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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한국군 위안부(韓国軍慰安婦)’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45)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한국군 위안부(韓国軍慰安婦)’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2년 11월 17일판, 번역 : 박재이).




한국군 위안부(韓国軍慰安婦), 또는 대한민국군 위안부(大韓民国軍慰安婦, Korean Military Comfort Women)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된 조선에서 한국군과 재한미군(주한미군) 및 유엔군을 상대한 위안부를 말한다. 가해자가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서 한국 정부를 포함한 한국의 관민은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관련 자료인 ‘후방전사(後方戦史)(인사편(人事編)’를 자료관에서 철거해 은폐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목차


1 개요

  1.1 정책 연혁


2 명칭의 변천

  2.1 기타 경멸적 속칭


3 연합군 군정기 조선의 위안부


4 조선전쟁과 특수위안대

  4.1 특수위안대

  4.2 설치 시기와 장소

      4.2.1 부산, 마산

      4.2.2 강릉, 춘천 등

      4.2.3 서울

  4.3 조선전쟁 때의 위안부 수

  4.4 강제연행

      4.4.1 연합군의 성폭력과 강제연행

      4.4.2 북조선 여성에 대한 강제연행


5 조선전쟁 휴전에서 베트남전쟁까지

  5.1 폐쇄와 존속

  5.2 매춘업자의 유괴 사건

  5.3 위안부의 자살

  5.4 특수관광

  5.5 지방자치단체의 위안부 관리

  5.6 몽키하우스


6 베트남 전쟁 때

  6.1 미국의 성 정책

  6.2 한국의 성 정책

  6.3 터키탕

  6.4 한국군의 성폭력


7 전두환 정권

  7.1 기지촌 정화 캠페인


8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8.1 윤금이 살해 사건

  8.2 필리핀인, 러시아인 등 외국인 위안부와 강제 매춘

      8.2.1 주스 바 문제

      8.2.2 필리핀 정부의 대응

      8.2.3 미국 정부, 미군의 권고


9 한국군, 미군 위안부 문제

  9.1 연구와 자료 열람 금지

      9.1.1 2000년대


10 한국과 미국에 대한 위안부 소송


11 한국의 위안부에 관한 여러 설

   11.1 일본군 위안소와의 관련

   11.2 현대의 기생


12 참고문헌

 



1 개요(概要)

조선전쟁(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은 미국을 기반으로 한 연합군에 참가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설치된 위안소 및 위안부(특수위안대)는 한국군뿐만 아니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도 이용했다. 현재도 파주시의 용주골 등에 존재한다.

1.1 정책 연혁(政策沿革)

• 1947년 11월 14일 공창제도 폐지
• 1950-1954년 한국군 위안부 설치
• 1961년 11월 9일 윤락행위 등 방지법 제정
• 1962년 6월 미군기지 인근 104군데를 특정(윤락) 지역으로 지정해 매춘 단속 제외
• 1971년 12월 22일 정부 주도로 기지촌 정화위원회 발족
• 1970-1980년대 강제 성병 검진, 기지촌 여성 인권침해가 심각했다.
• 1990-1991년 이화여자대학교 전 교수 윤정옥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신문에서 최초로 고발했다.
• 1992년 윤금이 살해 사건(미군 병사가 기지촌 여성 살해)
• 1996년 성병 관리소 폐쇄(한국 정부의 관리 매춘이 끝났다.)
• 1990년대 후반 필리핀 등 외국인 여성으로 대체(민영화)


2 명칭의 변천(名称の変遷)

한국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공문서 ‘후방전사(後方戦史)(인사편(人事編)에서 ‘고정식 위안소 – 특수위안대’라고 했으며, 조선전쟁 중에는 ‘특수위안대’ 또는 ‘제5종 보급품’으로 불리기도 했다.*

[* 정규 군 보급품이 1종에서 4종까지였기 때문이다.]

조선전쟁 후에는 ‘미군 위안부(미군은 미국군을 의미한다)’, ‘유엔군 상대 위안부’로 불렸다. 그밖에도 ‘정신대’나 국군정신대로도 불렸다. 미군이나 한국군 등을 상대한 여성들에 대한 당시 한국 정부와 한국 보도기관의 공식 호칭은 ‘위안부’였다. ‘달러를 버는 요정’, ‘민간 외교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위안부’라는 말이 1980년대까지는 주로 미군, 유엔군 위안부를 가리켰으며, 일본군 위안부는 거의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일본과의 문제가 커진 후에는 ‘위안부’라는 말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만 쓰이기 시작했으며 미군, 유엔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 말의 영어 표기는 comfort woman 이며 일본어의 위안부를 영어로 번역한 것과 동일하다. 영어로는 한국군, 재한미군 위안부를 일반적으로 Korean Military Comfort Women 으로 표기한다.

2.1 기타 경멸적 속칭(その他軽蔑的俗称)

• ‘양팡(양섹시)’, ‘양공주(양갈보)’
• ‘담요부대’ - 담요 한 장으로 미군기지에 따라다닌다는 의미
• ‘디즈니랜드’ - 베트남 전쟁 때.
• ‘양키 매춘부’, ‘쌀밥으로 움직이는 꼬마 갈색 퍼킹머신’ - 미군을 상대하는 필리핀인 위안부.
• ‘주스 걸(juicy girls)’, ‘바 걸(bar girls)’, ‘호스티스(hostesses)’, ‘엔터테이너(entertainer)’.


3 연합군 군정기 조선의 위안부(連合軍軍政期の朝鮮における慰安婦)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일본제국이 연합군에 패배했기 때문에 조선반도는 1945년 9월 2일부터 일본 통치기에서 연합군 군정기로 넘어가게 된다.

조선반도에서는 연합군이 군정을 폈고 위안소, 위안부 모두 미군에 인계되었다. 1945년 9월에는 일본군 병참 기지가 있던 부평에 미군기지가 그대로 건설되었고 기지 주변에 있던 공창(公娼) 지역도 인수되었다. 부평 기지는 캠프 그랜트(Camp Grant), 캠프 마켓(Camp Market), 캠프 타일러(Camp Tyler), 캠프 헤이즈(Camp Hayes)를 망라하는 방대한 기지였다.(이나영(李娜榮),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기지촌의 양공주 - 식민지의 유산과 탈식민지의 현재성 -(日本軍「慰安婦」と米軍基地村の「洋公主」─植民地の遺産と脱植民地の現在性─)’ 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立命館言語文化研究) 23(2), 209-228, 2011)

제8군의 용산 기지 주변에는 이태원이 있었다. 그밖에도 부산의 완월동, 범전동(하야리아부대 기지 입구), 대구의 도원동(자갈마당), 대전의 중앙동 등에 공창 지역이 있었다.

1947년 11월에는 공창제가 폐지되었으나 1948년에 미군은 공창제 폐지로 성병이 만연했다고 주장하면서 창부에 대한 성병 검사가 1949년까지 이어졌다.(이나영(李娜榮),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기지촌의 양공주 - 식민지의 유산과 탈식민지의 현재성 -(日本軍「慰安婦」と米軍基地村の「洋公主」─植民地の遺産と脱植民地の現在性─)’ 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立命館言語文化研究) 23(2), 209-228, 2011)


4 조선전쟁과 특수위안대(朝鮮戦争と特殊慰安隊)

1948년 8월 15일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그해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독립한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남북조선 사이에서 조선전쟁이 발발하였고,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이뤄졌다.

조선전쟁 중에 한국군은 위안부를 모집했다. 한국 정부는 한국군, 미군을 위한 위안부를 ‘특수위안대’라고 부르며 설립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朝鮮戦争時の韓国軍にも慰安婦制度 韓国の研究者発表’, 2002년 2월 24일자) (중앙일보 일본어판‘「韓国戦争中にも軍慰安婦存在」韓国教授が主張’, 2002년 2월 24일자) (일요시사, ‘[미니 인터뷰] ‘한국군 위안부’ 문제 제기한 김귀옥 박사 “밝혀진 건 퍼즐의 일부’ 2002년 3월 26일 323호)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군과 유엔군을 위한 위안소를 운영했다. 한국군은 직접 위안소를 경영하기도 해서 한국 육군본부는 특수위안대 실적 통계표를 작성했다. 부대장의 재량으로 주변의 사창굴에서 여성을 조달해 병사들에게 보급했다. 한국군이 트럭으로 최전선까지 보급한 여성들은 밤이 되면 개점해서 미군들도 이용했다.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2007, 기파랑))

조선전쟁 이후 1990년대까지 재한미군의 한국 주둔 시에 한국군이 강행해서 한국군과 재한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할 목적으로 강제적으로 집단적 성행위를 강요당한 사례도 있다.(일다(조이여울 기자), ‘‘여러분은 달러를 벌어주는 애국자입니다’‘ 2008년 12월 15일자)

한국 육군본부는 한국에서의 위안소 설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기 고양은 물론 전쟁이라는 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시간에 걸치는 보답받을 수 없는 전투로 후방과의 왕래가 끊어지기 때문이 이 성에 대한 생각에서 일어나는 생리 작용으로 인한 성격 변화 등으로 우울증, 그 지장을 부르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특수위안대를 설치했다.”

- 육군본부 군사감독실 ‘후방전사(인사편)’ 1956년, 148쪽 


4.1 특수위안대(特殊慰安隊)

한국군이 1951년-1954년까지 ‘특수위안대’라는 이름으로 고정식 또는 이동식 위안부 제도를 도입해 운영한 사실은, 후방육군 한국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공식 기록인 ‘후방전사’라는 인사편과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뒷받침되었다.(오마이뉴스 ‘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2002년 2월 26일자)

한국군은 위안부를 ‘특수위안대’라고 이름 짓고 위안소를 설치해서 조직적, 체계적으로 위안부제도를 만들었다. 한성대 교수 김귀옥(金貴玉) 따르면 한국군 위안부 유형에는 군인의 납치, 강제 결혼, 성적 노예형에 낮에는 하녀로 일하고 밤에는 위안을 강요당하거나 위안부가 군부대로 출장가는 사례도 있었다. (김귀옥(金貴玉) ‘조선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 제도에 대하여(「朝鮮戦争時の韓国軍「慰安婦」制度について」)’ ‘군대와 성폭력-한반도의 20세기(軍隊と性暴力―朝鮮半島の20世紀)’ 송연옥(宋連玉), 김영(金栄) 편(編)、겐다이시료슈판(現代史料出版) 2010년 소장)

또한 정규 ‘위안대’와는 달리 부대장 재량으로 위안부를 떠안은 부대도 있었다.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2007, 기파랑)) 일본인 위안부도 재일미군 기지 주변이나 조선반도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특수위안대를 설치한 이유는 병사의 사기 고양, 성범죄 예방이며 이는 일본군 위안부와 마찬가지였다(한국 정부와 군이 정식으로 모집, 설치 운영했다는 점이 일본과 다르다). 계획은 육군본부 휼병감(恤兵監)실이 짰고 1950년 7월에 한국 정부는 군 작전 지휘권을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에 양도했으며 최종적인 승인은 연합군이 했다고 한다. (김귀옥(金貴玉) ‘조선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 제도에 대하여(「朝鮮戦争時の韓国軍「慰安婦」制度について」)’ ‘군대와 성폭력-한반도의 20세기(軍隊と性暴力―朝鮮半島の20世紀)’ 송연옥(宋連玉), 김영(金栄) 편(編)、겐다이시료슈판(現代史料出版) 2010년 소장)

한국 정부, 군은 이런 위안부들에게 “당신들은 달러를 버는 애국자”라며 ‘칭찬’했다고 한다.(NYTimes, ‘Ex-Prostitutes Say South Korea and U.S. Enabled Sex Trade Near Bases’, Jan. 7, 2009)

위관장교였던 김희오 씨의 증언에 따르면 육군 내부 문서에서는 위안부를 제5종 보급품(군 보급품은 4종까지였다)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위안부는 한국군과 함께 미군도 이용했다.(산케이신문(産経新聞) ‘한국군 위안소 설치 베트남전 미 공문에서 기술(「韓国軍が慰安所設置」 ベトナム戦争時 米公文書に記述)’ 2015년 3월 29일자)

위안부를 드럼통에 하나씩 밀어 넣고 트럭으로 전선까지 이송했다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증언자에 따르면 위안부를 전선까지 데려가는 것이 원래는 허가되지 않았다.(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2007, 기파랑)) 


4.2 설치 시기와 장소(設置時期と場所)

한국 정부는 한국군뿐만 아니라 유엔군을 위한 위안소도 운영했다.

4.2.1 부산, 마산(釜山・馬山)

조선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0년 9월 부산에 한국군 위안소, 마산시에 연합군 위안소가 설치되었으며 당시 부산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마산의 유엔군용 위안소는 5군데나 있었다고 한다.(한겨레21,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였다’ 2011년 11월 28일 제887호)

1951년에는 부산 위안소 74군데와 유엔군 전용 댄스홀 5군데를 설치했다.(이나영(李娜榮),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기지촌의 양공주 - 식민지의 유산과 탈식민지의 현재성 -(日本軍「慰安婦」と米軍基地村の「洋公主」─植民地の遺産と脱植民地の現在性─)’ 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立命館言語文化研究) 23(2), 209-228, 2011)

4.2.2 강릉, 춘천 등(江陵・春川など)

강릉시에는 1소대용 위안소(강릉군 성덕면 노암리), 그밖에 춘천시, 원주시, 속초시 등에 위안소가 설치되었다. (김귀옥(金貴玉) ‘조선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 제도에 대하여(「朝鮮戦争時の韓国軍「慰安婦」制度について」)’ ‘군대와 성폭력-한반도의 20세기(軍隊と性暴力―朝鮮半島の20世紀)’ 송연옥(宋連玉), 김영(金栄) 편(編)、겐다이시료슈판(現代史料出版) 2010년 소장)
 
4.2.3 서울(ソウル)

서울특별시 지구에는 다음의 세 군데가 설치되었다.(김귀옥(金貴玉) ‘조선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 제도에 대하여(「朝鮮戦争時の韓国軍「慰安婦」制度について」)’ ‘군대와 성폭력-한반도의 20세기(軍隊と性暴力―朝鮮半島の20世紀)’ 송연옥(宋連玉), 김영(金栄) 편(編)、겐다이시료슈판(現代史料出版) 2010년 소장)

• 1소대용 위안소(현 서울시 중구 충무로4가 148)
• 2소대용 위안소(현 서울특별시 중구 초동 105)
• 3소대용 위안소(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236)

4.3 조선전쟁 때의 위안부 수(朝鮮戦争時の慰安婦の数)

총수는 알 수 없다. 김귀옥 교수는 조선전쟁 직전의 사창 수 5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으로 봤다. 또한 조선전쟁 후에는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30만여 명에 달했다고 추측된다.(오마이뉴스 ‘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2002년 2월 26일자)

한국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공문서 ‘후방전사(인사편)’에 따르면 한국군 위안부는 1952년의 4소대에 한한 경우만으로도 위안부 89명이 행위 204,560회를 실시했다.(아사히신문(朝日新聞). ‘朝鮮戦争時の韓国軍にも慰安婦制度 韓国の研究者発表’, 2002년 2월 24일자)

4.4 강제연행(強制連行)

한국군 위안부 사례에서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강제가 있었다고 본다. (NYTimes, ‘Ex-Prostitutes Say South Korea and U.S. Enabled Sex Trade Near Bases’, Jan. 7, 2009) 한국의 위안부는 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거나 미군이 저지른 방화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Korea Joongang Daily ‘Openly revealing a secret life’ July 31, 2005)

4.4.1 연합군의 성폭력과 강제연행(連合国軍による性暴力と強制連行)

일본 도아(東亜)대학 교수 최길성(崔吉城)은 논문 ‘조선전쟁에서 유엔군의 성폭행과 매춘(朝鮮戦争における国連軍の性暴行と売春)’에서 조선전쟁 때는 적국이 아닌 한국에서 유엔군이 서울시 북부에서 한낮에 셰퍼드를 데리고 다니며 여성을 수색해서 발견 후에 강간하거나, 또 지프를 타고 민가를 찾아가 여성을 강제로 연행해 성폭력을 저지르거나, 한국인 병사가 한국인 여성에게 성폭력과 성고문을 한 일에 대해서 소개했다. 성폭력을 당한 것은 여성뿐만이 아니다. 10세 정도의 소년이 펠라티오를 강요당해 목이 파열된 적도 있었다.(최길성 ‘조선전쟁 유엔군의 성폭행과 매춘’ ‘아시아 사회문화연구アジア社会文化研究’ 제2권, 아시아사회문화연구회, 2001년 3월, 1-16쪽, doi: 10.15027/23290, NAID 120000876478.)

4.4.2 북조선 여성에 대한 강제연행(連合国軍による性暴力と強制連行)

조선전쟁 중에 한국군에게 체포된 북조선 여성을 강제적으로 위안부로 삼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2002년 2월 26일자) 한국군의 북파공작원은 북조선에서 납치와 강간으로 위안부를 두기도 했다.(일요시사, ‘[미니 인터뷰] ‘한국군 위안부’ 문제 제기한 김귀옥 박사 “밝혀진 건 퍼즐의 일부’ 2002년 3월 26일 323호)

포로가 된 조선인민군 여군, 여성 빨치산 게릴라, 그 외에 조선인민군이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점령지에 사는 주민인 조선인 여성 중 아직 피난하지 않은 여성 등이 공산주의자를 도왔다는 명목으로 강제적으로 성노예가 되었다.(노컷뉴스 "미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女 포로에 위안부 요구" 2005년 10월 13일자)



5 조선전쟁 휴전에서 베트남전쟁까지(朝鮮戦争休戦からベトナム戦争まで)

5.1 폐쇄와 존속(閉鎖と存続)

1953년 7월 27일 조선전쟁(한국전쟁)의 휴전에 따라 각 위안소는 1954년 3월에 폐쇄되었고 이듬해 1954년에 ‘정규 위안대’는 없어졌지만, 사실상의 위안대가 사창 형태로 존속했으며 비용은 ‘후생비’ 등의 명목으로 지출되었다. (오마이뉴스 ‘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2002년 2월 26일자)

군대 위안소는 공식으로 해체되어야 했지만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존속 협의를 위해 ‘성병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1957년 회의에서는 미국경제조정관실(Office of Economic Coodinator,  OEC)은 한국에서 결정할 것을 요청해서 서울, 인천, 부산에 접객업소나 댄스홀을 지정해 설치했다. 이렇게 해서 양공주는 국가 관리로 위안부와 ‘미군 동거녀’로 분류되었고 동두천과 의정부에 기지촌이 번성했다.(이나영(李娜榮),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기지촌의 양공주 - 식민지의 유산과 탈식민지의 현재성 -(日本軍「慰安婦」と米軍基地村の「洋公主」─植民地の遺産と脱植民地の現在性─)’ 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立命館言語文化研究) 23(2), 209-228, 2011)

1955년 서울시 경찰국에 따르면 미군을 상대한 성매매 여성은 61,833명이었다.

5.2 매춘업자의 유괴 사건(売春業者による誘拐事件)

조선에서는 1930년대에도 매춘알선업자의 소녀 유괴사건이 빈발했는데, 조선전쟁 후에도 매춘알선업자의 소녀 유괴사건이 발생했다. 1956년 4월에는 ‘매음 브로커’가 소녀 2명을 유괴한 사건이 있었다. ‘동아일보, ’소녀2명 유괴 매음 부로커 구속(少女二名誘拐 賣淫『부로커』拘束) 1956년 4월 11일자)

또한 1956년 7월 11일 동아일보는 ‘시골 처녀 유인 매춘굴에 판 여인 검거’라는 표제로 소녀를 유괴해 매춘을 강요한 용의로 노파가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

5.3 위안부의 자살(慰安婦の自殺)

한국에서 미군을 상대한 여성들은 자살이나 중독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1957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는 미군 위안부가 자신을 비관해서 자살했다고 보도했다. 1959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에서도 위안부가 비관 자살했다고 보도했다.


5.4 특수관광(特殊観光)

1969년대 한국에서는 기지촌 관련 산업이 국민총생산의 25퍼센트를 차지했고 그중 절반이 성 산업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한다.(Korea Joongang Daily ‘Former sex workers in fight for compensation’ October 29, 2008)

이영훈에 따르면 1962년 한국 시세로는 기지 관련 유흥 영업의 쇼트 타임에 2달러, 롱 타임에 5달러였다. 고정적인 성적 관계를 가져서 월급을 받는 여성도 있었다.(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2007, 기파랑))

1970년대가 되자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외화벌이의 주축으로 간주되어 위안부, 양공주들은 “달러를 버는 애국자”, “진정한 애국자”, “달러를 버는 요정”, “민간 외교관”이라며 한국 정부로부터 칭찬받았다.(International Business Times ‘South Korea: A Thriving Sex Industry In A Powerful, Wealthy Super-State’, 04/29/13)

1961년 박정희 정권은 관광사업 진흥법을 제정해 면세 맥주를 허가받은 특수관광시설업자를 지정해 적선지대(赤線地帯)를 설립했다. 1962년 6월에는 보건사회부, 법무부, 내무부 합동으로 한국 국내의 윤락 지역 104군데를 설치했으며, 용산역, 영등포역, 서울역, 이태원, 동두천, 의정부 등도 그곳에 포함되었다. 국내에서 관리 매춘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1962년 4월에 한국은 인신매매금지조약에 서명했다.(이나영(李娜榮),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기지촌의 양공주 - 식민지의 유산과 탈식민지의 현재성 -(日本軍「慰安婦」と米軍基地村の「洋公主」─植民地の遺産と脱植民地の現在性─)’ 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立命館言語文化研究) 23(2), 209-228, 2011)

박정희 정권은 위안부를 새롭게 ‘특수업태부’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특수관광협의회와 한미친선협회가 매춘의 제도 기반이 되었다.

1960년대 동두천에서만 미등록 사창이 1만 명에 달했고 미군 2, 3명당 창부 1명이 있었다. 1962년 한국에서는 미군을 상대한 위안부로 2만 명 이상이 등록되었다. 한국 정부 추산으로는 1만 6천 명이다.(이나영(李娜榮),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기지촌의 양공주 - 식민지의 유산과 탈식민지의 현재성 -(日本軍「慰安婦」と米軍基地村の「洋公主」─植民地の遺産と脱植民地の現在性─)’ 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立命館言語文化研究) 23(2), 209-228, 2011)

5.5 지방자치단체의 위안부 관리(自治体による慰安婦管理)

위안부의 성병 감염이 문제시된 후, 행정에서 실태를 조사했다. 1959년 9월 한국 보건사회부의 성병보균실태 보고에서는 접대부의 15.6퍼센트, 사창 11.7퍼센트, 위안부 4.5퍼센트, 댄서 4.4퍼센트가 감염됐다. 1959년 10월에는 위안부의 66퍼센트가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검사로 알게 됐다.(동아일보 ‘위안부(慰安婦) 66%가 보균(保菌)’ 1959년 10월 19일자)

박정희 정권은 성병을 규제할 목적으로 위안부를 자치회에 소속시켜 신원 등을 정확히 파악하게 한 후 상호 감시를 하게 하는 교육과 관리 시스템을 운영했다. 자치회장은 한국 경찰이나 한국 공무원이 선정했다.(일다(조이여울 기자), ‘‘여러분은 달러를 벌어주는 애국자입니다’‘ 2008년 12월 15일자)

1961년 1월 27일 동광극장에서 이담(동두천)지소가 주최한 위안부용 교양 강습회가 열렸다. 위안부 800여 명, 주둔 미군 7사단 헌병부 사령관, 민사처장 등 한미관계자가 참석해서 위안부의 성병 관리에 관해 교류했다.(동아일보, ’위안부 교양강습(慰安婦教養講習) 이담지소 주재(伊淡支署主催)로‘  1961년 1월 31일자)

1961년 서울시 사회국이 ‘유엔군 상대 위안부 성병 관리사업계획서’를 입안했으며 9월 13일에는 ‘유엔군 상대 위안부’라는 등록이 서울시경에서 개시되었다.(경향신문 ‘유엔 군상대(軍相對)=위안부(慰安婦)등록 실시(實施)’ 1961년 9월 14일자)


5.6 몽키하우스(モンキーハウス)

한국에서의 위안부들 사진과 개인정보 등을 미군도 관리했으며, 한국에서 미군을 상대한 위안부는 성병이 의심되면 한국 경찰이 몽키하우스라고 불리는 창문에 울타리를 친 시설에 지프나 트럭에 태워 유치시키고 완치할 때까지 강제적으로 약을 먹였다. 또한 성병에 걸린 여성들은 나을 때까지는 강제적으로 구치소에 격리되었다고 재한미군의 성병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병이 아니라고 증명된 경우에는 개처럼 강제로 태그를 달아야 했다. (NYTimes, ‘Ex-Prostitutes Say South Korea and U.S. Enabled Sex Trade Near Bases’, Jan. 7, 2009) (Korea Joongang Daily ‘Openly revealing a secret life’ July 31, 2005)

한국에서 미군을 상대한 위안부들은 행위 상대가 쉽게 분간할 수 있게 번호표를 붙일 것을 강요당했다. 또 한국 정부는 여성들에게 한국을 돕기 위해 온 병사들이 만족하도록 청결히 하라고 지도했다.


6 베트남 전쟁 때(ベトナム戦争時)

6.1 미국의 성 정책(米国の性政策)

베트남전쟁 때 미군은 공인 위안소가 아니라 현지의 매춘부를 성매수했다. 베트남에서 요금은 500피아스톨(2달러)인데 여성의 실수령액은 200피아스톨(0.8달러)이었고 나머지는 업자의 몫이었다.(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 신초샤(新潮社), 1999)

1970년대 초 미군은 한국 정부에 한국의 기지촌 정화사업을 하도록 요구했다. 1971년 8월 오치성(吳致成) 내무부 장관이 각 경찰서에 보건 당국과 협력해서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마련하고 교양을 강화하도록 명령했다.(한겨레21,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였다’ 2011년 11월 28일 제887호)

6.2 한국의 성 정책(韓国の性政策)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한국 정부는 조선전쟁 때와 같은 ‘위안부’ 설치를 계획했지만, 미군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않았다(주월한국군 사령관). 이 일이 베트남 민간 여성에 대한 강간 사건이 빈발한 것의 한 요인이 되었다고 간주되기도 한다.(오마이뉴스 ‘"베트남전 때도 '위안대' 운용 계획" -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③ - 김귀옥 박사 인터뷰’ 2002년 3월 4일자)

6.3 터키탕(トルコ風呂)

그러나 한국이 베트남 전쟁 때 사이공(현 호치민) 시내에 한국군을 위한 ‘터키탕’(トルコ風呂, Turkish Bath)이라는 명칭의 위안소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베트남 여성에게 매춘을 시켰다는 사실이 2015년 3월 29일 미국 공문서로 밝혀졌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위안소 경영에 관여한 것이 공문서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문서는 미군이 베트남 주둔 한국군 최고사령관 채명신 장군에게 보낸 것으로, 날짜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1969년 무렵 통보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육군 간부들의 미국 지폐나 미군표 등의 부정 조작 사건을 설명한 것으로 조사 대상 중 하나로 ‘터키탕’이 등장한다. 거기서 미군은 베트남 통관 당국과 연계한 조사의 결과로 “터키탕은 한국군의 한국 병사 전용 복지센터(Welfare Center=위안소)”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 증거로 한국군 수윤원(スー・ユンウォン, ‘슈칸분슌’ 보도에서의 표기) 대령이 서명한 서류를 들었다. 또한 확인 사항으로 베트남 호스티스가 있다는 점과 “매춘부는 하룻밤을 함께 할 수 있다. 요금은 4,500피아스톨(38달러). 증기탕과 마사지방은 숙박할 때 밀회 장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이 미국 공문서에 대해서는 ‘슈칸분슌’(2015년 4월 2일호)에서 TBS의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 워싱턴 지국장이 최초로 발표했다.(산케이신문(産経新聞) ‘한국군 위안소 설치 베트남전 미 공문에서 기술(「韓国軍が慰安所設置」 ベトナム戦争時 米公文書に記述)’ 2015년 3월 29일자)

야마구치 노리유키의 ‘슈칸분슌’ 기사(‘한국군에 베트남인 위안부가 있었다!(韓国軍にベトナム人慰安婦がいた!)’)를 둘러싸고 이에 대해서 뒷조사를 한 ‘슈칸신초’와, 야마구치 노리유키의 원 기사를 게재했던 ‘슈칸분슌’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슈칸신초’는 아리마 데츠오(有馬哲夫)의 “한국군 전용이라는 것은 경영자의 주장일 뿐이며 미군의 조사에서는 (베트남 국적자만 제외한) 일반용 매춘 시설이라고 결론이 났다”는 지적과 함께 “발견된 문서에 military brothels나 military prostitutes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고 야마구치 요시유키가 복지센터를 위안소, 매춘부를 위안부라고 바꿔 말했다”는 말을 인용해 기사를 비판했다. 아리마 데츠오는 “군의관과 헌병의 존재하는지 여부 등 한국군이 운영 관리한 실태가 없어서 위안소라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슈칸분슌’은 하타 이쿠히코(秦郁彦)의 코멘트로 반론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위안소를 가리켜 레크리에이션 센터나 디즈니랜드 등의 은어가 쓰였고 일본군 위안소에서도 헌병이나 군의관이 반드시 상주한 것은 아닌 만큼 ‘터키탕’도 한국군 위안소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고 했다. 또한 “베트남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베트남 국적자가 이용할 수 없었다면 일반용으로 개방되지 않았던 것이다”라는 의견도 소개되었다. 야마구치 요시유키의 기사에도 한국군 외에 미군도 이용했다고 쓰여 있었다.(슈칸신초(週刊新潮) ‘‘한국군에 위안부’ 기사는 야마구치 기자의 조작인가(「韓国軍に慰安婦」記事は山口記者の捏造か)」’ 2017년 10월 26일호) (슈칸분슌(週刊文春) ‘슈칸신초의 ’한국군에 위안부‘가 조작기사라는 지적에 답한다(「週刊新潮「韓国軍に慰安婦」捏造記事の指摘に答える」) 2017년 11월 2일호)

6.4 한국군의 성폭력(韓国軍による性暴力)

한국군 병사는 수많은 베트남 여성을 강간하고 퐁니퐁넛 학살에서는 강간 후 학살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뉴스위크 일본판(ニューズウィーク日本版) WORLD AFFAIRS 証言 Apocalypse Then ’우리 마을은 지옥이 됐다(「私の村は地獄になった」)‘ 2000년 4월 12일호 P.24 )

한국군 병사의 강간으로 임신한 베트남 여성이 낳은, 아버지 없는 혼혈아들을 ’라이따이한‘(라이 ‘ (쯔놈 표기)는 베트남어로 동물을 포함하는 ‘혼혈 잡종’을 의미하는 명칭)이라고 하며 그 수는 3만 명에 달한다고도 한다.(노컷뉴스 ‘"적군 핏줄 라이따이한" 한국군 성폭행 피해자의 주홍글씨’ 2017년 11월 14일자)


7 전두환 정권(全斗煥政権)

7.1 기지촌 정화 캠페인(基地村浄化キャンペーン)

전두환 정권(1980년-1988년) 시절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기지촌 정화 캠페인이 실시되자 매춘부와 미군의 관계 발전을 목표로 에티켓 강의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약물 요법이 빈번하게 실시되었다. 의사면허가 없는 의자들 앞에서 강제로 다리를 벌리고 항생제를 맞아 죽음에 이르는 여성도 있었다. 여성들이 거역하면 의사들이 폭력을 휘둘러 감금하기도 했다.


8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1990年代から現在まで)

조선전쟁 때 설치된 속초 위안소는 휴전 후 사창의 집창지가 형성되어 1990년대까지 군의 위안소로 기능했다. 1990년 무렵에도 군의 훈련소 밖에 흔히 ‘담요부대’라고 불리는 사창굴이 있었다.(김귀옥(金貴玉) ‘조선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 제도에 대하여(「朝鮮戦争時の韓国軍「慰安婦」制度について」)’ ‘군대와 성폭력-한반도의 20세기(軍隊と性暴力―朝鮮半島の20世紀)’ 송연옥(宋連玉), 김영(金栄) 편(編)、겐다이시료슈판(現代史料出版) 2010년 소장)

한국에서는 구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재한미군을 상대한 위안부(매춘부) 문제도 재한미군 위안부 문제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1990년까지 한국에서 미군을 상대한 매춘부는 25만 명에서 30만 명에 달했다.(최길성 ‘조선전쟁 유엔군의 성폭행과 매춘’ ‘아시아 사회문화연구アジア社会文化研究’ 제2권, 아시아사회문화연구회, 2001년 3월, 1-16쪽, doi: 10.15027/23290, NAID 120000876478.)

8.1 윤금이 살해 사건(尹今伊殺害事件)

1992년 10월에는 미군 케네스 마클(Kenneth Markle)이 미군 전용 클럽의 종업원이며 ‘양공주’인 윤금이를 살해하고 질에 콜라병, 항문에는 우산이 꽂혀 온몸에 세탁세제가 뿌려진 채 시체로 발견되는 윤금이 살해 사건이 발생해 반미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듬해 1993년에는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가 설치되었다.

8.2 필리핀인, 러시아인 등 외국인 위안부와 강제 매춘(フィリピン人・ロシア人等外国人慰安婦と強制売春)

1980년대까지 한국인 여성들은 한국 정부와 미국인에 의해 재한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강요당했다. 한국인 여성들에 대한 강요 이후에는 러시아인 여성들이나 필리핀인 여성들이 대신했다. 그밖에 위안부의 출신지는 볼리비아, 페루, 몽골, 중국, 방글라데시,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이 있다.(Donna Hughes, Katherine Chon, Ellerman Ellerman (2007). Modern-Day Comfort Women:The U.S. Military, Transnational Crime, and the Trafficking of Women. University of Rhode Island. p. 4)

1990년대 이후의 한국에서는 재한미군 기지 근처에서 필리핀인 여성들이 한국인 업자에게 매춘을 강요당했다고 보고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2년까지 5천 명에 달하는 러시아인이나 필리핀인 여성들을 밀입국시킨 후 매춘을 강요했다.(Hankyoreh ‘Filipinas forced into prostitution on the rise in S.Korea’, Dec.1,2009)

2000년대 한국에서는 한국군을 상대하는 여성들의 90퍼센트가 러시아인이나 필리핀인 여성 등의 외국인이라고 되어 있다. 2009년 시점에서는 미군기지 근접지에서 매춘을 강요당한 여성 중 러시아인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감소했지만 필리핀인 여성의 비율은 증가했다. 또한 한국에서는 현재 매춘이 위법 행위다. (중앙일보, ‘여성 8000명 미국서 '원정 성매매'’, 2006년 6월 21일자)

8.2.1 주스 바 문제(ジューシーバー問題)

한국에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주스 바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이 인신매매 상황에 놓인 문제가 있다. (PRESSTV ‘US servicemen in Korea contribute to human trafficking: report’ Dec 21, 2012)

한국에서는 매춘이 위법 행위지만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바 등은 당국의 적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매춘을 강요받는 필리핀 여성들은 필리핀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의해 한국에서 가수로 일하기 위함이라고 칭한 모집에 응한 여성들이다. 재한미군도 이 여성들이 가수, 댄서가 되기를 꿈꾸며 한국에 왔지만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Stars and Stripes ‘Ex-bar worker who was forced into prostitution wins $5,000 judgment’ August 6, 2005)

필리핀여성들은 양키 매춘부, 쌀밥으로 움직이는 꼬마 갈색 퍼킹 머신 등의 경멸적인 호칭으로 불렸다. (Foreign Policy in Focus, ‘Military Sexual Violence: From Frontline to Fenceline’ June 17, 2013)

1천 명이 넘는 필리핀 여성, 러시아 여성을 미군기지 주변의 클럽에서 인신매매했다고 클럽 경영자가 고소당하기도 했지만 한국의 법원은 소송을 기각했다. (Time(Donald Macintyre/Tongduchon) ‘Base Instincts’ Aug. 05, 2002)

2002년 미국의 폭스TV가 한국에 인신매매된 여성들이 매춘을 강요당하는 사실을 보도하자 이듬해부터는 감금되어 매춘을 강요당한 일부 필리핀 여성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거나 필리핀 여성들을 감금하고 매춘을 강요한 경영자에게 집행유예, 사회봉사의 판결을 내리는 사례도 존재했다.(Korea JoongAng Daily ‘Court rules in favor of Filipina prostitutes’, May 31, 2003)

2000년 이후 한국의 매춘업소에 감금된 외국 여성 등이 화재로 많이 죽는 사건이 잇따랐다. (Donna Hughes, Katherine Chon, Ellerman Ellerman (2007). Modern-Day Comfort Women:The U.S. Military, Transnational Crime, and the Trafficking of Women. University of Rhode Island. p. 4)

2009년 미군 기관지인 ‘성조기신문(Stars and Stripes)’은 한국에서 주스를 쿼터제로 파는 여성들이 매출에 따라 점주에게서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음을 밝혔다.(PRESSTV ‘US servicemen in Korea contribute to human trafficking: report’ Dec 21, 2012)

8.2.2 필리핀 정부의 대응(フィリピン政府の対応)

이러한 상황에서 필리핀 대사관은 필리핀 여성들이 매춘을 강요당하는 바의 감시 리스트를 작성하거나 여성들의 재판을 지원하는 활동을 보이고 있다.(Stars and Stripes ‘Philippine Embassy has 'watch list' of suspect bars in South Korea’ September 26, 2009)

8.2.3 미국 정부, 미군의 권고(米政府・米軍の勧告)

2010년에 미국 국무부는 한국의 미군기지 주변에 있는 바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상황에 관하여 현재 진행 중인 인신매매라고 보고했다. (PRESSTV ‘US servicemen in Korea contribute to human trafficking: report’ Dec 21, 2012)

2012년에 재한미군은 주스 바에서 비싼 음료비를 지불하는 것은 현대의 노예제 중 하나인 인신매매업을 지원하는 것이라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PAO USFK ‘Human Trafficking public service announcement’ https://youtu.be/adQQ1mQFdUc)


9 한국군, 미군 위안부 문제(韓国軍・米軍慰安婦問題)

한국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사회문제, 더 나아가 일본과 한국의 외교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이 되자 대한민국 국군 또는 미군에게 강간당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서도 한국 내에서 공론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미국에서 현재 서울대 로스쿨 교수인 양현아가 한국군 위안부 연구 논문 ‘Revisiting the Isuues of Korean Military Comfort Women’을 발표했고, 같은 해 현 S. 김(Hyun S.Kim)과 JT 다카기(タカギ)와 박혜정은 ‘The Woman Outside:Korean Women and the U.S.Militaly’를 발표했다.

9.1 연구와 자료 열람 금지(研究と資料閲覧禁止)

한국군 위안부에 관해서는 1996년 당시 한국 경남대학교 김귀옥 교수가 대한민국 육군본부군사감실 ‘후방전사(인사편)’(1956년 출간)에 대한 조사를 통해 조선전쟁 때 대한민국 육군이 위안부를 징집한 것 등 이 책에 당시의 기록이나 통계가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아사히신문(朝日新聞). ‘朝鮮戦争時の韓国軍にも慰安婦制度 韓国の研究者発表’, 2002년 2월 24일자)

김희오 대장은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밝히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군부의 수치지만 사실이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2002년 2월 26일자) 그러나 한국 학회나 운동단체에서는 한국군 위안부는 공창이며 또 “가족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 “일본 극우의 변명거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한국 국방부 소속 자료실의 위안부 자료 열람을 금지했다. (김귀옥(金貴玉) ‘조선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 제도에 대하여(「朝鮮戦争時の韓国軍「慰安婦」制度について」)’ ‘군대와 성폭력-한반도의 20세기(軍隊と性暴力―朝鮮半島の20世紀)’ 송연옥(宋連玉), 김영(金栄) 편(編)、겐다이시료슈판(現代史料出版) 2010년 소장)

9.1.1 2000년대(2000年代)

일본에서도 최길성이 2001년에 ‘‘조선전쟁에서 유엔군의 성폭행과 매춘(朝鮮戦争における国連軍の性暴行と売春)’을 발표했다.

2002년 2월 김귀옥과 강정숙 등에 의해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가 공개되었고 아사히신문 2002년 2월 24일 보도에서는 김귀옥과 강정숙 등은 1948년 한국 정부가 공창 폐지령을 어기고 약 3년 동안 불법으로 공창을 설치, 운영했다고 발표했다.(아사히신문(朝日新聞). ‘朝鮮戦争時の韓国軍にも慰安婦制度 韓国の研究者発表’, 2002년 2월 24일자) 

[* 1956년 육군본부 편찬한 공식 기록과 목격자들의 증언 연구에 따른 것이다. 아사히(朝日)신문 기사에 따르면 위안부이나 존재는 은폐공작이 이뤄졌기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002년 한국 미디어에서는 결국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보도도 이루어졌다. (오마이뉴스 ‘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2002년 2월 26일자)

또한 최근 ‘슈칸신초’ 2013년 11월 28일호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는 미군 위안부 관리자였다(朴槿惠大統領の父は『米軍慰安婦』管理者だった)’는 특집 기사가 실렸으며 그중에서 그녀들은 한 명씩 드럼통에 처박혀 ‘보급품’ 명목으로 트럭에 실렸다고 썼다.(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2007, 기파랑)) 

그러나 2012년, 당시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한국 신문 조선일보는 종군위안부가 일본군의 성노예지만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에 관해서는 왜곡이라고 주장했다.(조선일보 ‘한국어판 위키피디아, 일본에 점령당했다?’, 2012년 4월 1일자)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보도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달리 한국국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한겨레를 비롯한 일부 진보 언론이 거론할 뿐이며 보수 언론인 거대 신문사나 방송국은 관련 한국군 위안부 재판 등에 대한 소식도 포함해 묵살하고 있는 상태다.


10 한국과 미국에 대한 위안부 소송(韓国と米国に対する慰安婦訴訟)

2009년에 한국계 미국인 출신 과거 위안부들이 미군과의 성적 행위를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강요당했다며 미군과 한국 정부에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미국에서 제소했다. 원고인 위안부들은 한국 정부가 미군을 위한 삐끼였다고 비판했다. (NYTimes, ‘Ex-Prostitutes Say South Korea and U.S. Enabled Sex Trade Near Bases’, Jan. 7, 2009)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한국 대법원의 입장은 매춘인 불법 행위에 기인하는 손해배상청구라면서 기각했다.*

[* 손해배상 [대법원 1966. 10. 18., 선고, 66다1635,1636, 판결] “일반적으로 일상용어에 있어서 위안부라 함은 매춘행위를 하는 여자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법률이 금하고 있는 매춘행위를 35세까지 계속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여 위안부가 타인의 불법행위 있는 사고로 인하여 상실한 수익손해액을 산출함에 있어 이러한 범법행위를 계속하여 얻을 수 있는 수익을 기초로 할 수는 없다.”]

2014년 6월 25일 미군 위안부로 강제로 일했다며 한국인 여성 122명이 한국 정부를 상태로 국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경향신문 ‘“기지촌은 미군 위안부 제도… 피해 보상을” 여성 112명, 국가에 손배소’ 2014년 6월 25일자) 

소송 지원자의 말에 따르면 미군 위안부의 국가 배상 소송은 처음이라고 한다. 한국에선 1947년부터 매춘금지법이 성립되었지만 한국 정부는 1950년부터의 조선전쟁 때 미군(유엔군)을 상대로 한 매춘을 인정하는 ‘특정지역’을 설치해 여성들을 매춘 관리했다. 특정 지역에서의 관리는 강제적이며 위안부 중에는 속아서 끌려온 10대 소녀도 있었다고 한다. 위안부와 지원단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는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소를 제기했다. 현시점에서는 아직 미국에는 소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관리했다고 하는 지적도 나왔다.(산케이디지털(産経デジタル) ‘한국에서 옛 미군 위안부 122명이 국가에 배상 요구 집단 제소  정부의 엄격한 관리하에 인권침해(“韓国で元「米軍慰安婦」122人が国に賠償求め集団提訴 政府の厳しい管理下で「人権侵害」”)’ 2014년 6월 25일자)

2014년 12월 19일에 이 소송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지만 한국 정부 측 변호인은 “위안부 개개인의 소가 진실이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정부의 책임은 물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한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서는 “살아계신 할머니들의 육성 호소가 증거 그 자체”라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또한 중국 관련 기사를 전하는 일본의 웹사트인 ‘레코드 차이나(レコードチャイナ)’는 ‘“지금 살아계신 옛 위안부 할머니들이 가장 좋은 증거다!”라며 일본에게 강력하게 말했던 한국 정보는 어디로?’라는 한국 누리꾼들의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두 번째 공판은 2015년 1월 30일에 열렸다.

2017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근거 없는 성병 감염자의 강제 수용은 ‘위법 행위’라고 판단하고 “소송을 제기한 120명 중 격리 수용 대상으로 하는 전염병을 명시한 시행 규칙이 제정된 1977년 8월 이전에 성병 검사 불합격자 시설에 강제 수용된 57명에게는 500만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원고들의 “국가가 성매매가 쉽게 이뤄지도록 기지촌을 설치한 것은 위법”, “국가가 정화운동 등 기지촌의 성매매를 관리한 것은 위법”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지방법원은 “기지촌에서의 매춘은 강요당한 것이라도 그만둘 수 있었다”, “국가의 성매매 관리는 성병 검진, 치료 등의 공익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고 판단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겨레, ‘법원 “미군 기지촌 ‘위안부’에 국가가 배상해야”‘, 2017년 1월 20일자)*

[* 2022년 9월 29일,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판결 후에도 한국 정부가 성병 검사 불합격자 수용시설(통칭 : 몽키 하우스)’을 만들어 기지촌 여성들을 격리한 점이나 ‘노후에는 9평짜리 무료 아파트 알선’이라는 식의 거짓말을 했다는 점 등의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11 한국의 위안부에 관한 여러 설(韓国の慰安婦に関する諸説)

11.1 일본군 위안소와의 관련(日本軍慰安所との関連)

한성대 교수 김귀옥은 당시 설치한 육군 관계자가 한때 일본군으로 종군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한국군 위안소 제도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연장”이라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누가 한국군 위안부로 끌려갔나“’ 2015년 1월 8일자) 또한 재한미군기지는 일본군 기지를 유용한 것이 대부분이며 미군이 기지 주변의 매춘가도 활용한 점도 배경에 있다.

또 ‘위안(부)’이라는 말이 공통으로 사용되는 점에서 한국군 위안부는 구 일본군 위안부를 본떠 만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계 미국인인 연구자이며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 교수인 사라 소(C. Sarah Soh, 소정희)는 2009년 저서에서 위안부를 두고 ‘성노예’나 전쟁범죄와 연결해 묘사하는 것은 부정확하다고 했다. 또한 한국 정부와 한국 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선정적으로 다루고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은 채 ”일제에 의한 피해 이야기“로 만들어 국민을 유도했다고 비판했다. 사라 소 교수는 ”위안부가 강제연행된 이야기“는 진부한 교의이며, 한국 정부의 이 정치 유도적인 과장이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이해와 그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한국 사회가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나야 하며 한국 자체도 옛 위안부에게 트라우마를 준 공범자이며 위안부 제도 자체는 전쟁 범죄가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C. Sarah Soh ‘The Comfort Wome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현재 한국에서는 한국군의 위안부 존재를 당시와 마찬가지로 인정하는 보도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조선일보는 종군위안부는 일본군의 성노예지만,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에 관해서는 왜곡이라는 입장이다. (조선일보 ‘한국어판 위키피디아, 일본에 점령당했다?’, 2012년 4월 1일자)

11.2 현대의 기생(現代の妓生、キーセン)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는 ”이조 이전의 기생과 근대 이후의 기생은 다르다. 에도시대의 요시와라 유곽과 현대 일본의 요시와라 소프란도 거리가 다르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 정치적, 사회적, 제도적인 지배-종속 구조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대의 서울 미아리 88번지의 미아리 텍사스나 청량리 588 등 사창굴에도 ”성을 억압하며 그것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고급스럽게 포장한 기생 문화의 근본에 있는 것은 여기에도 있다“고 밝혔다.(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 ‘기생(妓生)’(2001년) - 한국에서 소담출판사에서 2002년에 ‘기생 - 말하는 꽃’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

2012년 9월에는 서울 종암경찰서장으로서 유흥가 ‘미아리 텍사스’를 단속한 적도 있는 한남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김강자 씨가 TV조선 방송에서 한국에서는 생계를 위해 매춘업을 하는 여성들에 대한 지원 제도도 없고 경찰력의 한계도 있다며 한정적인 공창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조선일보 ‘집창촌 단속했던 김강자 前서장 "성범죄 막으려면 제한적 공창제 필요" 주장’ 2012년 9월 13일자 )


12 참고문헌(参考文献)

• 한국 육군본부 편 ‘후방전사(인사편)’ 1956년.

• Cynthia Enloe, Does Khaki Become You? The Militarization of Women’s Lives, London: Pluto Press, 1983년
.
• Yang Hyunah,Revisiting the Isuues of Korean Military Comfort Women, Positions5(1), 1997.

• Hyun S.Kim, JT Takagi, and Hye-Jung Park, The Woman Outside: Korean Women and the U.S.Militaly,1997 (2009년 개정)

• 하타 이쿠히코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 신초샤(신초신쇼), 1999년 6월. ISBN 978-4106005657

• 하야시 히로시(林博史) ‘미군의 성대책 역사 – 1950년대까지(アメリカ軍の性対策の歴史―1950年代まで)’ ‘여성, 전쟁, 인권(女性・戦争・人権)’ 7호, 2005년 3월

• Hata Ikuhiko(秦郁彦), NO ORGANIZED OR FORCED RECRUITMENT: MISCONCEPTIONS ABOUT COMFORT WOMEN AND THE JAPANESE MILITARY, 2007, Society for the Dissemination of Historical Fact.

• Hughes, Donna; Chon, Katherine; Ellerman, Ellerman. Modern-Day Comfort Women: The U.S. Military, Transnational Crime, and the Trafficking of Women. 로드아일랜드대학  「Violence Against Women」 2007 Sep;13(9):901-22 수록.

• Cho, Grace (2008). Haunting the Korean Diaspora: Shame, Secrecy, and the Forgotten War.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ISBN 0816652759

•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大韓民国の物語)’ 나카지마 히로키(永島広紀) 번역, 분게이순주, 2009년 2월. ISBN 4163703101

• Chunghee Sarah Soh, The Comfort Woma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시카고대학출판국), 2009년 2월

• CHOE SANG-HUN, ‘Ex-Prostitutes Say South Korea and U.S. Enabled Sex Trade Near Bases’ 뉴욕 타임스 2009년 1월 8일.

• 김귀옥(金貴玉) ‘조선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 제도에 대하여(「朝鮮戦争時の韓国軍「慰安婦」制度について」)’ ‘군대와 성폭력-한반도의 20세기(軍隊と性暴力―朝鮮半島の20世紀)’ 송연옥(宋連玉), 김영(金栄) 편(編)、겐다이시료슈판(現代史料出版) 2010년 소장
(‘한국전쟁기 한국군의 ‘위안부’ 제도의 실체와 문제점‘ 『군대와 성폭력 – 한반도의 20세기』 송연옥, 김영 편저, 선인, 2012년)

• 이나영(李娜榮),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기지촌의 양공주 - 식민지의 유산과 탈식민지의 현재성 -(日本軍「慰安婦」と米軍基地村の「洋公主」─植民地の遺産と脱植民地の現在性─)’ 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立命館言語文化研究) 23(2), 209-228, 2011

• Moon, Katharine H. S. (1997) (영어). Sex Among Allies: Military Prostitution in U.S.-Korea Relations. en: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6436

• 캐서린 H.S.문, 이정주 역(2003) (조선어) ‘동맹 속의 섹스’ 삼인출판사(Sam-in Publishing Co.), ISBN 9788987519692

• Lim, Timothy C.; Yoo, Karam (2008) (영어). The Dynamics of Trafficking, Smuggling and Prostitution: An Analysis of Korean Women in the U.S. Commercial Sex Industry (Report) 2013년 10월 19일 열람.

• 김현선(2013-06) (조선어).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 미국위안부 기지촌여성의 최초의 증언록 (米軍慰安婦基地村の隠された真実 - 米国慰安婦基地村女性の最初の証言録). 한울아카데미. ISBN 978894605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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