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2일) 아베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가 전격 사임했다. 그것도 자민당 참패로 여소야대가 되어버린 참의원에서의 총리 답변을 하루 앞두고 갑작스럽게 일이 벌어졌으며 자민당의 실질적 2인자 아소타로(麻生太郞) 간사장에게만 이틀 전 사임 가능성을 흘렸을 뿐 측근과 각료 그 누구도 이같은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격적인 사임발표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자민당은 지금 충격에 휩싸여있다. 최소한 이번 정기국회가 끝날 때까지는 아베 총리가 버텨줄 것으로 믿어왔던 상황에서 그야말로 대폭격을 당한 형국이다. 야당은 물론, 자민당 일부에서조차 아베의 돌연 사임을 가리켜 '자폭테러'라는 극한적 표현까지 쓰고 있다.
자민당만 충격에 휩싸인 것이 아니다. 일본 보수언론들도 그야말로 폭격을 당했다는 표현을 써도 좋을 만큼 쑥대밭이 되어있다. 야당 성향이 강한 아사히(朝日)신문만 따로 특집코너를 만들어 심층보도를 하고 있을 뿐 요미우리(讀賣), 닛께이(日經), 산께이(産經) 등 보수언론들은 하루종일 우왕좌왕하며 논조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였을 때에 '아베 책임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던 것과 비교해볼 때 대단히 흥미롭다.
이들 언론들은 "사퇴할 것이었으면 참의원 선거 이후에 곧바로 했을 것이지 왜 하필 지금...?"이라는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타이밍의 미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즉 패배한 경우에도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끝까지 완수한 후에 자결하는 것이 사무라이(侍) 문화의 특징이었으며 일본의 정치권도 이 같은 사무라이 문화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에 고이즈미 총리 시절부터 자민당이 주도해온 개혁정책과 관련법안의 국회 처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아베 총리가 사임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베는 이처럼 일본 사회와 언론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점에 돌연 사임한 것일까?
이미 일본 정가 일각에서는 그가 '고이즈미의 후광'과 언론의 집중 스포트라이트에 힘입어 편하게 정치를 해왔던 만큼 참의원 선거 참패 이후 벌어진 정치적 상황에 대해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왜냐하면 총리 취임 당시에만 하더라도 최연소 총리(52세)에 70%를 넘는 역대 최고 지지율을 받았었던 상황에서 최근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지는 '롤로코스터'와 취임 후 1년도 되지 않아 찾아온 '레임덕' 상황을 견뎌내기에는 그의 정치적 역량과 카리스마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와같은 아베의 비극(悲劇)은 그의 총리 취임과 더불어 이미 잉태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통상 일본에서 총리가 되려면 최소한 두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대장상(大藏相)과 외교장관에 해당하는 외무상(外務相) 등 내각의 주요 포스트를 역임해야 하고, 둘째, 대표최고위원에 해당하는 간사장(幹事長), 사무총장에 해당하는 총무회장(總務會長), 정책위의장에 해당하는 정조회장(政調會長) 등 자민당 핵심당직을 두루 역임한 인물이어야 했다.
그 첫 예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일본 정가의 '헨진'(變人, 예측불허의 사나이) 고이즈미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였다. 고이즈미의 경우 정치적 비중이 많이 떨어지는 재무차관과 부간사장을 거쳐 보건복지부장관에 해당하는 후생상(厚生相)을 역임한 것이 정치적 경력의 전부였다.
그러나, 고이즈미에게는 30세였던 1972년부터 30년 가까이 비주류 정치인으로 생존하기 위해 터득했던 대중성과 카리스마가 있었던 반면 39세에 정계에 입문하여 12년만에 총리에 오른 아베로부터 그와 같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같은 아베의 문제점을 모리 요시로오(森喜郞) 전 총리를 비롯, 다께베-야마사끼 등 일본 자민당 원로들이 너무나 분명하게 간파했기에 일본 정가의 또 한명의 주류 정치인 후꾸다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의 출마를 막판까지 종용했었던 것이다.
이들은 사실상 총리 선거에 해당하는 작년 자민당 총재 경선에 후꾸다를 아베의 대항마로 출마시킴으로써 레이스 흥행과 아베의 '내공 축적'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쫓았으나 북핵위기로 인해 한반도 정세가 출렁이면서 일본 국민들의 안보 불안심리가 발동되었고 이로 인해 유권자의 보수성향이 두드러지면서 후꾸다의 경선참여 포기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김정일이 아베의 일본총리 '무혈입성'에 있어서 일등공신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왜 아베는 별볼일 없는 경력과 검증되지 않은 정치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가에서 '벼락 출세'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베의 '벼락 출세'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강력한 행정개혁'과 '할 말을 하는 일본외교'라는 양대 슬로건을 내건 고이즈미 입장에서 자신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할 '강력한 뉴리더'가 필요했고, 그 조건을 아베 신조가 정확하게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또 할아버지가 군국주의 내각의 각료를 지냈음에도 자민당 비주류에 머물렀던 고이즈미와 달리 아베는 일본 정치의 성골(聖骨)이었다.
1980~90년대 일본 정치의 대표적 온건파이자 지한파(知韓派)였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가 그의 아버지이며, 기시 노부스께(岸信介) 전 총리의 딸이 어머니이다. 또한, 아시아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토 에이사꾸(佐藤榮作)가 숙부이니 그야말로 아베 가문 자체가 전후 일본정치의 주류세력을 그대로 담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 최대의 낙농제품 기업인 모리나가유업(森永乳業) 창업자 모리나가 타이헤이의 외손녀와 결혼하여 재계와의 인맥도 두텁다.
이런 아베의 막강한 '배경'이 그의 벼락 출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결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면 도꾜(東京)-와세다(早稻田)-게이오(慶應)로 불리우는 3대 명문학교 출신이 아닌데다 재무관료나 외교관 등으로 대표되는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은 상황에서 단지 집안이 막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벼락 출세'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베 벼락 출세'의 보다 본질적인 부분은 따로 있다. 즉, 제1야당인 민주당과 오자와이찌로(小澤一郞)가 정국의 헤게모니를 잡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일본 보수언론이 일제히 '묻지마 아베 띄우기'에 나섰고, 이같은 분위기에 일본 보수사회가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편승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 하에서 실질적 2인자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하면서도 단 한번도 일본 언론으로부터 제대로 된 비판과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 결국, 이같은 언론의 자충수로 인해 아베를 총리 자리에 올려놓은 일본 보수언론들이 도리어 뒤통수 맞는 장면이 지금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정치적 관록과 카리스마를 놓고 볼 때에 아베는 아직까지 오자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일본 자민당내 최대 계파였던 '다나까(田中)파'의 2인자로서 자민당 서열 2위인 간사장을 40대 약관의 나이에 맡았고, 뛰어난 언변과 서민적인 행보로 보수층과 진보개혁층 양쪽으로부터 두터운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오자와에 맞서기에는 아베의 중량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베 책임 하에 치러진 최초의 전국단위 선거인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소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일본 보수언론이 '묻지마 아베 띄우기'를 하지 않고 중심과 균형을 잡고 보도를 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일본 총리는 후꾸다이거나 아니면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좀 더 빨리 이루어져 오자와가 총리를 맡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일본 정치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우리 일부 언론들은 아소타로(麻生太郞) 자민당 간사장이 후임 일본 총리가 될 것이라는 성급한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베 총리의 전격 사임으로 인해 그 '책임론'의 칼끝이 일본 보수언론과 자민당에게 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않는 인간을 일본 총리로 내세웠냐"는 일본 국민들의 빗발치는 비판을 이들이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민당 내에서 '아베 총리 만들기'에 앞장섰던 사람들에 대한 문책의 목소리가 높아질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의 제1야당인 민주당이 아베 사임을 계기로 '중의원 해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높은 지지율'과 차세대 리더 아베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해 자민당이 작년 7월 중의원 선거에서 총 의석의 2/3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지만 이같은 민심은 지난 1년을 거치면서 그야말로 180도 급변했다. 그리고 그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7월의 참의원 선거 자민당 참패였다. 따라서 액면만 놓고보면 자민당이 2/3을 차지하고 있는 중의원에서 아무 문제없이 후임 총리가 선출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베 사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내각 지지율 28%라는 것은 일본인들의 보수성과 소극성을 감안할 때 그야말로 혁명적인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지금 총선이 치러지면 100% 여당과 야당이 뒤바뀐다고 보아도 틀립없다. 그와같은 상황에서 자민당 의원들이 아무 대책 없이 밀어붙이다가 마지못해 중의원이 해산되고 총선거를 실시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이같은 악몽 속에서 자민당은 100석도 건지기 어렵게 될 것이고, 영원히 불임정당으로 낙인찍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은 지금 그래서 최악이다. 즉 이제 일본은 파벌정치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즉, 제1야당인 민주당보다 더 무서운 문책의 칼날이 '아베 총리 만들기'에 올인했던 사람들을 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리파'가 몰락하고 새로운 파벌간의 합종연횡이 활발하게 논의될 수 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자민당이 분열될 수도 있고, 일부 세력의 이탈로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훨씬 더 앞당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일본 차기 총리에 대한 전망은 그야말로 '시계 제로'다.
그렇다면 아베 퇴장이 한국 정치에 던지고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브라함 링컨이 말했듯이 "소수의 사람들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다. 결국, 일본 보수언론과 보수지식인들이 쌓아올린 '아베'라는 모래성이 도도한 민심의 변화 속에서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지금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그러한 어리석음을 한국 언론과 보수 지식인들이 지금 범하지 않고 있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국민으로부터 제대로 검증받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가운데 헛된 이미지와 세력간 이합집산에만 매달리는 여야 정치권을 보며 머지않아 한국에서 또 한명의 '아베'가 탄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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