록유산 등록대상은, 중국이 제출한 자료이며,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 1937 년 - 1938 년의 대량 학살에 관한 자료,  (2) 1945 년 - 1947 년의 중국의 군사 법정에 의한 전후의 조사와 전쟁 범죄 재판 자료, (3) 1952 년 - 1956 년의 중국 사법 당국의 자료. - UNESCO » Communication and Information » Memory of the World » Register » Full list of Registered Heritage » Documents of Nanjing Massacre]


목차


1 배경과 경위

   1.1 상하이전에서 난징전으로


2 난징시의 개황

   2.1 면적

   2.2 총인구


3 난징사건의 피해자

   3.1 난징사건의 피해자(난징의 일반시민)

        3.1.1 난징안전구

   3.2 난징사건의 피해자(중국 병사)


4 난징사건의 발생 원인


5 국제사회의 인지 및 보도

   5.1 외국 언론에 의한 보도

   5.2 사건 발생 후 외국인의 반응


6 중국 정부의 대응

   6.1 중화민국(국민당)

   6.2 중국 공산당


7 일본 정부의 반응


8 전후 군사재판에서의 취급

   8.1 난징재판

        8.1.1 검찰보고

        8.1.2 판결


(계속)




‘난징사건(南京事件)’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南京事件)’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南京事件)’ (2)

 



1 배경과 경위(背景と経緯)

1.1 상하이전에서 난징전으로(上海戦から南京戦へ)

1937년에 시작된 일중전쟁(日中戦争)은 당초 화베이(華北)에서 전투가 시작되었고, 그 후 쌍방이 병력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사고문의 도움을 받고 있던 장제스(蒋介石)가 국제도시 상하이에 일본군을 유인해서 섬멸시키는 작전을 세웠다. 그 결과 8월에 주요 전장이 상하이로 옮겨졌다. 

일본 측도 이번 기회에 중국에 일격을 가하면 조용히 물러날 것으로 예상하여 폭지응징(暴支膺懲), 즉 “날뛰는 중국을 응징하자”는 구호를 여론으로 펼치면서 대결자세를 취한다. 일본 육군은 상하이 파견군을 상하이로 보냈고, 이에 상하이에서 일본과 중국 양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제2차 상하이사변). 일본 해군은 8월부터 일본 해군공격기에 의한 중국 수도 난징에 대한 공습(도양폭격(渡洋爆撃))을 개시하여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됐다.

8월 5일 일본 육군차관은 헤이그육전조약(ハーグ陸戦条約) 정신에 준거한 교전규정의 일부(‘해적수단의 선용(害敵手段の選用)’)를 애써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이를 엄밀준수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으며 ‘포로’라는 명칭도 가급적 사용하지 않도록 현지군에 통지했다. 그 결과로 현장의 장교들마저 “군의 규율을 요구한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군사령관의 통달”을 무시하는 행동을 취했으며 상하이전에서 수많은 전우를 잃은 일본 군인들이 중국에 대한 복수심을 품게 되었다고 일본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지적한다.

한편, 일본 외무성은 10월에 중국에 주재하는 독일인 외교관인 오스카 트라우트만(Oskar Trautmann)을 중개인으로 한 ‘트라우트만 화평조정공작(トラウトマン和平調停工作, 1937~1938년 사이 일본과 중국의 전쟁 당시에 일중 양국을 중재하려 했던 독일의 중재 시도)’을 개시했다.

중국군의 저항도 커서 일본 측은 예상보다 고전했으나, 11월 5일에 항저우만(杭州湾)에 상륙한 일본육군 제10군에 의해 중국군이 배후를 습격당했고 이에 상하이 방면에서 수도인 난징 방면으로 궤주(潰走, 패주)했다. 그러나 상하이전에서 수많은 일본군 전사자가 나왔으며 이에 일본 군인들의 마음 속에 중국군에 대한 복수심이 심어졌다.

11월 7일에 상하이 파견군은 제10군과 함께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 사령관: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으로 개편되었다. 11월 19일에 제10군은 화평공작을 권하는 군 중앙의 방침을 무시했으며, 그 후 상하이 파견군은 철퇴(撤退, 철수)하는 중국군을 무단으로 추격하여 수도 난징을 목표로 침공했다. 12월 1일에는 군 중앙이 현지군의 방침을 추인하는 형태로 중지나방면군에 난징공략명령을 하달했다.

총퇴각하는 중국군은 11월의 난징 고급막료회의에서 난징 고수 작전 방침을 결정했다. 11월 20일 장제스는 난징 방위사령관으로 탕성즈(唐生智)를 임명함과 동시에,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重慶)으로 천도할 것을 선언하며 잠정수도가 된 한커우(漢口)로 각 중앙기관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중국 측은 난징에 방위선(복곽진지(複郭陣地))를 구축하여 항전할 대비를 했다. 패주하는 중국군은 견벽청야(堅壁清野,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과 민가를 불태웠다.



추격하는 일본군은 식량 등을 도중의 농촌지역에서 약탈하면서 진군했다. 난징으로 향하는 과정에 농촌부에서 일본군에 의한 주민 학살, 강간, 강탈이 발생하는 등 군기가 문란해졌다. 이에 12월 7일에 마츠이 이와네 사령관은 약탈행위 및 불법행위를 엄벌하게 처벌하는 등 엄한 군기를 포함한 ‘난징성 공략요령(南京城攻略要領)’을 자군에게 통지했다.

일본군이 난징성으로 다가오는 동안 장제스 등 중국의 수뇌부는 난징방위사령관 탕성즈와 방위군만을 남긴채 12월 7일에 난징을 탈출했다.

일본군은 12월 8일에 난징을 포위하고 12월 9일에 중국군에게 무혈개성(無血開城)을 권고했다. 하지만 성문을 열라는 권고를 중국군이 응하지 않자 일본군은 12월 10일 공격을 개시했다. 난징방위사령관인 탕성즈도 12월 12일에 도망쳤다. 

난징의 중국군 대다수는 조직적 철퇴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 있어도 도망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중국병사 중에는 참호에 발이 묶여서 방전(防戦)을 강요당하는 자도 있었고 유일한 도피로인 북부 장강(長江)으로 이어지는 이장먼(挹江門)에 아군을 주저없이 쏘는 독전대(督戦隊)가 배치되어 철퇴하는 동지들을 쏘는 일(‘이장먼사건(挹江門事件)’)도 발생했다. 

12월 13일에 중국군은 총붕괴되어 난징성은 함락됐다. 함락시에 난징성 북측에서 장강의 대안(対岸)으로 도주하려고 한 다수의 병사 및 일반인들이 배도 없이 도하(渡河)를 시도하다가 대부분 물에 빠져 죽었다.


2 난징시의 개황(南京市の概況)

2.1 면적(面積)

난징시(南京市)는 동서(중산문(中山門)에서 한중문(漢中門)까지)로 약 5.3km, 남북(대평문(大平門)에서 중화문(中華門)까지)으로 약 8km로서 총 면적은 35㎢다. 성밖의 하관(下関) 및 수서문(水西門) 시가지 등을 포함하면 39~40㎢ 정도로, 일본 가마쿠라(鎌倉) 시(39.67㎢) 정도의 면적이다.



2.2 총인구(総人口)

난징의 인구는 일중전쟁 이전에는 100만명을 넘었으나 상하이사변 이후의 폭격과 난징 공격 직전의 중국 정부 수뇌부의 충칭(重慶)으로의 이전, 부호들의 소개(疎開, 이전) 등으로 난징전 당시의 인구는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다. ‘스마이스 조사(スマイスの調査, 미국인 선교사 루이스 스마이스(Lewis S.C. Smythe)에 의한 난징 지역 전쟁 피해에 대한 1937년부터 1938년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난징 공격 직전인 11월에는 약 50만명(다른 설도 있음)으로 반감했는데 난징전 직전인 12월의 인구는 여러 설이 있어서 분명하지 않다.


3 난징사건의 피해자(南京事件の被害者)

3.1 난징사건의 피해자(난징의 일반시민)( 南京事件の被害者(南京の一般市民))

일본군에 의한 난징시민의 피해는 제 2차 상하이사변 개시 직후에 발생한 8월 15일의 도양폭격(渡洋爆撃)으로 일본 해군공격기가 난징을 공습하여 발생한 사상 및 전재(戦災)가 최초이다.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10월까지의 2개월간(그 후에도 계속됨)의 공습으로 약 400명의 시민이 사망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공습으로 수많은 난징시민들이 시가지에서 멀리 피난을 간 결과, 100만명을 넘었다는 난징성 시의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11월에 일본육군의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이 난징 주변의 광대한 농촌지역 근교의 6개 현을 포함한 난징 행정구에 진입한 결과, 농촌지역 등에서도 다수의 피재자(被災者)가 난징성 시로 유입되는 현상도 일어났다.

일본군에 의한 난징성 시의 함락(12월 13일) 전후에 일본군의 공격, 소토(掃討, 무조건 쓸어없앰) 및 폭력행위의 피해를 입은 시민들이 적지 않게 존재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성밖으로 탈출하여 장강을 건너서 도망치는 도중에 부녀자를 포함한 시민들이 병사와 함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증언, 일본병의 공격과 폭력으로 살해당했다는 증언(‘신루커우사건(新路口事件)’)이 있다.

다만 일본군의 난징 점령이 확정되어 전투가 종결된 후에도, 비록 포로 및 패잔병에 대한 조직적 학살은 있었지만, 성 안쪽의 일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심해지지는 않았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그 이유로 난징시 함락 전에 구미(서양) 선교사들이 조직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가 관리하는 난징시내 난징안전구로 살아남은 피재민들이 다수 피난했으며, 그 후에는 일반시민들이 구미인으로 구성된 국제위원회 측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의 회원인 스마이스의 조사에 의하면 난징시부(난징성구)에서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살해 및 납치후 살해는 총 6600명으로 추측된다고 하였으며 그와 별도로 12000명이란 추측치도 밝혔다.

난징성시와 그 주변만이 아니라 광대한 농촌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도 26000명 이상의 희생자가 있었다고 스마이스 조사는 밝혔는데 이것도 난징사건의 피해자로 포함시키자는 견해가 있다.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등) 


3.1.1 난징안전구(南京安全区)

난징안전구(南京安全区)란, 난징공략전이 시작되기 전인 11월에 독일인 사업가 욘 라베(John Heinrich Detlef Rabe), 미국인 선교사(존 매기(John Gillespie Magee), 마이너 설 베이츠(Miner Searle Bates) 및 여성선교사 윌헬미나 미니 보트린(Wilhelmina Minnie Vautrin) 등)을 중심으로 한 약 15명이 전재 피해를 당한 시민을 구제하기 위해 조직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별칭: 난징난민구 국제위원회)가 난징성 시내에 설정한 지역이다. 

이 안전구에 난징함락 직후에는 약 20만명(여러 설이 있음)이 있었다는 추측치가 있으며 난징성 시내의 난징안전구 밖으로는 주민이 많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난징안전구(별칭 난민구)에는 일본군이 포격을 가하지 않았다(이른바 ‘라베의 감사장(ラーベの感謝状)’).*

[* ‘라베의 감사장’은, 1937년 12월 14일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의 욘 라베가 일본군에 제출한 문서 '난징안전구 토우(檔, 관청에 저장되는 기록) 안’ 제 1호 문건(Z1) 이다. 이 문서의 시작 부분에서 “귀군 포병 부대가 안전구를 공격하지 않은 점에 대해 감사드리며, 안전구 안쪽에 거주하는 중국인 민간인 보호와 관련하여 향후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귀하와 접촉하고 싶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점령 후에도 일본군은 조직적 주민학살을 행하지는 않았다. 다만 안전구 안쪽에서 발생한 개개인들에 대한 학살 기록은 남아있으며 이것이 결코 과소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안전구의 인구에 대해서는 ‘난징사건 논쟁 # 인구추이’, ‘난징사건 논쟁 # 인구추이의 논점’을 참조할 것.

3.2 난징사건의 피해자(중국병사)(南京事件の被害者(中国兵))

난징전에서의 가장 많은 살해 관련 사안은, 바로 일본군에 의한 ‘중국인 포로’와 군복을 벗고 민간인 속에 잠입한 ‘패잔병’에 대한 조직적 살해다. 이 살해가 전시국제법에 위반되는지 여부가 문제화되었다.

중국 측 난징 방위군의 당시 전체 총수는 △ 6~7만명(‘난징전사(南京戦史)’ 가이코샤(偕行社)), △ 10만명(하타 이쿠히코(秦郁彦)의 설(‘대만공식전사(台湾公式戦史)’에서)), △ 15만명(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의 설, 쑨자이웨이(孫宅巍)의 설) 등 여러 설이 있으며, 그 중 포로가 되기 전에 전사한 사람, 도망친 사람들의 숫자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 편집자주 : 난징의 중국군 병력의 수는, 미국 측 자료에서는 12월 10일 이후 미국 대사관 보고서는 함락 전에 인구의 80%가 도시를 탈출했으며 주요 부대는 철수하고 방위군은 5만 명 정도라고 했다. 현지 주재 기자였던 뉴욕타임스의 틸만 더딘(Frank Tillman Durdin)은 중국군은 16개 사단 약 5만명이 있었는데 3만 3000명이 제압되고 이중에서 2만 명이 처형됐다고 보도했다. 도쿄재판 판결도 5만 명 정도로 봤다. 가이코샤(偕行社))는 ‘난징전사(南京戦史)’에서 6만 5천 5백명에서 7만 5백명이라고 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당초에는 10만명이었으며, 함락 당시에는 3.5만~5만이라고 했는데, 민병대, 게릴라병의 존재로 정확한 병력 계산은 어렵다고 했다.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11만에서 15만명이 있었지만 5만 명이 도망갔다고 했다. 쑨자이웨이(孫宅巍)는 14만 2천명이라고 했다. 일본 위키의 ‘난징전(南京戦)’ 항목 참조.]

또한 중국군 패잔병 중에는 군복을 벗고 민간인에 섞여 들어가 안전구로 도주하려고 한 병사들도 다수 있었다. 이런 경우에 대한 일본군의 중국군 살해가, 전투 중의 것인지, 전투 후의 것인지, 혹은 전시국제법상 위법행위인지 아닌지 여부에 대한 논의로는 각각 ‘난징사건 논쟁 # 투항병포로의 취급 및 전시국제법’, ‘난징사건논쟁 # 편의병 및 전시국제법’을 참조하라.

참고로, 일중전쟁 당시의 전시국제법으로 유효한 것은 일본과 중국의 쌍방이 비준한 헤이그육전조약(ハーグ陸戦条約)이 있는데, 그 제4조에서 ‘포로를 인도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23조에서는 살해 등 해적수단(害敵手段)으로서 금지된 행위로 제3항 ‘병기를 버리거나 자위수단을 잃어서 항복한 적병을 살상하는 것’과, 적병에 대하여서 제4항 ‘구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 육군은 같은 해 8월, 육군차관 명의로 헤이그육전조약에 대해서 ‘엄밀히 준수할 필요없음’, ‘포로라는 명칭도 되도록이면 사용하지 않도록’이라고 현지군에게 통지하기도 했다. (‘난징사건 논쟁 # 투항병포로의 취급 및 전시국제법’을 참조하라)*

[* 일본 육군차관(陸軍次官)이 북지나(北支那) 주둔군 참모장 앞으로 보낸 1937년 8월 5일의 통첩 ‘교전 법규의 적용에 관한 건(交戰法規ノ適用ニ關スル件)'(육지밀(陸支密) 제198호)에서는, “육전의 법규 관례에 관한 조약 기타 교전 법규에 관한 협약 중, 해적(害敵) 수단의 선용(選用) 등에 관하여 이 규정을 노력하고 존중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으며, 또한 일지(日支, ‘일본’과 ‘지나(중국)’) 전면 전투를 상대보다 앞서서 결심했다는 언동(예를 들어 전리품, 포로 등의 명칭을 사용한다거나, 또는 군 스스로 교전 법규를 그대로 적용하였다고 공칭(公称)하는 것)은 애써서 피하라라고 지시하고 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이것은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좋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해석의 책임을 일단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맡기고서 그냥 내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도 했다.]

아래는 구(舊) 일본 육군 장교의 친목 및 상호 부조 단체인 가이코샤(偕行社)의 ‘난징전사(南京戦史)’에 의한 내용인데 ‘난징전사’의 기록은 대략적인 기준이며 정확성에 관해서는 논의가 있다.






4 난징사건의 발생원인(南京事件の発生原因)

난징사건이 일어난 원인(단, 규모에 관해서는 논의가 있음)으로서 일중(日中) 양군의 대응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 양국이 공식적으로 한 조사였던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먼저 일본측 문제로서는 선전포고가 없는 ‘사변(事変)’이었기 때문에 일중 양국이 비준한 헤이그육전조약을 일본육군이 의식적으로 철저히 지키지는 않았기에(전시국제법 관련은 ‘난징사건 논쟁 # 투항병포로의 취급 및 전시국제법’에 설명이 있음), 그로 인해 중국병 포로에 대한 취급지침의 결여와 점령후 주민보호를 포함한 군정(軍政) 방침의 결여가 있었고, 약탈에 의한 진군이 원인이 되어 군기가 무너졌고 비행을 단속하는 헌병이 적었던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일본군의 관습으로 인해서 이것이 상대방 포로에 대한 모욕으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또 일중전쟁 개시 시기부터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퉁저우사건(通州事件, 1937년 7월, 중국인 병사들이 허베이(河北) 일본인 거류민(조선인 등 포함)을 습격해 200명 이상을 강간, 학살한 사건)’과 같은 민간인 살해 등)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병이 중국 군인들을 인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 “난징에 파견된 16사단 경리부의 오하라(小原) 소위의 일기에 의하면, 310명의 포로 중 200명을 찔러 죽이고, 그중 1명은 여성이어서 여성 성기에 나무 막대기를 꽂아 넣었다(‘퉁저우사건’에서 중국군이 일본인 살해에서 사용된 방법), 또한 전우의 유골을 가슴에 두르고서 포로 살해를 저지른 일본병도 있었다고 적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2007) p121]

중국측 문제로서는 방위전의 실패, 지휘통제의 포기, 민간보호대책 결여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에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의 욘 라베도 중화민국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고 있다.*

[* 편집자주 : 관련해서, 일본군의 성문을 열라는 권고에 응하지 않으면서도 탈주가 곤란해진 부하를 버리거나 주민보호를 게을리 했다는 점, 배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장강을 건너려고 대군이 몰려들게 했다는 점 등에 대한 비판이 있다. 욘 라베는 중국 정부가 병사는 고사하고 일반 시민까지 희생시키는 것 아닌가 우려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던 뉴욕타임스의 틸만 더딘(Frank Tillman Durdin) 기자도 역시 무익한 방어 작전을 하려고 했던 장제스, 특히 탕성즈와 그 이하 지휘관들을 비판했다고 한다. 중국군의 방위 작전 잘못, 지휘 통제의 포기, 민중 보호 대책의 결여에 대해서는 쑨자이웨이(孫宅巍),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등도 역시 지적하고 있다. 일본 위키의 ‘난징전(南京戦)’ 항목 참조.]


5 국제사회의 인지 및 보도(国際社会の認知・報道)

5.1 외국 언론에 의한 보도(外国メディアによる報道)

미국의 ‘시카고데일리뉴스(Chicago Daily News)’(영어판)(12월 15일부)나 ‘뉴욕타임스’(12월 18일, 19일부), 영국의 ‘타임스(Times)’(런던타임스(London Times)(12월 20일부)와 같은 유력지 기사, 그리고 ‘로이터(Reuters)’에 의한 신문기사를 통해, 사건초기의 살인, 상해, 강간, 약탈 등의 범죄행위(Nanjing Atrocities)가 일본군에 의해 행해졌던 사실이 전달되고 보도되었다. 1938년 이후에도 신문기사와 잡지(미국 잡지 ‘라이프(LIFE)’ 특집, 1월호/5월호)에서 보도되었다. 자세한 논의 내용은 ‘난징사건 논쟁 # 당시의 국제보도에 대한 논의’를 참조하라.

5.2 사건발생후 외국인의 반응(事件発生後の外国人の反応)

당시 난징에서 거주한 구미인들 중에서 일본에 가족을 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난징전 이전에) 난징에 거주하여 일본인과 교재하면서 일본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이에 ‘일본군 입성후의 질서 안정’에 대한 기대심에 대해서도 난징 공략 당시 주재 기자의 ‘뉴욕타임스’(12월 18일) 기사 및 독일인 사업가인 욘 라베(John Heinrich Detlef Rabe)가 기록하고 있다.*

[* 욘 라베의 저술인 ‘난징의 진실(南京の真実, 편집자주 : 영어판은 ‘The Good Man of Nanking’, 독일어판은 ‘John Rabe-Der gute Deutsche von Nanking’, 한국어판은 ‘존 라베 난징의 굿맨‘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라베의 일기)은 312쪽에서 귀국 후 강연 부분에서 중국인에게 일본군이 오면 치안이 안정될 것이라고 말한 대목이 나오며, 80쪽에서는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이 독일 주재 중국 대사에 보낸 전보, “일본은 도시를 비롯해, 국민 정부, 생명, 재산, 외국인, 그리고 무저항의 중국 인민을 최대한 관대하게 취급한다”고 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난징전 이후에 일본군 입성 전후부터 전투종료 후에 일본군이 전시국제법을 위반하여 인도상 심각한 문제가 있는 행위가 간과하지 못할 정도로 저질러졌다고 욘 라베,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들인 존 매기, 마이너 설 베이츠 등이 기술했다. 욘 라베, 마이너 설 베이츠, 윌헬미나 미니 보트린은 중국병사에 의한 방화 및 폭행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6 중국정부의 대응(中国政府の対応)

6.1 중화민국(국민당)(中華民国(国民党))

1938년 1월, 유엔 제 100회 이사회에서 중국의 웰링턴 쿠(Wellington Koo, 顧維鈞) 대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으며, 2월 2일, 이사회는 전년 10월의 총회결의를 다시 한번 확인(remember)하면서 일본의 군사행동이 9개국 조약 및 부전(不戦)조약 위반이라고 밝혔다. 중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도 요구했으나 영국 및 프랑스가 반대했다.

국민당 계열 신문인 '중양르바오(中央日報, 중앙일보)', '신화르바오(新華日報, 신화일보)'는 미국의 상하이 신문인 Shanghai Evening Post and Mercury(대미만보(大美晩報)), The China Weekly Review (John w. Powell 주간)에 나온 사건보도기사의 번역만을 게재하였을 뿐, 독자적 취재를 통한 사건 보도는 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측 신문은 전의고양(戦意高揚)을 위해서 전승기사만를 연이어 게재했다. 외국기사의 번역 이외에는 난징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던 이유는 난징전의 패배를 보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제스(蒋介石)는 1938년 7월 7일 한커우(漢口)에서 ‘일본국민에게 고한다(日本国民に告ぐ)’라는 제목으로 일본군의 약탈, 폭행, 살인을 비난했지만 난징사건으로서 이를 특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齢)은 1938년 1월 미국의 친구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난징의 살육에 대해 언급했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난징사건 논쟁 # 당시 국제사회의 인식에 대한 의논’을 참조하라.

6.2 중국공산당(中国共産党)

사건 당시 중국공산당군은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의 산악지대에 있었다. 1938년 1월 1일 중국공산당 홍보지 ‘춘중(群衆, 군중)’은 난징사건을 잔학행위로서 언급했다. 그러나 전후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난징사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으며, 1982년 일본에서 발생한 '제1차 교과서문제(第一次教科書問題, 일본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에서 중국 '침략'을 '진출'로 바꿔쓰도록 지시해 일어난 파문)'를 계기로 1982년 8월에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인민일보)가 처음으로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문제를 해설했다.

전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간행물 기재를 살펴보면, ‘중공중앙문헌연구실(中共中央文献研究室編纂)’이 편찬한 ‘마오쩌둥 연보(毛沢東年譜)’의 1937년 12월 13일란에 ‘난징실함(南京失陥)’(난징함락)이라는 표기가 있을 뿐, 전 9권 총 6000쪽 이상의 연보에서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1957년 중국 중학교과서(장쑤(江蘇) 인민출판사)에 난징대학살이 기재되었으나 1958년판 ‘중학역사교사 지도요령(中学歴史教師指導要領)’에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여 국민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천도했다’는 기술이 있을 뿐, 1960년판에도, 1975년판 교과서 ‘신편 중국사(新編中国史)’의 ‘역사연표(歴史年表)’에도, 학살에 대한 기재는 없다. 

마우쩌둥이 학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군은 일본군과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과 국민당군의 분투와 희생이 강조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7 일본정부의 반응(日本政府の反応)

난징사건 발생 직후에 일본 도쿄의 외무성에도 이 사건의 비참한 내용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다. 외무성의 이시이 아타로(石射猪太郎)는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육군 군무국(軍務局)에 전달했는데, 그 결과 현지에 있는 난징 총영사가 육군의 압력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히로타 고우키(広田広毅) 외무대신이 육군대신 스기야마 겐(杉山元)에게 군기숙정(軍紀粛正)을 요청하여 1월에 육군참모본부의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가 현지로 파견되었다. 그 보고를 받고 현지 중지나방면군 사령관인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가 일본으로 소환되었다. 다만 히로타 고우키는 각의(閣議)에서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잔학행위를 막지 않은 것과 관련한 부작위(不作爲)로 판단됐다.

또 마츠이 이와네의 후임인 하타 슌로쿠(畑俊六) 사령관 및 제11군 사령관에 취임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대장처럼 당시의 난징파견군의 규율에 부정적인 평가를 한 사람도 있었다.

상하이전 이전인 1937년 8월 2일, 헌병사령부 경무부장의 통첩 ‘시국에 관한 언론, 문서 단속에 관한 건(時局に関する言論、文書取締に関する件)’에서는 “국경을 초월하는 인류애 또는 생명존중, 육친애 등을 기조로 하여 현실을 경멸하는 듯 강조 또는 풍자하여 희생봉공(犠牲奉公)의 정신을 동요, 감퇴시키는 우려되는 사항” 등이 언론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8 전후 군사재판에서의 취급(戦後の軍事裁判における扱い)

1945년 6월부터 1947년 3월까지 패전국 일본의 전범재판에 있어서 연합국 전쟁범죄위원회 극동소위원회와 중화민국은 일본인 전범 총 3147명을 선정하고 이를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 제출했다. 1945년 겨울, 국민당 정부는 전쟁범죄처리위원회를 설립했다. 1946년 2월 15일에 국민당 정부 국방부 군사법정(난징군사법정)이 성립했다. 난징에서의 폭행학살사건의 ‘주요죄범(主要罪犯)’으로 선정된 것은 제 6사단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였다. 다니 히사오는 1946년 2월에 도쿄에서 체포되어 10월에 난징법정으로 이송되었다.

8.1 난징재판(南京裁判)

8.1.1 검찰보고(検察報告)

1947년 2월, 난징지방원 검찰소 ‘적인죄행 조사보고(敵人罪行調査報告)’에서는 ‘적(일본)의 기만방해 등이 격렬하여 민심이 소침되어 스스로 나서서 자발적으로 살인 죄행을 신고하는 자가 매우 적고’ 일본군의 폭행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부정하는 자, 체면을 위해 고지하지 않은 자가 있어 조사는 극도로 곤란했으나 “확정된 희생자가 이미 30만 명에 달했고 앞으로 확증이 가능한 자는 20만 명을 넘는다”라고 했다. 

난징에서 집단도살(학살)을 행한 부대는 나카지마(中島), 하타나카(畑中), 야마모토(山本), 하세가와(長谷川), 미노우라(箕浦), 이노키(猪木), 도쿠가와(徳川), 미즈노(水野) , 오오이네(大稲)의 9개 단위였다.


8.1.2 판결(判決)

1947년 3월 10일, 난징국방부 군사재판소(재판장: 스메이위(石美瑜))는 피고 제6사단 사령관 다니 히사오(谷寿夫)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려 사형을 선고했다.

공소사실(公訴事実)

・ 다니 히사오가 인솔한 제 6사단은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대해서 원한을 풀기 위해 입성후 계획적 학살로 보복했다. 선봉부대인 다니 부대는 12월 12일 저녁에 중화문(中華門)을 공략하여 학살을 시작했다. 다음 날 13일 아침 나카지마, 우시지마, 스에마츠 등의 부대는 난징시 각 지구에 분산하여 대규모 학살과 방화, 강간 및 약탈을 범했다. 안전구의 외국인들이 항의했으나 일본군 지도자는 방치했다. 학살이 정점에 달한 시기는 12월 12일부터 12월 21일까지이며 중화문 밖의 화신묘(花神廟)・보탑교(宝塔橋)・석관음(石観音)・하관(下関)의 초해협(草鮭峡) 등에서 일본군이 집단적으로 사살을 하고 시체를 소각하여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이 학살로 인한 중국군인 및 민간인 희생자는 19만명 이상이며 그 외에도 자선단체가 매장한 시신이 15만체를 넘어 총 희생자는 30만명 이상이다. 

사례(事例)

・ 12월12일 일본군은 농민 왕서(王徐) 부인을 죽여 머리를 중화문 밖의 부두밑에 내어 걸었다.

・ 13일 마을 주민인 위소산(魏小山)은 다니(谷) 부대가 중화문 퇴초항(堆草巷) 방화 중에 살해당했으며 승려 2명, 여승 3명은 중화문 밖의 승암(僧庵)에서 살해당했다.
- 도탕(陶湯) 부인은 중화문 동인후리 5호에서 일본군한테 윤간을 당한 후 복부를 절개당했다.
- 임산부 소여(蕭余), 16살 소녀 황계영(黄桂英), 진(陳)자매, 63세 부인이 중화문 지구에서 폭행당했다.
- 농촌 소녀 정(丁)은 중화문 퇴초항(堆草巷)에서 일본병사 13명한테 윤간당한 후 살해당했다. 
- 13일에서 17일에 걸쳐 중화문 밖에 주둔한 일본군이 마을주민 30여명한테 물 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으라고 강요했는데 그 명령을 따른 사람은 동사(凍死)하고 거부한 사람은 살해당했다.
- 노인을 묶어 나뭇가지에 매달아 사격연습을 했다.
- 일본군 장교 두 명이 살인경쟁을 하여서 한 사람은 105명, 다른 한 사람은 106명을 살해했다.
- 일본군은 중화문 밖에서 소녀를 강간 후 거리를 지나가던 승려한테 강간을 강요하고 승려가 거절하자 살해했다. 중화문 밖의 토성두(土城頭)에서 3명의 소녀가 일본군한테 강간당한 후 자살했다.

・ 14일 일반시민 요가류(姚加隆)의 처가 중화문 참룡교(斬龍橋)에서 강간당한 후 살해당했다. 8살과 3살의 아이들이 울자 총검으로 찌르고 살아있는 채로 불에 태워죽였다.

・ 15일 오후 1시, 중국의 군인경찰관 2,000여명을 한중문(漢中門) 밖에서 기관총으로 사살하고 불에 태워 죽였다.

・ 16일 오후 6시, 화교초대소에 모인 난민 5천여명을 중산(中山)부두에서 기관총으로 사살하고 시체는 장강(長江)에 버렸다. 두 명이 생존했다.

・안전구 국제위원회에 의하면 16, 17일의 이틀간에 걸쳐 중국인 여성 1,000명 이상이 엽기적이고 잔학한 방법으로 강간당했다. 일본군은 밤마다 침입하여 노약자까지 연속적으로 강간했다.

・ 18일 밤, 무푸산(幕府山)에서 잡힌 중국 군인 및 민간인 57,418명은 철사로 묶여 하관(下関)의 차오세샤(草蛙峡)에서 기관총으로 사살당했다.

・ 19일, 농촌부인 한 명이 중화문 밖의 동악묘(東岳廟)에서 사살되어 대나무 장대가 음부에 삽입당했다.

・ 12월 20일까지 일본군은 계획적인 방화를 저질러 난징의 절반이 불에 탔다. 중화문 순상리(循相里)의 가옥 수십 채, 중화문 조어항(釣魚巷)・호북로(湖北路)・장낙로(長楽路)・우갑진(又閘鎮)의 가옥 수백 채도 전소했다. 모든 소화설비가 약탈되어 구제하려고 한 사람들까지 학살당했다.

・ 일본군은 식량, 가축, 식기, 골동품, 국제적십자병원 내의 간호사 재물, 환자 이불, 난민들의 식량을 모두 약탈했다. 난징 주재 미국대사관 직원인 더글라스 젠킨스(Douglas Jenkins, Jr.), 선교사 그레이스 바워(Grace Bauer), 그리고 독일인인 욘 라베와 바차드, 포블로, 제임센도 약탈을 당했다.

증거(証拠)

• 난징지방법원(南京地方法院) ‘적인죄행 조사보고(敵人罪行調査報告)’
• 증인 1,250여명
• 시신매장의 책임자였던 허전음(許伝音)・주일어(周一漁)・유덕재(劉徳才)・성세징(盛世徴)에 대한 조서
• 홍백자회(紅白字会)의 매장기록 43,071구
• 숭선당(崇善堂)에 매장된 112,266구 (남자 109,362, 여자 2,091, 아동 813)
• 난징 독판(督辨) 고관오(高冠吾)에 의한 영곡사(霊谷寺) 무연불(無縁仏) 비문(碑文) 
• 일본군이 촬영한 사진 15장과 현지제작된 난징학살 관련 영화
• 기자 해럴드 J. 팀펄리(Harold John Timperley), ‘일본군 폭행기실(日本軍暴行紀実)’ (What War Means: The Japanese Terror in China)
• 중국군 대장장 곽기(郭岐)에 의한 ‘함도혈루록(陥都血涙録)’ 
• 서숙희(徐淑希) 편(編) ‘난징안전지대의 기록(南京安全区攩案)’(Documents of Nanking Safety Zone, 1939,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기록집)
• 스마이스 조사보고
• 마이너 설 베이츠(Miner Searle Bates) 및 루이스 S.C. 스마이스(Lewis S.C. Smythe)의 증언

피고의 반론(被告の反論)

다니(谷)의 반론

 다니 히사오(谷寿夫)의 부대인 제 6사단은 입성후 중화문 일대에 주둔하다가 12월 21일에 전원이 우후(蕪湖)로 이동했다. 중화문 일대는 격전지이며 주민들은 모두 피난했으며 학살의 대상이 될 사람이 없었다.

 피해자는 모두 일본군 부대번호를 지적하지 못했다. 학살사건은 제16사단(사령관 나카시마 게사고(中島今朝吾))와 제114사단(사령관 스에마츠 시게하루(末松茂治)) 및 기타 부대가 책임을 지고 있었다. 범죄행위 조사표에도 ‘나카지마’라는 이름이 다수 기재되어있다. 다니 히사오의 부대 제6사단은 군규가 엄정했으며 한 사람도 살해하지 않았다.

 오가사와라 기요시(小笠原清)의 증언 이외에 참모장 시모노 잇카쿠(下野一霍), 여단장 사카이 도쿠타로(坂井徳太郎), 야나가와(柳川)부대 참모장 다나베 모리다케(田辺盛武), 참모 후지모토 테츠쿠마(藤本鉄熊)의 소환신문을 요청하고 싶다.

 본 사건의 증거는 모두 위조이며 죄의 근거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피고의 반론에 대한 판결(被告の反論への判決)

이 항변(弁明)에 대하여 법정은 “책임을 피하려는 변명(弁解)”이라고 하면서, 폭행사실은 명백한데도 억지(強弁)를 부린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판정을 내렸다.

 범죄행위를 공동으로 실행한 자는 발생한 모든 결과에 대하여 마츠이, 나카지마, 우시지마, 스에마츠, 야나가와 각 군사지도자가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조사표에 ‘나카지마’의 이름이 기재되었다든지, 피해자가 일본군의 부대번호를 지적하지 못한다 등의 언사를 구실로 삼아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다.

  학살, 강간, 약탈은 피고 부대가 난징에 주류했던 기간 내에 발생했으며 중화문 일대에서의 방화, 살인, 강간, 약탈사건이 459건에 달했다. 폭행은 피고부대에 의한 행위라는 증언이 다수 존재한다.

- 범실포(范実甫) 증언: “다니 히사오의 부하 중 살인, 방화, 강간을 저지르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고 다니 부대는 가장 잔인한 부대였다” “살인은 수십만 명에 달한다” 집 맞은 편에 살던 손녀는 다니 히사오의 부하 13명한테 강간당했는지 비명을 질렀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하복부를 찔러 죽였다. 이웃인 위소산(魏小山)이 다니 히사오 부대가 방화한 곳으로 불을 끄러 갔다가 일본군한테 참살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 정장영(丁長栄) 증언:  “7명의 내 자식들은 다니 부대 병사들에게  총살당하거나 구타로 인해 죽었다. 중화문 새홍교(賽虹橋)에서 두 명의 여성이 일본군한테 강간당해 음부에서 복부까지 총검으로 찔려 장이 배에서 튀어나온 시체를 봤다”
- 서승주(徐承鋳) 증언: “형은 다니 히사오 부대한테 징발당하고 우화대(雨花台)에서 총으로 구타당해 죽었다”
- 구양도린(欧陽都麟) 증언에서는 12, 13일의 이틀간 중화문 내외에 시체가 산란하여 임산부는 총검으로 복부를 찔려 태아가 배에서 튀어나와 죽었다. 어떤 여성은 총검으로 음부를 찔려 검끝이 엉덩이를 관통하여 죽었다. 80세 노부인도 강간당하고 죽었다.
- 장홍여(張鴻如) 증언: “살인, 방화, 강간이 가장 심했던 것은 다니 히사오 부대였다”

 다니 히사오의 부대는 보정(保定), 석가장(石家荘) 일대에서도 주민의 의류와 골동품, 가구를 약탈했고 저장(浙江)성 더칭(徳清)의 경계에서 평민 두 명을 참살했다.

 일본인 증인 오가사와라 기요시(小笠原清)도 피고부대가 폭행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진술했다.

 소환요청된 4명은 난징대학살 사건의 공범용의자로 개인적인 정으로 서로 감싸며 진술하고 있다. 또한 피고의 요청은 지연을 노린 것이다. (소환을 인정할 수 없다)

 증인 천여명은 모두 직접 그 상황을 체험하거나 목격했다.

 피해자의 시체, 두개골 수천 구를 본 법정이 파내어 확인했다.

 일본군은 살인을 게임이나 오락처럼 여겼다.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게재 기사가 증거)

 학살 사진, 학살 도시의 영화는 일본군이 촬영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무훈(武勲)을 과시하려고 했다.

위 내용은 피고들이 공동으로 폭행을 저지른 증거이며 “피고는 끝내 허위로 학살을 말살하기 위해 사실을 위조라고 주장하는 등의 망언을 지껄이고 있으나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결론(結論)

피고는 병사를 방임하여 포로 및 비전투원을 학살했으며 강간, 약탈, 재산파괴 등의 폭행을 저질렀다. 살육 피해자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 이것은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이며 헤이그육전법규(2조, 3조) 위반, 전쟁범죄 재판조례(1조, 2조2관, 3조1관/4관/24관/27관, 11조), 중화민국 형사소송법 291조 전단, 중화민국 형법(28, 55, 56, 57조)에 의하여 극형에 처한다.

1947년 4월 26일에 다니 히사오(谷寿夫)는 총살되었다. 그 후 7월에 이소가이 렌스케(磯谷廉介) 중장도 난징사건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1948년 1월에는 제6사단의 중대장 다나카 군기치(田中軍吉)가 ‘300인 참수(三百人斬り)’를 저지른 죄로, 또 제16사단 보병 제9연대의 노다 츠요시(野田毅),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가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을 한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아 세 명은 처형당했다. 



8월, 난징법정은 홍콩공략전 등에서 포로 및 민간인 살해와 강간죄로 사카이 다카시(酒井隆) 중장을 A급전범으로 사형판결을 내려 9월에 처형했다.

다니 히사오(谷寿夫)에 대한 판결문 및 재판자료와 증언은 중국정부의 요청에 의해 2015년 10월 9일,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록되었다. ‘난징사건 논쟁 # 세계기록유산 등록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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