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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디워'팬들은 당당히 자기 표현하는 중"

평론가들, 애국코드의 촌스러움에 혐오감 드러내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전북대 신방과 강준만 교수가 “디워'에 미학적 잣대를 들이대 평가하는 건 의미있는 일이긴 하되, 그 결과를 강하게 밀어 붙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라며 최근의 ‘디워’ 논쟁을 꼬집었다.

그는 그의 제자들과 만드는 지역 인터넷신문 선샤인뉴스에 ‘디워’ 관련 글을 기고했다. 강교수가 주목하는 점은 전문평론가들과 집단대중들 간의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이다.
“비록 경제적으론 풍족하지 못할망정 텍스트 분석과 해석을 위해 오랜 세월 문화자본을 투자하고 획득해온 평론가 집단과 유쾌한 여가 선용이나 시간 때우기를 위해 영화를 소비하는 일반 관객 집단이 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게다”

그로 인해 전문평론가들은 애국코드에 대해 알게 모르게 편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교수는 이에 대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사회에선 ‘애국 코드' 아닌 걸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 아닌가? 왜 갑자기 ‘디워'의 ‘애국 코드'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평론가들은 자신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실은 ‘애국 코드' 포장술의 촌스러움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그는 ‘디워’의 광팬들은 단순히 흉내내기의 키치가 아닌 당당히 자기 주장을 하는 캠프라는 점을 지적하며, 이들 스스로의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고 주장하며 글을 끝마쳤다.

“디워' 스토리의 촌스러움은 영구를 사랑하면서 커온 이른바 ‘영구 세대'에겐 캠프지 키치가 아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그런 감수성을 보호받고 싶어 한다. 그들은 영구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추억을 위해 싸우는 건지도 모른다. 새로운 유형의 ‘취향 전쟁'이다. 싸우더라도 부디 행복하게 싸우자. “영구 있니? 영구 없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디워’ 관련 글은 전문 평론가와 집단대중 간의 간극을 주목했다는 점에서, 집단대중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진중권의 글과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진중권씨는 최근 서울신문의 기고글을 통해, ‘디워’에 우호적인 평을 내리고 있는 다른 대중문화평론가와 시인 김정란씨 등에 대해서 인신공격형 맹비난을 퍼부어, ‘디워’ 논란은 지식계 전반으로 번질 전망이다.

다음은 강준만 교수의 기고글 전문

심형래의 ‘디워'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지켜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이야기가 하나 있다. 『새천년 emerge』라는 월간지 2001년 1월호에 실린 이야기다. 일본의 소프트화 경제센터 이사장인 쿠사카 기민토와 평론가인 이시카와 요시미가 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 실력에 대해 나눈 대담이다. 이들이 스스로 잘난 척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무언가 생각케 하는 날카로운 점이 있다. 그 대담의 일부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이시카와: 중국은 아직 CG기술이 미숙해서 1장짜리 만화 같은 게 많지만 예를 들어 한국은 할리우드에서 공부한 애니메 크리에이터나 시나리오 작가들이 열심히 질 높은 만화를 만들어 내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역시 일본에는 적수가 아니라고 생각되는군요. 일본만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일본인이 엉터리이기 때문이지요.
쿠사카: 나도 동감입니다.

이시카와: 한국인은 성실하거든요. 술을 마실 때도 진지하게 토론을 하니까 눈에 핏발이 서지요(웃음). 한편 일본문화가 엉터리라는 것은 만화에 꼭 들어맞아요. 한국처럼 순수 유교라고 할까요, 유교의 종주국이 이웃에 있는데도 종가인 중국보다 순화된 유교를 만드는 것으로 차별화를 하려고 한 나라는 역시 국민성이 성실해서 일본처럼 장난치는 만화를 만들 수가 없지요.

쿠사카: 그렇지만 바둑은 강하지요(웃음). 성실하게 두니까요.

이시카와: 미국인도 그래요. 장난을 치기도 하고 유머도 있지만 근본은 청교도의 나라지요. 때로는 질릴 정도로 진지해서 문화에 매뉴얼화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미국 만화는 일본만큼 뛰어나지 못하지요. 웃음을 만드는 법 등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그리려고 들거든요. 일본 만화의 주인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늘을 날아요. 그 이유는 필요없지요.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한국인들의 ‘과잉 성실' 또는 ‘과잉 진지함'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런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양쪽 사이가 영 좋지 않다. 정치판의 이른바 ‘빠'들은 ‘과잉 성실'의 표본이다. ‘빠' 아닌 사람들은 그들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그들의 ‘과잉 성실' 행태에 짜증과 염증을 낸다. 알맹이가 문제가 아니라 스타일이 문제라는 뜻이다.

“일본만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일본인이 엉터리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면, 대중문화 현상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에 이성·논리 일변도의 사고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도 공감할 수 있으리라. ‘디워'는 만화가 아니잖느냐는 반론은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 있다.

‘디워'에 미학적 잣대를 들이대 평가하는 건 의미있는 일이긴 하되, 그 결과를 강하게 밀어 붙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 물론 그렇게 하는 건 자유지만, 그런 시도에 대한 비판도 자유다. 서로 주고받는 비판 속에 명랑사회 꽃핀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정치에 흥미를 잃은 채 논쟁에 굶주린 대중에게 그럴듯한 논쟁을 제공하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디워' 논쟁은 한국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선샤인뉴스에서 ‘굿뉴스' 1위로 올려 마땅한 건수다.

논쟁이 격렬하다 못해 인신공격으로까지 흐른다는 게 문제라곤 하지만, 여태까지 인터넷 논쟁 중에 그렇지 않은 게 하나라도 있었는지 묻고 싶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싸우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아니다. 그게 아니다. 싸우더라도 좀더 행복하게(?) 싸우기 위해 알건 알고 싸우자는 뜻이다.

‘디워' 논쟁은 ‘취향 전쟁'이다. 그래서 ‘절대' 답이 나올 수 없게 돼 있다. 자기 글을 자기가 인용하는 건 욕 먹을 소지가 다분하지만, 욕 먹더라도 내가 어디 다른 곳에 썼던 글의 일부를 소개하련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에 관한 글이다. 다음과 같다.

부르디외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 반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음악에 관한 담론은 가장 인기 있는 지적 과시의 기회 가운데 하나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음악에 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교양의 폭과 해박성을 표현하는 훌륭한 기회인데, 그는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기호만큼 그 사람의 ‘계급'을 확인시켜 주는 것도 없으며, 또한 그것만큼 확실한 분류 기준도 없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만 하다. 한 개인의 기호 또는 취향이 그토록 많은 것을 폭로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미적으로 편협하다는 것은 가공할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기호는 혐오와 분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다른 삶의 양식에 대한 혐오는 계급 사이의 가장 두터운 장벽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우리가 예술작품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미학적 느낌의 자발적 결과가 아니라, 교육과정의 사회적 산물이다. 거기서 미적 판단은 계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디워' 논쟁은 ‘계급 전쟁'은 아니다. 그러나 ‘계급'을 넓게 해석해 ‘문화자본' 중심으로 보자면 ‘문화자본'으로서의 ‘계급 전쟁'인 건 분명하다. 비록 경제적으론 풍족하지 못할망정 텍스트 분석과 해석을 위해 오랜 세월 문화자본을 투자하고 획득해온 평론가 집단과 유쾌한 여가 선용이나 시간 때우기를 위해 영화를 소비하는 일반 관객 집단이 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게다. 그 점을 감안하자면, 논쟁의 양쪽 모두 다 옳다. 다양성 존중의 차원에서 서로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각자 다른 견해를 제출해도 좋을 정도로 다들 나름대로의 탄탄한 논리적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의 알맹이가 아니라 감정의 수사학으로 얼룩진 스타일이다. 양쪽 모두 상대편의 스타일에 짜증과 분노를 발산하는 것이다. 이른바 ‘애국 코드'만 해도 그렇다. 한국사회에선 ‘애국 코드' 아닌 걸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 아닌가? 왜 갑자기 ‘디워'의 ‘애국 코드'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평론가들은 자신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실은 ‘애국 코드' 포장술의 촌스러움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논쟁에 뛰어든 관객 집단은 그 촌스러움을 ‘키치'로 보는 게 아니라 ‘캠프'로 본다. 캠프는 촌스럽다는 점에서는 키치와 비슷하지만 어설픈 흉내내기가 아니라 당당한 자기표현이라는 점에서 키치와 다르다. 그런 자의식이 없는 아저씨·아줌마가 트레이닝복을 평상복으로 입으면 촌스러움의 극치지만, 이효리가 입으면 불티나게 유행되는 ‘이효리 스타일'이 된다.

‘디워' 스토리의 촌스러움은 영구를 사랑하면서 커온 이른바 ‘영구 세대'에겐 캠프지 키치가 아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그런 감수성을 보호받고 싶어 한다. 그들은 영구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추억을 위해 싸우는 건지도 모른다. 새로운 유형의 ‘취향 전쟁'이다. 싸우더라도 부디 행복하게 싸우자. “영구 있니? 영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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