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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4)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2)


이전기사 :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3)




   3.8 전후 전범재판의 검증

        3.8.1 난징재판

        3.8.2 도쿄재판


4 문헌기록과 구술자료, 사진 및 영상

   4.1 히로타 고키 외상의 전보

   4.2 증언

   4.3 일기사료

        4.3.1 진중일지

        4.3.2 구미인의 일기 기록

        4.3.3 중국인의 일기

   4.4 공식기록(전투상보)

   4.5 시신 매장 기록과 논쟁

   4.6 문학작품영화 등

   4.7 서한사료

        4.7.1 의문의 사진(학살긍정파에 대한 반론)

        4.7.2 의문의 사진(학살부정파에 대한 반론)

   4.8 기록 영상 자료

   4.9 세계기록유산 등록에 관하여


5 관련 작품에 대한 논쟁


6 논쟁에 대한 평가


7 참고문헌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2)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3)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4)





3.8 전후 전범재판의 검증(戦後の戦犯裁判の検証)


3.8.1 난징재판(南京裁判)


이 재판에 관한 비판으로는, 판결을 통해 책임자로 처형된 다니 히사오(谷寿夫) 제 6사단 중장은 실은 난징사건 당시엔 제 6사단의 입성식을 위해 일주일 정도 난징에 머물렀을 뿐이고 며칠 뒤에 주력(主力)이 우후(蕪湖) 방면으로 전진했다는 점, 야나카 마사루(谷中将)도 입성했다는 점, 또한 이후 관련 재판에서 일본인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제16사단(사령관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과 제114사단(사령관 스에마츠 시게하루(中島今朝吾) 쪽의 살해 기록이 더 많다는 점이 있다.


일본의 근현대사 연구가인 아라 켄이치(阿羅健一)는 다니 히사오(谷寿夫) 중장이 난징사건의 책임자로 심판받은 것에 대해서 다니 히사오 중장 지휘 하의 제 6사단은 성내 수백 미터까지 진행했던 것에 불과하고, 다니 히사오 중장은 입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주일 정도 머물렀을 뿐이라고 했다. 또한 다니 히사오 중장이 재판에서 난징사건을 알게 된 것도 전후에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보도인 ‘태평양전쟁사’를 통해서라고 말했었다고 했다.


다만, 제 6사단이 포로 해방과 전투에 대한 상세 보고가 남아 있는 한편, 입성하지 않고 향했던 난징성 근처의 장강 주변에서 군민을 포함한, (전투의 연장으로 볼 것인가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학살 기록이 있다.


관련 논의는 ‘난징사건 # 난징재판’을 참조하라.


3.8.2 도쿄재판(東京裁判)


이 재판에서는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이 책임자로 처형됐다. 이 재판에 대한 비판은 많다. 이미 ‘# 주요논점’과 ‘# 학살의 대상’에서도 설명했듯이, 점령 후 중국병사에 불법 살인 기록과 점령 직후까지의 시민 살해 등 전시국제법 위반으로서의 기록이 존재하며 그 총 숫자도 1만을 훌쩍 넘는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치안을 회복한 도시의 시민(포로를 포함) 총 20만 명의 ‘대학살’은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판결에서 채택된 것에 대해 비판이 많다.


또한 부정파인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는 전후 전범재판에서 중국은 처음부터 시체 매장 목록 등의 자료를 급조했고, 피해자라고 칭하는 인물들의 과대선전에다가, “시체가 겹겹으로 산더미를 이뤘다, 유혈이 강물처럼 흘러 무릎에 달할 정도였다”같은 문학적 작문까지 증언・증거가 되었으며, 도쿄재판에서는 일본군에 관한 증언에는 위증죄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여러 보고와 기록으로 봤을 때 총 20만 명까지의 '대학살'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관련 논의는 ‘난징사건 # 도쿄재판’도 참조하라.





4 문헌기록과 구술자료, 사진 및 영상(文献記録と口述資料、写真・映像)


4.1 히로타 고키 외상의 전보(広田弘毅外相の電報)


1994년에 미국 공문서관에서 해금된 자료 중에 1938년 1월 17일자 일본 외무성에서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 앞으로 발신한 암호 전보가 발견되었는데, 난징을 시찰한 후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 외상(外相)이 “일본군 부대는 훈족의 아틸라 대왕을 떠올리게 행동했다. 30만 명 이상의 중국 시민이 살해되고 참으로 냉혹하게 죽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중국은 학살의 증거로 이 ‘히로타 전보(広田電)’를 선전하고 있다. 아이리스 장(Iris Chang)도 이 히로타 전보가 30만 학살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로타 외상은 당시 중국이 아니라 일본에 있었으며 외무성이 받은 난징사건의 자료를 견문했을 뿐이지, 난징에서 시찰을 한 것은 아니다. 또한 조지워싱턴대학(The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교수인 다킨 양(Daqing Yang)은 이 전보는 히로타 고키(広田弘毅)가 아니라, 기자인 해럴드 팀펄리가 쓴 뉴스라고 지적했다. 잡지 ‘쇼쿤!(諸君!)’ 편집부는 이 전보문서가 헤럴드 팀펄리의 기사를 현지의 일본 당국이 검열・압수한 것으로, “아틸라 대왕”이나 “훈족” 등의 언급부터가 일본인답지 않은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4.2 증언(証言)


당시 난징전에 참가한 일본군 장병과 종군 기자, 외교관 등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 “포로” “편의병”의 처형을 목격했다, 는 증언이 있다. 한편, 당시 ‘학살’을 보지 못했다・듣지 못했다는 증언도 다수 있다. 또 재조사를 통해 증언이 거짓이었음이 판명된 것도 있다. 일본인 이외에도 전후 난징 재판과 동경 재판에서 증인이 된 안전구역에 있던 외국인과 중국인이 있다.(자세한 내용은 일본 위키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을 참조하라.)


4.3 일기사료(日記史料)


4.3.1 진중일지(陣中日誌)


일본 육군 OB회인 가이코샤(偕行社)가 편찬한 ‘난징전사(南京戦史)’・’난징전사 자료집 I(南京戦史資料集 I)’・ ‘난징전사 자료집 II(南京戦史資料集 II)'에는 수많은 군인의 진중일지, 일기, 부대의 전투상보가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또한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 이누마 마모루(飯沼守) 상하이 파견군 참모장(자료집 I), 우에무라 도시미치(上村利道) 상하이 파견군 참모부장(자료집 II), 야마다 센지(山田栴二)(보병 제104여단장・야마다 지대 지대장)의 일기 등도 수록되어 있다. 개별 출판으로는 부사관이었던 무라타 카즈시로(村田和志郎)의 ‘일중전쟁일기(日中戦争日記)’(1986년 출판) 등이 있다.


・제16사단장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의 진중 일지


1937년 12월 13일, 오늘 정오 다카야마(高山) 검사(剣士)가 왔다. 포로 일곱 명이 있었다. 직접 목을 베려는 순간, 마침 내 칼도 이때 그로 하여금 시험하도록 했고, 목 둘을 베었다 ... 대략 포로로 두지 않는 방침이라면, 빠짐없이 처리하더라도 1천, 5천, 1만의 군중이 되면 무장을 해제하는 것조차 못한다.이들이 완전히 전의를 잃고서 따라오기 때문에 안전하기는 하겠지만, 이것도 일단 소란이 벌어지면 처리가 곤란하므로, 부대를 트럭으로 늘려서 감시(監視) 및 유도(誘導)를 맡게 했다. 13일 저녁, 트럭으로 큰 활동을 해야 했다. 전승(戦勝) 직후여서 실행을 빨리 못하고서 목을 베는 처리는 당초부터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참모부는 너무 바빴다. 후에 알았던 이야기지만, 사사키(佐々木) 부대가 처리한 약 1만 5천 명, 태평문(太平門)에서의 수비의 한 중대장이 처리한 1300명, 선학문(仙鶴門) 부근에 집결한 자 약 7, 8천 명이 있어서 속속 투항했다. 7, 8천 명, 이를 처리하려면 상당히 큰 호(壕)를 요구한다. 쉽게 찾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의 제안으로 100, 200명으로 분할한 후 적절하게 처리할 예정이다.


이 기술에서의 “대략 포로로 두지 않는 방침”을 군에 의한 포로 살해 명령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히토츠바시(一橋)대학 교수인 요시다 유타카(吉田裕)는 그 근거로 제38연대 코다마 요시오(児玉義雄) 증언, 제16사단 보병 33연대, 제114사단 제66연대 제1대대 전투상보를 들었다.


한편, 나카지마 게사고 일기의 기술을 뒷받침하는 명령서와 물증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지아(亜細亜)대학 교수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이것을 포로 살해의 의미가 아니라고 본다. 당초부터 살해할 방침이었다고 하면 명기를 했을 것이며, 포로로 하지 않고 석방할 것이라고 생각하여서, 상하이 파견군 참모인 오오니시 하지메(大西一) 대위의 “이것은 총기를 빼앗아 석방하라는 것입니다”라는 증언도 있다. 일본군은 포로수용소를 만들고 포로를 수용했으며, 그중에는 왕징웨이(汪兆銘) 정권(1940~1945년 사이 난징시에 존재했던 일본의 괴뢰정권) 하에서 군인이 된 사람도 있고, 전투 중 포로를 석방한 사례도 있다.


다만, 만약 “대략 포로로 두지 않는 방침”이 “살해하라”가 아니라 “석방하라”는 해석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자연스럽다. 그 뒤의 문장, 즉 ‘이 7.8천 명, 이를 정리할 수 있는 상당히 큰 호(壕)를 필요로 함’, 즉 왜 포로를 석방한 후에도 ‘7천 8천 명의 인간을 정리하기 위한 큰 지면의 구멍이 필요한가’라고 하는, 표현상의 모순이 있기 때문에 ‘포로로 두지 않는 방침’은 ‘포로를 살해하고 처분하라’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난징전사’에도 “살해하라”의 의미라는 당시 군인의 해석이나, 큰 호에 포로를 대량으로 묻었다는 증언 등이 있다.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에 대한 이러한 반론과 관련하여 재반론이 없이 그저 석방하라는 뜻이라고만 한 오오니시 대위는 일본 육군 OB 가이쿠샤(偕行社)의 ‘난징전사(南京戦史)’ 편집부로부터도 그 언행의 진의를 비판받은 바 있다


• 오하라 류이치(小原立一) (제16사단 경리부 예비주계(予備主計) 소위) 일기 1937년 12월 14일 “최전선의 병사 7명이 약 310명의 정규군을 포로로 잡아왔기 때문에 보러 갔다. 별의별 놈이 다 있다. 무기를 빼앗고 복장 검사, 그간에 도망한 놈 세 명은 즉시 총살했다. 곧 한 사람씩 한 정(丁) 정도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서 병대 200명을 전부 찔러 죽였다 ... ... 그 속에 여자 한 명이 있어, 죽이고 음모에 나무 막대기를 꽂아 넣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가 인용)


• 이노이에 마타이치(井家又一) (보병 제7연대 제2중대 상병) 일기 12월 22일 “160 여명을 데리고 난징 외국인 거리를 다니면서, 고림사(古林寺) 부근의 중요 지대에 엄개(掩蓋, 참호)의 총좌(銃座)가 많이 있었다. (중략) 외딴집에에서 다섯 명을 연이어 데리고 와서는 찔렀다. (중략) 전투에서 패망한 병사는 일본 군인에게 살해되었던 것이다. 철사로 팔을 죄고, 목을 매고, 몽둥이로 패서 끌고 갔다. (중략) 물속에 뛰어들어 허겁지겁하는 놈, 개중에 도망치기 위해 다락방에 매달려 숨어있는 녀석도 있다. 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아서 휘발유로 집을 태웠다. 불덩이가 되어 두세 명이 달려나온 것을 찔러 죽였다”


• 코다마 요시오(児玉義雄) (제16사단 제38연대의 부관) 사단 명령으로 중국병사의 항복을 거부하고 살해하라는 소식을 전했다.


• 사사키 이타루이치(佐々木到一) (제16사단 보병 제30여단장) 소탕전기(掃討戦記) ‘사사키 이타루이치 소장 사기(私記)’를 남겼다. 성 외 인근에 있어 불령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패잔병들도 순차적으로 포박. 하관(下関)에서 처분한 경우가, 수천에 도달했다”


• 엔도 코메(遠藤高明) (제13사단 야마다(山田) 지대 제65연대 제8중대 소위)


• 쿠로스 타다노부(黒須忠信) (제13사단 야마다 지대 산포병(山砲兵) 제19연대 제3대대 상등병)


• 마키하라 노부오(牧原信夫) (보병 제26연대・상등병)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의 저서 ‘난징사건’에서 인용)


• 호리코시 후미오(堀越文雄) (제13연대 야마다 지대 보병 제65연대) 중국인 여성, 아이를 총살. (가사하라 도쿠시의 저서 ‘난징사건’에서 인용)


• 오오테라 다카시(大寺隆) (제13연대 야마다 지대 보병 제65연대 제7중대) 12월 18일, 전날까지 장강 포로 살해는 2만 명. (가사하라 도쿠시의 저서 ‘난징사건’에서 인용)


• 마스다 로쿠스케(増田六助) (제16사단 보병 20연대 오장(伍長)) 난민구 소탕. ‘난징전사 자료집(南京戦史資料集)’ 가이코샤(偕行社). (가사하라 도쿠시의 저서 ‘난징사건’에서 인용)


4.3.2 구미인의 일기 기록(欧米人の日記・記録)


 욘 라베(John Heinrich Detlef Rabe) -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원장. 일기(일본어 번역 ‘난징의 진실(南京の真実)’). 욘 라베는 일본군 입성 후 질서가 안정되리라 믿었지만(예, 욘 라베의 ‘난징의 진실’(라베 일기) 312쪽, 80쪽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독일 주재 중국 대사에 보낸 전보 “일본은 도시를 비롯해, 국민당 정부, 생명, 재산, 외국인 및 저항하지 않는 중국 인민을 최대한 관대하게 처리 할 것이다“), 이후 일본군의 행동에 배신당한다. 일기에는 라베 등의 안전 구역에서의 활동과 일본 측과의 협상에 대해서도 적혀 있으며, 동시에 일본군의 폭행 및 불법 살인도 기록되어 있다. 한편, 난징 주재 독일대사관의 샤펜베르크(Paul Scharfenberg) 사무장의 지적과 같이, 욘 라베는 미국에 지나치게 경도되고 중국 측에서의 일방적인 정보를 듣고 있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 샤펜베르크 사무장은 “욘 라베는 위원회 대표로 탁월한 공헌을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미국인에 의해서 회유되었고, 미국인의 이해, 그리고 신도(信徒) 획득에 너무 열심인 전도단을 편들고 있다. (생략) 첫째, 폭행 사건이라고 해도 전부 중국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라고 비판하였고 이것이 라베 일기에 수록되었다. 이는 라베 일기의 편집자인 에르빈 뷔케르트(Erwin Wickert)가 추가한 문서다.]



• 윌헬미나 미니 보트린(Wilhelmina Minnie Vautrin) -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여성 위원이며 진링(金陵)여대 학내에서 여성을 구호하고 일기를 남겼다.


• 로버트 O. 윌슨(Robert O. Wilson) -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원이며 진링(金陵)여대 부속 병원 (구로우(鼓楼) 병원) 의사. 본인의 편지.


•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회원. 저서 ‘중국에서의 팔십년(My Eighty Years in China)’(1967년).


• 제임스 H. 맥칼럼(James H. McCallum) - 난징 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원. 선교사. 진링여대 부속 병원(구로우 병원) 사무관리 총괄(의사는 아님). 맥칼럼의 1937년 12월 29일의 일기에 쓰여있는 다음 문장은 일본군의 학살을 부정하는 증거로 도쿄 재판에 제출되었다. 1937년 12월 29일 “(안전구역에 들어온 일본군은) 예의가 바르고, 심지어 존경하는 태도로 우리를 대우해주었다. 몇 명의 아주 유쾌한 일본병사가 있었다. 나는 때때로 일본 병사가 몇몇 지나인을 돕고, 또한 같이 놀아주기 위해서 지나인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이날 일기에는 “우리를 정중하게 대우해주는 매우 기분 좋게 하는 일본인도 있기는 하지만, 다른 일본인은 대체로 상당히 잔인하며 때리고 걷어차고 하는 것을 보면서 무서워졌다고 기재했다. 맥칼럼의 일기에는 그 밖에도 일본 측의 식량 제공 등을 호의적으로 쓴 부분도 있지만, 12월 30일, 1월 7일의 일기에 “오늘 병원에 실려온 남성은 내장이 관통되어, 장이 4피트나 튀어나왔다. 다행히 그는 구사일생로 살았다. 밥 윌슨(인용 참고 : 로버트 O 윌슨 의사)이 거의 반나절에 걸쳐 상처를 봉합했다. 저녁 식사 전에 일본 군인 두 사람이 와서 열두 살 소녀를 노란색 택시로 납치했다” “프라이스의 정원에서 생후 여섯 달 정도의 아기가 울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 일본 병사가 아이 어머니를 강간하고 있다. 병사는 아기의 입과 코를 눌러 질식시키고 말았다”라는 기재도 있다.


• 국민당 감수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의 기록집 ‘Documents of the Nanking Safety Zone(난징 안전 지대의 기록)’ - 이 기록을 번역한 부정파인 도미자와 시게노부(冨澤繁信)는 기록에서 일본군의 소행이라는 근거가 없고, 오히려 일본군의 소행으로 봐야할 것이 적다고 추론했다. 게다가 기록 내용이 사실이라도, 대학살설의 과실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 해럴드 J. 팀펄리(Harold John Timperley)  - 호주 기자이자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의 해럴드 J. 팀펄리는 난징사건 직전인 9월까지 난징에 있었다. 이후에 다른 저널리스트의 정보 등을 바탕으로 난징사건과 관련해 1938년에 저작 ‘전쟁이란 무엇인가(What War Means)’를 간행했다. 이 논문은 당시 영국, 미국, 프랑스, 코펜하겐, 중국, 일본에서도 간행되었고, 영국과 미국에서 12만 권이 출판되어, 일본군의 잔학 행위를 세계에 널리 알렸고, 전후 전범 재판에서 검찰 측의 주요 증거로 채택되었다. 다만 그의 이 저작은 그 내용에 대해 신빙성에 논란이 있다.


4.3.3 중국인의 일기(中国人の日記) 


2015년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청루이팡의 일기(程瑞芳の日記)’와 관련, 일본의 부정파는 이 일기가 강간 8건, 약탈 6건, 납치 1건, 구타 1건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을 뿐 살인 사건의 기록도 없고, 목격자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학살’의 증거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 아라 켄이치(阿羅健一)와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는 이 일기의 기록은 강간 8건, 약탈 6건, 납치 1건, 구타 1건 뿐으로, 살인 사건의 기록도 없고 목격자도 없기 때문에 ‘대학살’의 증거로 부적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 아라 켄이치와 후지오카 노부카츠는 1938년 1월 4일에 뉴욕타임스가 “중국군 대사와 6명의 장교가 진링(金陵)여자대학에 숨어서는 약탈을 하고 소녀를 강간했는데, 일본병이 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날 진링학원에 있던 윌헬미나 미니 보트린(Wilhelmina Minnie Vautrin)의 일기에는 정작 이 사건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 아라 켄이치는 “20만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면 수용 인원의 비율로 한다면 진링여자문리학원에서는 1만 명 정도의 살해가 있었어야 한다”고 하면서, “청루이팡이 들었다는 강간은 일본군에 의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도 모르며, 수 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약탈은 식량으로서의 닭이나 돈 등이다”, “오히려 난징은 통상(通常)의 전장(戦場)이라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후지오카 노부카츠는 여성이었던 청루이팡(程瑞芳)의 일기가 필두로 꼽을 수 있었던 것은 안네의 일기(2009년 등록)를 참고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밝혔다.]


4.4 공식기록(전투상보)( 公式記録(戦闘詳報))


주요 기록과 논의는 ‘난징사건 # 난징사건의 피해자 (중국 병사)’를 참조하라.


4.5 시신 매장 기록과 논쟁(遺体埋葬記録とその論争)


난징사건에서는 일본군의 불법살인에 의해서 군인・민간인 시신이 성 밖에서 살해된 후에 장강으로 내던져진 예가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성 안쪽과 성 바깥쪽에 버려진 시체(다른 전투와 불법이 아닌 전투의 사망자 등에 의한 유기사체와 같이 불법살인 이외의 시신도 포함하기 때문에 전부가 학살(불법 살인)은 아니다)도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중국 측의 자선단체인 홍만자회(紅卍字会)와 숭선당(崇善堂)이 다수의 시체 처리를 한 기록도 남아있다. 양 단체가 4월까지 실시한 시신의 매장 숫자는 다음과 같으며, 난징성 안쪽에서의 작업 분담과 관련하여 홍만자회가 안전구가 있는 성내 서쪽을, 그리고 숭선당이 성내 동쪽을 담당했다.


・홍만자회가 성 안쪽(주로 안전 구역을 포함한 성안의 서쪽) 매장 1,795구(당시 문서에서는 1,793구), 성 바깥쪽에 매장 41,330구.


・숭선당이 성 안쪽(주로 성안의 동쪽) 매장 7,549구, 성 바깥쪽 매장 104,718구. 그러나 3월까지 성 안쪽에서 매장했고 4월부터는 성 바깥쪽에서 매장. 


또한 사망자는 성 안팎으로 90% 이상이 성인 남성이며, 불법살인 또는 전투 중의 사망 이외에  중국 군인이 다수이지만, 윌헬미나 미니 보트린(Wilhelmina Minnie Vautrin)의 일기에서는 홍만자회가 처리한 시체의 3분의 1은 민간인의 시체였다는 보고가 있고(4월 2일), 홍만자회가 처리한 성내 1,793구의 시신 80%는 민간인(4월 15일)라는 전문(伝聞, 들은 얘기) 정보를 기술하고 있다.


이 시신 매장 숫자에 대해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욘 라베(John Heinrich Detlef Rabe)의 일기에는 1월 말까지 인근에 있던 시신의 매장을 일본 측이 허용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있기 때문에 거짓이 있다고 본다. 또한 그는 숭선당의 4월 이후 매장 숫자가 과대하며 불가능한 숫자로 간주하면서, 이 단체의 존재 여부를 포함해 매장 숫자의 신빙성이 낮다고 말했다. 


또한 아라 켄이치(阿羅健一)는 3월에 성립한 일본의 괴뢰정권인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자료에서는 숭선당(崇善堂) 활동이 재개된 시기가 1938년 9월이라고 적혀있다는 점(단, 단체 목록에 활동 재개시기의 연월만 설명된 것이고, 어떤 활동을 재개하거나 자료의 배경 등 자세한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음)을 근거로 이 단체가 그 이전은 활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근현대사 연구자인 미즈마 마사노리(水間政憲)는 이상의 생각에서 숭선당의 시신 매장 활동이 없었다, 곧 실적이라는게 없었다고 하면서 숭선당 난징성 바깥쪽의 시신 매장 104,718명과 성 바깥쪽의 동쪽 시신 매장 7,549명을 0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난징사건에서의 시신 매장 숫자(피해자 숫자)에서 홍만지회의 시신 매장 숫자 중 성 바깥쪽의 매장 숫자 41,330명은 난징사건의 피해자로 간주하지 않으면서, 성 안쪽의 1,793명의 시신 매장만 피해자(게다가 여성・아이와 같은 확실히 민간인으로 특정된 사망자 수는 그 속에 불과 “34명”이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부정파에 대한 반론으로서 중국 전문 역사학자인 이노우에 히사시(井上久士)는 우선 일본군 특무기관의 기록에서 1월에는 이미 시신 매장 활동 자체가 허용되어 있었다고 반박하고, 또한 숭선당도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현지 상조(互助) 단체로 부동산 수입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비록 일본 측이 이 단체에 매장을 위탁한 자료는 없지만) 난징시 자치위원회에 서한 등의 구체적인 자료로 숭선당의 1~2월 시진 매장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4월 이후 시진 매장 숫자가 많은 것은 3월에는 이미 시신의 손상이 심해졌기 때문에 수많은 시신이 조잡하게 매장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면서, 조잡하다면 시진 매장 숫자의 신뢰성도 낮을 것(하지만 매장 활동의 전면 부정까지는 되지 않음)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숭선당의 시진 매장 활동 기록은 분명히 적다고 인정하면서도, 가짜 자료라거나 날조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료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또한 홍만자회의 기록에도 불과 하루에 6,000명이 성 바깥쪽에 매장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기록이 허구라는 설도 있지만, 역사학자인 호라 도미오(洞富雄)가 중국에 있는 원본을 조사한 결과, 그때는 장강을 따라 버려진 대량의 시체는 그대로 장강에 (매장하지 않고) 흘려 보냈다고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설명된다고 말했다.


4.6 문학작품 • 영화 등(文学作品・映画など)


‘난징사건 # 난징사건을 다룬 작품’을 참조하라. 기록 영화는 아래 ‘# 기록 영상 자료’를 참조하라.


4.7 서한사료(書簡史料)


2000년에 사후 발표된 종군작가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1937년 12월 15일) 데려온 지나 병사에 대해서 모두가, 안타깝게도 네놈들 때문에 우리 전우가 죽었다, 답답하다고 말하면서 걷어차고 때리고서는, 누군가가 갑자기 소총으로 여덟 명 정도를 순식간에 죽였습니다. 지나 병사가 너무 빨리 체념해서 놀랐습니다. 걷어차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살해당하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쓰러집니다. 중대장이 와달라고 해서 그곳의 지푸라기로 된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점심이었기 때문에 밥을 먹고, 밖에 나와보니, 이미 서른두 명 모두가 살해되어서 물이 고인 산병호(散兵濠) 속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야마자키(山崎) 소위도 한 명 죽였다고 하면서 목을 가져왔습니다. 산병호의 물이 새빨개져서, 맞은 편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참호 옆으로 가니까 지나병사가 아직 죽지 못하고 있었는데, 저를 보고 죽여달라고 눈으로 가슴을 가리켰기 때문에, 내가 한발을 가슴에 쏘자, 곧 죽었습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붉은 물 위에 상반신을 내놓고 움직이고 있어 한발 등쪽에서 쐈고 물 속으로 가라앉아 죽었습니다. 통곡하던 소년병도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4.7.1 의문의 사진(학살긍정파에 대한 반론)( 疑問ある写真(虐殺肯定派への反論))


난징사건의 사진 자료(매기 목사의 사진, 국민당이 편찬한 ‘일구폭행실록(日寇暴行実録)’(1938년), 일본인 사진사 촬영 등)은 많이 존재하지만, 그 신빙성이 검증되지 않은 채 취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서술하는 바와 같이, 아사히(朝日)신문은 1984년 8월 4일 오사카(大阪)판 석간(다음 날 아침 전국 게재)의 ‘난징대학살의 증거사진’으로서의 목이 잘린 사람 사진은 실수였다고 하는 등 신빙성이 없는 사진이 일부 섞여 있었다. 


난징사건 관련 사진을 검증 해왔던 마쓰오 이치로(松尾一郎)와 그 연구에 참여한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등은 아이리스 장의 저작 등 난징사건 관계서적들에 게재된 수많은 ‘증거사진’은 날조사진이라고 했다. 고의(조작)인지 차치하더라도, 이제까지 지적된 잘못된 사진의 예는, (역시 고의인지는 차치하고) 다른 무관한 사진이 섞여 있다거나, 난징사건 이후 1938년 일본군의 군장(軍装)이 나오거나(즉 난징 이외의 장소의 것), 편집자 오기 등 다양하다. 히가시나카노 슈도는 “난징 대학살 증거 사진은 전부 날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의 사진분석에 있어서 증거사진 전부가 날조라는 주장은 지나친 것으로, 고증이나 지적에 있어서 그의 실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성기에 이물질을 넣는 잔혹행위는 중국인 밖에 하지 않았다면서 잘못된 사진으로 간주됐었지만, 실은 일본 병사들도 같은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또한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살인사건 자체는 촬영이 거의 불가능한 것을 고려하지 않는 등의 의문점이 존재한다.


2008년, 난징시에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이 난징사건과 무관하다고 지적된 사진 3장은 철거했다고 일부 언론이 보도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철거 사실을 부인했다.


1. ‘아사히그래프(アサヒグラフ)’ 1937년 (쇼와 12년) 11월 10일호

 



사진 주간지 ‘아사히그래프(アサヒグラフ)’는 1937년(쇼와 12년) 11월 10일 호에, 장쑤성(江蘇省) 바오산현(宝山県) 성자교(盛家橋) 부락의 중국 농민의 사진에 ”우리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야량사사(野良仕事, 들일)를 보다가 부락으로 돌아가는 일장기 부락의 여자들(我が兵に援けられて野良仕事より部落へかへる日の丸部落の女子供の群れ)이라고 캡션을 붙여 게재했다. 이 사진은 그 다음 해 1938년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일구폭행실록(日寇暴行実録)’에 “일본군에 납치된 중국인 여성”이라는 설명이 붙어 무단으로 전재되었다. 또한 이 ‘일구폭행실록’의 사진은 아사히신문 기자인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가 1972년 저서 ‘중국의 일본군(中国の日本軍)’(소오주샤(創樹社))과 1997년 11월 발행 가사하라 도쿠시의 저서 ‘난징사건(南京事件)’ III장 처음에 “일본군에 납치된 장난(江南) 지방의 중국인 여성들”이라는 캡션으로 게재되었다. 


1998년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에 의해 이 사진의 원판은 ‘아사히그래프’의 쇼와 12년 11월 10일호에 게재된 “우리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부락으로 돌아가는 일장기 부락의 여자들”이라는 사진임이 지적되었다. 쓰루분카(都留文科)대학 교수인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중국 국민 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가 사실과 다른 자막을 붙인 것을 모르고 사용했다고 하면서, 하타 이쿠히코(秦郁彦)에게 감사를 표하고 촬영자인 고(故) 쿠마자키 타마키(熊崎玉樹) 사진사, 아사히신문 독자들에 사과했다. 이에 따라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도 사과문을 게재하고 출품을 일시중지하고 가사하라 도쿠시와 협의하여 ‘무라세 모리야스 사진집 - 나의 종군중국전선(村瀬守保写真集 私の従軍中国戦線)’에서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할머니의 사진으로 교체했다.


2014년에는 ‘슈칸신초(週刊新潮)’가 위 사진을 혼다 가쓰이치의 저서 ‘중국의 일본군(中国の日本軍)’에서 인용해 ‘부녀자를 사냥해서 모으고 데려가는 일본병. 강간이나 윤간은 7살 어린 소녀에서 70세의 할머니까지 이르렀다(婦女子を狩り集めて連れて行く日本兵。 強姦や輪姦は7歳の幼女から70歳の老婆まで及んだ )’라는 캡션과 함께 게재했다.


(위 가사하라 도쿠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진의 오용을 지적하자 혼다 가쓰이치는 “’중국의 일본군’ 사진 설명은 이 책의 범례에 명시되어있는 대로, ‘모두 중국 측의 조사증언에 기초한 것’입니다. 중국 측의 문제점은 내가 사회를 맡은 좌담회에서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씨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측의 대응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진의 사용법이네요. 언제 누가 어디서 찍은 것인지 근거를 확인하지 않고는 정치 캠페인으로 마음대로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시민운동 측도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면이 있으며, 그것이 반동에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아사히그래프’에 다른 캡션에 게재되었다는 지적은 제 기억으로는 처음입니다. 확실히 오용같습니다.]”라고 문서로 답했다.


2. 아사히(朝日)신문 ‘난징대학살의 증거 사진(南京大虐殺の証拠写真)’


아사히신문 1984년 8월 4일 오사카판 석간(다음 날 아침 전국 게재)이 ‘난징대학살 증거 사진’이라면서 목이 잘린 사람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이 사진은 중국군이 마적떼의 목을 자른 사진임이 밝혀져, 기사에서 학살에 참여한 것으로 보도된 보병 23연대 전우회 ‘도성 23 연대회(都城二十三連隊会)’가 아사히신문에 항의하고 소송이 제기됐다.(1986년 1월에 화해).


3. 무라세 모리야스(村瀬守保) 사진


무라세 모리야스(村瀬守保) 사진집 ‘종군중국전선(従軍中国戦線)’은 히가시나카노 슈도가 그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무라세 모리야스는 이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4.7.2 의문의 사진(학살부정파에 대한 반론)( 疑問ある写真(虐殺否定派への反論))


한편, 일중전쟁 발생 당시 많은 일본의 신문사들이 난징함락 직후인 12월부터 이듬해초에 걸쳐 현지를 취재한 기록이 당시의 신문기사나 잡지 ‘지나사변화보’(支那事変画報) 등에 남아있으며, 그 중의 일본군과 중국 민간인의 자녀 등과의 교류장면을 봤을 때 전쟁이나 학살을 느끼게 하지 않는 장면이기 때문에 이는 ‘난징사건은 없었다’는 증거라고 근현대사 연구자인 미즈마 마사노리(水間政憲)는 주장했다.


미즈마 마사노리는 일본통치시대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 출판사 ‘마나비샤(学び舎)’(도쿄도(東京都)) 발행의 검정교과서 ‘함께 배우는 인간의 역사(ともに学ぶ人間の歴史)’에 대한 항의 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앞서 서술했었던, 당시 기록에서 ‘프로듀스’한 ‘난징역사전’의 엽서(구 일본군의 난징 점령 시절, 중국인들이 난징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과 일본군과 교류하는 모습을 촬영한 보도 사진들을 활용한 수많은 그림 엽서(일부는 1937년 11월 같은, 난징 이전의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의 사진)를 ‘1차 자료’로 삼아 나다(灘)중학교 등 마나비샤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에 송부하고서 그들에게 계몽 활동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작가인 햐쿠타 나오키(百田尚樹)도 저서인 ‘일본국기(日本国紀)’에서 이러한 평화롭고 치안이 좋은 난징의 중국인들의 모습을 드러낸 난징전 직후의 사진들로 미루어 봤을 때 난징학살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실제 미즈마 마사노리가 보여주는 ‘난징역사전’ 포스트카드 사진 중에서 대표적인 ‘완결 난징사건 일미중 역사전에 종지부를 찍는다(完結「南京事件」日米中「歴史戦」に終止符を打つ)’의 표지 사진을 1937년 12월 15일자로 촬영한 사토 신주(佐藤振寿) 보도원은, 그 전날인 14일이나 다음날 16일에 (사진에는 물론 찍히지 않은) 포로 학살이나 패잔병으로 지목된 자(가족으로 보이는 여성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있어 일반인도 섞였는지)에 대한 연행(그 후 안전구 밖에서 처형당한 것 같다)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한편, 사토 신주 보도원은, 일본병사의 출입을 막고 있던, 구미인이 지키는 난민구(안전구)의 입구 주변에서는 일반인들이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었으며, 15일에 그곳에서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고 말했다. 이에 반드시 화목한 사진들만이 난징의 모든 진실한 모습을 담은 것은 아닐 가능성도 기술에 남기고 있다.


애초에, ‘난징역사전’ 포스트카드 사진의 상당수는, 난민구(안전구) 즉, 일본 군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난징의 많은 민간 중국인이 피난하고 있는 지역이며, 게다가 그 안전한 거주를 구미인의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가 보장했던 장소에서 촬영된 것이다.


또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원인 제임스 H. 맥칼럼(James H. McCallum)은 1938년 1월 9일의 기록으로서 일본 신문기자가 안전구에서 음식을 나눠주면서 그 모습을 촬영(단, 이 촬영이 무엇인지는 상세불명)하는 한편, 일본군에 불리한 장면은 촬영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 “난민 캠프의 입구에 신문 기자 몇 명이 와서는 케이크, 사과를 나눠줬고, 약간의 동전을 난민에게 전달하면서 이 장면을 영화로 촬영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상당수의 병사가 뒤 벽을 기어오르고, 구내에 침입하고 110명 정도의 여성을 강간했지만, 이쪽의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았다” - ‘난징사건자료집 1 미국 관계 자료편’에 수록 p268-9]


그리고, ‘난징역사전’ 포스트카드의 사진을 촬영한 하야시 겐이치(林謙一, 전후의 인기 아침 드라마 ‘오하나한(おはなはん)’의 원작자이자 모델 히로인의 친자(実子)임) 특파원은, ‘도쿄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의 난징 주재 특파원으로 연초 1월부터 일본 내각정보부의 사무촉탁을 받았는데, 그는 그 이전해에 있었던 제2차 상하이사변에서의 미국의 ‘라이프(LIFE)’지 게재 사진(역에서 우는 아이의 모습)이 반일 프로파간다로서 큰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도 보도를 통해 주장해야 할 것은 어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정보국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야시 겐이치는 그 후 많은 일본 시정(市井)의 사람들이 싼 가격으로 읽게 되는 잡지(‘샤신슈호(写真週報)’: 일본 정부의 선전용 사진 잡지)의 편집에 종사하기도 했으므로, 그의 사진에도 프로파간다의 요소가 전무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있다.


4.8 기록 영상 자료(記録映像資料)


• 매기 필름 – 미국 선교사 존 매기(John Gillespie Magee)의 기록 영상. 학살 등의 구체적인 기록이다. 한편, 그 정확성에 대한 논란도 있다.


• ‘난징(南京)’(일본, 1938년) - 일본 육군의 기록 영상에 의한 전선 후방 기록 영화. 당시 일본 육군의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비판이나 문제점 지적이 있어 논란이 있다. 이 영화의 카메라맨인 시라이 시게루(白井茂)는 중국 사람들이 총살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일본군 입성식에서도 주민들이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환영의 수기(手旗)를 흔들었다고 증언했다.


• ‘더 배틀 오브 차이나(The Battle of China)’(미국, 1944년) 감독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 그리고 이 영화를 편집한 ‘중국지로후(中国之怒吼)’(중화민국(대만), 1945년) 등 미국, 중국 프로파간다 영화설에 대해서는 ‘# 기록영상에 의한 피해과장설’을 참조.




4.9 세계기록유산 등록에 관하여(ユネスコ記憶遺産登録に関して)


중국 난징사건에 관한 문서와 위안부 관련 자료에 대해서 세계기록유산 등록 신청을 유네스코에 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는 등록 전까지 중국 정부에 반복해서 신청 철회를 하도록 항의를 했다. 2015년 10월 9일에 유네스코는 ‘Nanjing Massacre(난징 학살)’에 관한 문서를 세계기록유산에 등록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이 신청하여 등록된 자료는, 희생자 수를 30만 명 이상으로 기록한 난징군사법원의 판결서 외에 일본군이 촬영한 사진, 미국인 목사가 촬영한 필름, 생존자로 추정되는 자의 증언과 외국인의 일기 등 11점이다.


1. 진링(金陵)여자문리학원 기숙사 관리원인 청루이팡(程瑞芳)의 일기

2. 미국인 존 매기(John Gillespie Magee) 목사의 16밀리 필름

3. 난징시민 뤄진(羅瑾)이 저장해놓은, 일본군이 촬영한 민간인 학살과 여성에 대한 희롱, 강간 사진 16장

4. 우시언(呉旋)이 난징 임시 정부 참의원에 보낸 일본군의 폭행 사진

5. 난징군사법정에서의 다니 히사오(谷寿夫)에 대한 판결문

6. 난징군사법정에서 미국인 마이너 설 베이츠(Miner Searle Bates)의 증언

7. 난징대학살 생존자 리슈잉(李秀英)의 증언

8. 난징 임시정부 조사위원회의 조사표

9. 난징군사법정이 조사한 범죄의 증거

10. 난징대학살의 안건에 대한 시민의 상신서

11. 외국인 일기 ‘난징점령 - 목격자의 기술’


일본 정부는 중국의 신청이 세계기록유산의 정치적 이용이라고 항의했다. 등록 발표 후에 일본 정부는 “자료는 중국 측의 일방적인 주장에 근거하고 있으며 진정성과 완전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항의했다. 일본 외무성은 “중립 공평해야 할 국제기구로서 문제가 있으며, 매우 유감” “정치에 이용될 수 없도록 제도개혁을 요구하겠다”고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발표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등록 당시 세계에서 제2위의 거출률(拠出率, 미국이 지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일본이 실질적 제1위)인 유네스코 분담금 재검토를 시사했는데, 등록 이후 분담금 거출 동결 검토에 들어갔다. 


일본 자유민주당과 민주당, 유신의당(維新の党) 등 여야당도 등록을 비판했다. 마이니치(毎日)신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무형문화유산은 등록 심의가 공개되는데, 기록유산은 심의도 권고도 그 내용이 비공개이기 때문에 투명도가 요구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밖에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는 등록을 결정한 당시 사무총장인 이리나 보코바(Irina Georgieva Bokova)는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한 친중파이며, 이에 공정성에도 의문이 있다고 했다.



5 관련 작품에 대한 논쟁(関連作品に関する論争)


• 모토미야 히로시(本宮ひろ志)의 만화 ‘나라가 불탄다(国が燃える)’에서 난징사건에 관한 묘사가 문제가 되었다.


• 영국 기자 조지 호그(George Hogg)를 주인공으로 한 호주・중국・독일 합작 영화 ‘황시(The Children of Huang Shi)’가 2008년에 제작되었는데, 이 작품에서 호그는 난징사건을 보도한 기자로 그려졌다. 2015년 10월에는 시진핑 총서기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난징사건을 보도한 기자로서 조지 호그의 이름을 거론하며 일본을 비난했다. 그러나 산케이(産経)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영화 원작자의 각본을 담당한 제임스 맥마누스(James MacManus)는 “호그가 중국에 간 것은 1938년 2월이고, 난징에는 가지 않았다. 영화는 각색된 것으로,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또한 조지 호그는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지의 기자였다고 하지만, 해당 매체에서는 기명 기사도 재직 기록도 발견할 수 없었다.



6 논쟁에 대한 평가(論争に対する評価)


난징사건 논쟁에 대해 각 방면의 지식인들이 비판에 나섰다. 


심리학자 나카야마 오사무(中山治)는 “서로 비난만을 하고 있다.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불행히도 수습이 되지 않는다”고 논평했다. 


정치학자 후지와라 기이치(藤原帰一)는 난징사건 논쟁에 대해서 생산적인 형태를 취할 수가 없었다. 분쟁 당사자가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상대의 판단을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편견을 선반에 올려서는 상대의 편견을 노출하는 형태로 밖에는 이 토론의 진행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새로운 인식을 낳는다기보다는 편견의 강화 밖에 없다고 논평했다.


SF작가인 야마모토 히로시(山本浩司)는, 비록 “포로와 민간인 30만명의 살육”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본군은 포로나 편의병(게릴라병) 등 수만 명을 학살했으며 여기에는 억울한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논쟁은 이데올로기 논쟁이며 좌측에 경도된 논자들(30만명 학살 긍정파)은 중국인 희생자수를 많게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난징”, “학살”의 범위를 확대하려 하고, 우측에 경도된 논자들(30만명 학살 비판파)은 중국인 희생자수를 적게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또는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난징” “학살”의 범위를 좁히고 있다고 하면서, 논쟁의 당사자들은 역사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신조를 정당화하려고 할 뿐이라고 논평했다.



7 참고문헌(参考文献)


- ‘마츠이 이와네 대장 ‘진중일기’ 수정의 불가사의(「松井石根大将『陣中日記』改竄の怪」)’(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역사와 인물(「歴史と人物」)’ ‘1985년 겨울호’에 수록)


-(레쥬메(レジュメ))‘이른바 ’난징사건(いわゆる「南京事件」)’ 하라 다케시(原剛)(오사카교육대학(大阪教育大学) - 사회교육학연구(社会教育学研究) 제15호2009.1) 、소개(야마다 마사유키(山田正行)) 


-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사실은 이랬다 난징사건(『本当はこうだった南京事件』)’ ‘니혼토쇼간코카이(日本図書刊行会)’、1999년 12월。ISBN 978-4823105043。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난징사건(南京事件)’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이와나미신쇼(岩波新書)’、1997년。ISBN 4-00-430530-6。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난징사건논쟁사 – 일본인은 사실을 어떻게 알아 왔는가(南京事件論争史―日本人は史実をどう認識してきたか)’ 헤이본샤(平凡社) ‘헤이본샤신쇼(平凡社新書)’、2007년。ISBN 4-582-85403-6。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난징사건과 일본인-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南京事件と日本人―戦争の記憶をめぐるナショナリズムとグローバリズム』)’ ‘카시와쇼보(柏書房)’、2002年2月。ISBN 978-4760121984。


- 기타무라 미노루(北村稔) ‘’난징사건’의 탐구 – 그 실상을 찾아(『「南京事件」の探究―その実像をもとめて』)’, ‘분게이슌주(文藝春秋)’ ’분슌신쇼(文春新書)’、2001년 11월。ISBN 978-4166602070。


- 기타무라 미노루(北村稔) ‘’난징대학살’이란 무엇인가(『「南京大虐殺」とは何か』)’ 일본정책연구센터(日本政策研究センター) 2016년


-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 ‘’난징사건’의 총괄 – 학살부정의 논거(『南京事件の総括―虐殺否定の論拠』)’ 쇼가쿠칸분코(小学館文庫)、2007년。 초판(初版):켄코샤(謙光社) 1987년。재간(再刊):2001년、덴덴샤(展転社)。


- 일본회의 국제홍보위원회(日本会議国際広報委員会)、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다케모토 다다오(竹本忠雄) ‘재심 난징대학살 - 세계에 호소하는 일본의 원죄(『再審「南京大虐殺」―世界に訴える日本の冤罪』)’ 메이세이샤(明成社)、2000년 12월。ISBN 978-4944219056。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난징사건 – ‘학살’의 구조(南京事件―「虐殺」の構造)’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주코신쇼(中公新書)’、1986년。ISBN 4-12-100795-6。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난징사건 - ‘학살’의 구조 (증보판)(南京事件―「虐殺」の構造(増補版))’ 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주코신쇼(中公新書)’、2007년。ISBN 978-4-12-190795-0。


-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난징학살‘의 철저검증(「南京虐殺」の徹底検証)’ 텐덴샤(展転社)、1998년。ISBN 4-88656-153-5。


- 난징사건조사연구회(南京事件調査研究会)・편(編) ‘난징대학살부정론의 13가지 거짓말(南京大虐殺否定論13のウソ)’ 카시와쇼보(柏書房)、1999년。ISBN 978-4-7601-1784-0。


- 호라 도미오(洞富雄)、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편(編) ‘난징사건을 생각한다(『南京事件を考える』)’ 오츠기쇼텐(大月書店)、1987년 8월。ISBN 978-4272520152。


- 호라 도미오(洞富雄)、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편(編) ‘난징대학살 현장으로(『南京大虐殺の現場へ』)’ 아사히신분샤(朝日新聞社)、1988년 12월。ISBN 978-4022559623。


- 호라 도미오(洞富雄)、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편(編) ‘난징대학살에 대한 연구(『南京大虐殺の研究』)’ 반세이샤(晩聲社)、1992년 4월。ISBN 978-4891882235。


- 노부오 준페이(信夫淳平) ‘전시국제법 제요(제1권, 제2권)(『戦時国際法提要(第一巻、第二巻)』)’ 테루바야시도쇼텐(照林堂書店)、1943년。ASIN B000JB9X4O。


- 노부오 준페이(信夫淳平) ‘상하이전과 국제법(『上海戦と国際法』)’ 노부오 준페이(信夫淳平)・마루젠(丸善)、1932년。


- 사토 카즈오(佐藤和男) ‘난징사건과 전시국제법(「南京事件と戦時国際法」)’ ‘세이론(『正論』)’ 헤이세이(平成) 13년 3월호


- Ma, Xiaohua (馬暁華) (2007), “Constructing a National Memory of War:War museums in China,Japan,and the United States”, in Gallicchio, Marc, The Unpredictability of the Past: Memories of the Asia-Pacific War in U.S–East Asian Relations, Duke University Press, pp. 15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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