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논객 진중권과 좌파 논객 김규항의 ‘진보논쟁’을 통해 대한민국의 지식사회의 인사들이 전혀 공부를 하지 않고 글을 쓰고 있는 현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역사와 사상적 스펙트럼의 기본 개념조차 모르고 진보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학자 답게 서강대학교 손호철 교수가 나름대로 정확히 정리를 해주었다. 손호철 교수는 자유주의와 진보를 철저하게 구분했다. 대한민국에서 번역되어 출판되는 미국의 역사나 정치사상사 책에서는 자유주의를 뜻하는 ‘liberal'을 ’진보주의‘나 혹은 ’진보적 자유주의‘로 변역한다. 이 때문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글을 쓰는 논객들이 온통 진보를 진흙탕으로 만들어놓게 된다.
손호철,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손호철 교수는 이에 대해 “진보가 영어의 liberal을 의미하는지, progressive를 의미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둘러싼 논쟁과 오해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서 생긴 것이 대부분이다. 구체적으로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등 자유주의세력을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liberal를 진보로 번역해 이들이 진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던 한 학자는 "진보주의는 오늘날 미국의 민주당 등 정강, 정책의 기조를 이루고 있고, 이러한 이념적 사조를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칭하기도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최근 나온 정치사상 관련 저서 중 가장 명확히 이념적 스펙트럼을 정리해놓은 폴 슈메이커교수의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이란 책에서도 번역자인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미국 민주당의 ‘liberal' 노선을 주석을 달아 ’진보적 자유주의‘로 번역해놓았다. 또한 이 책의 원제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고 ’From Ideologies Public Philasophies'임에도, 책 제목에 ‘진보’라는 단어를 집어넣기도 했다.
최근 유시민 국민참여당 당대표는 “왜 진보정당이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지 못하느냐. 자유주의를 적대시하기 때문"이라며 "진보대통합을 진보의 확장으로 보고 자유주의 토대를 획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유시민은 진보와 자유주의의 결합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손호철 교수도 이 점을 거론하며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와 대별되는 진보주의를 ‘progressive'로 칭하자고 제안한다. 손호철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liberal'로 표현되는 미국이나 유럽의 정치사상을 번역할 때 이는 ‘자유주의’로 그대로 번역해야 하고, ‘progressive'라 표현된 것만 ’진보주의‘로 번역해야 한다.
정치사상에서 진보주의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개념
그럼 대체 주로 미국의 정치사상에서 진보주의란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일까? 필자가 아는 한에서 최소한 정치계와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이념으로서 자유주의, 보수주의와 구분되는 진보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필자가 정치사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혹시 손호철 교수가 이를 알고 있다면, 시간을 내서라도 알려주기를 바란다.
손호철 교수가 이야기하는 ‘progressive'는 1900년 초반의 대대적인 미국 경제와 사회를 개혁해냈던 정책 흐름인 ’혁신주의‘로 번역되고 있다. 국내에 번역된 그 어떤 역사책을 보더라도 ’progressive'는 혁식주의로 번역하지 진보주의라 번역하지 않는다. 손호철 교수가 진보주의를 ‘progressive'로 이야기하게 되면, 미국의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목적으로 진행된 정책방향을 하나의 스펙트럼 상의 이념으로 치환을 시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진중권이나 김규항 같이 별다른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야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역사와 사상을 조금만 공부한 사람은 일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손호철 교수와 김규항의 집권플랜은 진보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집권 플랜’이다
그럼 대안은 없는가? 가장 쉬운 대안이 있다. 폴 슈메이커 교수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자유주의보다 더 왼쪽에 있는 이념은 ‘민주사회주의’이다. 이른바 ‘socialism'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사회주의 노선이 1900년대 초반 이후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별로 논의되지 않으나 유럽에서는 지금도 정치권과 언론에서 늘 다루어진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노선 역시 유럽식 사회주의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정당이라 부르면 되는 것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은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매우 해괴한 정당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은 ‘봉건식 사회주의 노선’ 으로 정리해주면 된다.
그럼 왜 이토록 쉬운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있을까? 바로 색깔론에 대한 역이용 정략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너무나 상식적 기준으로 좌파로 분류된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을 학술적 개념으로 좌파로 분류하면, ‘색깔론’을 뒤집어 씌운다며 길길히 뛰기 때문에 이들을 좌파 혹은 사회주의로 부르지 못하면서 일대 혼란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파진영에서도 이를 간파하고 자유주의진보연합이란 단체를 결성했다. 우파진영에서 ‘진보’는 가치중립적 용어인 ‘개혁’과 유사하다고 판단하여, ‘진보’를 좌파들의 전유물로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손호철 교수의 ‘progressive'는 이념이 아닌 1900년 초반의 미국의 정책 흐름일 뿐
이념적 스펙트럼상 ‘진보주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우파진영의 발상은 타당하다. 손호철 교수가 주장하는 ‘progressive', 즉 혁신주의 역시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전 분야에서 개혁이 필요했던 1900년대 초기의 미국의 정책 흐름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혁신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은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그 어떤 역사학자도 루스벨트 대통령을 좌파 사회주의자로 부르지 않고 혁신주의자로 부른다는 것은, ’progressive'가 이념이기 보다는 어떠한 정책방향이나 태도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이 시기의 미국은 1800년대 후반에 록펠러, 모건 등 독점 재벌들이 경제를 장악하고 있어, 노선에 관계없이 이에 개혁이 절실히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논쟁의 당사자들인 김규항과 진중권 모두 자신들을 좌파로 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을 좌파정당이라 부르면 된다. 그 점에서 보면 좌파인 김규항이 오연호 대표와 조국교수의 ‘진보집권플랜’을 시비걸 일도 아니다. 좌든 우든 ‘진보’는 그냥 아무렇게나 갖다 쓰면 되는 것이고, 김규항의 집권플랜은 ‘좌파 집권플랜’ 혹은 ‘사회주의 집권 플랜’이라 부르면 된다.
참고로 민주당 내에서 민주노동당과 손잡아서 좌로 가는 자들을 제외하고, 김경재 전 의원, 강봉균 의원, 김효석 의원 등이 집권플랜을 이야기하면 더 첨부할 것도 없고 그냥 미국 민주당의 ‘,libera' 즉 ’자유주의 집권 플랜‘이 된다. 그런데 자유주의란 단어는 모조리 우파가 선점하고 있다.
우파진영은 ‘보수주의’라는 단어를 포기하면 안 돼
우파진영에서 ‘보수주의’라는 단어보다는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게 된 것은 역시 ‘보수’와 ‘진보’를 대립되는 개념으로 좌파들이 오염시켜놓았기 때문이다. 포드 행정부 시절부터 정부 일을 시작한 앨런 그리스펀의 회고록 ‘격동의 시대’에서 앨런 그린스펀은 시종일관 자신을 ‘보수주의’라 칭하고 있다.
폴 슈메이커 교수가 정리해놓은 ‘보수주의’는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 사회문화적으로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상대적으로 도덕적 그리고 애국적 가치를 표방하고 있다. 당연히 미국의 공화당도 ‘보수주의’라 분류된다.
한나라당은 도저히 무슨 이념을 갖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정당이니 제외하고, 이른바 애국단체들은 ‘보수주의’가 맞다. 물론 ‘애국우파’도 맞는 개념이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애국우파들이 ‘보수주의’라는 단어를 포기해선 안 된다.
좌파진영에서도 최소한 자신을 스스로 좌파로 칭하는 김규항이나, 이러한 개념들을 정확히 알고 있을 법한 손호철 교수 등은 ‘사회주의’란 단어를 포기하면 안 된다. 막말로 ‘사회주의’ 노선으로 유럽에서는 수많은 정당이 집권하고 있는데, ‘사회주의’란 단어를 ‘진보주의’로 위장할 필요가 있는가.
필자는 좌파매체들로부터 ‘보수논객’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모두 시장경제 원리는 존중하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보수로 분류되도 괜찮으나, 사회적 가치보다는 개인의 자유에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주의’보다는 ‘자유주의’에 가깝다.
그러나 자유주의자의 대명사에 가까운 존 스튜어트 밀의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는 정부가 집단적 대중들의 횡포로부터 개인을 보호해야한다“는 주장에 공감하고 있고, 이러한 시각은 고전적 보수주의자의 대표격인 에드먼드 버크의 시각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중간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또한 김정일 3대 세습과 연평폭격 등으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한치도 내다볼 수 없는 중차대한 시기라면 자유주의자라 하더라도, 개인의 가치보다는 국가적 혹은 사회적 가치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한국적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유시민은 한나라당으로, 진중권은 자유선진당으로 가는 게 맞아
즉, 이러한 한국적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자유주의 세력은 사회주의세력과 집권플랜을 논의하면 안 되고, 오히려 보수주의자와 손을 잡아야 될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도 높다. 그렇게 되면 별다른 철학도 없이 오직 정략만으로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잘못된 용어로 선동에 나서는 서울대 조국교수,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허구의 개념을 주장하는 유시민 같은 인물들은 별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만 검토하면, 조국교수는 민주노동당으로 가면 되고, 유시민은 민주당 우파나 한나라당으로 가는 게 맞지만, 민주당 우파 내에서의 유시민에 대한 심각한 거부감을 고려한다면, 차라리 한나라당과 더 잘 맞는다. 실제로 유시민은 노무현 정부 시절 구 민주당과의 통합에는 결사 반대했으나, 한나라당과의 연정에는 구걸하다시피 달려든 전력도 있다. 참고로 진중권의 경우 무한대에 가까운 시장주의적 자유를 주장하며, 미국에 대한 숭배사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이나 자유선진당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
등신과 머저리들의 ‘진보논란’을 접고, 보다 더 명확한 세워보자.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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