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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의 시간여행(1)] 사리원역 7여인 납치 미수 사건-1

그들이 사리원까지 오게 된 기구한 사연은?

[김병헌 ·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국권상실기(1910~1945) 조선 땅에서 일어난 여인들의 수난사(受難史)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김병헌의 시간여행(時間旅行)’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연재를 통해 매소부(賣笑婦), 추업부(醜業婦), 위안부(慰安婦) 등으로 불리어진 당시 하층 여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저자


1925년 8월 11일 12시 50분, 경의선 사리원역!

만주 봉천행 기차가 멈추자 일곱 명의 여인과 세 명의 일본 남자들이 역사(驛舍) 개찰구를 나와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를 둘러싸고 큰 소동을 벌였다. 일본어로 말하는 남자들이 여인들에게 자동차에 타라고 윽박지르고, 여인들은 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틴 것이다. 얼마간 밀고 당기며 옥신각신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윽고 남자들의 손에 들려있던 몽둥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여인들을 가격하자 세 명의 여인이 쓰러졌다. 갑작스런 폭력 사태에 구경꾼들이 역 광장을 가득 매우고 웅성거리는 가운데 신고를 받은 경찰이 남녀 모두를 사리원 경찰서로 연행했다. 

취조 결과, 이들 여인들은 모두 조선인들로 본적을 경성에 둔 이난옥(李蘭玉, 21), 강계 조금선(趙錦善, 20), 마산포 김만옥(金萬玉, 23), 평남 강서 정향란(鄭香蘭, 22), 대구 김매화(金梅花, 20), 대구 이순애(李順愛, 22), 평양 김명주(金明珠, 19) 등 일곱 명, 남자는 오사카에 본적을 둔 오산무팔(奧川茂八,32), 오산등송(奧川藤松,39)과 안악에서 마중 나온 오산태랑(奧山太郞) 등 3형제였다. 이들 중 오산태랑(奧山太郞)은 사리원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안악(安岳)에서 요리점을, 둘은 일본 오사카에서 조일정(朝日亭) 지점을 경영하는 주인이었다. 본점은 오사카의 조일정(朝日亭)으로 주인은 향정일지진(向井一之進, 30)이다. 



일곱 여인이 사리원까지 오게 된 기구한 사연은 이렇다. 1924년 11월경 오사카에 사는 향정일지진(向井一之進, 30)이라는 남자가 조선에 와서 일곱 여인들에게 각각 전차금 300원에 1년 6개월에서 5년 간 요리점 ‘작부(酌婦)’ 계약을 맺고 일본으로 데려갔다. 오사카에서 이들을 데리고 조일정(朝日亭)이란 요리점을 개업한 향정은 영업 시작 2개월이 지나지 않아 이들에게 매춘(賣春)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작부는 매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엄연한 계약 위반이었다. 여인들은 계약과 다르다며 거부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옷도 주지 않고 갖은 학대를 가해 도리 없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다못한 여인들은 오사카 금궁(今宮:いまみや) 경찰서에 처벌을 바라는 탄원을 하기에 이르렀고, 여인들의 탄원을 접수한 경찰서에서는 조일정을 폐업시키고, 주인 향정(向井)은 구류 12일, 일곱 여인들은 조선으로 돌려보내도록 처분을 내렸다. 이후 향정은 부끄러워 어디로 도망하고 말았다는데 이후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조일정 지점(支店) 주인 되는 오산(奧川)의 형이 안악에서 요리업을 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이곳까지 끌고 와서 다른 데로 팔아먹으려는 흉계를 꾸민 것이었다. 안악에 있는 오산태랑에게는 미리 사리원역 앞에 자동차를 대기시켜 놓을 것을 통지하였다. 

여인들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날, 이들은 조선으로 가는 다른 친구들이 정거장에 있으니 그곳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여인들을 차에 태워 출발했으나 정거장이 아닌 축항(築港)으로 데리고 가 온갖 감언이설로 자신들의 말 대로 할 것을 요구했다. 천신만고 끝에 사리원역까지 데리고 온 여인들이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안악(安岳) 행 자동차에 타지 않겠다고 완강히 저항하자 다급해진 이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연약한 여인들을 사정없이 구타하기에 이르렀다. 일곱 명 중 조금선, 김만옥, 이난옥 이 세 여자는 일시에 기절하는 등 일대 활극이 벌어졌고 경찰서에 불려간 일곱 여인들은 일본 남자들을 죽어도 따라가지 않겠다며 눈물로 호소하였다. 이날의 경찰서 풍경을 당시 신문은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경찰서 앞에서 여자 7명이 애원하는 울음소리는 구경하는 사람으로 동정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는데 밤이 깊도록 경찰서 앞에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교통 상 대혼란을 이루었으며 이 광경을 본 일반시민들은 일인(日人)의 무리한 행동에 대하여 비난이 자자하다고 한다.” 
(1925. 8. 13. 시대일보)


취조를 마친 사리원 경찰서에서는 일곱 명의 여인들에게 ‘아직 만기가 되지 못하였으니 안악으로 따라가서 기한(期限)을 마치되 만일 일본인이 전과 같이 무리한 행동을 하면 안악경찰서에 조회하여 엄중히 처벌하여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여인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일본인은 따라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3일 기한을 주면 몸값을 전부 갚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을 비치자 경찰은 이를 일본인 포주에게 전달하였고 그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함으로써 본 사건은 극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하였다. 

동이 틀 무렵 일본인이 먼저 경찰서를 떠나고 이어 일곱 여인들도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경찰서를 나서 사리원역 인근의 정방(正方) 여관에 짐을 풀었다. 맨몸으로 끌려온 그녀들이 3일 동안 마련해야 할 돈은 모두 2천 1백 원이라는 거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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