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이승제기자][CEO가 제대로 대접받는 시대는 언제 올 것인가]
"손 사장, 아니 일 잘했는데 왜 나가는 겁니까. 새로 오는 사장이 일 잘 못하면 내년 주총에서 잘라 버릴 겁니다."
25일 오전 열린 대우증권 정기주주총회에서 60대 후반의 한 주주는 물러나는 손복조 사장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였습니다.
이 주주는 발언권을 얻어 "대주주인 산업은행측에 사장 교체 건을 따져 묻겠다"고 했지만 이날 산은측은 대리출석을 한 관계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특유의 활달한 목소리와 기운으로 주총을 이끌던 손복조 이사회 의장은 이 주주의 발언으로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 했습니다. 말이 일순 끊긴 채 숨을 고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일을 잘했구나. 주주들로부터 애정어린 말을 들으며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나게 됐으니 다행이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손 사장은 2004년 6월 취임한 뒤 대우증권을 숨가쁘게 몰아 왔습니다. 뛰어난 리더십과 추진력 그리고 시장예측능력을 발휘하며 대우증권을 다시 업계 1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자기자본을 취임 당시 1조원대에서 현재 2조1500억원으로 2배 이상 늘렸습니다.
손 사장의 능력은 특히 그의 예측력에서 돋보입니다. 취임 직후 증시 여건과 전망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위탁매매(브로커리지) 업무에 집중하는 '승부수'를 띄웠고, 이후 증시가 장기 상승하면서 회사를 흑자전환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주주들 입장에서 이런 성과를 낸 CEO를 따뜻하게 감싸안는 것은 당연합니다. 흑자를, 그것도 사상 최고 실적을 2년 연속 거두며 짭짤한 배당을 나눠줬고, 주가도 많이 올랐으니까요. 게다가 미래성장을 위한 동력을 마련했으니 주주 입장에서 손 사장은 '최상의 수익제조기'로 여길 법합니다.
물러나는 손 사장은 한국 CEO 시장에서 남다른 성과를 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연임 유력에서 고배를 마셨음에도 깔끔한 매너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박수갈채를 받을만 합니다.
CEO에 대한 평가는 아주 복잡합니다. 단기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회사와 조직의 미래 경쟁력을 높이는 안목도 요구됩니다. 화합과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고, 필요할 때마다 공격전략과 방어전술을 유연하게 펼치는 민첩성도 갖춰야 합니다. 하지만 CEO는 무엇보다 '성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습니다. 이런 점에서 손 사장은 '최고의 CEO'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산은측은 차기 사장공모에서 합리적이고 유연한 감각을 갖춘 인물을 중시했다고 합니다. 공격적인 전략으로 돌파력을 발휘하는 '뚝심형'인 손 사장이 처음부터 배제됐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던 만큼 그 속에 뭔가 심각한 문제점이 잠복해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남의 영역을 빼앗아 자신의 영토를 넓히는 작업은 생각만큼 쉬운 작업은 아니니까요.
그렇다 해도 손 사장의 퇴임은 왠지 찜찜함을 느끼게 합니다. 주주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은 아니라 해도 "한국 시장에서 CEO가 언제쯤 제대로 대접받는 시대가 올까"하는 상념입니다.
손 사장은 주총이 끝나자마자 9시 35분께 회사 정문을 빠져나와 정든 직장을 공식적으로 떠났습니다. 급히 차에 오르려는 손 사장을 붙잡고 악수를 청했는데요. "어디로 가십니까"는 우문에 "이제 백수야, 놀아야지"하는 대답은 시원한 듯 아렸습니다. 왜 그렇듯 황망히 떠나야 했는지, 그의 가슴에는 어떤 감정들이 떠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참았습니다. 떠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할까요.
이승제기자 opene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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