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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평> ‘방문’, ‘정의’의 또 다른 모습 ‘사랑’

작품과 배우의 힘을 보여준 ‘방문’


[김승근 뉴스파인더 대표] 나의 정의가 너에게도 정의인가 아닌가. 지금의 정의는 내일도 정의로울까 아닐까. 사회의 정의와 나의 정의는 같을까 다를까. 한때 대한민국 사회에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을 불러온 논쟁적 화두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스위스의 세계적인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을 원작으로 한 연극 ‘방문’은 이런 정의의 다중적이고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을 단 한순간도 눈 돌릴 틈 없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묵직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반 동안 숨 가쁘게 질주하며 관객의 흥미를 최고로 올려놓는다.

방문은 원작의 큰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간다. 경제적으로 몰락해가는 소도시 귈렌 시민들은 이곳 태생의 거부(巨富)인 노부인 클레어 자하나시안의 방문을 애타게 기다린다. 드디어 45년만에 고향을 방문한 그녀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귈렌 시민에게 1천억 기부를 약속한다. 단 그녀가 내건 조건이 성사됐을 때의 일이다. 자하나시안이 내건 조건은 귈렌 시민이자 소상인 알프레드 일의 목숨이다. 이런 노부인의 끔찍스런 요구 이면엔 아픈 추억이 있다.

그녀는 십대 시절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며 영원을 노래했던 연인 알프레드로부터 버림받았다. 사랑의 결실로 아이까지 잉태했지만 알프레드는 돌변해 이를 부정하고 클레어가 제기한 소송에서 증인까지 매수해 그녀를 차갑게 외면했다. 절망한 클레어는 귈렌 시민들의 냉대에 고향을 떠나게 되고, 아이를 잃고 매춘으로 연명하는 지옥과 같은 삶을 전전하다 억만 장자와 결혼하여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 클레어가 귈렌을 방문한 이유는 자신을 차갑게 버린 알프레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1천억 기부란 큰 제안에 기뻐하던 귈렌 시민들은 처음엔 노부인의 불의한 제안을 “인간성의 이름으로” 거부한다. 그때 클레어가 했던 말은 “기다리겠습니다” 이 단 한 마디 뿐이었다. 시간이 차츰 흐르고 시민들은 한 둘씩 변해간다. 알프레드의 상점을 들르던 이들은 빚을 져가며 고급 양주와 담배 등 상품들을 사기 시작했고, 이들의 소비 행태는 알프레드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기 시작한다. “인간성의 이름으로” 처음엔 자하나시안의 요구를 거절했던 시민들은 급기야 “정의의 이름으로” 알프레드의 목숨을 빼앗고, 알프레드는 마지막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클레어는 죽은 알프레드 시신을 관에 담아 떠나면서 귈렌 시민에게 약속했던 1천억 수표를 발행해준다.

어쩌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방문’ 속 클레어의 사랑은 이 연극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 주제다. 끝내 돈의 유혹 앞에 무너진 귈렌 시민들의 정의와 지나간 과오를 인정하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또 다른 의미의 정의를 실현한 알프레드, 자신을 버린 연인과 무너져 가는 낡은 귈렌 시의 비정, 천박함을 돈으로 되갚아 복수하는 클레어의 정의. 우리가 정의라 일컫는 정신이 가진 어둡고 모순적이며 다면적인 실체를 조명하면서도 시종일관 놓치지 않는 건 변함없는 사랑을 갈구한 클레어의 뜨거운 진심이다. 차갑고 냉정하며 잔인한 얼굴을 가진 노부인의 사랑 그 자체야말로 어쩌면 정의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젊고 어렸던 클레어에게 ‘검은 표범’과 같았던 알프레드는 45년이 지나 늙고 윤기 잃은 보잘 것 없는 몸뚱이가 되었어도 자하나시안 그녀에겐 여전히 ‘검은 표범’과 같은 존재다. 극의 마지막 부분, “당신은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죽은 알프레드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클레어가 나즈막히 내뱉는 말 속엔 영원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갈망이 배어져 나와 뭉클한 감동마저 준다. 시장, 교장 선생, 경찰 등 귈렌 시민들의 정의는 하나 같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일그러진 모습이다. 하지만 45년 전 내쫓기다시피 한 그 순간부터 떠나온 고향에 다시 돌아오길 꿈꾸고 검은 표범과 같았던 알프레드의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했던 클레어의 그 진심만큼만은 그녀의 변함없는 정의였던 것이다.

‘방문’은 돈과 욕망 앞에 무기력한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공동체와 개인, 죄와 속죄, 복수와 희생 등의 문제를 희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면서 한편으론 이렇듯 주인공을 통해 그 이면, 사랑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한 시간 반가량 이어지는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배우들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심리묘사를 탁월하게 연기해낸다. 특히 클레어와 알프레드 역의 두 남녀 배우(정아미/자하나시안, 손성호/알프레드 일)는 원작의 명성에 빛을 더하는 연기를 보여줬고, 귈렌 시 수많은 시민들을 무대 위에서 일인 다역을 해낸 세 명의 배우(권성훈/시장 등, 방지혁/경찰 등, 정우식/교장 등)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이 극이 관객과 교감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다만 작은 소극장 공연이라는 점에서 큰 변화 없는 무대와 소품이 다소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hemo@newsfin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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