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워치 24호 칼럼입니다.
제럴드 포드는 미국 정치 역사 상 유일하게 선거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는 37대 대통령이었던 닉슨 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할 당시 포드는 부통령이었고, 포드는 승계순위에 따라 대통령 직을 승계하였다.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람은 포드를 제외하고는 8명이다. 이중 가장 유명한 승계 건은 케네디 암살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린드 B 존슨이다. 미국의 경우 부통령은 대통령과 함께 선거를 치르기 때문에 승계를 하더라도,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고 인정해줄 수 있다. 그러나 포드는 부통령 역시 선거없이 이어받았다.
닉슨이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승리할 당시 부통령은 애그뉴였다. 그러나 애그뉴는 주지사 당시 행해진 뇌물수수, 세금포탈, 자금세탁 혐의를 받던 중 1973년 10월 10일 사임을 한다. 미국의 대통령직 승계 순위에 따르면 부통령 공석 시 하원의장이 이어받도록 되어있다. 당시 하원의장은 알버트였으나 대통령인 닉슨이 공화당인데 반해 알버트는 민주당이었다. 이 때문에 공화당 원내대표였던 포드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상하원 투표를 거쳐 결국 부통령이 되었다.
평범한 정치인의 화려하지 못했던 재임 기간
즉 포드는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닉슨과 애그뉴의 도청 및 부패 스캔들로 인해 갑자기 대통령이 되어버렸다. 화려한 정치 경력조차 없었던 포드가 선거도 없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더구나 닉슨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낸 사건으로서, 같은 공화당 소속 포드에게는 큰 짐이 되었다. 포드는 대통령을 승계하자마자 과감하게 닉슨을 사면시킨다. 특히 그의 닉슨 사면에 관한 성명은 분노한 대중의 반발심리를 크게 자극했다.
“내 양심은 이미 덮혀진 장을 다시 여는 악몽을 연장해서는 안된다고 확실하게 내게 일러줍니다. 내 양심은 대통령인 나만이 이 책(워터게이트 사건)을 덮고 봉해버릴 헌법적 권한을 갖고 있다고 일러줍니다. 내 양심은 또 국가의 평온을 선언하고 모든 수단을 강구해 이를 유지시켜나가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며 여론에 밀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국민들의 비난 여론이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언론은 무차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고 71%였던 그의 지지도는 성명발표 한 주 만에 49%로 곤두박질쳤다. 25년 친구였던 백악관 대변인마저 양심의 문제라며 포드를 비판, 사표를 내던졌다. 그가 호소한 의도와는 달리 그에게 쏟아진 것은 강한 의혹이었다 포드가 닉슨에게서 대통령직을 승계받기 위해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 아닌가. 취임 한 달 만에 발표한 성명이니 의혹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포드는 대통령직은 ‘승리해 얻는 상이 아니라 충실히 이행하여야 할 의무’라고 강조하며 겸손한 자세로 성실히 일해나갔다. 하지만 포드는 베트남전에 퍼부은 전쟁비용으로 인한 재정적자, 그리고 석유파동이라는 최악의 경제상황을 돌파해야 했다. 포드는 융통성없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대중적 정서와 거리가 먼 경제정책, 예를 들면 석유파동 당시 석유가를 더 올려 소비를 줄이는 정책 등으로 의회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닉슨 재임 5년 반 동안 42개의 예산안을 거부한 데 비해, 포드는 재임 2년 반 동안 66개의 예산안을 거부했다. 결국 1976년 선거에서 새로운 흐름을 원했던 미국인들은 포드를 낙선시키고 민주당의 지미 카터를 택했다.
포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대통령의 환경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정직과 신뢰를 내세우며 혹백차별 금지 정책 등을 통과시키며 베트남전으로 분열된 미국인들을 점차 통합시키는 역할은 충실히 수행했다. 특히 낙태 문제와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해 헌신했던 베티 포드 여사는 미국인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퍼스트 레이디였다. 안타깝게도 베티 포드 여사는 포드 재임시 유방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였고, 이를 공개하면서 지지자들로부터 포드 낙선의 원흉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선거 패배의 심리적 압박을 극복하지 못한 베티 포드 여사는 이후 마약과 알콜 중독에 걸려 포드 부부는 인생의 최대의 위기에 빠진다. 베티 포드 여사는 놀랍게도 이번에도 자신의 마약과 알콜 중독 사실을 공개하면서, 이후 1982년 마약과 알콜 중독자 치료센터인 베티포드센터를 건립, 전직 대통령 부부는 자선봉사활동에 평생을 바치게 된다. 인생의 위기를 극복해낸 이들 부부는 퇴임 이후 미국인들의 존경을 되찾으면서, 포드의 최대의 정치적 실수라 비판받은 닉슨 사면에 대해서도 2000년이 넘어 미국인들의 60%가 지지하는 정치적 역전극을 펼치기도 한다. 물론 포드 역시 닉슨 사면에 대해 단 한번도 후회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분열된 미국을 다시 통합시킨 포드 대통령의 장례식, 안타까운 DJ 장례식
2006년 12월 26일 포드 대통령은 93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포드 대통령의 장례식은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가장 간소하고도 조용히 진행되었다. 그 이전의 레이건 대통령의 성대한 장례식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러나 비가 오는 추운 겨울 날씨에 진행된 포드 대통령의 장례식에는 시간 당 2500명의 조문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미국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뉴스위크지에서 2007년 신년호 표지로 포드 대통령을 선정하는 등 미국 전체에 애도의 분위기가 이어졌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물론 그의 숙적인 지미 카터, 그리고 빌 클린턴을 비롯한 모든 미국인들이 “탁월한 지도력과 성품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깊은 분열의 시기 중 하나를 치유하고 안정으로 이끌었다”며,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 사회를 재통합시킨 포드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찬양했다. 포드 대통령이 타계한 2006년의 미국은 부시 정권을 중심으로 또 다시 분열되는 시기였다. 포드 대통령의 장례식으로 재차 분열되는 미국을 잠시나마 다시 통합시킨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포드 대통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고난이 섞인 화려한 정치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재임 기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퇴임 이후에도 여전히 민주당의 주인임을 자청하며, 신당창당과 합당 등에 개입하여 반대파들의 지탄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화려한 정치경력과 아들과 측근 비리를 제외하곤 비교적 성공적인 재임 기간과 달리 퇴임 이후는 정치적 분열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사후에 유족들은 전직 대통령은 국민장, 현직 대통령은 국장이라는 관례를 깨고 국장을 요구했다. 우파진영의 반발이 거셀 것은 뻔한 일이었고, 실제로 애국우파진영이 국장 반대의 깃발을 들면서 분열된 대한민국은 더 크게 분열되고 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등등 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일기 내용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정국은 또 다시 요동친다.
물론 미국과 한국의 정치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민통합을 위해서라도, 아니 민주당의 정권교체를 위해서라도, 간소한 가족장 혹은 평범한 국민장을 치뤘다면, 또한 고인의 일기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자제했다면 최소한 다른 쪽 세상의 사람들로부터도 “우리가 DJ를 너무 미워했던 건 아닐까”하는 조용하지만 성찰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게 고인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고인의 진정한 명복을 빈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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