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방송 본 부인 "행방불명된 내 남편..한국 갈 것"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 "우리는 아빠가 살아있을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식물인간이 된 `신원불명'의 한 외국인 노동자가 사고를 당한 지 1년 4개월 만에 신원이 밝혀져, 한국에 돈 벌러 온지 8년 만에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됐다.
러시아인 알렉산드르 데르길예프 씨가 부산시 서구 암남동 사조물산 창고 앞 거리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가 경찰관에 발견돼 부산 고신대 복음병원 응급실로 실려온 것은 지난해 1월2일 새벽.
의료진은 뇌출혈과 심장마비, 저산소증 등으로 위독했던 데르길예프 씨의 생명을 구해냈지만 그는 스스로 호흡만 할 수 있을 뿐 운동기능이 정지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기는 하지만 의미없는 눈맞춤이었고 아무런 의사표현도 할 수 없었다.
러시아 선원이 많이 찾는 지역에서 발견됐고 외모도 러시아인으로 추정됐으나 소지품에선 신원을 알려줄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병원 측과 부산 외국인 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등은 40대 후반 50대로 추정되는 그의 신원 파악을 위해 인터넷에 사진을 올렸고 연합뉴스 등 언론을 통해 국내에서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러시아 영사관 측도 그가 러시아인임을 증명해 줄 어떤 서류도 없다면서 도움을 거절했다.
데르길예프 씨는 지난 2월 국가가 운영하는 부산의료센터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며, 병원 측은 신원 불명인 이 남자의 이름을 편의상 `이석희'로 불러왔다.
부산의 한 외국인 노동자 인권모임상담소로부터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러시아 국영 TV 베스티가 3월초 사연을 방송했다. 얼마 뒤 이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자신과 남편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으며, 이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그 결과 놀랍게도 그는 이미 고향인 극동 `콤소몰스크 나 아무르' 현지 법원에서 행방불명자로 분류돼 러시아 연방 정부가 3년째 그의 가족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있는 상태였다.
지난 2000년 돈벌이를 위해 한국을 찾은 그는 조선소와 농장을 전전하는 등 어렵게 생활했지만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 안부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2001년 12월부터 가족과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다. 가족들의 걱정은 컸지만 그를 찾아 한국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데르길예프 씨가 왜 사고를 당했으며, 쓰러지기 전까지 5년여 동안 왜 가족과 연락을 끊었는 지 등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불행중 다행으로 데르길예프 씨는 돈을 벌러 한국에 온 지 8년, 사고를 당한 지 1년여 만에 식물인간 상태에서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됐다.
부인 타마라 씨와 딸 다샤 씨는 27일 베스티 TV와의 인터뷰에서 "아빠가 살아있을 것으로 믿어왔다"면서 한국으로 갈 날을 손꼽았다.
일간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앞서 26일 데르길예프 씨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부산의 외국인 상담소와 그의 고향 행정당국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 그의 가족들을 위해 한국행 비행기표와 유전자 검사 비용을 일부 지원해 주기로 했다고 전했다.
부산의료센터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데르길예프씨는 현재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으며, 거의 식물인간 상태로 봐야 할 것 같다"면서 "가족들이 올 때까지 그가 버틸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치료비와 입원비가 수천만 원에 달하지만 이 러시아 환자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국내 행려환자에게 지원되는 정부 지원금을 받도록 해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hyun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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