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북한이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제안한 연락사무소 설치 구상을 거부하면서 남북관계에 드리워진 냉각기류가 더욱 짙어지는 양상이다.
북한이 강한 비난과 함께 연락사무소 구상을 거부한 상황에서 지난 19일 한.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간 대화 재개 방안을 검토해온 정부의 움직임은 일단 장애물에 봉착했다.
현안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남북 고위급 대화 또는 인도적 지원 협의를 위한 대화 등을 먼저 제안할 수도 있지만 정부 당국자들이나 전문가 모두 그 가능성 보다는 일단 정부가 상황을 관망할 가능성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6자회담 프로세스와 그에 맞물린 북.미 관계는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백악관이 최근 북한의 대 시리아 핵협력 정황을 공개하면서 부시 행정부의 북핵 정책에 대한 미국내 강경파의 견제가 변수로 떠올랐지만 현재로선 북한의 핵 신고를 전후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방침을 의회에 통보하게 될 가능성을 점치는 시각이 다소 우세하다.
북.미 관계정상화를 위한 과정이 본격 시작될 문턱에 와 있는 셈이다.
이 대통령이 연락사무소 구상을 천명한 지난 18일 이후 침묵을 지키던 북 측이 8일 만에 강한 어조로 반대 입장을 밝히고 대남 비난 공세를 강화하는 것은 북.미 관계 진전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이 섰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북.미 관계가 속도를 내는 반면 남북관계의 경색은 길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조성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한동안 잠잠하던 북한이 다시 남측을 향해 도발적 행동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내 놓고 있다.
다만 북한의 대남 요구가 `6.15와 10.4 선언 이행의지를 밝히라'는 쪽으로 수렴되고 있어 이 문제에 남북이 타협점을 찾을 경우 남북관계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노동신문이나 북한 매체들의 보도를 보면 남측과 대화자체를 거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6.15 선언과 10.4선언 이행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표명할 것을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걸고 있는 듯 하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가 연락사무소 카드로 북에 공을 넘겼다면 북은 다시 6.15, 10.4 선언 이행에 대한 의지를 먼저 표하라며 남측 코트로 공을 넘겼다는 얘기다.
정부는 한 번도 6.15, 10.4 선언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지만 지난 달 26일 통일부 업부보고에서 이 대통령은 "기본합의서와 그 이후에 정상이 합의한 합의문이 있다"면서 "가장 중요한 기본 남북간 정신은 1991년 체결된 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해 기본합의 이행에 더 무게를 뒀다.
그리고 북핵 진전, 경제적 타당성, 재정부담 능력, 국민 동의 등 경협 4대 원칙을 천명하면서 10.4 선언에 명시된 여러 경협 사업을 사실상 `조건부' 이행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공개된 대통령의 발언 등을 근거로 사실상 정부에 6.15, 10.4 이행 의지가 희박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북한은 공산권 붕괴로 자국에 불리해진 대외 환경 속에 연형묵(2005년 사망) 당시 정무원 총리가 서명한 기본합의서와 남북 화해의 흐름 속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서명한 6.15, 10.4 선언 중 이 대통령이 전자에 무게를 둔 데 대해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그런 관점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비록 정권이 교체됐지만 새 정부가 6.15, 10.4 선언 또한 남북 정상간 합의임을 들어 원칙적인 선에서 이행의지를 밝힘으로써 남북관계를 긍정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동국대 고유환 교수는 "북한이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정부가 6.15, 10.4선언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남북관계 재정립이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과거의 합의문서는 그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니 그대로 인정하고 새 시대에는 새로운 상황을 반영한 합의문을 만들면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방안도 그다지 간단하지 만은 않아 보인다.
정부가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보이기 보다는 새로운 남북관계 관행을 만들기 위해 일정 부분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는 쪽으로 대북정책을 펼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북한이 요구하는 두 합의문에 대한 기존 입장을 유지하면서 의연하게 북한의 태도변화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결국 정부가 향후 북핵 프로세스의 진전 여부, 북한의 태도 등을 당분간 지켜보면서 현재의 원칙적 대북정책 기조를 밀고 가느냐, 아니면 6.15, 10.4선언에 대한 입장 정리와 함께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풀어가기 위해 유연성을 보일지를 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북한 전문가는 "정부가 비핵화와 남북관계를 연계한 만큼 남북관계를 풀어가려면 차기 6자회담 개최를 전후해 비핵화 프로세스가 진전을 이룰 때가 적기"라면서 "그 시기를 넘길 경우 올 하반기에는 북핵 프로세스도 관리기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아 남북관계를 풀 기회를 찾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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