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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가훈과 유언 31편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이른바 예송논쟁의 와중에 남인과 대립하며 부침을 거듭하다 숙종 6년(1680)에는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숙종 15년(1689)에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전라도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약을 받자 태연히 바둑을 두던 그는 다섯 아들 창집(昌集)ㆍ창협(昌協)ㆍ창흡(昌翕)ㆍ창업(昌業)ㆍ창집(昌緝) 앞으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간 유서를 남긴다.

"나는 위태로운 때를 만나 오래도록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외람되이 차지했으나 널리 백성을 건지는 일을 본시 내가 감당할 수도 없었으니, 관직과 나라에 범한 죄를 이루 다 속죄할 길이 없다. 다만 임금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만은 귀신에게라도 물어볼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하겠다."

임금에 대한 충성만은 변함없다는 말을 남김으로써 더 이상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막고자 부심했다.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의 아들들은 모두가 문명(文名)을 드날렸다.

그는 장례 절차나 방법도 남겼다. 모든 절차는 상례비요(喪禮備要)라는 예학서에 규정된 순서를 따라야 하며, 신도비(神道碑)는 "네 할아버지도 또한 분부에 따라 비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이제 내 무덤에는 다만 짧은 표석만 세우고 지석(誌石)은 묻도록 하라. 지석에는 세계(世系)와 생졸(生卒)과 이력만 간단히 적음으로써 장황한 글로 남우세를 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경와(敬窩) 김휴(金烋.1596-1638)는 성격이 불 같아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다. 이 때문에 그는 출사하지 않고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 이유를 외아들 학기(學基)에게 남긴 훈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두운 때를 만나 정치는 혼탁하고 어지러웠다. 아예 자취를 숨길 작정으로 과거공부는 그만두고 감히 술만 퍼마셔 마침내 술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자 속으로 몸을 보전하는 좋은 계책이라 여겼다."

하지만 술 기운을 빌려 그는 걸핏하면 남들을 비난했다.

이에 아들을 타이르기를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후회해도 소용없구나. 너는 마땅히 이를 몹시 경계하도록 하라"고 한다. 못난 아비 전철을 밟지 말고 성현의 말씀을 공부하라고 당부한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칠순을 맞은 1660년 큰아들 인미(仁美)에게 준 가훈(家訓)은 잔소리가 심한 편이다.

이에서 고산은 "노비가 실수를 해도 작은 일은 가르치고 큰 일에는 대충 매질만 하면 될 뿐이며, 매번 직접 어루만지는 느낌으로 대함으로써 (노비가) 학대당한다는 원망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들을 낳으려면 "모름지기 '의학입문'(醫學入門)의 구사(求嗣. 후사를 얻는 법) 편과 '기사진전'(祈嗣眞銓)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도에 어긋나는 점쟁이의 말에는 귀를 막아 물리쳐 아녀자들이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한다. 의학입문이나 기사진전은 모두 의학서다.

한문학 전공인 정민 한양대 교수와 같은 대학 이홍식 연구교수가 함께 엮은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김영사 펴냄)는 각종 문집 등을 뒤져 골라낸 '조선시대 명문가의 가훈과 유언' 31편을 우리말로 옮기고 이에다가 해설을 덧붙인 단행본이다. 이 중 가훈이 21편, 유언이 10편이다.

이와 같은 가훈과 유언 문학의 백미로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혼란기를 살다간 지식인 안지추(顔之推.531-591?)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이 꼽힌다.

남조(南朝) 양(梁)나라에서 태어나 그곳에 출사했다가 양이 망하자 제(齊) 왕조를 섬기고, 다시 제가 망하자 이번에는 수(隋)에 들어가 태자의 스승이 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안지추가 자신을 반면교사 삼아 자식들에게는 어떻게 살것인지를 당부하는 말을 남기는데 이것이 안씨가훈이다.

이런 교훈성 이야기는 고답적이고 딱딱하게 받아들이기 십상이지만 안지추의 당부는 지금도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안씨가훈'으로 기획한 이번 가훈ㆍ유언집 또한 고산처럼 잔소리가 심한 까닭에 정감이 가기도 하며, 김수항처럼 억울함을 안고 죽으면서도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그래도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한다는 '거짓말'을 하는 까닭에 비장감을 주기도 한다. 332쪽. 1만3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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