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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 칼럼] 호사카 유지 교수에게 드리는 질문

일본군 관리 하에 있는 위안소에서 허위로 기재한 계약서가 가능할까?

[김병헌 ·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3월 6일 미디어워치에 “위안부 계약 없었다? 호사카 유지 저서에서 위안부 계약서 발견!”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자 호사카 유지 (前) 세종대 교수는 이에 대해 발끈하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필자를 대상으로 한 반박 글을 썼다.



발단은 3월 1일 호사카와 송영길(더불어민주당 위원) 등 36명이 참여한 ‘램지어 교수에게 보내는 항의 서한문’이다. 이 서한문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거나 취업사기로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다. 거기에는 일본 여성뿐만이 아니라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동남아인, 유럽의 네덜란드인과 독일인도 포함된다.”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성 계약’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여성들이 끌려가거나 다른 명목에 속아서 연행되어 도망갈 수 없는 환경에서 성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램지어 교수는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허위 주장을 했고, 업자와 여성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성 계약을 맺었다는 허위에 입각한 논문을 썼다. 그는 논문을 통해 일본 내의 매춘업 상황을 확대 해석하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모두 매춘부였다고 우기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필자가 호사카가 엮은 ‘일본의 위안부문제 증거자료집(1)’ 36쪽에 있는 ‘계약증’과 ‘승낙서’를 지목하여 ‘계약 자체가 없었다.’는 주장은 허위라는 취지의 기사가 보도되자 호사카는 페이스북에 “조선여성들의 ‘성매매계약서’는 없었으며, 책에 있는 계약서는 업자들이 일본여성들에 제시한 ‘작부(=술 접대부)’ 계약서 양식이며, 작부 계약서는 ‘성매매계약서’가 아니다.”고 기사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그런데, 호사카의 주장을 잘 살펴보면 ‘계약 부존재’가 ‘조선인 계약서 부존재’로, ‘모든 위안부’가 ‘일본인 위안부’로 교묘하게 바뀌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호사카가 창기와 작부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있지 않다는 점이다. 호사카는 자신의 책에 있는 계약서가 ‘작부(=술 접대부) 계약서 양식’에 불과하며 ‘성매매계약서’가 아니라면서 “당시 일본 내에서는 공창제(=공인된 매춘부제도)가 존재했기 때문에 ‘매춘부 계약서’는 ‘창기 계약서’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따로 ‘작부 계약서’도 존재했다. 이유는 창기(=공인된 매춘부=공창)와 작부(=술 접대부)는 전혀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공창 폐지가 곧 관허(官許) 매춘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1934년 일본 전역에서 ‘창기’라는 공창제가 폐지되고 이후 ‘작부’가 ‘창기’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매춘 공간인 유곽을 카페나 요리점으로 개조하고, 창기를 작부로 이름을 바꾸어 영업을 이어가도록 한 그야말로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당시 신문 보도이다.

공창은 사창으로 유곽은 요정으로


10월에는 내무성에서 규칙개정 “공창폐지 문제는 이윽고 구체화하야 금번 내무성에서는 현재의 창기취체규칙을 폐지하고 공창을 없이 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유곽을 전부 철폐하는 것이 아니고 창기라는 명칭만 폐지하는 것으로서 창기는 작부‧종업부라고 하여 그냥 둔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유곽은 요리점 혹은 오락장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단 창기의 인원에 대하여는 현재 이상은 허락지 않고 새로 출원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허가하지 아니하리라 한다. 폐창에 대한 규칙을 9월 1일 또는 10월 1일에 내무성령으로 공포되리라 한다.” (1934. 7. 19. 동아일보)


이에 따라 1934년 이후 공창이 사라진 일본에서는 작부가 창기 자리를 대신했다. 조선 내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받아 작부와 창기의 영역이 분명했던 1920년대와 달리 1930년대에는 예창기 작부의 경계가 모호해져 작부의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1937년 일본에서는 이미 작부가 창기와 같은 의미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승낙서 상에 ‘작부(창기와 동일)’이라고 부기(附記)하여 그 업무 내용을 분명히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호사카는 또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으려는 업자들이 일본군의 지시를 받아 1937년 말부터 일본에서 활동했을 때 왜 ‘창기계약서’가 아니라 ‘작부계약서’를 제시했을까? 속이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며 “승낙서에 ‘작부(창기와 동일)’이라는 기재가 있으니 작부계약서는 매춘계약서라고 우기지만 그렇다면 업자들은 처음부터 여성들에 ‘창기계약서’를 제시했어야 했다.”고 하여 ‘작부계약서’나 ‘작부(창기와 동일)’은 모두 여성들을 속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처음부터 속일 의도가 있었다면 굳이 창기나 작부라는 단어가 아니라 훨씬 더 근사하고 속기 쉬운 단어를 쓰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무엇보다 호사카는 마치 허위 계약서 작성이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당시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만 있어도 이런 주장을 하기 어렵다. 당시에는 조선 내에서조차 사문서 위조, 인감 위조, 계약 위반 등 권리 침해에 대한 소송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작부로 계약해놓고 매춘을 강요했다고 소송을 제기하며, 작부 허가 담당 형사가 자신을 협박하고 폭행했다고 해당 형사를 고소하던 때였다. 일본군 관리 하에 있는 위안소에서 허위로 기재한 계약서가 과연 통용될 수 있을 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게다가 항의 서한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거나”라며 일본군을 명시했던 호사카가 정작 자신의 페이스북에서는 “당시 조선 여성들은 80%정도가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고 추정되므로 업자들은 계약서 따위는 작성하지도 않았고 구두 약속으로 여성들을 속여서 끌어갔다. 전형적인 유괴였던 것이다.”라고 하여 위안부의 계약 당사자를 줄곧 ‘업자’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호사카 유지 교수에게 질문을 드린다. 업자가 일본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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