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건(高 建) 전 국무총리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 대한 `정면대결'의 길을 선택했다.
고 전 총리는 22일 자신의 기용을 `인사실패'로 규정한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대통령 발언은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란 취지의 개인성명을 내면서 반격에 나섰다.
그는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정을 전단(專斷)한 당연한 결과"라면서 `노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돌다리를 두드린 뒤에도 건너지 않는다'는 신중한 성격의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 발언이 언론에 보도된 지 14시간만에 강경한 내용의 성명서를 낸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해 고 전 총리측은 "고 전 총리는 어제 밤 늦게까지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수렴했다"며 "사실과 다른 대통령의 말이 국민에게 잘못된 인상을 남길 수도 있으니 직접 입장을 발표하자는 의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고 전 총리의 발빠른 강경대응은 노 대통령의 발언이 향후 정계개편에 미칠 영향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현재 열린우리당이 진로를 둘러싸고 통합신당파와 당 사수파로 나뉘어 세대결을 벌이는 양상에서 노 대통령의 `인사실패' 발언은 고 전 총리를 유력한 차기주자로 간주하고 있는 신당파의 기세를 꺾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안정적 개혁을 위한 모임'(안개모) 소속의 한 초선 의원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고 전 총리 때문에 범여권이 그나마 버텨나가고 있는데 노 대통령이 정신나간 소리를 했다"고 고 전 총리를 적극 거들었다.
특히 최근 우리당 내에서 정운찬(鄭雲燦) 전 서울대 총장이 `제3후보'로 급부상한 상황도 고 전 총리의 강경대응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자칫하면 범여권후보로서 고 전 총리의 위상이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노 대통령의 발언에 강경대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각에선 고 전 총리가 이번 사건을 노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와의 인연을 완전하게 끊는 계기로 삼을 것 같다는 분석도 제기하고 있다.
고 전 총리는 최근 자신의 지지율이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대해 "언론에서 나를 범여권 후보로 분류하기 때문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해왔다.
물론 고 전 총리는 노 대통령과 우리당 내 친노(親盧) 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숨기지 않았지만, 참여정부 초대 총리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했기 때문인지 일정한 선을 넘지는 않았다.
고 전 총리의 한 측근은 "참여정부 초대 총리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며 "노 대통령의 발언 때문에 이제 부담없이 `이혼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고일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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