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어리 연꽃 <동악산 청류동에서>
서울행정법원이 16일 민주당이 무상급식 관련 8.24주민투표를 정지해 달라며 낸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고 선관위가 사립학교 교사들의 투표 찬반 운동 허용함에 따라 무상급식 주민투표 찬반 주민투표를 발의한 오세훈 서울시장과 한나라당, 그리고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반대하는 서울시의회와 민주당은 주민투표 유무효의 1차 관건인 투표율 33.3%를 채우거나 미달시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고 있는데 과연 투표율 33.3%는 채워질까? 그리고 개표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서울시 주민투표에 투표권도 없는 타지 사람이지만 오세훈 주민투표의 과정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온 한 사람으로 오세훈 시장에게 조언을 한다면 전면 무상급식 반대의 논점을 잘못 잡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먹는 점심 한 끼 밥그릇에 좌우의 이념과 빈부차별을 논한 것이 잘못이고, 세상을 무상으로 지원받아 먹어야할 하위 50%와 돈을 내고 먹어야할 상위 50%로 갈라버린 것이 잘못이다.
크게는 주민투표에 임하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한나라당의 변화를 보고, 작게는 시중 언론에 흐르고 있는 논점의 변화를 보면, 처음 무상급식에 관하여 투쟁적이고 극단적인 선동과 이념의 잣대로 일관하던 주장들이 건전한 재정을 확보하여 보다 더 시급하고 유용한 곳에 알차게 미래지향적인 에너지로 사용하자는 차분한 논조로 바뀌고 있는데, 이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시작의 논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세훈 서울시장과 한나라당 그리고 그 지지자들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라 이미 해는 저물고, 나그네가 하룻밤 쉬어갈 주막은 물살이 요동치는 강 건너에 있으니......
주민투표를 발의한 오세훈의 정치적 꼼수가 무엇인지는 논외하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 그대로만 놓고 보면, 처음부터 무상급식을 반대하고 주민투표를 발의할 생각이었으면, 이념과 빈부의 잣대가 아닌 보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미래지향적인 논점을 가지고 국민들의 앞에 섰다면, 상황은 달라졌고 국민들의 적극적인 공감대 형성으로 승패는 이미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주민투표의 찬반 요구가 무상으로 지원받을 하위 50%와 자기의 돈을 내고 먹어야할 상위 50%로 단순 무식하게 편을 갈라 서울시민들을 상류와 하류로 양분하여 버렸으니 서울시민들은 무슨 명분으로 어디에다 투표를 해야 하는가? 근본적으로 정치인 서울시장이 내세울 정책이 아니었다.
이른바 공짜로 먹여준다는 하위 50%는 주민투표 찬반 승패에 관계없이 확보되어 있으니 투표할 일이 없고, 반대로 자기의 돈을 내고 먹어야 하는 상위 50%는 이런들 저런들 자기의 돈만 들어갈 뿐 자기들에게 아무런 실익이 없는데 무엇으로 투표에 참여하고 찬성을 해야 하는가?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투표를 해야 할 명분이 없다.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학생들의 전면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이며 좌파 빨갱이들이 뿌리는 독약이라고 매도하면서, 정작 한나라당 자신은 대학등록금 반값과 0-4까지 어린아이들의 무상보육까지 실시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는 엇박자 속에서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가 무슨 명분이 있고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특히 지자체장인 오세훈 시장과 민주당이라는 어른과 아이의 싸움에 한나라당이 막판에 끼어들어 어른들의 싸움으로 판을 키워버린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아쉬움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협박과 몽니에 한나라당이 마지못해 끌려 들어간 건지, 애초부터 머리 수준이 그것뿐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이 서울시장 오세훈, 차 차기에 대권을 꿈꾸는 오세훈의 안목이고 정치력이라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오세훈이 스스로 판 묘혈이라고 할 것이다.
끝으로 얼마나 다급했는지 근본정신부터 전혀 다른 박근혜의 맞춤형 복지를 오세훈 시장과 한나라당이 아전인수 해석으로 끌어다 붙이면서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에 덧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차기 대선에서 천하의 패권을 가를 박근혜의 맞춤형 복지를 오염시켜 박근혜를 물 먹이려는 또 다른 “물귀신 작업이다. 아니다.”를 떠나 정치인 오세훈이 할 짓은 아니다.
비록 해는 저물고 하룻밤 쉬어갈 주막은 물결이 요동치는 강 건너에 있지만, 아직도 7일이라는 길 다면 긴 시간이 남아 있으니, 이제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국민들의 앞에 나선다면, 자신을 죽이려고 쫒아오고 있는 기병(騎兵)들을 피해 강을 건너려 할 때, 안개는 골령(鶻嶺)을 어둡게 하고 강물은 넘치고 요동을 쳤지만, 자라들이 모여 다리를 놓아 건넌 고구려 시조 주몽처럼 살 길은 열릴 것이다. [데일리안 광주전라=박혜범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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