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자유통일강대국코리아 (역사/외교)


배너

[군함도논란④] 군함도 주민회 명예회장이 검증한 25가지 낭설

‘<사진기록> 지쿠호・군함도 조선인 강제연행, 그후(<写真記録> 筑豊・軍艦島 朝鮮人強制連行、その後)’의 오류 지적 (1)



일본의 논픽션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林えいだい)는 2010년에 군함도(정식명칭 하시마섬) 문제를 다룬 책  ‘<사진기록> 지쿠호・군함도 조선인 강제연행, 그후(<写真記録> 筑豊・軍艦島 朝鮮人強制連行、その後)’를 펴내 한국을 비롯,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EBS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이 저작물의 주된 골자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과 중국인 노무동원 노동자들이 고된 노동과 차별에 시달리며 노예와 같은 상태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 십년간 군함도에서 살았던 일본인 주민인 마츠모토 사카에(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 명예회장) 씨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일본 산업유산국민회의(産業遺産国民会議, https://www.gunkanjima-truth.com/l/ko-KR/index.html 이하 산유국)와의 인터뷰에서 ‘<사진기록> 지쿠호・군함도 조선인 강제연행, 그후’ 세부 내용을 하나씩 반박했다.  (해당영상 바로가기 : “<사진기록>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를 검증한다1)


1. -유골에 대해서-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강제연행된 남성의 증언(무기명) - “동료가 사고로 죽고 화장이 끝나자, 감시하러 온 노무 담당자의 명령으로 유골을 삽으로 퍼서, 폐갱에 던져버렸다.” (‘<사진기록> 지쿠호・군함도 조선인 강제연행, 그후’ 158 페이지. 이하 페이지만 명기)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인수인이 없는 유골이 절의 본당 선반에 가득했어요. 화장을 하면 유골이 있잖아요. 유골함에 가득 담아도 뼈가 다 안들어가요. 그 뼈를 처리해야하는데 그래서 폐갱에다가... 그 책에도 쓰여있지만 10미터 아래까지 물이 고여 있었어요. 그 수갱에 남은 뼈라든지 화장하고 남은 것들을 거기에 던져 버리기는 했어요. 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체격이 좋았어요. 유골함에 유골을 다 담을수는 없었어요.”


2. -재향군인회에 대해서- 

증언자 불명(하야시 에이다이씨에 의한 기술) - “전쟁 중에는 도주자를 감시하기 위해, 재향군인회의 회원들이 총을 들고 경비를 했다고 한다.” (158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20명~ 30명도 없어요. 군대를 다녀오고 하시마에 있는 근로과에서 근무를 한 사람이 몇 명 있긴 했어요. 하지만 재향군인회에서 군사 교련이라는 걸 광장에서 실시하는 모습은 본 적도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총을 들고 걸어다니는 모습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3. -1945년의 섬 인구에 대해서- 

증언자 불명(하야시 에이다이씨에 의한 기술) - “하시마 탄광의 노동자수는, 광산 사업 확장과 함께 증가하면서 전성기였던 1945년에는 약 5300명까지 늘어나, 섬에서 넘쳐날 정도였다.” (158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1960년쯤에 딱 5300명이 최고의 인구밀도예요. 그게 1960년 쯤이었어요. 그 전에 5천 몇 백명이라고 하는데 수용할 수 있는 집이 없었어요.”


4. -옥상에서의 재배에 대해서- 

증언자 불명(하야시 에이다이씨에 의한 기술) - “전쟁 중에 식량난이 심할 때는 아파트 옥상에서 밭벼와 야채를 재배했다.” (160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옥상에 화단을 만들거나 뭔가 했다는 것은 1960년 쯤이었을 거예요. 옥상이니까 물도 별로 없고 시골의 논처럼 물을 댈 수는 없으니까요.” 

5. -영화관의 명칭에 대해서- 

증언자 불명(하야시 에이다이씨에 의한 기술) - “영화관(쇼와관)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전쟁 중에는 그 건물을 협화(協和) 회관이라고 불렀다.” (160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쇼와관이에요. 협회회관은 다카시마예요. 다카시마에는 협화회관이라는 게 있었어요.”

6. -아사가오마루에 대해서- 

증언자 불명(하야시 에이다이씨에 의한 기술) - “그들의 출신지는 하북성 183명, 산동성 20명, 운남성 1명, 총 204명이었다. 오무라연대가 총을 들고 경비를 했는데, 정연한 모습으로 아사가오마루에서 하선했다고 한다.” (162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아사가오마루라는 건 말하자면 하시마에 물을 운반하는 배예요. 주된 목적은 그래요. 하지만 유우가오마루가 정기점검 때문에 그 때 아사가오마루가 승선을 대행하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유우가오마루가 부두에 들어온 경우에만 그랬어요. 그 외에는 북한에 왔다갔다했다는 무라사메마루나 그런 배들이 유우가오마루의 대행을 했어요. 그러니까 아사가오마루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지는 않았어요. 물운반선이니까요.”


7. -폭동 진압에 대해서- 

사할린 전환 갱도 강도시 씨의 증언 - “채탄 중에 일본인 지도원한테 폭행을 당한 중국인 2명이 들고 있었던 삽으로 반격하여 크게 다치게 한 사건도 일어났다. 중국인에게만 그 책임을 물어, 노무 사무소에 끌고가서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폭동이 일어나, 전원이 입갱을 거부하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탄광측은 나가사키현에 대해서 군대 출동을 요청했다. 파병된 오무라 연대의 일개소대는 무력으로 진압, 탄광측은 두명의 중국인을 북해도로 송환했다. 하시마 탄광의 폭동진압을 위해 출동한 오무라 연대와 격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162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오무라 연대가 오기 저너에 하시마의 주재소에서 나가사키현 경찰본부에서 어딘가 연락을 했겠지요. 군대를 부른다니... 민간 소동인데. 상상도 못하는 일이죠. 오무라에서 일개소대를 보낸다니요.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전쟁터에도 군인이 부족한데 하시마 탄광의 포로 폭동에 총검을 들고 진압하러 온다는건 정말 말도 안돼요. 무슨 만화도 아니고.”




8. -다이너마이트의 취급에 대해서- 


사할린 전환 갱도 강도시 씨의 증언 - “갱내채탄에는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굴진 중에 한통 훔치는 것은 간단하다. 메탄가스가 발생한 갱내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는 것도 간단했다” (162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한국인에게 발파를 맡기는 일은 없었어요. 그것은 자격을 가진 일본 사람이 해요. 발파는 위험물을 취급하는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스위치도 핸들도 항상 허리에 차고 있어요. 그 담당자가 발파를 해요. 숙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안되니까요. 국가시험으로 발파취급 시험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아니면 핸들을 잡을 수도 없어요. 굴진하고 발파하죠. 삭공하고... 몇 호의 다이너마이트를, 몇 통이라든지 써있어요. ‘서사방’이라고하는 갱내 사무소에서 처음에 다이너마이트를 받고 전부 기록하게 돼 있어요. 그걸 굴진현장에서 충전을 하는 거죠. 어제 오늘 들어온 한국인, 중국인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킬리 없죠. 왜 담당자가 해야 하냐면 굴진갱도에 바람을 보내는 풍관이라는게 있는데, 그런 것들도 다 파악해야 되니까요. 발파는 순서대로 진행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기술적인 것과 법적허가가 필요해요. 그런 일들은 한국인이라든지 중국인에게 허가할 수 없어요. 다이너마이트 취급법상 그래요.” 


9. -총 소지에 대해서- 

증언자 불명(하야시 에이다이씨에 의한 기술) - “중국인에게는 특히나 엄격했다. 조선인이 말을 걸면, 총을 든 노무 담당자가 와서 ‘접근하지마라’라며 양측을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162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현장에서 뭐라고 해야 할까요. 외근 간부예요. 그런 사람들은 갱내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 작업현장에 외근간부가 들어간다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총을 들고 올 수 있는 사람은 오무라 연대 군인밖에 없어요. 무엇보다 하시마에서 그렇게 마음대로 오무라 연대의 군인을 요청할 수도 없어요.” 


10. -정전에 대해서- 

증언자 불명(하야시 에이다이씨에 의한 기술) -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고, 하시마탄광의 발전소가 폭격을 당해, 하시마 갱내가 정전이 되었다. 펌프가 멈추고, 갱내는 침수되었다. 중국인이 의도적으로 전원을 끈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전원이 헌병의 조사를 받았다.”(162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중국인들이 전원을 끄거나 뭔가를 할 수가 없어요. 전원은 후타고에만 있으니까요. 하시마, 나카노시마, 다카시마가 있잖아요. 다카시마의 앞 쪽에 후타고 발전소가 있고, 다카시마, 하시마에 송전했다고. 그곳이 폭격을 맞아서 정전이 된거지요. 발전소가 폭격으로 당한 거니까요.” 

11. -유곽과 도박에 대해서- 

“일본노무관리연지 - ”‘미쓰비시 하시마 노동상황’에서 “회사측이 매춘부를 고용해, 여러 곳에 매춘업소를 차려, 더욱이 도박까지 장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64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그런 유곽같은 곳은 혼다라는 곳하고 모리모토, 그곳은 일본인이 경영했어요. 요시다. 그곳이 말하자면 조선인이 경영한 유곽이에요.”


1938년 11월 26일자 나가사키일일신문 ‘하시마의 조선인 12명이 도박으로 검거’ 기사 - “다이쇼부터 쇼와에 걸쳐 하시마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어 전쟁 중에 회사측이 도박을 권장한 일은 없었다.”



12. -다카시마 노동환경의 개선 시점에 대해서- 

나가사키일일신문 기자 사쿠라이 킨사쿠 씨의 담화 - “1941년(쇼와 16)의 나가사키일일신문 보도에 히로시마 현 출신인 사쿠라이 킨사쿠 담화가 실렸다. ‘다카시마의 제재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 ’탈주자‘라고 하는데, 감시원의 눈을 피해 술통을 몸에 달고 헤엄쳐서 도망갔어요. 그 뒤 하시마로 옮긴지 18년이 지났지만, 당시 하시마도 감방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하루 피비린내 나는 생활이었어요.’라고 증언하고 있다.”(164 페이지)


사쿠라이 킨사쿠의 담화 실제의 기사(1941년 나가사키일일신문에서)- “다카시마의 제재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 ’탈주자‘라고 하는데, 감시원의 눈을 피해 술통을 몸에 달고 헤엄쳐서 도망갔어요. 그 뒤 하시마로 옮긴지 18년이 지났지만, 당시 하시마도 감방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하루 피비린내 나는 생활이었어요. 회사가 노동자의 오락시설에 신경을 써서 오늘날의 하시마가 된 것은 20년 정도 전부터예요.”(즉, 감방이라고 불리던 시절은 1921년 이전이고, 1941년에는 개선되었다는 것)


13. -탈주한 사람의 체포에 대해서- 

증언자 불명(하야시 에이다이씨에 의한 기술) - “경찰은 감시를 겸해 많은 순경을 노모 반도에 배치했다. 순경은 탈주한 사람을 범죄자로 간주하고 체포한 것이다.” (164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그렇게 바다를 건너다가 죽었다는 사람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갱내에 사용하는 소나무인지 전나무를 먼저 바다에 던져요. 그 나무를 묶어서 다카하마라는 건너 편 마을까지 헤엄쳐 간다고. 바닷물의 흐름을 잘 몰라서 익사했다고. 그런 사람의 시체가 다카하마라는 마을 바닷가에 떠내려와요. 그건 있어요. 마을 사람들 말이에요. 한편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잘 참았다고 생각해요. 자신들의 소중한 농작물인데 작업용 신발도 배급받던 시절에 그런 것을 다 훔쳐가요. 도망자들은 알몸으로 건너왔으니까요. 거기에 있는 농가 사람들이 하루종일 일하고 빨래를 말리면 그것을 훔쳐서 걸쳐 입고 도망갔어요. 그러니까 정말 다카하마 사람들은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농작물인 토마토도 훔쳐갔고, 모처럼 하시마에 가서 시장에 팔려고 한 상품도 있었겠지요. 그런 상품들을 그놈들이 훔쳐요. 그건 절도에요.”


14. -물 운반에 대해서- 

조선인 탄갱부의 처 강시점 씨의 증언 - “당시 음료수와 공동 목욕탕 물은 탄광의 급수선이 건너편에 있는 도이노쿠비에서 매일 실어왔다. 강 씨는 아래층에 있는 조수조에서 7층까지 가파른 계단을 땀을 흘리면서 물을 날랐다. 취사장의 물통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7층까지 5, 6번 오르내려야 했고, 그 고생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주부들도 힘들어 하던 계단으로 물을 날랐던 강 씨는 ‘지옥 언덕’이라고 부른다. 폐쇄하고 폐허가 된 아파트 방에 물독이 남아 있는 것은 당시의 흔적이다.” (165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수원지는 도이노쿠비가 아니라 다메이시라는 곳이에요. 물은 각 층에 수도꼭지랄까. 회사측에서 각층마다 물당번을 두고 관리하고 있었어요. 1층부터 7층까지 옮기다니, 나는 본 적도 없어요. 각층마다 수전이 있었으니까요. 아침마다 1층부터 7층까지 물을 옮기는 바보는 없었어요. 말도 안되죠. 다음 날 어깨가 안움직여요. 나중엔 해저수도가 설치되고 수도꼭지에서 바로 물을 쓰게 됐어요. 그때까지는 각 층에 있는 급수전에 당번이 있었지요. 한 번에 1전5리였을까요. 구매회라는 곳에서 티켓을 사고 그것을 주면 자신의 물독이라던지 우리집 근처는 취사장 밑이 콘크리트여서 꽤 많이 담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15. -세탁물 건조장에 대해서- 

조선인 탄갱부의 처 강시점 씨의 증언 - “아파트 최하층의 주택은 빨래가 마르지 않아, 주부들은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 물보라 때문에, 빨래는 아파트의 옥상에서만 널 수 있었다.”(165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세탁물을 옥상까지 가져가서 말린다는 것은... 예를 들어 그 사람이 9층에 살아도 옥상까지 가져가서 말리는 짓은 안해요. 왜냐하면 아파트에는 복도가 있으니까요. 복도에 대나무 장대를 걸어서 비가 오는 날은 거기서 말려요. 복도에요.”


16. -가정 연료에 대해서- 

조선인 탄갱부의 처 강시점 씨의 증언 - “갱내에서 석탄을 캐도 무단으로 집으로 가져간다고 하면, 갱구 검사에서 조입 담당자한테 빼앗겼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연료는 다카하마에서 팔러오는 장작을 샀다. 그 중에 옻나무의 가지가 섞여있었다. 수지가 피부에 묻으면 전신이 빨갛게 부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165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하시마에서 갱내에 낡아진 목재가 있지요. 구부러진 목재라든지 여러 가지 목재가 있는데, 매일 같이 석탄 운반차를 타고 나옵니다. 그것을 저목장 한쪽에서 사카모토라는 나이 든 부부입니다. 그 부부가 적당한 길이로 자른 장작을 하시마 구매회에서 티켓을 사서 그 장작을 사는 거예요. 다카하마에서 연료를 가지고 왔다는건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하시마에는 옻나무라는 건 들어온 적도 본 적도 없어요. 다카하마에서 가지고 온다는 건, 그 전에 하시마에서 좋은 갱목을 잘라서 구매회에서 돈을 내면 싸게 연료의 장작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런 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17. -갱내의 음료수에 대해서- 

조선인 탄갱부의 처 강시점 씨의 증언 - “하시마 탄광은 해저 깊은 곳까지 채탄하러 가는데, 고온으로 인해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물통을 두 개 들고가도 목이 타고 순식간에 다 마셔버리게 된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일본인 갱부가 마음대로 마셔 버리는 일도 있었다. 항의하면, ‘조선인은 물 마시는 것도 안돼. 갱내 바닥 물이라도 퍼 마셔’라며 태연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166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물을 운반하는 차가 있었어요. 거기에 물을 한 가득 담아서 갱내로 들어가요. 갱내에 물을 받는 곳이 막장마다 반드시 있어요. 그 근처에 물 운반차를 준비해 둬요.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물을 이용하고. 물은 안 가져가도 거기에 가면 돼요. 또 목이 마르면 친한 사람에게는 남은 물을 마셔도 되냐고 물어보긴 했어요. 다 마시면 서사방에 가서 물통에 물을 담아 오면 되니까 마셔도 된다고. 다들 그렇게 했어요.”




18. -갱내수에 대해서- 

조선인 탄갱부의 처 강시점 씨의 증언 - “갱내수라는 것은 지하수가 흘러나오는 것인데, 갱내에는 변소가 없어서 똥오줌은 그대로 흘려보내게 된다. 갑자기 전염병이 번진 것은 오염된 비위생적인 물을 그대로 마셨기 때문이었다.” (166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바닷물을요? 오염된 물이라고 하면 갱내에서는 바닷물 밖에 안 나오니까. 전부 바닷물이에요. 가져간 물 이외에는. 바닷물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마셔도 되지만 더러운 바닷물을 기꺼이 마시는 사람은 없겠지요. 물이 없다면 몰라도 물은 전부 일본인 갱부가 마셔버렸다는 것은 화장실 문제도 그렇고 그것도 순 거짓말이에요.”


19. -갱도 입구의 전봇대에 대해서- 

조선인 탄갱부의 처 강시점 씨의 증언 - “특히 조선인의 경우는 감기에 걸려서도 병으로 인정되지 않고 외근 노무 담당자에게 심하게 맞았다. 갱도 입구의 전봇대에 온몸이 묶여서 앞을 지나가는 갱부들에게 몽둥이로 때리게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166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갱도 입구의 전봇대... 우선 하시마에 전봇대라고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거에요. 전봇대가 없다니까요. 얘기를 듣고 하시마 어디에 전봇대가 있었냐고 의심이 생길 지경이에요.”

20. -파도 물보라에 대해서- 

조선인 탄갱부의 처 강시점 씨의 증언 - “태풍은 하시마의 명물이라고 할 정도로 바다가 거칠어지면 강 씨가 사는 7층 현관까지 물보라가 쳤다. 방 내부까지 물에 잠겨서 서둘러서 다다미를 걷어 벽장에 넣었다.” (167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입구에 있는 문을 닫으면 물보라 정도는 집에 안들어가요. 그건 여기도 그렇지만 비가 와서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문을 닫으면 현관이 물바다가 되는 일은 없잖아요. 대홍수가 일어나지 않는 한. 위에서 내리는 비로... 같은 말을 계속하게 되는데, 남부의 태풍은 일년 내내 있는게 아니잖아요. 태풍 때, 남쪽의 암벽에 부딪힌 파도가... 하시마는 제일 위쪽에 신사가 있고, 그곳을 지나서 학교 운동장이 있어요. 그곳까지 물보라가 쳤다는 건 일 년에 한두 번 있었을 지도 몰라요.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바람이니까요. 바람을 타고 물보라가 암벽에 부딪힌 파도가 높이 10미터 정도가 될 때도 있으니까요. 그 파도가 바람을 타고 제일 북쪽에 있는 학교 운동장 근처까지 날아가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서 있으면 흠뻑 젖는 그런 건 아니에요. 파도 물보라 정도니까요. 그런 일은 있었어요.”

21. -노무담당자에 의한 강탈에 대해서- 

조선인 탄갱부의 처 강시점 씨의 증언 - “조선인 기숙사에 배급된 식량의 절반을 노무 담당자가 가로채 집으로 가져가는 바람에 그들은 나머지 잘반 밖에 먹지 못했다. 심한 노동을 견디고 있는 조선인 갱부들의 식량까지 빼앗은 것이다.”(169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실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거기 1층에 3명, 그리고 2층에 1명. 우유를 계약했어요. 제가 어떻게 아냐면 제 친구의 어머니가 출산을 해서 우유배달을 무거워서 못하게 됐으니까. 자신의 아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카에 씨가 ‘미안하지만 너희 집 근처니까 우유배달을 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같은 마을에 살고, 제 동급생 어머니고 그런 상황이니까, ‘좋아요’라고 해서 우유를 배달해 준 적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 말처럼 눈 주위가 까맣게 될 정도로 말라서 먹을 게 없다는게 이상하다고요. 그 사람들은 매일 우유를 마셨어요. 아래 층에 있는 사람들은 3명이에요. 우유배달을 실제로 제가 했으니까요.”


22. -누워서 하는 채탄 작업에 대해서- 

섬에서 탈주한 조선인 갱부 유희긍 씨의 증언 - “2척층이라고 하는 탄층은 약 60센치, 짧은 무늬의 곡괭이로 누워서 파야하는 곳이었다. 캡 램프의 코드가 목과 발을 휘감고 머리가 천장의 암반에 닿았다. 10분 채탄했을 뿐인데도 하반신이 저렸다.”(185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그렇게 좁은 탄층은 없어요. 아무리 낮아도 90cm에요. 거기서는 거의 캐지 않아요. 4매층이라는 게 있어요. 그리고 150cm하고, 그리고 3m에요. 탄층이 제일 높은 곳은 3m60cm. 사람이 누워서 파야하는 곳은 찾이 않으면 없다는 거에요.”

23. -바다에 버린 시체에 대해서- 

섬에서 탈주한 조선인 갱부 유희긍 씨가 동료한테서 들은 얘기 - “도망가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잡히면 노무 담당자에게 고문을 받고 시체는 바다에 던져질뿐이다.”(185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죽이고 바다에 던지면 어딘가 떠밀려 갈테지요.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어요.”> 


24. -노무 담당자의 감시에 대해서- 

섬에서 탈주한 조선인 갱부 유희긍 씨의 증언 - “‘저 낚시꾼은 이상하지 않아?’ 이 씨가 손으로 가리켰다. 제방 위에 50미터 간격으로 밀짚 모자를 쓴 사람들이 낚싯대를 던져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그 누구도 낚싯바늘의 먹이를 바꾸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모르는 체하고 다가가서 얼굴을 내려다보니, 그 남자는 노무 담당자,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갱부들의 탈주를 24시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거기서 알게됐다.”(185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그건 만화에도 안나와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쟁이 시작되어서 50명이든 몇 명이든 방파제에 배치한다니. 그런 여유가 있다면 채탄 작업을 하러 보내는게 더 좋잖아요. 그렇게까지 안해도 바다에 뛰어들면 죽을지도 살지도 모르는데. 그 빠른 조류에 그런 무리가 있었다면 그건 바로 죽는거예요. 조류의 흐름은 천차만별이지만, 하시마의 경우는 하루종일 조류의 흐름이 계속 바뀌니까요. 하시마에서 배를 타는 사람이 여기만큼 조수의 흐름을 읽는 것이 힘든 곳은 처음이라고 한 걸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정도로 하시마를 둘러싼 물살의 변화가 심하다고.”


25. -모터 보트에 대해서- 

섬에서 탈주한 조선인 갱부 유희긍 씨의 증언 - “탄광측은 갱부의 도망자 대책을 철저하게 세웠다. 하시마섬 주변을 모터보트로 순회하면서 공습이 없는 야간은 경비등으로 제방을 조사했다.”(186 페이지)


마츠모토 사카에의 반박 - “모터 보트는 탄광장이 어딘가에서 하시마로 전근을 왔는데 자신이 취미로 탄다는 모터보트를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쉬는 날은 탄광장이 낚시하러 나가기도 했지요. 그러니까 사체 어쩌고 저쩌고 하고 탈주자를 발견하면 쫓아가서 체포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어요. 그 때문에 탄광장이 모터보트를 몰았다는 사실은 없어요. 낚시용이에요. 탄광장의 취미. 회사 보트가 아니라 탄광장의 개인 소유잖아요.”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