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연합뉴스) 조성미 기자 = "남편을 살려주신 한국인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길에서 쓰러진 뒤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채 생면부지의 한국 의료진의 보살핌덕에 1년 넘게 식물인간 상태로 생명을 부지해 온 러시아 남성이 의식이 있는지 여부가 불분명한 채 8년 만에 아내와 상봉했다.
30일 오후 부산의료원 중환자실에 찾아온 타마라 데르길예프(40.여)씨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식물인간이 돼 누워있는 남편 알렉산드르씨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되뇌었다.
그가 남편과 헤어진 것은 2000년 남편이 돈을 벌어오겠다며 한국으로 떠나면서다. 조선소와 농장을 전전하며 어렵게 생활했지만 고향의 아내에게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던 남편으로부터의 연락이 2001년 12월부터 갑자기 끊겼다.
타마라씨 등 가족은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에 남편을 찾아 한국에 갈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수년째 연락이 없자 고향인 러시아 극동 콤소몰스크 나 아무르 법원은 급기야 3년 전부터 알렉산드르씨를 행방불명자로 분류하고 연금을 지급해왔다.
타마라씨는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을 8년 만에 TV 화면에서 다시 만났다. 2주 전 한 러시아 방송이 "한국 부산에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행려병자가 가족을 찾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환자 사진을 방영했는데 그리던 남편과 꼭닮아 있었던 것.
타마라씨는 방송국을 통해 남편이 입원해있는 부산의료원에 함께 찍은 사진을 보냈다. 당사자는 의료진이 보여주는 사진에 의미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부부라는 심증에서 부산 러시아영사관이 비자를 발급, 타마라씨는 29일 한국땅을 밟게 됐다.
아내가 나타남으로써 제 이름과 나라를 찾게 된 알렉산드르씨는 지난해 1월2일 밤 부산 서구 암남동 사조 물류창고 앞에 뇌출혈로 쓰러져 있는 채로 발견돼 고신대복음병원에서 긴급 뇌수술을 받았으나 눈만 뜨고 있을 뿐 아무런 의사표현도 못하고 기계에 의존해 연명하는 식물인간 상태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병원비 때문에 행려병자 의료비를 지원하는 부산의료원으로 옮겨진 그는 최근 폐렴이 심해지고 가슴에 공기가 차 생명이 위독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의식이 있는지 여부는 여전히 분명치 않지만 증세는 다소 호전된 상태다.
타마라씨는 8년 만에 눈 앞에 나타나 눈물을 흘리는 자신과 눈을 맞추고 부여잡은 손에 힘을 주는 등 남편이 몸은 부자연스럽지만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을 다시 만나 기쁘고도 슬프다. 외국인인 남편에게 한국 이름(이석희)도 지어주고 천주교 세례까지 받게 해 준 한국인들에게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의료진과 간병인의 손을 부여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타마라씨는 2주간 부산에 머물면서 남편과 친자확인을 위해 러시아에서 가져온 딸의 혈액을 유전자 검사 의뢰하고 남편을 본국으로 데려가는 문제를 고민할 예정이다.
알렉산드르씨의 주치의인 부산의료원 신경과 주환 과장은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장시간 비행기 여행을 하기가 당분간 무리일 것으로 보이나 최상의 상태가 되면 가족의 선택에 따라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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