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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사례를 든다. 나라가 망하던 시절, 나라를 위해 싸운 가장 전라도 사람다운 민초(民草)를 들으라면, 전북 진안 마이산에 120개의 돌탑을 쌓은 이갑용(李甲用) 처사일 것이다.

전북 임실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이갑용(李甲用)은 25세 때인 1885년(고종 25)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을 전해 듣고 입산하여 마이산 은수사(銀水寺)에 머물면서 솔잎 등을 생식하며 수도하던 중,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0년 동안에 120여 개에 달하는 여러 형태의 탑을 쌓았다고 하는 이갑용은 글자 한 자 모르는, 책이라고는 한번 펼쳐본 적도 없는 그런 농부였다.

그러나 그는 10여년을 아무 말 없이 뜻하는 바에 몸을 바쳤다. 탑을 쌓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작업을 비웃거나 허투루 보았으나, 어느덧 탑이 하나둘 완성되어 가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탑 전(前)에 시물(施物)을 바치고 갔다. 계속 돈이든 곡식이든 베든 시물(施物)은 모아져 갔고, 이갑용 처사는 그 시물로 송아지를 사서 길렀다. 어느덧 송아지가 커서 황소가 되면, 그 황소는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사람들이 궁금하여 물어보았으나, 이갑용 처사는 그저 웃기만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상해임시 정부나 독립군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은수사를 감시하던 일경(日警)의 눈이 두려워, 돈을 만들어 건네주면 잡힐 것 같아, 은수사를 찾아온 독립군에게 소고삐를 들려 보내준 것이었다. 독립군은 그 소를 끌고 가 안전한 곳에서 팔아 돈으로 만들어 상해로 갔다고 하였으니, 간악한 일본경찰들도 설마 소가 독립운동 자금이 될 줄은 모르고 무사히 통과시켰다는 것이다.

탑을 만들어 시물(施物)과 사람을 모으고, 그 시물로 송아지를 사서 길러 독립운동에 이바지 한 농부 이갑용. 비록 배운 바 없어 글자 하나 아는 것 없는 흔한 농부였으나, 그러나 농부였기에 가능한 독립운동을 선택한 것이었다. 탑을 쌓고 소를 길러서 독립운동을 하는 일은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토해내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피맺힌 외침이 들려온다

“사내답게 칼 한 휘두르지 못하고, 거적때기 깔아놓고 인의(仁義)를 외치다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았구나.”

문약한 선비들의 허세와 위선이 나라를 망쳐놓았다면, 참으로 갸륵하고 어여쁜 농군 출신 이갑용. 명성황후의 살해사건을 지켜보던 이 전라도 촌인(村人)이 일으킨 의로운 일을 보라.

훗날 하늘은 이 농부에게 민족의 영광을 예견하는 언어를 전해준다. 필자(筆者) 역시 이갑용 처사가 썼다는 예언서를 자료로 본 적이 있다. 하늘은 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우리 백의민족에게 영광(榮光)과 융성(隆盛)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수고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 농부에게 감사와 위로의 뜻으로 전하여 주셨던 것이다.

동학혁명 당시 손화중 접주가 선운사 마애석불 배꼽에서 발견했다는 예언서, 그리고 이갑용 처사를 통해 기록한 하늘의 예언. 이에 이르러 필자(筆者)는 참으로 행복한 마음 누를 길 없다. 예언은 실현되어 우리 민족은 반드시 위대한 민족으로 웅비할 것이고, 또한 반드시 광개토대왕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다.

원모심려(遠謀深慮)한 계책은 진정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갑용, 이런 민초들이 오늘날 진정한 호남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아래는 이갑용 처사를 기리며 쓴 시임.)



무더기무더기 돌은 서로를 받치고

하늘을 향하여 오른다

탑......

빛을 꿈꾸는 村夫(촌부)의 손에서

올려져

돌로 태어난 삶이

침묵 속에서 일어나

님이 되고 나라가 되고

마지막

기도가 되어

바람 속에 서 있다.

그 해

國運(국운)이 風前燈火(풍전등화)처럼 위태하여

朝廷(조정)은 왜구의 발밑에 엎드리고

황후의 시신마저 불태워지는 참극

이 슬픔 이 분노를

僻谷(벽곡)에서 듣고

구름 낀 볕뉘 하나 없을지라도

강토를 찾기 위해 마이산으로 간다.

白頭(백두)에서 흘러온 호남정맥의 푸른 핏줄이

飛翔(비상)을 꿈꾸며, 두 귀만 보이는 곳

은수사 뜨락에서 태조를 맞이하였으나

500년 창업의 기틀이 빗돌로 서서

風化(풍화) 속에 스러지는데

다시 이을 光榮(광영)의 역사를 짓기 위해

돌을 모으다.

솔잎 生食(생식) 지극한 積功(적공)이여

몸은 거룩한 정성으로 가두고

돌 하나하나 叩頭百拜(고두백배)하는 마음

天地陰陽(천지음양)을 따르고

八鎭圖法(팔진도법)을 펼치니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탑이여.

왜적을 향하여 장수읍을 향해 나아가던

최덕일 이석용의 의병군

피를 뿌리던

붉은 忠情(충정)이 봄안개 속에 마이산 문필봉을

에울 때

우리는 백성의 공양물을 모아

소를 길렀노라.

은수사 내당에 찾아 깃들던 손을 맞이하여

소고삐를 들려

만주로 상해로 보내노니,

애먹이 송아지를 기르던 어린 새싹들의

뜻도 함께 따라가던 고갯길

가을 무심한 霜葉(상엽)마저 붉었으니

한울님 약속하신

그 날은 올 것이라네.

그리하여 두 줄기 希願(희원)의 눈물

西(서)로 흐르는 눈물은 부여 錦江(금강)에 닿고

남으로 남으로 가는 눈물 섬진강이여.

노령산맥을 베고 누워

억만년 겨레의 노래를 듣는다.

탑이여.

처사 이갑용의 숨결이여.

張三李四(장삼이사)의 손으로 흔한 목숨으로 주워 올려져

돌은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나고

천지 오행탑 월궁 월광탑 무더기무더기

탑은 구름을 이고 하늘에 오른다.

靑苔(청태) 두터이 몸을 입히니

벌써 지난 해 백년이런가.

蘭香(난향) 번져오는

鎔巖同文(용암동문)에서

멀리 가는 나그네 되어

굽어진 산길을 보니

비구름 그친 뒤

절절히 피어있는 진달래꽃 몇 조각

눈 안에 떨어져 아파 오는데

금당사 곁 강산은

그냥 서서

말이 없구나.

* 詩作(시작)노트

마이산에 가면 이갑용 처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배움 하나 없는 農人(농인)일지라도 나라가 국난에 휩쓸리자 마이산으로 가서 탑을 쌓았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탑에 치성을 드리러 오면서 가져온 공양물을 모아, 송아지를 사서 기르다 그 송아지가 커서 어른 소가 되면, 논밭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변장하고 은수사로 찾아온 독립군 손에 넘기더랍니다. 손에 소고삐를 쥐고 독립군은 고개를 넘어 상해로 가고, 이처사는 다시 돌을 주워 탑을 쌓더랍니다.

그 후 백여 년이 지난 오늘 그 말없는 탑을 보면서, 위인이 가고 없는 자리에 솟아나는 잡초를 보면서, 그 이름 없는 민초의 정성으로 이 나라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 그 외 전라도의 영광을 이루었던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의병장들이 있습니다. 조선 말기 쌍산의소(雙山義所)의 의병장이었던 행사 양회일을 비롯한 수많은 호남 출신 의병들은 국난 앞에서 나라에 대한 원망을 잊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랑과 지적을 아끼지 않고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올리며 ‘전라도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를 마칩니다. 글/데일리안광주전라 정재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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