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미디어워치 4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이번 4호에는 다음과 같은 기획기사들이 수록되어있습니다.
1. MBC 광고매출 41% 급감 신경민 앵커 교체설 논란
2. 한예종은 좌파운동가들의 밥그릇인가?
3. 미국기업 '구글'은 한국정부와 맞서 싸워라?
4. 실시간 공짜로 본 기사 왜 다음날 돈 주고 사나?
5. 조선일보 2030 실크세대 기획 사내 우수기획상 받아
동국대 조흡 교수, 성공회대 최영묵 교수, 인터넷미디어협회 전경웅 사무국장 등등 좌우 인사가 함께 참여하는 소통포럼 4차 세미나 ‘진보와 보수의 공유지대를 찾아서’에서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대한민국의 소통을 위해 좌우 양 진영의 언론의 책임을 강조했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보수매체는 물론 진보매체의 과잉 정략성을 거론하며 “최소한 진보언론은 보수언론 입장을 자주 등장시키고 보수언론 역시 장기적으로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진보의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신대 윤평중 교수 역시 “계간지에 리영희 교수를 비판한 내용이 중앙일보에 실리자, 한겨레신문에 동국대 홍윤기 교수와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이를 비판했다”며, “한겨레신문에 반박칼럼을 보냈지만 게재되지 않았다”고 진보언론 한겨레 측의 편협함을 비판했다.
조교수와 윤교수의 공통된 입장은 매체 간의 이념적 편집방향성은 인정하되, 다른 진영의 목소리도 반영하면서 반론권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디어 시대에 언론이 소통의 절대적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언론의 지면 내에서의 소통없이 좌우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교수와 윤교수의 주문을 실천하고자 할 때, 하나의 거대한 운동의 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진보좌파 지식인의 조선일보 등 보수신문 기고와 취재를 거부하는 안티조선 운동이다.
안티조선 운동의 이론적 창시자는 전북대 신방과의 강준만 교수이다. 좌우 양 진영의 소통을 모색하는 소통포럼 역시 강교수가 시작했으니,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므로 좌우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안티조선에 대한 강교수의 이론적 궤적을 추적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를 지향하는 일이다.
강교수가 조선일보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때는 1995년 ‘김대중 죽이기’를 출판한 이후이다. 강교수는 이 책을 통해 조선일보의 반DJ노선의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쳤다. 그러나 반대로 강교수가 조선일보의 문제를 DJ와 연관지으면서 이는 두고두고 강교수의 발목을 잡게 된다. 아직도 과거의 교조적 안티조선 노선을 따르고 있는 진보신당 논객 진중권은 수십 차례에 걸쳐 “강준만의 조선일보 비판은 오직 DJ만을 위한 것”이라 맹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교수 역시 이를 수십 차례에 걸쳐 반박, “만약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라도 차에 치이면 도와줘야할 것 아니냐”는 예시까지 들며 DJ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실제로 강교수는 DJ정권 출범 이후 일체의 관직 및 공직은 물론 그 흔한 위원회 자리 하나 맞지 않았다. 심지어 강교수는 “내가 DJ 정권 밑에서 정치하면 개새끼다”라는 극단적 발언까지 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또한 DJ 정권 출범 이후 ‘김대중 정권의 몰락’이라는 단행본까지 쓰며 가장 강력하게 DJ정권을 비판하기도 했다.
강준만, 안티조선 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아
강교수가 실제로 강력한 안티조선의 노선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도 DJ 정권 출범 이후 월간인물과사상이라는 매체를 만들고부터이다. 강교수는 DJ정권을 비판하면서도, 보수진영과는 차별점을 두면서 더욱 강력히 조선일보 비판에 나섰다. 이에 불을 지른 것이 현 조선일보 사람들팀장 이한우 기자가 1998년 10월 26일자 ‘한국전쟁 관련 최장집위원장 논문 발췌’ 기사에서 당시 DJ 정부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인 고려대 최장집 교수의 논문의 내용을 근거로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정리한 것. 강교수는 기사의 소제목인 ‘김일성은 열렬한 민족주의자’, ‘마치 북의 공격 기다린듯’ 등을 거론하며 월간인물과사상 12월호에 ‘자신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모교의 존경받는 교수의 등에 칼을 꽂는 비정한 '청부업자'로 변신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이한우 기자는 이에 크게 반발, 법적 대응에 나섰다.
그러자 진중권, 상지대 김정란 교수 등이 소송을 당한 강교수에 후원금을 거두어주자는 명목으로 안티조선 우리모두 사이트를 개설하면서 안티조선은 이론의 틀을 넘어 조직화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을 중심으로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이하 조반연)이 구성되어 본격적인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강교수는 우리모두 사이트나 조반연에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조반연 관계자들이 강교수의 참여를 강권했지만, “나의 참여가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고, 실천적 운동가의 기질이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강준만의 안티조선과 조반연의 안티조선의 노선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강교수는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라는 명분을 내세운 반면 조반연은 ‘조선일보의 폐간 그날까지’라는 구호를 사용했다. 또한 조선일보 기고와 인터뷰 거부 역시 강교수는 선별적, 조반연은 전면적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강교수가 조선일보에 대한 선별적 기고 거부 원칙을 정리하게 된 계기는 2000년 한양대 임지현 교수와의 논쟁 때문이었다.
강준만의 선별적 조선일보 기고거부 원칙, 노무현 정권에 의해 무너져
강교수는 월간인물과사상 2000년 2월호에 진보 지식인 임교수가 체게바라 관련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한 것을 비판하며, “나는 누구건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내가 언제 극우인사가 ‘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건 일을 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국민을 상대해야하는 공직자가 ‘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거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언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이 ‘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건 일을 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연예인이 ‘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건 일 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연예인과 비슷한 기능을 추구하는 문인들이‘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거는 걸 본 적이 있는가?”라며 조선일보 기고 거부는 진보적 지식인에 제한된 원칙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강교수는 이보다 이전인 1999년도 고려대에서 장하성 교수 초청 강연회 때, “진보지식인 장하성 교수라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며, 장교수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삼성 비판 칼럼을 사례로 들었다. 즉 강교수의 조선일보 기고 거부 원칙은 진보적 지식인 내에서도 임지현 교수의 체게바라 관련 칼럼과 같은 추상적 진보 메시지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강교수가 조반연과 이론적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는 2000년 신동아와의 인터뷰 건으로 오마이뉴스 정운현 편집국장으로부터 “친일파 이완용의 변절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은 이후이다. 당시 정운현 국장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도토리 키재기이므로 안티조중동으로 전선을 확대할 것”을 주장했고, 강교수는 “안티조중동을 외치는 정운현의 과격한 행동은 언론개혁이라는 목표에 그와 도달하는 전략 전술을 혼동한 데서 빚어진 무리수”라 비판했다. 안티조선이 안티조중동으로 확산된 데에는 당시 한겨레신문의 정연주, 손석춘 논설위원 등 진보매체 인사들의 영향이 컸다. 언론개혁이라는 명분보다는 신문사들 간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러한 안티조중동의 여론을 이용해 집권한 노무현 정권 이후 강교수와 조반연은 완전히 선을 긋게 된다. 노정권 당시 안티조선 운동을 주도한 민언련은 보수지식인, 진보지식인, 공직자, 기업인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조중동의 기고와 인터뷰 거부운동을 확산시켰다. 특히 노정권 스스로 보수신문과의 전쟁을 선포, 진보좌파 시민사회가 이를 충실히 따라주며, 민언련 등 안티조선 인사들이 속속 노정권에 참여했다. 민언련과 민변 출신치고 공직 하나 맡지 않은 인사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또한 명계남 등 친노세력이 조직을 결성 조선일보 인쇄소에 들어가 난동을 부리면서 안티조선은 점차 폭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강준만, “안티조선은 국민적 동의를 얻는데 실패”
이에 강교수는 2006년 11월 4일, ‘좌우통합을 위한 한국현대사의 급소’를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안티조선 운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국민들이 신문선택에서 호응을 해주지 않았다”며 “안티조선의 운동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정치인들이 표로 심판받듯이 안티조선 운동도 다시 한 번 어디가 문제가 있는지 검토하여 기존의 방식(기고 및 인터뷰 거부, 절독운동 등)이 아닌 다른 방식을 모색해봐야 한다”고 노선의 변경을 시사했다.
특히 이 강연회에서 강교수는 본격적으로 좌우통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보수신문이 맞는 말을 많이 하지만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조선일보'에 실리면 반대 측에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한편 “이는 '한겨레신문'도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며 여론 형성 과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안티조선’운동의 부작용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누가 나서서 선언을 하는 방식은 올바른 것 같지 않다”면서 “자연스럽게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면 해결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그 이후로 강교수는 더욱 더 과감하게 좌우소통론을 주장한다. 2008년 11월 29일, 한국근현대사 완간 기념 강연회에서 "진보적 사관을 갖고 있는 분들이 우리 근현대사에 대해 진보적 관점에서 서술하다 보니 본의 아닌 실수를 했다"며 "대한민국의 자부심 문제를 좀 소홀히 했다“고 진보진영을 반성을 촉구했다. 또한 김성식(한나라당 국회의원), 박형준(청와대 홍보기획관), 김문수(경기도지사), 이재오(전 국회의원) 등 진보진영에서 한나라당으로 옮겨간 이들을 예로 들며 "내가 보기엔 (그들의) 생각이 바뀐게 아니라 자기 처한 상황에서 길을 뚫은 것"이라며 진보진영의 배신자론도 비판하기도 했다.
강교수는 이보다 앞선 2008년 9월 동국대 조흡 교수 등과 소통포럼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좌우소통에 나섰다. 특히 소통포럼은 4차 세미나부터 중도 및 보수우파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점차 세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강교수는 3차 세미나 이후 전주에 기거하는 현실적 한계를 들어 소통포럼에 더 이상 참여하지는 않고 있다.
안티조선의 노선을 정리하지 않고 있는 강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이론으로서의 강준만의 안티조선과, 노정권 이후의 민언련 등의 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은 전혀 그 궤를 달리한다. 그러나 이를 섬세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반인은 물론 지식계와 언론계에서도 거의 없다. 강준만 본인 스스로도 때때로 이를 혼동하고 있을 정도이다.
문제는 강교수가 좌우소통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어긋난 안티조선의 노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정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강교수는 “나 하나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업인들의 조선일보 기고는 정당하다고 고 주장한 강교수의 논리와 달리 2008년에는 조선, 중앙, 동아에 광고를 했다는 이유로 기업들이 무차별적인 탄압을 받았다. 이 때에도 강교수는 침묵했다.
현재까지 강교수의 좌우소통론과 안티조선의 노선은 절대적으로 충돌한다. 강교수의 논리로 볼 때는 문제가 없지만 현실은 조중동에 기고했다는 이유로 특정 세력으로부터 타도해야할 적으로 몰리고 있다. 안티조선의 정리없이 좌우소통은 한계에 부딪힌다. 조희연 교수와 윤평중 교수의 주장대로 설사 한겨레와 조선일보에서 다른 진영 인사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해도 논객들이 주눅이 들어 다른 진영의 매체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한겨레, 경향신문, 미디어오늘 등 진보좌파 매체는 보수우파 논객에게 아예 지면을 할애해주지 않고 있다. 강교수의 의견대로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지만, 안티조선의 이론적 창시자가 조선일보 기고 거부 원칙을 정확히 정리하고, 좌우소통의 시대를 위해 과격한 안티조선 노선은 정당하지 않다는 주장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 강교수와 소통포럼이 뛰어넘어야할 가장 낮은 벽이 아닐까? / 허수현 , 변희재
필자는 2005년 3월 조선일보 창간기념호에 신문시장 활성화 관련, 안티조선의 정적인 이한우 기자의 섭외로 조선일보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그뒤 아침논단 논객으로 참여하면서 주로 포털권력 비판 칼럼을 조선일보에 집중적으로 기고했다. 필자는 조선일보에 섭외를 받은 직후 안티조선의 이론가인 강준만 교수와 운동가인 한겨레신문 홍세화 전문위원에게 메일을 보낸 바 있다. “신문살리기와 포털 비판 등은 강교수의 안티조선 기고거부 원칙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다른 반대논리가 있다면 제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둘 다 답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일보에 기고한 이후 필자가 진보좌파 진영으로부터 받은 모욕적 공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배신, 변절, 사상철새, 출세주의자, 어용, 젊은 수구세력, 조선일보 앞잡이 등등 파괴적인 용어들이다. 강준만, 임지현 등과 같이 논쟁에 응한 사람도 없이 맹목적 비난과 음해뿐이었다. 특히 포털 비판 관련 칼럼은 한겨레, 미디어오늘, 경향신문 등 진보좌파 매체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특히 미디어오늘 측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오히려 포털 비판자들을 음해하는 보도로 일관했다. 칼럼을 받아주지도 않고 왜곡음해보도하여 타매체에 기고했더니 이제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인다.
필자와 10년 정도 친분이 있는 시사인의 고재열기자조차도 최근에 조선일보 기고 건으로 ‘사상철새’라 비판했다. 고재열 기자는 386세대보다 훨씬 젊은 신세대이다. 이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젊은 기자들조차도 매체 기고 여부만 보고 남의 사상을 재단하는 상황이다.
애초에 조선일보 기고를 결심했을 때, 이 정도는 충분히 각오했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언론지형도를 바꾸지 않고 대체 무슨 수로 좌우소통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인터넷포털과 연합뉴스의 맹점을 정확히 짚는 인터넷기자협회 이준희 회장, 냉정하고 객관적 시각으로 정치를 분석하는 유창선 박사 등등이 전문성이나 논리력, 방향성으로 볼 때 보수신문에 기고 못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반대로 중도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한신대 윤평중 교수의 주장을 한겨레와 경향신문에서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언론사들 역시 변해야 한다. 필자가 처음 조선일보에 기고했을 때와는 상황이 크게 변했다. 이제는 어느 노선에 서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메시지를 던지느냐가 더 중요하다. 노선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하고 전문적인 주장을 담는 매체가 향후 언론시장을 주도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이런 포용력에 대해서도 보수우파신문사들이 훨씬 앞서있다. 규모와 자금력을 탓하기 전에 노정권 이후 진보좌파매체에서 얼마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왔는지, 그것부터 성찰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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