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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용가치 사라진 유승민,친노좌익에 폐기처분

유승민 대선주자 선호도 4%.. 새정연 지지층에서도 미미한 수준


포퓰리즘 정책을 지지하며 박근혜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는 이유로 좌익세력으로부터 추앙받았던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지지율 거품이 대부분 소멸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갤럽이 17일 발표한 ‘여야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 결과, 유 전 원내대표는 7위에 그쳤다. 조사 결과 , 박원순 서울시장이 16%를 얻어 1위에 올랐다. 이어 김무성(15%)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12%)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안철수(8%) 전 새정치연합 대표, 오세훈(6%) 전 서울시장, 김문수(4%) 전 경기지사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유 전 원내대표는 정몽준 전 새누리당 대표와 같은 4%였다.

새누리당 지지층에서 유 전 원내대표의 지지율은 2%로, 야권 주자인 박원순, 문재인, 안철수보다 낮은 수준이었다고 한국갤럽 측은 밝혔다. 친노좌익 유권자들이 대거 포함됐다고 볼 수 있는 새정연 지지층에서도 유 전 원내대표를 선택한 비율은 4%에 불과했다.

유승민의 몰락, ‘좌익 통일전선전술’ 부역자의 말로

이는 박근혜 정권 타도와 새누리당 분열을 위해 일시적으로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띄워주던 친노좌익 세력이 효용 가치가 떨어진 유 전 원내대표를 폐기처분하는 절차에 돌입한 것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우파세력과 일시적으로 연대했다가 순혈 좌파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숙청하는 친노좌익 특유의 ‘통일전선전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좌익에게 이용당한 우파진영 정치인들은 결국 좌익세력에게 배신-숙청당하면서 대가를 치른 바 있다. 97년 대선 당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그는 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국무총리로 임명되며 DJP 공동정권을 이어갔다. 그러나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김종필 당시 총리와의 내각제 개헌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았다. 여기에 대북정책에서도 두 사람의 생각은 극단적으로 달랐으며, 2001년 8월에 불거진 ‘만경대 방명록’ 논란을 계기로 김대중 대통령은 김종필 총재와의 연합정권을 파기했다.

2002년 대선에서 정몽준 후보의 운명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2002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극좌파에 가까운 노무현 후보와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했고, 이에 패하자 결과에 승복했다.

김대중-노무현에게 숙청된 김종필-정몽준과 유사

그러나 노무현 후보는 정 후보와의 정책합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했고, 집권 후에도 정 후보를 고려하지 않은 좌익 노선으로 갈 것임을 시사했다. 이에 선거를 하루 앞두고 단일화는 파기됐고, 정 후보로서는 단일화를 통해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 가장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에서 아무 지분도 가지지 못했다.

김종필 전 총재와 정몽준 전 의원이 김대중-노무현 세력에게 당했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 좌익의 트레이드마크인 ‘통일전선전술’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전선전술은 1차적 목적을 달성한 후 일시적으로 손잡았던 중도·우파세력을 척결하고 순혈 좌파세력만의 정권을 출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좌익 통일전선전술의 시초는 1940년대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시절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통해 공동의 적이었던 일본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한 후, 공산당은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석권했다.

베트남 공산화 과정에서도 월맹군에 자발적으로 협력하던 월남 내 ‘자생 좌익’들은 이후 무참히 숙청을 당했다. 김일성이 해방 직후 북한에서 권력을 움켜쥐는 과정에서도 한때 자신에게 협력했던 공산당 계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 및 숙청이 있었다.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과감하게 폐기화고, 순혈 공산주의자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게 공산당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몰락도 좌익과 손잡으면서 예견된 비극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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