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미국생활 접고 `은퇴문제 NGO' 설립
"노후자금 10억설에 귀 기울일 필요 없어"
"은퇴는 자랑스러운 것...도전 정신 필요"
최근 국내의 한 생명보험 회사가 풍요로운 은퇴자금으로 연간 5천600여만원(월 466만원)을 제시하자 사과문 게재를 요구하는 단체가 있었다. `대한은퇴자협회'(KARP)다.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내시렵니까'를 모토로 내걸고 은퇴문화 정착 활동을 펴고 있는 이 단체는 "월 466만원은 한창 벌이를 하는 젊은 층도 좋은 직장에나 근무하고 있어야 될 수입"이라면서 "골프 치고 해외에 두 차례씩 나가고 가사 도우미로 생활하는 은퇴생활이 상식적이냐"고 묻는 성명을 냈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에 상업적 목적을 띤 노후자금 계산이 이미 은퇴를 한 장노년층은 물론 은퇴 준비계층까지 당황케 하고 많은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있다고 성명은 꼬집었다.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주명룡 회장을 만나 `은퇴 문제'에 대해 물어봤다.
주명룡 회장은 대한항공 국제선 사무장을 그만두고 1981년 미국에 이민을 갔다가 2001년 귀국, 이듬해 1월 국제 NGO(비정부 기구)인 대한은퇴자협회를 만들었다. 뉴욕에 살면서 어느 날 "인생이 이렇게 가는구나"는 생각이 들어 `미국은퇴자협회'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 계기였다. 뉴욕한인회장, 한인식품협회 대표 등으로 미국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주 회장은 96년 뉴욕에 대한은퇴자협회를 설립했다. 이 때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토대로 장노년층 복지나 은퇴 문화가 일천한 한국에서 5년 전 첫 `은퇴문제 NGO'로 닻을 올린 것이 바로 대한은퇴자협회다.
"언제부턴가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는 10억원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습니다.하지만 이런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노후를 보낼 조그만 집만 있다면 노부부가 살기에는 3억-4억원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10억원이 필요하다는 말에 기죽어 살거나 위험한 투자로 재산을 날리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연간 은퇴자금으로 5천600만원을 이야기했던 생명보험회사는 대한은퇴자협의의 항의에 `회사의 공식 의견이 아니다'고 해명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은퇴, 노후대비라고 하면 경제적인 문제, 다시 말해 `돈'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주 회장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그는 은퇴 이후 삶에 대한 걱정이나 어둡고 부정적인 면보다는 희망이나 밝고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너무 `돈 돈'하며 살 필요는 없습니다. 잔칫날 잘 먹기 위해 사흘을 굶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처럼 노후를 준비하다 지금의 황금같은 시기를 배고프게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은퇴후 또는 남은 생을 어떻게 할 것이냐, 내가 누구냐, 하고 싶은,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등을 먼저 따져보고 그에 따라 남은 삶의 방식 등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 `돈 돈'하며 살 필요 없다는 이유를 주 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앞으로 정년이 늘어난다. 선진국의 추세를 봤을 때 지금의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는 시기인 향후 10년 사이에 정년은 선진국처럼 65세에 다가설 것이다. 또하나는 앞으로 사회보장제도가 경제 성장에 비례해 향상될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다 은퇴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도 갈수록 바뀌고 있다. 지금의 30대, 40대, 50대는 노후를 자식한테 기대려는 생각도 적고 노년에 대비한 재테크에도 열심이다.
주 회장에 따르면 이에 비해 가장 딱한 세대는 지금의 60대 이후 세대다. 해방전 세대인 이들은 어렸을 때 보릿고개로 고생했고 4.19, 5.16을 거쳐 잠깐 반짝하고는 사회에서 내밀린 데다 자식들도 돌봐주지 않고 그렇다고 국가가 먹고 살 만큼의 보장도 못해주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60세 이후 세대는 왜 처지가 딱한가. 주 회장은 우리 정부가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그는 "정부의 노년층 대책에는 립서비스가 너무 많다"면서 "정부가 내놓은 기초노령연금은 말이 연금이지 8만5천원 주면서 그것도 75세 이상에만 주면서 어떻게 그것을 연금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정부가 내년에 1조6천억원을 투입해 2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기로 한 데 대해서도 "9개월 정도면 바닥을 드러낼 재원과 한시적인 일자리를 과연 지금의 장노년층이 진짜로 원하는 일자리다운 일자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던진다. 그는 "일자리는 기업이 만들어야 하는 게 원칙이며 정부가 세금을 거둬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일시 방편일 뿐"이라면서 청년실업보다는 `가장의 실업'에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때라고 강조한다.
"기업도 나이든 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 기업이 고임금을 내세워 나이든 사람을 밀어내고 있지만 기업주는 60대, 70대이면서 그렇게 하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임금 피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 든 사람을 직장에 오래 있게 할 수 있는 좋은 제도인데 우리 기업에는 이것이 임금 삭감제 또는 임금 평가제로 왜곡되고 있습니다."
주 회장은 은퇴는 새로운 출발,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은퇴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서는 은퇴한 세대를 `Regeneration 세대'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재도약 세대'라고 의역합니다만 그동안 해왔던 일을 이제 끝내고 제2, 제3의 도약을 한다는 뜻이지요. 또다른 말로는 `르네상스 세대'로 불리기도 합니다. 중년과 노년기 사이에 있는 보너스 세대라는 말입니다."
환갑을 넘긴 나이이지만 주 회장의 웃음은 맑다. 선 굵은 목소리에는 힘이 느껴진다.
"은퇴 시기를 `제2의 사춘기'로 비유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10대 때의 사춘기가 목소리가 바뀌고 이성을 생각하며 신체구조가 변하는 시기라면, 피부 노화와 사회적 소외감, 열등감,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아 내가 인생의 큰 전환기에 들어섰구나'하고 실감하는 게 제2의 사춘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은퇴를 어둡고 절망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남은 시간을 자기 발전을 위해, 사회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Golden Years'(황금기)로 봅니다"
대한은퇴자협회는 은퇴한 사람들의 기를 살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명함갖기 운동'이다.
"지금의 장노년들은 70-80만원짜리 일자리가 어디 있는지, 남한테 내밀 수 있는 명함이 있었으면 하는 게 최대 관심입니다. 이런 일자리나 마땅한 명함이 없으면 마치 죄나 지은 것처럼 주눅이 들어 처신합니다. 하지만 명함이 왜 없습니까. 누구나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 집전화, 집주소를 담은 명함이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체념할 것이냐 도전할 것이냐의 마음 자세입니다"
주 회장은 은퇴는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은퇴는 찾아오지만 은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면서 "뭔가 인생에서 정점을 찍은 사람에게 은퇴의 의미가 있으며 이 의미를 느끼는 사람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용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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