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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송아지 잃은 어미소의 애절한 울음을 기억하는가. 낳은 지 6개월 정도가 되면 송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어미소와 헤어져야 했다. 장날 쇠전에서 새 주인에게 팔린 것이다.

자식 잃은 비통함이란 사람이나 소나 매한가지다. 어미소는 몇날 며칠을 넋이 나간 듯 밤낮없이 울어대며 새끼를 찾았다. 송아지 역시 낯선 외양간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온종일 울음소리를 그칠 줄 몰랐다. 애끊는 이산의 아픔이었다.

어린 날에 본 소의 출산 모습은 애련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산기가 느껴지면 깨끗한 지푸라기를 입으로 끌어모아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홀로 새끼를 낳았다. 산모가 아기를 손으로 쓰다듬듯이, 어미소는 보금자리에 누운 송아지를 혀로 핥으며 지극한 사랑을 나타냈다. 이러니 헤어지는 아픔이 어찌 적겠는가.

현대인들은 소를 잘 모른다. 도시인들은 더더욱 모른다. 탄생-성장-교미-출산-죽음의 과정을 연결지어 볼 기회가 거의 없다. 관계가 단절됐기 때문이다. 본래의 소를 모르는데, 애정인들 생겨날까. 현대도시인에겐 쇠고기가 있을 뿐 소는 없다.

소의 삶이 수익 증대와 효율 극대화라는 인간의 목적에 따라 극도로 왜곡돼 있음도 잘 모른다. 송아지는 암수의 정상적 교미에 따라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인공수정의 결과물일 뿐이며, 평생동안 비좁은 칸막이 우리에 갇혀 사육되다가 일정 크기가 되면 도살-가공-포장-판매라는 기계적 행로를 따라 생을 마감한다.

소는 생명체인가, 아니면 생산품인가. 이는 매우 큰 관점의 차이다. 풀밭이 아닌 공장식 사육장에서 어떠한 감정 교류도 하지 못한 채 비육과 착유, 출산을 과도하게 강요당하는 운명을 이 시대의 소들은 감내해야 한다. 생명체가 아닌 생산품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공장식 농장은 반생명의 대표적 현장이다. 어미소는 출산과 동시에 송아지를 빼앗기고, 송아지는 어미의 젖꼭지 한번 빨아보지 못한 채 곧바로 고성장ㆍ고능률 프로그램에 따라 살을 찌우고, 우유를 생산해야 한다. 사육과정에선 햇빛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풀밭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다. 대신 옥수수라는 이상한 음식을 먹는다.

이런 사육환경은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이나 리처드 W 불리엣의 '사육과 육식'과 같은 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미국 소의 경우 99%가 이런 환경에서 생을 시작하고 마친다. 푸른 벌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은 광고 속 풍경일 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성장호르몬과 항생제가 내내 투여된다.

더욱 충격적 사실은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 사체를 갈아서 먹인다는 점이다. 닭과 돼지의 도살 후 찌꺼기는 물론 소의 사체까지 먹게 한다. 성장 속도가 빠르고, 값이 싸며, 단백질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목초가 아닌 뼈와 고기를 주는 건 되새김질하는 소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광우병은 육류 사료 제공과 밀집 대량 사육의 결과다. 병에 걸린 소는 뇌에 구멍이 숭숭 뚫려 걷기조차 어렵다. 병명은 휘청거리는 모습이 마치 미친 것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광우병은 그 고기를 먹는 인간에도 번져 심각성이 크다.

영국 등 대부분의 국가는 광우병 파동 후 도살장의 동물 찌꺼기 소에게 먹이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으나 미국은 여전히 이를 합법적으로 허용한다. 소비자가 신뢰할 만한 규모의 검역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조차 쇠고기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정부가 최근 미국 쇠고기 수입을 사실상 전면 자유화하자 국내에서도 여러 파장을 낳고 있다. 광우병의 불안감이 커지고, 축산농가는 소값 하락으로 울상이다. 이제 선택은 소비자 몫이 됐다. 궁지에 몰린 미국 축산기업에게 한국이 앞장서 활로를 터준 셈이어서 씁쓸함이 더하다.

안타깝게도 국내 축산 역시 미국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는 추세다. 동물 사체를 먹이는 상황은 물론 아니나 과거보다 협소한 공간에서 배합사료로 대량사육된다. 가격과 품질 경쟁 속에 수익과 효율을 과도하게 좇는 방식이 축산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동물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있어야 한다. 채식 일변도까지는 아니어도 사람이 먹을 옥수수 등의 곡물을 소에게 먹이는 육식 위주의 식단이 과연 옳으냐는 것이다. 또 육식을 하더라도 생명체를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원시시대엔 사냥이나 도살에 앞서 동물에게 용서를 비는 의식을 치렀다. 속도가 중시되는 현대식 도축장에선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란 기대난이다.

소와 같은 동물은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기계'가 결코 아니다.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섬세한 생명체다. '오로지 인간을 위한 생산품'에서 '독자적 생존 이유를 가진 생명체'로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회복이 필요하다. 무감각한 종차별은 무감각한 인간차별로 이어질 수 있기에 더 그렇다.

id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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