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경제부가 `정치권의 합의'를 전제로 고액권 발행에 반대하던 입장을 선회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빠르면 오는 2008년에는 10만 원권이 나올 전망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논란이 지속되며 국력을 소모시키던 현안의 하나가 마침내 타결된다니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이다. 경제 규모나 사회의 투명도 등에 비춰 한국도 이제는 고액권을 발행할 때가 됐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최고액권인 1만 원권이 등장한 것은 지난 1973년이다. 다른
나라들은 물가 등을 감안해 수시로 고액권을 발행하는 터에 우리만 유독 30년 넘게
1만 원짜리 최고액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제협력개발기구(OEC
D)회원국 가운데 액면가치가 가장 낮은 최고액권을 보유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
다. 최고액권의 액면가치가 워낙 낮은 탓으로 수표가 은행권 대용으로 쓰이는 현상이
일반화돼 있는 나라는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를 제외하면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대목에서는 민망해지기까지 한다.
1만 원권이 처음 나왔을 때와 지금은 우리 경제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국
내총생산(GDP)은 60배, 1인당 국민총소득(GNI) 40배 이상으로 각각 커졌고 물가는
12배나 뛰어올랐다. 쌀 한 가마(80㎏)를 사려면 당시에는 만 원짜리 한 장으로 거뜬
했으나 지금은 20장 가까이 세야 한다. 봉급장이든, 장사꾼이든 웬만하면 누구나 지
갑에 10만 원짜리 수표 한 두 장에서 많게는 수 십 장씩 넣고 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폐는 3년 이상 통용되지만 재사용이 불가능한 수표는 평균 유통기간이 10일
에도 못 미쳐 매년 수표 발행과 사후 관리에 4천억 원이 소모되고 있다. 그러나 고
액권이 나오면 이와 함께 현재 지폐 유통의 90% 이상(액면 기준)을 차지하는 1만 원
권의 발행을 절반 정도로 줄이는 데에 따른 연간 400여억 원도 절감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은행들이 물리고 있는 수표발행 수수료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의 부담이 되
고 있지만 앞으로 경제 규모가 계속 커지고 물가도 올라가면 수표 발행은 더욱 늘어
나고 국가적 낭비와 소비자의 부담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반 상거래
에서 지폐를 세거나 많은 돈을 소지.보관하는데 따른 불편을 덜 수 있다는 점도 결
코 무시할 수 없는 고액권의 매력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고액권 발행이 미뤄지고 있는 것은 물가를 자극하고 뇌물 수
수나 탈세, 화폐 위조 등의 범죄를 조장할 우려가 있어 시기상조라는 재경부와 정치
권 일각 및 시민단체 등의 반대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포기
하는 사회라면 무슨 발전을 기대하겠는가. 편익과 비용을 비교해 편익 쪽이 훨씬 더
크다면 추진하는 게 마땅하다. 유로화 도입에 따른 유럽 국가들의 물가상승률은
0.2%에 불과했다고 한다. 뇌물이나 탈세, 위폐 등의 범죄 행위도 사회의 투명성 제고
와 위폐 방지 기술 및 수사 기법 향상, 범죄에 대한 엄중 처벌 등으로 해결할 과제일
뿐이지 고액권 발행을 더 이상 미룰 핑곗거리는 못 된다. 한국은행은 진작부터 5만
원권이나 10만 원권의 색상과 크기까지 정해 놓았다고 한다. 세계를 경탄시킨 우리
의 경제 발전과 성숙한 시민의식에 걸맞은 고액권을 하루 빨리 보게 되기를 기대한
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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