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사이언스워치 (과학/의학)


배너


본 콘텐츠는 '과학중심의학연구원(http://www.i-sbm.org)'이 제공하는 공익콘텐츠입니다. 이번 글은 네이버 블로그 등을 통해 한의학을 비판해온 문화비평가이자 과의연 특보인 서범석님의 시리즈 한의학 비판 글인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입니다. 서범석님은 스타일리스트로서의 필치에 더해 한의학 문제를 바라보는 보다 풍부한 관점을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귀한 원고를 투고해주신 서범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전 글 :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5) : 뜸사랑 체험기


지난 2005년, 한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평소 고대중국의학에 대해 필자가 갖고 있던 문제 의식과 부합하는 내용이라 스크랩해둔 기억이 난다.


<침·뜸 자리 경혈 위치 한국·중국·일본 모두 달라>, 2005년 1월 10일, 중앙일보

한방에서 침 뜸 자리로 사용되는 경혈(經穴) 361곳 가운데 4분의 1 가량이 한∙중∙일3국 간에 조금씩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3국은 이에 따라 경혈 위치를 통일한 뒤 내년에 세계보건기구(WHO)의 공인을 받기로 했다.

10일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한∙중∙일 3국 전문가들이 WHO의 요청에 따라 지난해 3월부터 각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경혈 위치를 비교 조사한 결과 92군데가 서로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옛 문헌과의 대조 등 위치 확인 작업을 거쳐 지난해 10월 회의에서 92곳 중 77곳의 위치를 통일하기로 합의했다. 주로 중국에서 사용되는 경혈 위치가 표준으로 확정됐다. 나머지 경혈 15군데는 아직 대조 확인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위치 차이가 가장 큰 경혈은 목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듣는 사독(四瀆) 등 팔뚝 쪽에 있는 경혈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과 일본은 팔꿈치에서부터 손목까지를 10등분해 경혈 위치를 정한 데 반해 중국은 같은 부위를 12등분해 위치를 설명하고 있어 같은 이름의 경혈도 실제로는 서로 위치가 달라진다. 경혈은 중국에서 약 2000년 전 처음 사용됐으나 나라, 유파별로 위치와 그 개수가 서로 달랐다. WHO는 1989년 전문가 회의를 열어 경혈 361개의 명칭을 통일해 공인했으나 위치는 각국의 의견이 달라 통일하지 못했다.


이 기사가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것이, 만약 경혈이 불변하며 실재하는 것이었다면 지역적으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표준 경혈 위치에 관한 3국간 합의의 과정은 지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자신들 쪽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한다면 몇천 년동안 동일한 증상을 치료하면서 서로 다른 곳에 침을 놓았는데 똑같은 효과가 났다는 자가당착적 실토를 자기 입으로 내뱉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위를 수술한답시고 장을 절개했는데 위가 나았다는 말이니 이보다 더 제 발등을 찍는 고백은 없을 것이다.


최종 결론이 어떻게 났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관련 내용을 추적해보았다. 해보니, 그 이듬해인 2006년 10월에 극적 합의안이 도출된 것으로 나온다. ‘서태평양지역의 경혈 위치에 관한 WHO 표준(WHO STANDARD ACUPUNCTURE LOCATIONS IN THE WESTERN PACIFIC REGION)’라는 책자의 서문을 보면 그 합의 과정을 개략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은 WHO 서태평양지역사무국장인 ‘시게루 오미’가 작성한 것인데, 이를 번역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서문>

2500년 넘게, 한약과 침술은 서태평양지역에서 활용된 전통의학의 주요 축 중 하나였다. 그래서 WHO 서태평양지역사무국에서는 1985년과 1987년에 한약과 침술의 올바른 사용을 지원하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침술 분야의 표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목적 하에, 1981년 WHO 서태평양지역사무국에서는 ‘침술 명칭 표준화에 관한 조사위원회’를 설립하였고 이후 10년간의 노력 끝에 ‘국제 침술 명칭 표준화 제안서’에 관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1991년, WHO 본부에서는 ‘국제 침술 명칭 표준화 제안서’를 발행하였으며, WHO서태평양지역사무국에서는 ‘표준 침술 명칭’ 개정판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침술 사용국 간 약 1/4에 해당하는 경혈 자리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침 시술의 효용성 및 안전성에 관한 의심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경혈 자리에 대한 이러한 불일치가 언제 처음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근자에 이르러 교육, 연구, 임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경혈을 표준화하라는 국제적 요구가 증가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침술 사용국들은 (경혈 자리에 관해) 각자 자신만의 자주성 및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경혈 위치에 관한 국제 표준화는 극히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경혈 위치를 표준화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2003년 10월, WHO 서태평양지역사무국에서는 ‘경혈 위치 WHO 표준화 개발을 위한 비공식 회담’을 소집하게 되었다. 중국, 일본, 대한민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이 회담에 참석하였으며, 서태평양지역사무국에서는 그 후 10번의 회담을 추가로 소집하였다. 처음에는 다양한 참가자들의 의견을 조화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상호 이해와 신뢰가 구축되면서 전문가들은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부분의 경혈 위치에 관해 어떻게든 하나씩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국제적으로 통일된 경혈 위치를 도출해내는 데는 3년이 걸렸다.

최근 들어, 기능성자기공명영상기계(f-MRI)나 양전자방사단층촬영기계(PET) 등의 현대 과학 장비가 침술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연구들은 표준 경혈 위치를 발굴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회담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문헌 분석, 자신들의 임상 경험, 실제 측정 등을 결합하여 (경혈 위치를 결정하기 위한) 원칙과 방법을 개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들의 노력 및 그 결실로 경혈 위치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더욱 확장될 것이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전문가들이 기억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단지 경혈 위치를 표준화하였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전통 의학계의 국제적 학자들끼리 단체정신(team spirit)을 구축하였다는 사실로도 말이다.


이 서문을 읽고 가장 안타까운 점은 표준 경혈 위치가 제대로 된 반증과 검증에 의해서 구축된 것이 아니라 상호이해 및 신뢰로 구축된 단체정신(team spirit) 하에 도출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정보가 ‘WHO/WPRO 표준경혈위치’라는 제목으로 한글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2009년 9월의 일이다. 무려 3년 뒤의 일인데, 출판 후 모두가 구입하여 자신의 부정확한(!) 지식을 업데이트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에게 뜸을 뜨면서 뜸사랑 봉사자들끼리 경혈의 위치에 대해서 갑론을박할 필요는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모든 정보는 확산되는데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이와 비슷한 촌극이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할 것이다. 즉, 전 세계 고대중국의학 종사자들 상당수는 표준 경혈 위치 확립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뿐더러, 표준 위치 확립 전에 자신이 정신감염된 곳에 여전히 시술을 하고 있다. 한날 한시 한자리에 한국의 고대중국의학종사자들을 불러놓고 경혈 위치에 대한 검증을 실시하면 전부 엉뚱한 곳을 찍을 것이라는 말이다.

공교롭게도 역사상 최초로 경혈 위치가 표준화되었던 2006년, 지구 한 켠에서는 경혈의 존재를 확신했던 한 의학 논문이 주저자에 의해 철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 기사를 보자.


<‘침술효과 규명’, 저명 논문 자진 철회>, 2006년 11월 27일, 연합뉴스

한방 치료에 사용되는 침술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규명한 저명 논문이 ‘연구결과에 오류가 있다’는 이유로 최근 저자들에 의해 자진 철회(Retraction)된 것으로 확인됐다. ‘논문 베끼기’와 ‘조작’ 등으로 얼룩진 국내 과학계에서 저명 과학저널에 실린 논문을 저자가 ‘연구결과의 오류’를 들어 철회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의학계에서는 침술의 효과에 대한 논란이 재연될 수도 있을 전망이다.

27일 의학계에 따르면 문제의 논문은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 조장희 박사팀이 지난 98년 3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게재한 것. 이 논문은 특정 침점에 침을 놓으면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장희 박사가 미국 어바인 소재 캘리포니아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제1저자이자 교신저자로 참여한 이 논문은 당시 PNAS에 실린 뒤 “침술과 침점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한 첫 연구성과”라는 주목을 받으면서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됐었다.

이 논문에서 조 박사는 눈에 이상이 왔을 때 침을 놓는 위치인 발등 바깥쪽 침점들(BL60, BL65, BL66, BL67)을 자극하면 뇌의 시각피질(Visual cortex)이 빛으로 눈을 자극했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기능성자기공명장치(f-MRI)를 이용해 확인했었다. 이 연구성과는 침술이 뇌와 관계없이 질병에 대한 치료효과를 낸다는 그동안의 통념을 뒤엎은 데다 특정 침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는 점에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 논문은 침술의 효과를 언급하는 국내외 각종 논문에 빠지지 않고 인용돼 왔다.

하지만 조 박사는 이 논문이 나온 지 8년여 만인 지난 7월 논문을 공식 취소했다. 취소된 논문은 PNAS 7월호에 게재됐다. 논문의 취소 이유는 과거의 연구가 일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게 조 박사의 설명이다. 조 박사는 “당시 PNAS에 실린 논문은 특정 침점에 침을 놓아야만 치료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었지만 후속 연구에서 침점이 아닌 곳에 침을 놔도 비슷한 치료효과를 내는 것으로 확인돼 논문을 취소한 것”이라며 “침은 특정 침점에 놓아야만 효과를 내기 보다는 침의 강도와 주기, 빈번도 등에 의해 효과가 결정되는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조 박사팀은 PNAS에 실린 논문을 취소하는 대신 스웨덴에서 발간되는 신경학 전문지 '악타 뉴롤로지카(Acta Neurologica Scandinavica)' 6월호에 그동안의 침술 연구를 집대성한 논문을 새로 게재했다. 조 박사는 이 논문에서 '침을 침점(경혈)이 아닌 부위에 놓았을 때도 통증이 없어진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연구팀은 통증 환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침점이든 침점 외 대른 부위든 침을 놓기만 하면 뇌의 통증 관련 부위가(ACC)가 활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규명한 뇌영상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후략)



다음 글 :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7) : 경락 대뇌피질 기원론


저자 프로필 :

퇴몽사(退蒙士) 서범석

현재 모 고등학교에서 입학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사회기여활동으로서 과학중심의학연구원의 ‘홍보특별보좌관’도 겸임하고 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성균관-조지타운 대학교 TESOL 과정을 수료했다. 20년 넘게 중증 아토피로 고생하며 여러 대체 의학을 접했지만, 그 허상에 눈을 뜬 후 사이비 의‧과학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몽매주의’를 퇴치하는 번역 및 집필 작업에 뛰어들었다.

저서: Q&A TOEIC Voca, 외국어영역 CSI(기본), 외국어영역 CSI(유형), 외국어영역 CSI(장문독해)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시리즈 / 서범석 과학중심의학연구원 특보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1) : 왜 '한의학'을 '고대중국의학'이라 불러야 옳은가?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2) : 도올 조우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3) : 고대의학들의 유사점과 차이점 ①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4) : 고대의학들의 유사점과 차이점 ②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5) : 뜸사랑 체험기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6) : 세계 보건기구(WHO)의 경혈 위치 표준화 작업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7) : 경락 대뇌피질 기원론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8) : 컨디셔닝, 플라시보, 노시보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9) : 고대중국문명의 플라시보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10) : 고대중국의학의 현대적 적응

고대중국의학 몽매주의 (11) : 고대중국의학의 효과와 한계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