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던 눈물의 바다
최근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따라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 위기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북한의 경우에는 서해바다(NLL)를 통한 도발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면서 하시라도 틈만 보이면 공격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금은 북한의 공격의지를 꺽기 위하여 도입한 우수한 장비로써 장비의 우위를 논하고 있지만, 결코 우수한 함정과 무기가 저절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해군의 상황을 예를 들면 1970년 초까지 해군력은 북한이 절대적 우세의 시기로 서해와 동해바다는 그야말로 눈물의 바다였다.
동해와 서해바다에서 조업 중인 어선과 이를 보호하는 해양경찰을 틈만 나면 납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군에게도 위협을 가했다.
1967년에 동해에서 당포함이 해안포에 포격 받아 침몰되고 39명이 숨졌고, 1968년에는 미국의 Pueblo호가 납치되어 북한 대동강에서 체제선전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1970년 6월 5일 북한 함정은 연평도 부근 공해상에서 우리 함정을 기습 공격하여 납치해 갔다. 이른바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이다. 어선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어엿한 현역 120톤급 해군함정이 북괴와 15분간 교전을 한 후 승무원 20명 중 대부분이 사상된 채 납치 당했다.
박정희 대통령, 국민의 성금으로 MTU엔진을 탑재한 고속정을 건조한 것이 방위산업의 태동
어처구니없는 해군함정의 피랍된 이유는 해군 방송선은 120톤급으로 최대 시속은 12노트 (시속 24㎞)정도, 40㎜와 20㎜ 기관포 각 1문으로 무장하였으며, 레이더도 갖고 있으나 매우 노후하여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북괴 고속포함은 북괴 해군의 연안경비용 함정으로 250톤급이며, 최대속력은 25노트(시속 50㎞), 무장은 75㎜ 포 1문과 기관포, 레이더를 갖고 있었다. 즉, 북괴는 2배나 빠른 속력의 고속함정으로 한국 해군을 자유자재로 유린한 것이었다.
게다가 1970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남파 간첩선 사건은 9건이었다. 이 중 6건은 상륙 지점에서 발견된 것이고 나머지 3건만 해상에서 격침시켰다. 이 3건 중에도 2건은 공군의 지원을 받아 항공기가 격침시킨 것이니 해군에서 단독 처리한 것은 1건에 불과 할 정도로 우리 해군은 속수무책이었다는 결론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연안은 북괴 간첩선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해군 함정이 어이 없이 피랍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불안해했고 여론은 들끓었고 국민들은 다투어 방위성금을 내기 시작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고속정을 확보하기로 하였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미국 해군의 원조를 받는 것을 검토하였으나 미 해군의 경우 항공모함, 구축함과 같은 대양해군 함정은 있으나 북괴를 막아낼 한국연안에 맞는 소형고속정은 생산을 하지 않아 첫단추부터 어렵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꼇다. 그리하여 미국에서의 무기의존에서 독립하지 않으면 자체 방위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당시 김학렬 부총리를 통하여 방위산업 육성을 지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써 우리나라에서 자체 고속정을 생산하기로 하였고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통해 설계에 들어갔다. 결국 우리나라의 방위산업의 태동은 이렇게 눈물로써 시작된 것이다.
당시 고속정에는 북괴의 타격을 막기 위해서는 고속의 엔진이 반드시 탑재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조선소에서 독일제 MTU엔진을 탑재한 고속정이 취역하게 된 것이다.
당시 기록에 남아있는 자료를 보면 MTU 엔진의 성능으로 우리나라 고속정은 최대 40노트(시속 80㎞)까지 속력을 낼 수 있어 북괴 함정에 비해 월등한 성능이었다. 비로소 바다를 북괴로부터 빼앗기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애국과학자 KIST 연구진들이 선택한 고속정용 MTU 엔진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태동이 눈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기술로 만들어야 하는 고속정을 선정했던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그야 말로 애국심에 불타는 과학자들의 집합체였다.
익히 알다시피 1966년부터 1990년까지 해외에 있던 한인 과학자 1000명이 부와 명예를 버리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조국으로 돌아와 과학입국을 만든 것이 바로 KIST이다. 초기 귀국자의 30%가 4년만에 스트레스로 인해 암으로 사망한 눈물의 역사가 바로 한국과학의 역사이며, 방위산업의 역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KIST 연구진들이 해군의 고속정에 최고의 제품을 설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의 세계 1위 조선산업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가난한 나라였던 우리나라는 최적의 성능을 가진 고속엔진을 선정하게 되었는데 바로 독일 MTU사의 디젤 엔진이다.
독일 MTU사는 엔진의 바이블로 알려져 있는데 1909년 독일에서 설립된 이 회사는 회사 이름 자체가 Motor Turbine Union(엔진 터빈 제국)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
최고급 자동차 가문인 창업자 마이바흐가 다이믈러와 자동차 산업에서 엔지니어링 모델로 역할한 MTU는 항공기엔진, 선박엔진, 기차엔진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세계대전 때는 탱크엔진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K2 전차의 핵심부품을 전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생산하는 회사로 알려져 있다.
고속정으로 북괴 간첩선을 막아내다
애국 과학자 KIST 연구진들이 만든 국산고속정이 드디어 운영되자 북괴의 해상 도발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북한을 압도하는 고속엔진은 그야말로 날게 단 듯 고속정을 움직이게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해군의 터빈엔진은 정상적인 속력이 나오기 까지 무려 40분 이상의 가동준비가 필요해서 북괴의 신속한 간첩선에 대응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고속기동이 가능하게 해준 MTU엔진을 탑재한 해군 고속정이 나타나면서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얼마나 빨랐는지 날개 단듯이란 표현이 어울렸던지 당시 고속정의 명칭은 제비, 기러기, 백구 등으로 호칭되었고 현재는 참수리, 검독수리로 변경되어 불려지고 있다. 물론 현재의 고속정의 엔진은 독일 MTU엔진을 사용하는데, MTU MD538, TB90 디젤엔진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민성금으로 마련한 고속정 건조가 결국은 자주국방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과 북괴로부터 바다를 지켜내었다는 점에서 그 당시의 신문들은 다음과 같이 기쁨을 전하고 있다.
................ 특히 이번 작전에서 전과를 올린 해군 고속정은 국민의 방위성금으로 우리의 기술진에 의해 설계·건조된 신예함정이었다는 점에서 다같이 가슴 뿌듯한 자신과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1978.5.1 경향신문)
최근 육군 K2 전차엔진의 선정과정에서 독일 MTU 엔진과 관련하여 폄훼하는 내용이 퍼지고 있다. 만약 MTU 엔진이 수준미달이었다면 당시 가난한 나라를 지키겠다고 이역만리에서 돌아와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신 애국 KIST 과학자들의 무덤에 침을 뱉는 격이다.
그리고 지금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 창조경제이다. 창조경제의 역할을 담당할 미래창조과학부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KIST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근혜 당선자이기에 무슨 이유로 폄훼하고 있는지 잘 알 것이다.
대한민국의 발전만을 위해 생각하신 애국과학자 KIST연구원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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