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청소년 축구대회 중계방송 탓으로 SBS 주말연속극 ‘황금신부’가 결방됐다. 방송시간이 약간 겹치는 KBS 대하사극 ‘대조영’을 덕분에 온전히 시청할 수가 있었다. 대조영이 당나라로부터 고구려의 옛 터전이었던 요동땅을 되찾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었다. 잃어버린 고토를 의미하는 지정학적 맥락에서든, 진취적 기상을 뜻하는 상징적 차원에서건 요동, 즉 만주는 우리 국민들이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할 공간이며 단어다. 요동을 꿈꾸지 않는 자, 만주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한국인의 자격이 없다.
드라마 ‘대조영’은 고구려제국의 붕괴에서 발해왕국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수복의 역사, 탈환의 역사, 중흥의 역사, 재건의 역사를 다룬다. 쇠멸과 부활, 창업과 수성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돼 이루어지는 웅대하고 남성적인 서사구조를 지향한다. 2007년 대선정국의 모습은 당나라에게 패망한 고구려 꼬락서니다. 진보개혁 성향의 유권자들은 나라 없는 유민신세가 되어 이민족의 억압과 매국노들의 착취에 이중으로 고통받는다. 반면, 진보개혁을 망하게 한 패장들은 진솔한 반성은커녕 제각기 조그만 세력권을 형성하고 호족 노릇에 열중한다. 경상도 신흥맹주로 행세하는 유시민이 대표적 사례다.
고구려는 언제 망했을까? 일반적으로는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었을 때 멸망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각은 좁은 반도에 갇힌 식민사관의 소산이다. 고구려는 평양과 요동이 등을 돌렸을 적에 이미 망했다. 광활한 만주벌판을 상실한 고구려는 더는 고구려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북방의 신라 정도에 불과했다.
요동과 평양은 왜 각자의 길을 걸었을까? 집권자 연개소문이 나라의 안위보다는 자기자식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일에 골몰한 이유에서다.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고구려의 운명은 그가 연개소문 정권의 계승을 국정지표로 삼음과 동시에 종말을 고했다.
연개소문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자 폄하임을 무릅쓰고 그를 감히 노무현에 비교해보련다. 노무현이 개혁의 심화와 진보의 성장이 아니라 친위그룹의 세력확대에 올인한 순간 노무현 정권의 몰락은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김혁규 총리카드도, APEC 부산유치도, 연정제의도, 개헌발의도, 심지어 한미FTA 강행도 궁극적 목적은 친노들의 영남진출에 있었다.
연개소문이 대륙경영을 포기하는 즉시 요동은 평양과 결별했다. 요동이 떨어져나간 고구려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 변변한 항전조차 하지 못한 채 당나라 군대한테 항복하고 만다. 그렇다면 진보개혁 진영의 요동은 어디일까? 광주? 미안한 얘기지만 광주는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광주는 실패한 정권을 낳았다는 원죄를 뒤집어쓴 상태다. 노정권의 파탄은 광주의 신뢰성에 치명상을 가했다. 광주의 정치적 신인도를 기업신용도에 대입하면 거의 정크본드 수준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요동지방은 바로 서울 강북지역이다. 내가 지칭하는 강북이 지리적 개념이 아닌 사회경제적 정의에 기초함은 물론이다. 작년 5·31 지자제 선거는 한국정치의 지각변동을 초래한 중대 사건이었다. 서민층 주거지역인 도봉구와 구로구에서 한나라당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뒀던 것이다. 요동방어선의 양대 거점이라 할 요동성과 신성이 당군의 공격에 무너진 격이었다.
강북의 서민대중이 노무현 정권에게서 완벽히 이탈하면서 현정권의 생명은 사실상 끝났다. 현재의 노무현은 항장 신분으로 안동도호부 총관에 임명된 남생과 마찬가지다. 강북민심에 착착 달라붙는 히트정책을 연달아 터뜨림으로써 한나라당의 강북점령에 톡톡히 기여한 홍준표의 존재 역시 빼놓지 않고 거론해야겠다.
의미심장한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전 사장의 지지율이 정동영의 지지도를 제쳤다는 내용이다. 이명박의 지지율에 견주면 턱없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작지만 소중한 희망의 단초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문국현 지지도를 상승시킨 중심지가 수도권, 특히 서울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자. 노무현 정권의 배신과 한나라당의 침략으로 인해 망국의 설움을 겪고 있는 강북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더 나은 세상을 펼치고자 서서히 날갯짓을 시작하고 있다고. 삼족오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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