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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신문] 하타 이쿠히코, 니시오카 쓰토무 위안부 문제 대담

니시오카 쓰토무 “사실관계 파악도 없이 한국에 먼저 덜컥 사죄해버린 일본 정부의 책임 고민 필요” … 하타 이쿠히코 “위안부 문제 책임 절반 이상은 일본에 있어... 한국은 오히려 수동적”



※ 본 콘텐츠는 일본 ‘산케이신문(産経新聞)’이 2015년 1월 3일자 ‘하타 이쿠히코, 니시오카 쓰토무 대담 “아사히신문의 오보는 일본에 대한 명예훼손”(秦郁彦 × 西岡力 対談 「朝日の誤報は日本の名誉毀損」)’ 제하로 게재한 대담 기사이다. 위안부 문제 진상규명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전 니혼(日本)대학 교수와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도쿄기독교대학 교수(당시)가 앞서 일본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문제 오보에 대한 정정, 사죄건에 대해서 분석, 논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일위안부합의가 이뤄지기 1년 전쯤 일본 지성사회의 위안부 문제 논의를 잘 알 수 있다. 산케이신문 측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한다. (번역 : 미나모토 히카루)


하타 이쿠히코, 니시오카 쓰토무 대담
“아사히신문의 오보는 일본에 대한 명예훼손”
(秦郁彦 × 西岡力 対談 「朝日の誤報は日本の名誉毀損」)


일본 정부가 ‘고노담화(河野談話)’를 검증하고 아사히신문 사장이 사임하는 등, ‘위안부 문제’가 큰 전환점을 맞았던 2014년. 이제 해가 바뀌어 올해(2015년) 조선반도 정세나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에서도 과연 진전이 있을 것인가. 제30회 ‘세이론(正論)’ 대상 공동 수상자인 현대사가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82) 씨와 도쿄기독교대학 교수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58) 씨가 대담을 했다. 역사의 진실을 계속해 호소하고 있는 이들 두 사람이 견해를 나눴다. (사회·구성 ‘세이론(正論)’ 조사실 차장 오오노 마사토시(大野正利))


[오오노 마사토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작년(2014년) 12월 10일 전직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씨가 ‘분게이슌주(文芸春秋)’에 발표한 수기에는 니시오카 쓰토무 선생님에 대한 반론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일부 매체의 취재에도 응하고 있고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 걸까요?

[니시오카 쓰토무] 
저는 이번에 월간 ‘세이론(正論)’의 최신호(2015년 2월호)에서 우에무라 다카시 씨에게 다시 전면적인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수기에서 자신이 날조 기사를 쓴 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한 제 반론은, 옛 위안부 당사자는 한 번도 말한 바 없었던, ‘여자정신대로 연행됐다’는 가공된 이력을 마음대로 써서 가져다 붙였으면서, 정작 옛 위안부 당사자가 반복해서 말했었던 ‘빈곤의 결과로 기생이 되기 위해 포주인 양아버지 손에 이끌려 위안소로 갔다’는 진짜 이력에 대해선 쓰지 않은 것은 날조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타 이쿠히코] 
2014년 12월 22일 아사히신문이 위촉한 이들을 중심으로 한, 과거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기사들을 검증하는 ‘제3자위원회’의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호쿠세이가쿠인(北星学園)대학 측이 우에무라 다카시 씨와의 강사 고용계약을 연장하지 않은 사실을 둘러싸고 소동이 있어서 거기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만, (학교 측에서) “안이하고 부주의”했지만, “부자연스러운 일은 없었다”고 하면서 별 것 아닌 일로 끝나 버려 낙담했습니다. 

그리고, 우에무라 다카시 씨에게 특종 기사를 제공했다는 옛 위안부들에 대한 녹음 테이프에 관한 건입니다만, 당시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이 그 존재를 알고서 우에무라 다카시 씨에게 전하고자 했으므로 그래서 굳이 우에무라 다카시 씨가 서울로 출장을 가서 녹음테이프를 듣고 기사를 썼다고 그럽니다. 하지만,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은 어째서 일부러 오사카 본사 사회부에 있던 우에무라 다카시 씨를 한국으로 호출한 것일까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아사히신문에서는 당시 도쿄와 오사카, 두 본사 간에 온도차가 있었습니다. 특히 오사카 본사의 경우는 ‘여자들의 태평양전쟁(女たちの太平洋戦争)’이라는 특집 기획에서 “전쟁 이전의 일본인들은 정말 나빴다” 등의 강한 논조를 전개했었고, 도쿄판에는 게재되지 않은 기사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도쿄 본사 외신부의 관할인 서울지국장이 오사카 본사 쪽에서 옛 위안부 관련 기사를 쓰게 하기 위해서 우에무라 다카시 씨를 부른 것이라고 봅니다.

[하타 이쿠히코]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가 녹음을 한 것인지도 판명되지 않은 테이프를 근거로 기사를 썼다는 것인데, 어딘지 좀 수상쩍습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대표가 테이프 내용을 들려줬다는 것인데, (우에무라 다카시 씨는) 옛 위안부 당사자들과는 정작 만나지도 않고 일본으로 귀국했습니다. 이후 3일 간 한국 현지에 남아 있었다면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호소하고 나선 김학순 씨의 기자회견에도 참석할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완전한 특종 기사가 됐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사히신문 선배들 가운데에도 그 녹음테이프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했던 것인지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사히신문이 위촉한, 과거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기사들을 검증하는 ‘제3자위원회’의 보고서는 전반적으로 엄중한 논조입니다만,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2014년 8월 아사히신문이 자체 검증했던 것을  ‘제3자위원회’도 그냥 그대로 따라갔다는 느낌이라서, 새로운 사실이 발굴되지 않았고, 위안부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는 새로운 인식도 제시되지 않았기에 적지 않게 실망했습니다.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 증언에 대한 논의는 이제 전부 이뤄졌으므로 앞으로 새로운 논점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아사히신문은 어째서 작년(2014년) 8월에 검증 기사를 낸 것일까요. 박근혜 정권의 노골적인 반일 외교와, 이전부터 미국 등지에서 재외 한국인들이 일으킨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있어서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기사나 요시다 세이지의 최초 증언이 그대로 ‘성노예 20만 명’이라는 식의 메시지로 표출돼 왔습니다. 일반적인 일본 국민들이 ‘이상한데…’하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조사해 보니 아사히신문이 오보를 낸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20년도 더 이전의 오보가 전 세계에서 일본의 명예를 야금야금 훼손해 왔다는 데에서 그 책임이 무겁다고 하는 여론이 조성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타 이쿠히코] 
동감입니다. 아사히신문이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은 급속도로 쪼그라들기 시작하여, 오히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사히신문의 스탠스를 강하게 비판하는 풍조가 강해졌습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분야에서도 여론과 괴리가 있다는 부각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사히신문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방향을 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니시오카 쓰토무] 
검증 방법도 ‘독자 여러분께(読者の皆さんへ)’라는 식의 형식이라서,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의문에 답한다는 태도입니다. 23년 전에 하타 이쿠히코 선생님께서 한국 제주도에까지 가셔서 요시다 세이지 씨의 주장은 날조됐음을 확인하는 문제 제기를 최초로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사히신문은 하타 이쿠히코 선생님에게 답한다는 태도가 아닙니다. 비판이 고조되고 있는 데에서, 마치 ‘누명을 쓰고 있다는 점에 답을 해드립니다’ 하는 식이예요. 언론기관인 이상, 비판에 대해서는 가령 ‘니시오카의 논문에 답한다’는 식으로 대응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수기에도 제 논문에 대한 답변은 없습니다.

[오오노 마사토시] 
작년,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검증했습니다. 역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써 일한(日韓) 관계의 장래는 개선될는지요?

[니시오카 쓰토무] 
지난 1992년 1월 방한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 수상이 노태우 당시 한국 대통령에게 사죄한 사건이 일한(日韓)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일한(日韓) 국교정상화 교섭이 시작된 1951년 이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외교 문제가 됐던 적은 없습니다. 정말로 문제가 있었다면 1965년 일한기본조약 체결 당시 논의됐어야 했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후 1980년대가 되어서야 요시다 세이지 씨가 책을 쓰고 한국으로 사죄하러 간 것이고, 거기에 더해 1991년 일본의 전후보상 문제 전문 변호사들이 붙어서 옛 위안부들이 소를 제기한 것을 아사히신문이 실시간으로 계속해 보도했습니다. 그때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은 한국 매체들이 1991년 아사히신문의 대대적인 캠페인을 기점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크게 다루게 됐습니다.

[하타 이쿠히코]
그것을 등에 업고 아사히신문은 1992년 1월 11일에 일종의 트릭같은 수법으로 ‘군이 관여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강제로 연행해 위안부로 만들었다’, ‘위안부의 대다수는 조선인 여성’이라는 식의 대대적 캠페인 기사를 썼습니다. 다음날 사설에는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저는 이걸 ‘빅뱅’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아사히신문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갔습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결정적인 한 방은 일본 외무성이 ‘일단 사죄해야 한다’는 식의 자세를 취했다는 점이고, 그 때문에 아사히신문의 보도와 함께 묶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외교 문제가 돼 버렸습니다. 이번 ‘고노담화’ 검증 결과에서도 1991년 12월 단계에서 사죄하는 것을 전제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검토했다고 돼 있습니다. 요시다 세이지 씨가 증언한 것과 같은 강제연행 문제에 대해서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은 채, 실태에 대해 조사도 하기 전에 사죄부터 하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외교적으로 사죄한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어떻든, 사죄에 앞서 조사가 선행돼야 하는 법입니다.



[하타 이쿠히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이렇게 큰 문제가 돼 버린 책임의 반 이상은 일본에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오히려 수동적이었어요. 요시다 세이지 씨를 위시하여 아시아 각지로 나가서 옛 위안부들을 찾아내고 보상 재판으로 끌고 들어온 변호사, 그리고 유엔인권위원회(지금은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실현시킨 변호사도 모두 일본인입니다. 저로서는 자국을 깎아내리는 일에 열중하는 일본인들이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나라라면 사회적 제재가 내려질 테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죠. 오히려 미디어에서 그들을 띄워줍니다.

[니시오카 쓰토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지난해 8월 아사히신문의 검증을 통해 얼핏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노 담화’의 근거였다고 하는 옛 위안부들 16명에 대한 인터뷰 조사가, 실은 옛 위안부들의 증언을 검증도 하지 않았던 엉터리 조사였다는 사실을 당시의 기록을 입수해 폭로했던 산케이신문의 특종 보도, 그리고 일본 외무성이 한 번 유엔에 제출하려다가 갑자기 취소하고서 은폐해버린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론 문서를 입수해 전문을 공개한 월간 ‘세이론(正論)’의 특종 보도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의 극비 문서를 공개하고 새로운 사실을 찾아낸 것이 논의의 수준을 끌어올린 것이지요. ‘일본군 위안부’ 보도의 급속한 전개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고 봅니다. 보도 현장에서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든지, 또는 새로운 견해를 제안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새해에는 이런 건설적인 논의의 진전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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