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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중심'한의학'의 허구성과 과학중심의학의 출현

학술영역에 이뤄지는 한의학과 대체의학 연구의 허구성과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과학중심의학


※ 본 콘텐츠는 '과학중심의학연구원(http://www.i-sbm.org)'이 제공하는 공익콘텐츠입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자료는 현역 의사이자 뛰어난 과학적 회의주의 비평가이기도 한 존 번(John Byrne)이 쓴 ‘Evidence-Based Medicine Vs. Science-Based Medicine’를 과학중심의학연구원 황의원 원장이 리메이크(설명과 사례를 한국 실정에 맞게 대거 바꿨음)한 원고입니다. 이 원고는 2012년 11월 10일, 제주의사회 종합학술대회에서 발표했던 바 있습니다. 해당 원고는 이후 다시 인터넷 발표용으로 재편집되었습니다. 김진만 선생님, 이영록 선생님, 강용석 선생님, 신정재 선생님, 그리고 그 밖에 본 원고 발표 과정에 귀한 의견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기초과학(basic science)과 응용과학(applied science)은 차이가 있습니다.

기초과학은 자연의 기본적인 원리에 관한 과학적 지식으로 축적된 체계입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은 우리 살고 있는 우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며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하는데 근간이 되는 기본적인 사실들과 법칙들을 설명합니다.

현대에 확립된 우리의 기초과학적 사실들과 법칙들은 정말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정밀하게 확증이 되었습니다. 자연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인간의 정밀성이 어느 정도인지, 물리학자 앨런 소칼(Alan Sokal)의 저서인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에서 인용되었던 예를 여기서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물리학에서 양자전기역학은 이론적으로 원자의 자기모멘트값을 다음과 같은 수치로 예측했습니다.

1.001 159 652 201 ± 0.000 000 000 030

여기서 ±는 여러 가지 근사값이 포함되는 이론적 계산의 불확실성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한 실험에서 원자의 자기모멘트값을 측정해보니 실제로 이런 수치가 나왔다고 합니다.

1.001 159 652 188 ± 0.000 000 000 004

보시다시피 소숫점 9자리 이하까지 완전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밀성이 단순히 숫자로는 감이 잘 안오실 것입니다. 저명한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Richard Feynman)에 따르면 이러한 양자역학의 정밀성의 정도는 머리카락 굵기(약 0.1mm)의 오차로 북미대륙의 폭을 책상에 앉아서 순전히 이론적 계산의 힘만으로도 정확하게 예측해내는 것과 같다고 했던 바 있습니다.
 



정말 압도적인 정밀성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 인류는 이렇게 20세기부터 이제 거의 ‘진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확증이 된 기초과학적 사실과 법칙을 확보했습니다. 저렇게 자연세계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예측해내는 이론체계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상식을 초월한, 획기적인 근거가 나와야겠죠.

지구는 분명 둥급니다. 수억년이 지나도, 이렇게 2012년에 지구가 둥들었다는 진리가 바뀌진 않을 것입니다. “아냐, 그때 지구는 평면이었어”, 이런 반박은 불가능합니다. 이 부분 특히 강조합니다. 우리의 근대 기초과학적 지식 중 상당수는 ‘거의’ 유일무이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응용과학은 또 무엇인지 한번 개괄해보겠습니다.

응용과학은 저 기초과학에 기반해서 사실과 법칙들이 실제 세계에서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응용과학은 보편적인 새로운 사실이나 법칙을 발견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응용과학은 기초과학에 기반해서 특정한 목표(보통은 사회적 공익성이기 마련인데)의 실용적인 결과를 비용의 한도 내에서 얻어내고자 합니다.
 
응용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환원주의(reductionism, 여기서는 응용과학에서의 모든 관찰이 바로 기초과학의 사실, 법칙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는 연계성으로서의 의미로 사용함)의 원리를 가정합니다.
 



응용과학에는 크게 두가지 학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학(engineering)이고, 또 하나는 의학(medicine)입니다.

공학은 실용적 목표 달성을 위해 물리학적 지식과 화학적 지식을 활용합니다. 이런 지식을 통해 우리는 기계공학, 전기공학, 원자력공학, 토목공학, 항공학과 같은 분야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분야의 연구가 다 기본 물리학 법칙이 옳다는 가정 하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진리입니다. 비행기를 설계하는 사람은 뉴턴 역학이나 베르누이의 유체 역학에서의 원리가 옳다는 전제가 없이는 비행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의학은 응용과학이라는 점에서 공학과 가장 비슷합니다. 의학은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구하고 건강을 개선한다는 목표를 위해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지식들을 활용합니다. 비행기 설계가 뉴턴과 베르누이의 잘 확립된 물리학적 지식에 의존하는 것처럼, 항생제의 임상적 효과도 결국 화학, 미생물학과 같은 기초과학적 지식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이라는 단어는 1990년대에 일군의 의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근거중심의학이란 현재 존재하는 최고의 근거를 양심적이고, 명백하며, 분별있게 이용하여 개별 환자의 치료를 결정하는 것으로, 임상의사의 전문적인 견해와 환자의 가치에다 현재까지의 의학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근거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 데이비드 새킷(David Sacket)


사실 '근대의학(Modern Medicine 또는 Conventional Medicine)'은 응용과학의 범주에 속하긴 했어도 어쨌건 과학적 근거로써 성립하는 학문으로서 19세기 말 이래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근대과학의 한 분과로 당당히 인정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근대의학이 시작된지 100년도 더 지난 시점에 새삼스레 ‘(임상)근거(evidence)’를 강조하는 의학 개념이 새로이 만들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그때까지도 근대의학이 전근대시절부터 이어져내려왔던 일화(anecdote)나 권위자의 경험, 또는 단지 뭇 사람들이 그럴듯한 개연성(plausibility) 수준의 근거가 있을 뿐인 진단법들과 치료법들을 무비판적으로 계속 사용해왔었던 데 연유합니다.

특히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과 과학연구방법론(scientific method)이 고도로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이전까지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낮은 수준의 (임상)근거들에 기반한 진단법이나 치료법은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사용되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저명한 인지과학자인 토마스 길로비치(Thomas Gilovich)의 저서인 ‘인간, 그 속기쉬운 동물(How we know what isn't so: The fallibility of human reason in everyday life)’에서 소개한 문맥-대정맥문합술(門脈大靜脈吻合術, Portacaval shunt)의 폐기와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문맥-대정맥문합술은 1940년대에 문맥압 상승으로 인한 식도정맥류를 치료하기 위해 혈류를 우회시키는 수술법으로서 개발되었습니다. 이 수술법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소화기내 다양한 질환에서 분명 효과가 있다고 권위자들에 의해 주장되면서 20여 년 동안 널리 쓰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엄격한 무작위배정 임상시험을 통한 검증 결과, 저 시술법은 결국 아무런 효과가 없는 무의미한 시술법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전까지의 임상적 근거들은 사실 전혀 가망이 없었던 환자들이 대조군에 배치되면서 나타난 착시였던 것입니다.

다음은 실험의 대조군 수준과 비교한 문맥-대정맥 문합술의 효과 검증과 관련 도표입니다. 무작위 대조군 임상시험에서는 효과가 있다고 나온 결과가 하나도 없음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의약품 등 치료법 중에서 이렇게 질이 높은 검증을 통해 폐기되는 치료법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암질환 문제과 관련한 최고의 책으로 손꼽히는 싯다르타 무케르지(Siddhartha Mukherjee)의 저서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The emperor of all maladies: a biography of cancer)'만 읽어봐도 20세기 중후반에 정말 숱한 암치료법들이 이런 식으로 명멸을 거듭했었음이 확인되지요.

단순 사례와 같은 낮은 수준의 (임상)근거는 100개, 1,000개가 쏟아져 나온다고 하더라도, 잘 설계된 무작위배정 임상시험과 같은 높은 수준의 (임상)근거 1개가 가지는 설득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것이 연구 숫자만 많으면 각 연구의 결함이 서로 상쇄되어 결국 ‘진실’이 드러나지 않겠냐 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은 ‘질’을 상쇄 못합니다. 특히 의학에서는 낮은 수준의 근거는 제 아무리 많아도 그것들은 대부분 단순히 최초연구를 시작해볼만한 단서(clue), 또는 예방적 차원의 부작용 보고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경험중심의학(Experience-Based Medicine)’에 대한 의문과 반성은 결국 '근거의 수준(Levels of Evidence)'에 대한 고도의 합의를 이루어내면서 근거중심의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바로 다음의 그림이 근거중심의학(EBM)을 상징하는 유명한 피라미드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배경지식(Background Information), 전문가 견해(Expert Opinion)가 있습니다. 그위에 여러 증례들의 집합들, 그위에 코호트 연구, 또 그위에 근거중심의학의 기본 중에 기본으로 손꼽히는 무작위배정 임상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s)이 있습니다. 바로 그 위에 메타분석(meta-analysis),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이 있지요.

여기서 메타분석이나 체계적 문헌고찰이란, 임상시험과 관련된 데이타를 특정한 툴로 조합하거나 제거하거나 해서 (임상)근거의 질적 신뢰성을 높이는 과정들입니다. 이러한 연구방법론에 대한 더 세세한 설명은 논점에서 많이 벗어나기 때문에 깊게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는 이것들이 매우 높은 레벨의 (임상)근거를 도출하는 연구방법론이라는 점만 알아두시면 될 것입니다.

참고로, 개별적인 배경지식, 전문가견해, 무작위배정 임상시험, 메타분석, 체계적 문헌고찰도 질적 수준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적인 수준에서 증례보다는 무작위배정 임상시험이, 무작위배정 임상시험보다는 체계적 문헌고찰이 더 높은 근거로 인정받습니다.

어쨌든 현대의 믿을만한 진단법과 치료법은, 이렇게 무작위배정 임상시험, 메타분석,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가장 상위의 연구방법론인 체계적 문헌고찰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서 믿을만 하다는 입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근거중심의학의 개념입니다.

정체지점(Stasis Point)과 화성의 얼굴(Face on Mars)

이제는 잠시 논쟁에 있어서 '쟁점'이라고 하는 것의 문제를 좀 짚겠습니다. 이것은 뒤에 짚을 논의 이전에 꼭 살피고 지나가야할 문제입니다.

논쟁에는 이른바 ‘정체지점(停滯地點, Stasis Point)’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제대로된 논쟁을 위해서는 논쟁을 하는 사람들이나 그 논쟁을 보는 사람들이나 그 논쟁의 미묘한 요지에 대해서 선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정체지점’은 그 논쟁의 요지, 논점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논쟁을 하는데 있어 ‘정체지점’을 함부로 바꾸는, 이른바 ‘골대 옮기기’를 하게 되면 엉터리 논쟁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이 ‘정체지점’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Purdue OWL: Stasis Theory).

첫째, 추측(conjecture)의 정체지점입니다.

이는 논의하고자 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사실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현상이 존재하는지도 사실인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 현상이란 과연 무엇인지 따지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경혈이라는게 과연 존재할까? 경락은요? 기는?

둘째, 정의(definition)의 정체지점입니다.

논의하고자 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죠. 지금 논쟁을 하는 주제와 소재가 확실히 정의되어야 동상이몽이 아닌 제대로 된 토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나는 침술을 얘기하는데, 상대방은 한약이라고 알아들으면 안될 것입니다.
 



셋째, 질(quality)의 정체지점입니다.

과연 그것이 정당한가에 관한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질환이 특정한 치료법으로 치료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치료법은 너무 위험해서 위험 대비 이익 비율(risk-benefit ratio)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당연히 ‘질’을 논하려면 어떤 질환이 있고 거기에 대응하는 치료법이 존재해야하고 이것들이 다 정확하게 정의되어야 합니다.

넷째, 장소(place)의 정체지점입니다.

지금 논쟁이 적절한 시기와 적절한 장소에서 이뤄지고 있냐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 종종 하잖아요. “야, 그 문제는 지금 논의할 때도 아니고 여기는 그런 말 할만한 자리도 아니야” 바로 이런 말이 나오는 문제와 관계된 것입니다.
 
‘장소’에 대한 논쟁은 그 논쟁이 ‘질’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질’에 대한 논쟁은 ‘정의’를, ‘정의’에 대한 논쟁은 ‘추측’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 문제는 의외로 중요합니다. 통상 사이비 논리를 펴는 이들은 ‘추측’이나 ‘정의’가 없이 바로 ‘질’이나 ‘장소’에 관한 논쟁을 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논쟁을 하는 사람이나 논쟁을 보는 사람이나 속절없이 사이비들이 원하는 토론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화성의 얼굴(Face on Mars)’ 문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976년에 우주선 바이킹 1호가 화성의 궤도를 돌면서 표면의 사진을 하나 찍었습니다. 앞의 사진에는 누가 봐도 뚜렷하게 인간형(humanoid) 얼굴의 인공물 같은 것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저것이 화성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부가 화성의 문명을 감추려고 한다는 음모론도 제기됐고요. 심지어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일부 과학자들조차 저 얼굴이 지적생명체의 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화성에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 단순생명체조차 도저히 살기가 힘들어 보이는 행성에? 화성에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는건 상식을 초월한, 획기적인 주장이지요. 저명한 우주과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식을 초월한, 획기적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상식을 초월한, 획기적인 수준의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extraordinary claims require extraordinary evidence).”


그렇다면 저 화성의 얼굴 사진은 화성에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한 상식을 초월한, 획기적인 수준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나중에 더 좋은 촬영장비 및 기술을 갖춘 우주선들이 화성의 궤도를 돌면서 인간형 얼굴의 인공물같은 것을 다시 찍었습니다. 그 결과는 상식을 초월하지도, 획기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냥 일반적인 산맥이었습니다.

인간의 시지각이 무작위적인 패턴에서도 의미있는 무엇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려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우리가 바로 거기에 걸려든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화성에서 발견되었던 것이 과연 진짜 얼굴의 형상이었는가 하는 것부터가 애초 불확실한 상황에서 음모론 등등 별의별 이야기들은 다 만들어냈던 셈입니다. 착각에 기반했던 이런 잘못된 이야기들은, 화성의 얼굴의 정체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사실 논의가 될 수 조차 없었던 쟁점들이었습니다. ‘추측(conjecture)’의 논의없이 바로 ‘정의(definition)’의 논의로 넘어간, ‘골대 옮기기’의 폐해지요.

질이 떨어지는 연구에서, 예컨대 어디 침을 찔러서 뇌경색이 사라진다든지 정신질환이 고쳐진다든지 담배를 끊게 한다든지 하는 긍정적인 결과가 도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질높은 연구가 이뤄지면(예컨대 무작위배정 임상시험이나 체계적 문헌고찰과 같은) 그 ‘효과’가 약화되거나 사라집니다.

앞서 문맥-대정맥문합술의 사례처럼 양질의 연구결과는 저질의 연구결과를 ‘착각’이었다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가 해야할 일은 질 낮은 연구로부터 나온 결과는 그냥 폐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착각’에 의한 결과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착각’과 진짜 ‘사실’을 함부로 결합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근거의 수준이 다른 두가지 결과를 뒤섞고서는, 모호성 때문에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고 추가적인 후속연구가 필요하다고 해선 안됩니다.

1976년의 바이킹 1호가 찍은 사진과 가장 최근에 화성으로 간 우주선이 찍은 사진을 뒤섞고 모호함이 있어서 다시 한번 더 화성에 가서 사진을 찍어와야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고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근거중심의학, 무엇이 문제인가?

앞서 근거중심의학이 출현한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 근거중심의학은 단지 개연성만 있을뿐인, 실제로는 별 (임상)근거가 없는 진단법들과 치료법들을 제거하기 위한 필요로서 고안된 것입니다. 더해서 근거중심의학은 과학적으로 잘 검증된 진단법들과 치료법들을 도입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분명 근거중심의학은 반드시 필요했던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근거중심의학은 무작위배정 임상시험, 메타분석, 체계적 문헌고찰과 같은 순수 ‘임상’에 관한 연구방법론만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임상’에서는 사실 가장 낮은 근거의 레벨로 분류해온 ‘배경지식’으로서의 ‘기초과학적 개연성(scientific plausibility)’을 아예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문제를 일으키고 말아버립니다.

‘임상’에서는 배경지식(background Information)’이 가장 낮은 수준의 근거인 것과는 별개로, 사실 응용과학에서의 ‘기초과학적 개연성’이란 응용과학에서의 발견이 곧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같은 잘 정립된 기초과학적 지식과도 연계성을 갖고 있느냐와 관계된 문제로서, 응용과학의 성립 그 자체와도 관계되는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제일 첫 장에서 ‘환원주의’를 거론하며 강조했던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근거중심의학은 ‘기초과학적 개연성(scientific plausibility)’을 다른 여타의 ‘개연성’과 마찬가지로 가장 낮은 수준의 근거로서 도매금으로 처리해버리고 말았을까요?

근거중심의학의 지지자들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해명합니다. 바로 제아무리 정밀하고 옳은 기초과학적 지식이 있다 하더라고 그런 배경지식을 반드시 곧바로 임상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고요.

이는 나름 일리가 있는 얘기인 것이, 사실 학문들 간에 위계가 있다고 해서, 근본적인 학문의 지식에서 그보다 덜 근본적인 학문의 지식이 꼭 파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물리학의 양자이론으로 생물학의 진화론을 유추해낼 여지가 없거든요.

하지만, 근본적인 학문을 통한 지식을 통해 덜 근본적인 학문의 지식의 유추가 항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이런 유추를 반드시 고려해야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근거중심의학의 한계가 생깁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10여년 전에 ‘브리티쉬메디컬저널(British Medical Journal)’이라는 영국의 저명한 의학 학술지에 흥미로운 논문이 하나 실렸던 적이 있습니다. 이 논문의 제목은 바로 ‘중력적 충격에 대한 죽음과 중증 트라우마를 막기 위한 낙하산의 사용 : 무작위배정 임상시험을 통한 체계적 문헌고찰(Parachute use to prevent death and major trauma related to gravitational challenge: systematic review of randomised controlled trials)’이었습니다. 제목부터 거창하지요?

이 논문의 서두는 이렇습니다. 지금껏 나왔던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낙하산을 사용하는게 안전에 효과적이다”는 시중의 주장들은 대개 그럴 것이라는 개연성(plausiblity)이라는 수준낮은 근거에 기반을 두고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이 논문을 쓴 근거중심의학의 지지자들은 바로 여기에 큰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Mediline 과 Web of Science, Embase, 그리고 Cochrane Library database 같은 의학논문 검색엔진을 모조리 다 뒤져서 관련해서 실제로 낙하산 사용과 관련 무작위배정 임상시험의 근거가 있는지 찾아내 체계적 문헌고찰을 시도했습니다(Smith GC, Pell JP., Parachute use to prevent death and major trauma related to gravitational challenge: systematic review of randomised controlled trials., BMJ. 2003 Dec 20;327(7429):1459-61.).
 



하지만 놀랍게도 연구자들은 관련 무작위배정 임상시험 연구결과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이 안전하다는 주장을 근거중심의학적 기준에 맞게 증명하려 한다면, 당연히 낙하산을 메지 않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을 대조군으로 둔 임상적 근거가 필요한데 그런 임상시험을 한 연구 논문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들이 그간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낙하산을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어온 것은, 혹시 의사들의 질환예방에 대한 과잉 집착이 빚어낸 환상은 아닐까요? 아니면 의사들의 사악함과는 별개로 군산 복합체, 또는 다국적 기업이 자신들의 제품이 제대로 검증받기가 두려워서 퍼뜨린 음모에 우리가 넘어간 것은 아닐까요?

뭔가 좀 이상하단 느낌을 받으시죠? 네. 정답은, 저건 그냥 근거중심의학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유머 논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상에 도대체 누가 1만m 상공에서의 낙하산의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낙하산이 없는 대조군을 둔 연구를 설계해서 시행하겠어요? 또 그런 높은(?) 수준의 (임상)근거가 없으면 낙하산의 효과를 믿지 못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있겠어요?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안전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은 무슨 질적으로 수준이 높은 임상적 근거가 필요가 없는 그냥 너무 당연한 상식인 것이죠. 이 상식은 자연현상에 대한 우리들의 올바른 관찰의 반복과 물리학적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고 말입니다. 이 상식을 우리는 ‘기초과학적 개연성’이라고 부릅니다.

자, 보십시오. 이제는 또다른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초과학적 개연성’이 100% 라고 할 수 있는 주장에서 근거중심의학적인 고려라는 것이 굳이 필요한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면, 역시 ‘기초과학적 개연성’이 0% 라고 할 수 있는 주장에 대해서도 근거중심의학적 고려가 굳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한번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근거중심의학은 앞서 설명드린 정체지점(stasis point) 중에서 ‘정의(definition)’와 ‘질(quality)’과 관련한 논의에서는 자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거중심의학의 문제는 정체지점의 가장 첫 번째 문제, '추측(conjecture)'의 논의를 빠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그런 지식은 잘 확립된 기초과학적 지식과 완전히 이질적이고 배타적이지는 않은가?”


이런 의문들은 어떤 진단법과 치료법에 대해서건 무작위배정 임상시험, 메타분석, 체계적 문헌고찰을 시행하기 이전에 응당 품어 보아야하는 것들입니다.


‘추측’은 함부로 전제될 수 없습니다. 특히 기초과학적 개연성이 낮아 보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정의’와 ‘질’의 정체지점으로 논점을 옮기는 것은, ‘추측’ 자체를 인정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종국적으로는 사이비과학을 상아탑으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물론 기초과학적 개연성이 낮은 진단법과 치료법의 지지자들도 임상시험은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사실 임상시험에서 나오는 데이터는 결국 실험 자체의 질에 좌우됩니다. 이는 근거중심의학의 ‘근거의 수준’ 피라미드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준이 낮아도 아무튼 (임상)근거는 (임상)근거고, 조악하게 설계된 연구에서는 믿기가 어려운 긍정적인 효과도 쉽게 빈번히 도출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결과들이 학술지에 발표되고, 그 결과들은 현대의학과 전혀 이질적이고 배치되는 배경을 가진 의학을 떠받치는 토대가 됩니다. 조악하게 설계된 연구는 확실한 결론을 가로막고, 모범적이라면 모범적인 넌센스형 진술을 논문의 말미에 남기게 됩니다.


“이 치료법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후속 연구가 더 필요하다.”


근거중심의학이 사이비 치료법에 대해서 이렇게 황당한 결론을 내려버리는 연구의 예는 아주 많습니다. 특히 기와 경혈, 경락의 존재를 전제로 한 수많은 한의학 치료법 검증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근거중심'한의학'의 허구성

사실 한의학은 물리학적으로 확립된 4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과 어떤 관계도 없는 힘을 전제하며, 또 생물학적(생리학적)으로 확립된 신체구조와 역시 전혀 관계가 없는 경혈, 경락과 같은 신체구조를 전제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한마디로 ‘기초과학적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론에 기반한 진단법과 치료법이 맞는지 틀리는지 계속 연구를 해보라고 권하면서, 사실상 간접적으로 치료법의 연구가치를 보증해주는 진술들이 과연 합리적인 진술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음은 근거중심의학의 최전선기지라고 불리우는 ‘코크란연합(Cochrane Collaboration)’의 침술 치료 관련 체계적 문헌고찰 논문들의 결론들입니다.
 



보십시오. 결론의 앞에서는 연구에 문제가 많다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진술을 해놓구선, 뒤에다가 항상 추가적인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결론을 내리기가 부적절하다 운운하는 '사족'을 포함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상아탑 연구자 특유의 겸손일까요 뭘까요?

물론, 후속 연구가 계속해서 실시되고 연구의 질이 높아지면서 측정된 효과 수준의 데이터는 계속 감소하기 마련인 것이 한의학과 같은 대체의학에 대한 근거중심의학적 연구의 전형적인 패턴이긴 합니다. 즉, 앞서 언급한 화성의 얼굴 문제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성 탐사와는 달리, 한의학과 같은 대체의학 치료법의 효과 검증은 눈으로 딱보이게 기다 아니다가 명백하게 결판이 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효과라는게 착각이었음을 100% 완벽하게 입증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이 분야의 연구에서 모호성이 끝까지 남게되는지 여기서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맹검(blind)의 한계같은게 있습니다.

무작위배정 임상시험에서, 특히 플라시보 효과를 배제하기 위한 ‘이중맹검실험(double blind test)’은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하지만 침술 치료법같은게 과연 대조군 설정이 쉽게 가능할까요? 침술로 이중맹검실험을 하겠다면 실험군은 침을 맞은 환자군, 대조군은 자신이 침을 맞았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침을 안맞은 환자군을 반드시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후자의 환자군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환자는 어떻게 잘 속여서 한다고 해도, 시술자는 또 어떻게 속이나요? 아무리 실험설계를 잘해도 맹검 과정에서 반드시 오류가 발생하고, 이런 오류는 통상 침술 치료법의 지지자들에게 비록 아주 낮은 수준의 근거라도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내며, 결국 침술 치료법은 끝도없이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게 됩니다. 즉,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자체가 곧 한의학에서는 ‘근거’가 되어버리는 상황인 것입니다.

다음은 이른바 ‘EBM 한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있는 한의학 교과서들과, 대한한의사협회의 새로운 실세로 떠오르고 있다고 그러는 청년 한의사들의 조직인 ‘참의료실천연합회’의 창립취지문입니다.
 




참실련은 창립취지문에서 명확하게 한의학의 과학화, 근거중심의학화 지향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의학의 근거중심의학화를 가로막는 것은 한의학 자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사회제도 때문, 의사들의 반발 때문이라고도 주장합니다.


“한의학을 근거중심의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한의학을 선보이기 위해 지금도 많은 한의사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간 왜곡되었던 한의학과 관련한 제도와 여건들이, 한의학에 대한 국민들과 양의사들의 잘못된 선입견이 이러한 발전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결국 근거중심의학의 개념 자체는 대체의학계와 한의학계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적극적인 수용의 대상임을, 또 새로운 언론홍보, 사업수단의 일환임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다수의 근거중심의학 관련 논문들에서 한의학 치료법들에 대한 후속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엽기적인 현실에서 저런 상황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디시인사이드-한의학갤러리’, ‘제마나인’이나 ‘한의대닷컴’같은 요즘 젊은 한의대생들이 잘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논의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근거중심의학을 내세우는 학술적 결과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근간에 여러 한의원들이 내세우는 신문 광고의 흐름 변화도 살펴보십시오. 언제부턴가 근거중심의학으로 뒷받침된 학술지의 논문의 내용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방송에도 흔히 나오는게 어떤 한약이 무슨 질환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식의 보도이지요(대개 도대체 얼마나 높은 레벨의 연구방법론으로 연구된건지, 또 얼마나 믿을만한 학술지에 논문이 실렸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조차 없습니다).

한의학계가 ‘황제내경’과 ‘동의보감’을 핵심으로 내세우며 어려운 한자로 ‘촌놈들 기죽이기’를 하는 것은 철지난 수법입니다. 결국 과학이 대세인 시대에 한의학도 나름의 생존법을 획득한 것입니다. 상아탑의 근거중심의학은 기꺼이 그 숙주노릇을 해주고 있는 것이고요.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엄격한 연구방법론으로써 잘못된 진단법과 치료법을 폐기시키고 올바른 진단법과 치료법을 도입하겠다는 취지로 고안된 저 근거중심의학이, 오히려 명백한 사이비과학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수 있음은 물론이요 심지어 그 사이비과학을 조장하게 만드는 도구로까지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요.

참고로, 침술은 한의학 치료법 중에서 그나마 가장 근거(?)라는게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뜸술이니 부항이니 한약이니 하는 것은 아예 말도 못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근거중심의학이 폐기시킨 한의학 치료법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근거중심의학은 오로지 현대의학의 자기검증을 위한 학문인 것이지, 대체의학을 검증할 수 있는 학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과학중심의학(Science-Based Medicine)

‘과학중심의학(Science-Based Medicine)’은, 일군의 의사들과 과학적 회의주의 비평가들로 구성된 모임을 통해 2008년에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 개념은 근거중심의학이 갖고 있는 ‘기초과학적 개연성’ 무시 문제를 보강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근거중심의학은 도그마로 점철되었던 지금까지의 의학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이기는 하지만, 이 개념은 우리의 의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만드는 일에는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현재 근거중심의학의 상황을 보면, 다른 모든 근거보다도 임상시험을 통한 근거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기초과학에 기반한 반드시 고려해야될 사항들을 무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거중심의학은 결국 질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증례 보고서보다 근거의 수준을 더 낮은 단계로 떨어뜨리고 있다. 이러한 맹점은 바로 일련의 사이비의학같은 것들이 상아탑에서의 진짜 의학 행세는 물론, 소위 ‘근거중심의학’ 행세까지 기꺼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 데이비드 고스키(David Gorski)


스티븐 노벨라(Steven Novella), 데이비드 고스키(David Gorski), 해리엇 홀(Harriet Hall), 월러스 샘슨(Wallace Sampson), 그리고 킴볼 앳우드(Kimball Atwood) 등이 사이언스베이스드메디슨블로그(http://www.sciencebasedmedicine.org)를 만들었습니다. 이 블로그는 현재 과학중심의학의 주제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데이터베이스이기도 합니다.



근거중심의학(EBM)과 비교되는 과학중심의학(SBM)의 핵심 개념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면, 어떤 사건과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 ‘확률’, '개연성‘을 밝혀내는 과학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좀 드려야 합니다. 다소 장황해질 수가 있는데 꼭 세세한 이해가 중요한건 아니니 적당히 스킵하시면서 읽으면서 넘어가셔도 됩니다.

근거중심의학에서는 진단법이나 치료법의 효과를 확증하기 위해서 '유의확률(有意確率, significant probability 또는 p-value 라고 표기하기도 함)'이라는 개념을 강력하게 활용합니다. 유의확률은 “통계적 가설 검정에서 귀무가설(null hypothesis)이 맞다고 가정할 때 얻은 결과보다 극단적인 결과가 실제로 관측될 확률”로 정의되는 개념입니다.

여러분은 신문 기사에서 종종 어떤 치료법이나 의약품, 또는 조사결과가 나왔을 때,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과가 나왔다”, 또는 “유의한 개선 효과를 보였다”는 식의 문구를 쓰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有意)’가 바로 저 ‘유의확률’의 ‘유의’입니다. 이 자리에서 굳이 확률, 통계에 대해서 아주 자세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일단 그런게 있다는 것 정도만 이해하고 넘어가십시오.

자, 근데 과학중심의학의 지지자들은 근거중심의학의 지지자들과 달리, 순수 임상적 근거에 대한 검증으로만 도출되는 저 유의확률 개념뿐만이 아니라, ‘기초과학적 개연성’에도 크게 무게를 싣기 위해 '사전확률(事前確率, prior probability)'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사전확률 개념을 배우면, 순수 논리적으로 ‘기초과학적 개연성’이 극히 낮은 주장이 과연 어느 정도의 넌센스가 될 수 있는지 숫자로 딱 뽑히므로 여기서부터는 약간 더 진지하게 들어주십시오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에 따르면, 어떤 아이디어가 맞을 가능성을 밝히고자 할 때 임상시험에 의해 도출된 새로운 근거의 중요성은 ‘유의확률’보다 바로 그 아이디어의 ‘사전확률’에 의해 더 강하게 구속됩니다.

이 사전확률은 사실 우리가 고등학교 수학의 ‘확률과 통계’ 단원에서 배우는 개념입니다. 바로 조건부 확률, 사후확률 등의 개념과 같이요. 관련 유명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에이즈를 야기하는 바이러스(HIV)의 발병률이 천명 중 한명(0.1%)라고 하자. 한 과학자가 HIV 보균자를 탐지할 수 있는 검사기기를 개발하였다. 그런데 이 검사기기가 완벽하지는 않다. 이 검사기기에서 양성이 나오면 보균자로, 음성이 나오면 비보균자로 진단하게 된다. 이 검사기기는 HIV 보균자일 경우에 검사 결과가 100% 양성으로 나오지만, HIV 비보균자인 경우에도 양성으로 나올 확률이 5%가 된다. 만약 해당 검사기기가 어떤 사람의 검사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을 때, 이 사람이 실제로 HIV 보균자일 확률은 얼마일까?”


이 문제는 2008 서울대 논술 모의고사 문제(인문/가형)에서 발췌한 것이지만(약간 수정함), 같은 유형은 고등학교 수학과정에서 ‘확률과 통계’ 단원에서도 일상적인 연습문제로 출제되곤 합니다.


수험생들에게 저 문제 풀어보라 그러면 대부분은 잘못 계산해서 95.2% 라고 답합니다. 계산없이 직관적으로 답 내어보라고 해도 대충 그 언저리를 추측하죠. 아무튼 저 검사기기가 보균자일때는 100% 정확하게 판정해내고, 비보균자인데 보균자라고 잘못 판정할 확률은 5% 밖에 되지 않는다라는 정보에 주목해서 말이지요. 검사기기의 신뢰도에 다들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허나 저 문제의 실제 정답은 2% 이하입니다. 저 문제에서 핵심은 검사기기의 신뢰도가 아닙니다. 바로 발병률이 0.1% 라는 부분입니다. '발병률(앞서 얘기한 '사전확률'과 관계됨)' 자체가 너무 낮기 때문에 제법 높아보이는 '검사기기의 신뢰도(앞서 얘기한 '유의확률'과 관계됨)'가 갖는 의미가 낮아져버리는 것입니다.

저 문제풀이를 잠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검사기기가 비보균자임에도 보균자라고 판정할 확률은 5%입니다. 비보균자는 전체 중 99.9 % 니까 바로 이 비보균자들 중에서 저 검사기기가 보균자라고 판정할 확률은 4.995 % 가 나오지요( 0.999 X 0.05 = 4.995 % ) 여기에다가 실제 보균자일 확률 0.1 % 를 더하면 5.095 %입니다. 여기서 5.095 % 는 저 검사기기가 맞건 틀리건 좌우간 누군가를 보균자라고 판정했을 확률입니다. 이 확률의 조건에서 누군가가 실제 보균자일 확률은 결국 1.962... % 로 나옵니다( 0.001 / 0.05095 = 1.962...).
 



좀 복잡하죠? 수학시간이 아닌만큼 역시 자세한 설명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고 여러분은 저기에 계산식에서 0.1 % 라는 낮은 사전확률이 결국 정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만 확인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요 아디이어가 과학중심의학과 무슨 관계인가? 저기서 ‘발병률’을 ‘어떤 의학적 가설의 기초과학적 개연성’으로, ‘검사기기의 신뢰도’를 ‘근거중심의학적 (임상)근거의 수준’으로 한번 바꿔보십시오.

네. 바로 그게 과학중심의학의 근거중심의학 대비 핵심개념입니다. 바로 ‘어떤 의학적 가설의 기초과학적 개연성’(발병률)이 너무 떨어지면, 설령 긍정적 결과값이 나왔더라도 ‘근거중심의학적 (임상)근거의 수준’(검사기기의 신뢰도)이 아주 초극단적으로(경우에 따라서는 무한대 수준의) 높지 않은 바에야 실제로 그 가설이 맞을 가능성이 매우, 매우 낮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근거중심의학적 (임상)근거의 수준(clinical evidence)’은 반드시 ‘어떤 의학적 가설의 기초과학적 개연성(scientific evidence)’이 적절한 수준 이상일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의학적 가설의 기초과학적 개연성’이 적절한 수준이 아닌 전제 하에서는, ‘근거중심의학적 (임상)근거의 수준’에서 무슨 유의한 결과 운운하는 얘기들은 모조리 다 앞서 얘기했었던 ‘화성의 얼굴’과 같은 헛것이요 환상, 착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런 신기루를 의과학의 용어로는 ‘거짓양성(false positivie)’이라고 합니다. 앞서 연습문제에서 제시했던 검사기기가 HIV 비보균자인 경우에도 양성으로 잘못 나올 확률을 5%로 제시한 바 있는데, 이는 ‘근거중심의학적 (임상)근거의 수준’(검사기기의 신뢰도)의 한계 때문에도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또한 거듭 얘기하는 것이지만, ‘어떤 의학적 가설의 기초과학적 개연성’(발병률)이 낮을 때는 저런 ‘거짓양성(false positivie)’이 나올 가능성이 아주 극적으로 높아집니다.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잘 확증된 과학과 어떤 연계성도, 호환성도 없는 음양오행과 기, 경혈, 경락의 ‘기초과학적 개연성’은 숫자로 나타내면 어느 정도 될까요? 0.0001 % 는 될까요? 아니, 그보다도 훨씬, 훨씬 낮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극단적으로 낮은 ‘기초과학적 개연성’을 기반으로 한 가설을 검증하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신기루 형태의 이른바 ‘근거’라는 것이 만들어져 왔을는지 짐작이 가시는지요?

참고로, 첫 장에서 우리 현대 기초과학의 양자역학은 정밀성이 무려 소숫점 9자리까지 된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칼 세이건의 주장을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상식을 초월한, 획기적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상식을 초월한, 획기적인 수준의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extraordinary claims require extraordinary evidence).”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양자역학의 가설이나 상대성이론의 가설도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고, 그야말로 획기적입니다. 파동과 입자의 상보성이니, 또 무슨 빛이 휘고 시간이 구부러지고 등등, 가설 자체의 기이함이 범인에게 주는 충격은 음양오행 가설의 기이함이 주는 충격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아이디어들은 초기에 전문가들로부터도 엄청난 반발을 낳기도 했었구요. 




하지만,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그래도 어쨌거나 기존의 이론들은 도저히 가질 수가 없었던, 상식을 초월하게 정밀한 근거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숫점 9자리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저걸 도저히 안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음양오행, 기, 경혈, 경락의 한의학 이론이 과연 그 상식을 초월하는, 획기적인 주장에 대비 어떤 소숫점 수준의 정밀한 예측이나 인상적인 결과를 하나라도 보여주고 있는지요?

양자역학과 비교한다면, 무슨 통계적으로 유의하니 어쩌니 저쩌니 하는 모호하고 미묘한 수준의 ‘거짓양성(false positivie)’스런 근거로는 어림도 없고, 죽은 사람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살려내는 상식을 초월하는, 획기적인 수준의 근거 정도는 가져와야 한의학 이론에 기반한 치료효과 그거 믿을만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초과학적 개연성’이라는 강력한 배경까지 갖고 있는 과학중심의학은 그래서 근거중심의학과는 진술이 좀 다릅니다. 한의학 이론에 기반한 침술 연구에 대해서는 근거중심의학은 뭔가 아닌 것은 같은데 좌우간 ‘거짓양성’스런 근거를 들고서 “후속연구가 더 필요하다”, “결론을 내리기가 부적절하다” 이런 식으로 진술한다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과학중심의학은 그렇게 얼버무리지 않고 아주 대놓고 얘기합니다. ‘기초과학적 개연성’까지 고려하면 그건 전부 몽땅 다 실험 노이즈에 의한 결과물이란 것입니다.


“그따위 연구에 세금 쓰지 마! 그건 그냥 엉터리야! 그런 연구 말고도 관심과 연구비가 필요한 연구가 많이 있어!”


이것이 소숫점 9자리 정밀도까지 나올 수 있는 학문과 연계된 백그라운드가 있는 학문의 단호함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단호함을 보고 과학중심의학을 교만한 학문이라고 오해는 하시면 안됩니다. 바로 다음은 근거중심의학과 과학중심의학의 개념적 차이를 그린 도표입니다. 



과학중심의학과 근거중심의학은 사전개연성에서 둘다 100 에 해당하는 문제는 자신들이 다룰 영역이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차피 그냥 ‘진리’이니까요.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문제는 과학중심의학과 달리 근거중심의학은 그간 사전개연성이 0 에 가까워 보이는 가설까지도 과학이 입증하여야할 문제로 다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확증 문제에서는 오히려 과학중심의학의 지지자들이 겸손합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100 이 긍정문식 진리라면 0 도 역시 부정문식 진리인 것이죠. 0 이나 100 과 같은 이데아의 차원, 순수논리(수학)의 차원의 문제를 기초과학도 아니고 응용과학, 의학의 세속 차원으로 함부로 가져와서 다루겠다고 나서는 것이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음양오행같은 가설은 사전개연성이 0 에 가까운 가설임에도 근거도 없이 그냥 전제 자체가 무턱대고 진리라고 100 이라고 주장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도그마’인 것이고 자연 앞에서 겸허하지 못한 인간의 교만인 것인데, 이런 삐뚤어진 짓을 정당화하는 일에 우리 의학 그리고 과학 구성원들이 참여해선 안된다는 것이 바로 과학중심의학 지지자들의 얘기인 것이죠.

거듭 지적하지만, 근거중심의학의 ‘기초과학적 개연성’을 고려치않은 연구주제 선정은 정말 엄청난 넌센스를 낳습니다. 리차드 도킨스(Ricahrd Dawkins)의 저서인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을 읽어보면, 지난 2006년에 물리학자 러셀 스태너드(Russell Stannard)와 심장학자 허버트 벤슨(Herbert Benson)이 무려 240만 달러의 연구비를 들여서 환자들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 회복을 돕는지 안돕는지 대규모 임상시험을 했던 사례가 제시됩니다(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저 임상시험은 무작위배정, 이중맹검 등 근거중심의학의 최고급 연구방법론이 다 동원되었고 매우 엄격하게 진행됐습니다. 물론, 결론은 볼 것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기도를 받은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들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었습니다(Study of the Therapeutic Effects of Intercessory Prayer (STEP) in cardiac bypass patients: A multicenter randomized trial of uncertainty and certainty of receiving intercessory prayer).

부정적 결론이 나왔음에도 저 논문은 지금도 계속 인용이 되고 있는 모양인데, 어쩌면 기독교계에서는 기도가 회복을 돕는지 안돕는지 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기도가 효과가 없다’, ‘신은 없다’라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면 안된다고 주장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굳이 ‘신 가설’이 더 개연성이 있을지, ‘음양오행 가설’이 더 개연성이 있을지를 따로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이런 가설들 증명에까지 근거중심의학이 진지하게 동원되는 현실이 정당하냐는 것입니다.
 



과학중심의학은 진단법과 치료법과 관계된 모든 의학적 주장들이 반드시 ‘기초과학적 개연성’이 있는 설명을 처음부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전염질환 예방법으로서 '손씻기'의 어마어마한 중요성은 이그나즈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가 150년전에 시행했던 임상시험의 결과로 발견되었는데요. 당시에는 미생물학이라는 기초과학은 없었습니다. 모르핀(morphine)과 같은 향정신의약품도 200년전부터 쓰였지만, 물론 신경생리학이 없던 시절이죠. 이것들이 사용된 이유는 임상시험 자체에서 효과를 입증했기 때문입니다(물론 그다지 복잡한 임상시험 설계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효과가 명백했던 치료법들이기도 합니다).

과학중심의학에서 ‘기초과학적 개연성’이라는 개념이 요구하는 것은, 의학에서의 새로운 발견이 반드시 기초과학적 지식에서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새로운 발견이 이미 잘 확립된 기초과학적 지식과 충돌을 일으켜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손씻기와 모르핀의 사례는 우리가 알고있는 어떤 물리학적, 화학적, 생물학적 지식과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손씻기와 모르핀의 사례는 오히려 새로운 기초과학적 지식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허나 기초과학과는 완전히 이질적이고 배타적인 한의학적 이론 체계를 기반으로 한 침술은 손씻기나 모르핀의 사례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잘 확립된 물리법칙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대체적인 물리학을 전제하는 기(氣)와 관련된 이론체계가 틀렸을 가능성이 훨씬, 훨씬 큽니다. 이렇게 말로는 어떻게 표현이 안될 정도로 말이지요.
 





덧붙이면, 저 과학중심의학의 개념은 어떤 가설을 검증하려는 시도가 과연 과학적 가치가 있는지 뿐만이 아니라, 그런 시도가 과연 의료윤리상 적절한지의 문제 역시도 따져 묻습니다.

앞에서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낙하산을 사용하는 것이 안전에 효과적이다”라는 ‘기초과학적 개연성’ 측면에서 100% 맞는 가설을 억지로 검증한답시고 대조군을 두는 게 얼마나 충격적인 의료윤리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기초과학적 개연성’이 사실상 0% 라고 할 수 있는, 무슨 물이 기억력을 갖고 있다는 가설(동종요법), 또는 기라든지 경혈, 경락과 같은 생뚱맞은 존재를 전제로 하는 가설(한의학) 따위를 검증한답시고 환자를 동원하고 혈세를 퍼붓는 일도 얼마나 커다란 의료윤리상 문제가 되는지도 충분히 유추가 되시지 않습니까?

최근에 개정된 헬싱키 선언은 환자의 인권을 넘어서 이제 동물의 후생까지 고려하라고 권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개나 말에 침꽂는 것도 함부로 할 일이 아닙니다. 과학중심의학은 이런 확장된 인권의 시대에 정확히 발맞춘 과학적 의학의 흐름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연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원칙에 따라야 하고, 과학적 문헌의 충분한 지식이나 기타 관계 정보, 적절한 실험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동물실험 등에 근거해야하며, 연구에 쓰이는 동물의 후생도 적절하게 보장받아야 한다.” - 세계의사총회 헬싱키 선언 :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연구의 윤리 원칙 11조 (WMA Declaration of Helsinki - Ethical Principles for Medical Research Involving Human Subjects, Caluse 11)


결론

과학중심의학은 결국 근거중심의학이 달성하려고 한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거중심의학과 싸우자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근거중심의학과 과학중심의학이 상호배타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실 근거중심의학은 과학중심의학의 부분집합이다. 왜냐하면 근거중심의학은 자체적으로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거중심의학이 모든 근거들을 제대로 검증하여 자신의 이름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시대가 오길 갈망하고 있다. 그런 시대가 도래했을때, 과학중심의학(SBM)과 근거중심의학(EBM)은 서로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 킴볼 앳우드(Kimball Atwood)


근거중심의학은 의학 관련 주장들의 과학적 가치를 검증하기 위한 도구로서 개발된 것입니다. 의사들의 의료행위는 예술(art)입니다. 허나 이 의료행위는 반드시 과학적 의학에 기반해서 이뤄져야 합니다. 과학적 의학은 의료행위에 부수적으로 여러 과학적 지식을 다루게 되는데, 근거중심의학은 바로 이런 지식의 가치를 정리하는데 있어 의사들을 돕는 방법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저 근거중심의학은 임상시험에서 도출되는 근거에 모든 강조점을 두다가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간과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그 근거의 근간이 되는 아이디어가 말이 되는가? 그 아이디어는 기존의 엄밀하게 확증된 과학적 체계와 호환되는 과학적 개연성이 있는가?

과학은 사물이 도대체 어떠한지를 알아내는데 도움을 줍니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아내는데 도움을 줍니다. 과학중심의학의 철학은, 어떤 주장이 연구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할 때 우리가 기초과학에 근거해서 사전확률 및 개연성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가설이 이 관문만 넘는다면, 그때는 제대로 된 근거중심의학적 임상시험의 대상이 되야 합니다. 과학중심의학은 의학에다가 과학에 대한 철학을 더하는 것입니다.

과학중심의학은 근거중심의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거중심의 패러다임을 발전시키면서 사이비과학의 침투를 허용하는 틈을 메우자는 것입니다.

과학중심의학(SBM)과 근거중심의학(EBM)은 하나이며 결국 똑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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