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크 알-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의 용의자들을 재판할 국제법정(일명 하리리 법정)이 레바논 의회의 동의를 받지 못하고 출범하게 됐다.
레바논 법무부는 10일 하리리 법정 설립을 강제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1757호)가 발효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30일 채택된 안보리 결의 1757호는 레바논 의회가 6월10일까지 유엔과 레바논 정부가 합의한 법정 설립 안을 비준하지 못할 경우 의회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법정설립을 강행하도록 하고 있다.
하리리 법정 설립 문제를 놓고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졌던 레바논 의회는 이날까지 비준절차를 진행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하지 못했다.
하리리 법정 설립에 관한 안보리 결의가 자동으로 발효함에 따라 유엔과 레바논 정부는 법정 설립 절차에 본격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안보리 결의에 따르면 법정은 제3국에 설립될 예정이며, 현재 키프로스와 이탈리아가 유력한 후보지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외국인 판사 2명과 레바논 판사 1명이 참가하는 원심 재판부와 외국인 판사 3명과 레바논 판사 2명이 참가하는 항소심 재판부로 구성된다.
외국인 판사는 공소 유지를 맡게 될 검사와 마찬가지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모두 임명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재판부 구성을 완료하는 데 최소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리리 법정이 가동되면 벨기에 출신인 세르주 브라메르츠 특별검사가 이끄는 유엔 조사팀이 용의자로 지목한 레바논 군내의 친 시리아 인사 등 9명이 정식 기소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유엔 조사팀은 내년 6월까지 활동할 예정이기 때문에 미국이 하리리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나 그의 최측근들이 기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레바논 내의 친 시리아 정파인 헤즈볼라는 사실상 미국이 설립작업을 주도해온 하리리 법정의 불법성을 주장하고 있고, 시리아는 재판 과정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어서 앞으로 이 법정 설립과 가동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하리리 암살 사건 = 하리리 전 총리는 2005년 2월14일 베이루트의 지중해변에 위치한 세인트 조지 호텔 앞에서 차량으로 이동 중 트럭폭탄 테러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 사건 후 `레반트의 성전을 위한 단체'라는 이름의 조직이 알-자지라 방송에 보낸 비디오 성명을 통해 책임을 자인하고 나섰다.
레반트는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요르단,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지중해 동쪽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조직은 하리리를 사우디 아라비아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면서 그가 사우디 정권을 지지해왔기 때문에 자살폭탄 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의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미국은 사건의 배후로 시리아를 지목했고, 유엔 안보리는 조사단을 발족시켜 수사에 착수했다.
조사단은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조사했지만 뚜렷한 혐의를 확인하지 못한 채 아사드 대통령의 일부 측근과 시리아에 가까운 레바논 군 정보장교들이 연루된 혐의가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시리아는 하리리 암살사건의 여파로 1976년부터 레바논에 주둔시켰던 병력을 모두 철수함으로써 레바논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이 시리아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국제적인 음모와 관계가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카이로=연합뉴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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