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이 미디어를 휩쓸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강한 아버지’를 표방한 재벌 총수의 패륜이 연일 헤드라인 뉴스를 도배하는 시국까지, 올 봄 대한민국은 아버지 천하다.

올 봄 개봉한 한국영화의 트렌드는 한 마디로 ‘아버지’다. <아들>, <눈부신 날에>, <날아라 허동구>는 모두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아이를 투톱으로 내세웠다. 장애인과 그 아버지를 다룬 권용국 감독의 장편 데뷔작 <파란 자전거>와 이미 설부터 개봉이 미뤄진 <이대근, 이댁은>까지 정말 개봉작은 온통 부성애 타령뿐이다. <우아한 세계> 역시 그렇고, 실은 지난해의 초대박 <괴물> 또한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가정의 달이면 으레 가족애를 강조한 작품들이 꼭 나오기 마련이지만, 올 봄은 유독 부성애가 판을 친다. 그것도 하나같이 ‘신파’를 내세워 아버지의 눈물을 강조 또 강조한다. 영화만이 아니다. KBS 메인 뉴스는 5월 들어 <우리 시대의 아버지>라는 집중 기획까지 마련했다. SBS는 메인 뉴스는 <新 모계사회>라는 기획으로 아버지들의 입지가 좁아진 세태를 역으로 반영했다.

오죽하면 김승연 회장 부자까지 천인공노할 자신들의 폭력을 ‘부성애’로 포장하려 들었을까. 재벌 총수의 제왕적이고 초법적인 ‘부성애’를 강조한 한화 그룹의 뻔뻔함과 반성하지 않는 총수 부자야말로, 실은 일그러진 ‘아버지 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반면교사인 셈이다.

그런데 왜 다시 ‘아버지’인가?
한때 아버지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IMF 직후 이 땅의 아버지들은 파산의 책임을 홀로 짊어져야 했다. 그 즈음 김정현이라는 형사 출신 소설가의『아버지』가 출간돼 6개월 만에 1백만 부나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아버지들은 연민의 대상이었다. 또한 모든 아버지가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열심히 일했으나 파산의 빚더미만 떠안게 된 아버지, 가족을 위해 살아왔으나 방 한 칸이 없어 식구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아버지는 무능하기만 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가장의 실직 앞에서 눈물만 흘리던 전업주부를 그 10년은 생활력 강한 독한 엄마들로 바꿔 놓았다. 아버지처럼 어느 날 갑자기 ‘끈 떨어진 연’이 되지 말라고, 영어 학원에 어학연수에 유학에 오직 아이를 ‘엘리트’로 만들기 위한 독기만 남은 엄마들 때문에 남편은 ‘기러기’가 되어 말없이 돈만 부치는 존재가 된 지 오래다.

현재의 아버지 열풍 뒤에는 뜻하지 않게 바뀌어버린 세태가 반영돼 있다. 초라한 아버지, 자식 앞에서 권위는커녕 아버지로서의 권리조차 내세우지 못하는 아버지들을 그나마 자식과 소통시키기 위해 영화는 의도적으로 ‘엄마’들을 뺐다. 물론 작품 속의 아버지들은 젊은 시절 혹은 아이의 출생 시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그래서 자식에게 눈물로 속죄하는 신파 배우가 됐다. 그 아버지들이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이다.

그렇다. 오늘 아버지들은 본의 아니게 아이를 무조건 사랑해 주는 역할을 떠맡게 됐다. 아이를 지독하게 관리하고 조련하는 스케줄 매니저인 엄마들 뒤에서 말없이 아이를 품어주는 역할을 ‘대신’ 수행하게 된 것이다. 아이를 명문대에 보내는 최고의 조련사가 최고의 장한 엄마로 각광받는 시대다. ‘모성’이 변질돼 공석이 된 자리에 부성애가 그저 스며들었다고나 할까?

이제 집안에서 목소리 큰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다. 극성엄마들의 시대에, 아버지들은 오직 미디어에서만 대접받고 위로 받고 있다. 다만 이 ‘부성애’ 영화들은 70년대식 눈물의 신파로 영화 속의 갈등도 현실의 허탈함도 달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폭력적이고 신속한 ‘직접 복수’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강행한 한 재벌 총수의 패륜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화젯거리가 된 것도 이들 영화들의 불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