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연합뉴스) 이기창 특파원 = 사상 최초의 여성 미국 대통령에 도전하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펜실베이니아 경선에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검은 돌풍'의 주역 버락 오바마에게 밀려 거의 벼랑 끝까지 몰렸던 뉴햄프셔와 오하이오에서 천금 같은 승리를 연출하며 기사회생했던 힐러리는 '지면 끝장'이었을 펜실베이니아에서도 또다시 승리를 일궈내며 첫 여성 대통령을 향한 희망의 불씨를 지켜냈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 경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쪽으로 기운 민주당 후보 경선의 대세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힐러리로선 경선 종반 승부처인 펜실베이니아에서 압승해야만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가까스로 10% 격차를 내는데 그쳐 앞으로도 당내 사퇴압박과 자금난을 이겨내며 경선 레이스를 펼쳐야 하는 처지가 계속될 전망이다.
민주당으로서도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일찌감치 후보로 확정한 공화당에 비해 당내 경선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와 자금을 투입하는 소모전 끝에 11월 본선을 치러야 하는 부담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 힐러리 재기, 오바마 우세는 여전 = 펜실베이니아 경선은 힐러리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승부였다.
대의원 수에서 오바마에게 이미 100명 이상 뒤진 상태에서 158명의 대의원이 걸린 펜실베이니아에서 진다면 추격의 희망은 사실상 사라질 판이었다.
게다가 펜실베이니아는 인구 구조상 힐러리의 전형적인 지지기반이 밀집된 지역이다. 백인 중산층과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미국 내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높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진다면 힐러리의 정통 지지기반 마저 오바마에게 잠식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향후 경선은 해보나 마나 오바마 우세로 끝날게 뻔했다.
그러나 힐러리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이겼다. 캘리포니아와 뉴욕, 텍사스, 플로리다, 오하이오, 미시간 등 '승자 독식' 방식인 11월 본선에서 중요한 대형 주들에서 이긴데 이어 펜실베이니아에서 승리함으로써 오바마보다 본선경쟁력이 앞선다는 주장의 근거를 확고히 했다. 자신의 본선 경쟁력을 내세워 슈퍼 대의원들을 집중 설득하며 최후의 대역전을 노릴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문제는 펜실베이니아 승리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힐러리는 지지 대의원 수에서 오바마에게 이미 100명 이상 뒤져 있다. 앞으로 남은 9개 지역 경선을 다 이긴다 해도 열세인 대의원 수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은 경선도 오바마가 유리한 곳이 많기 때문에 펜실베이니아에서 압승해 대의원 격차를 줄여야 했지만 실제로 좁힌 대의원 격차는 10명 안팎일 것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펜실베이니아는 원래 힐러리가 20% 이상 오바마를 앞섰던 곳이다. 적어도 두 자리 수 이상의 승리를 거뒀어야 확실한 추격의 동력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결과는 10%차 승리였다. 힐러리로선 불안한 승리이고, 선전한 것은 오바마라는 분석도 그래서 나온다.
◇ 오바마-힐러리, 경선 드라마 향방은 = 오는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려면 2천25명의 대의원을 확보해야 한다.
AP통신과 CNN이 펜실베이니아 경선 직전 집계한 지지 대의원 수는 오바마가 각각 1천648.5명과 1천648명, 힐러리는 1천509.5명과 1천504명으로 힐러리가 139-144명 오바마에게 뒤져 있다.
앞으로 남은 경선은 5월6일 노스 캐롤라이나(134명)와 인디애나(83명), 5월13일 웨스트 버지니아(39명), 5월20일 켄터키(60명), 오리건(65명), 6월3일 몬태나(24명)와 사우스 다코타(23명) 등 7개 주 뿐이다. 미국령 괌(5월3일.9명)과 푸에르토리코(6월7일.56명)를 합치면 9개 지역의 경선이 남아 있다.
남은 경선을 힐러리가 다 이겨도 대의원 수에서 오바마를 역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노스 캐롤라이나와 오리건, 사우스 다코타 등 대의원 수가 많은 주에서 오바마의 승리가 예상돼 대의원 격차는 줄어들기 보다는 더욱 벌어질 가능성마저 있다.
이런 상황에서 힐러리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슈퍼 대의원들이다.
경선 투표로 뽑는게 아니라 당연직인 슈퍼 대의원 쟁탈전에서 오바마를 압도해야만 후보 지명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전현직 민주당 대통령, 주지사, 상하원 의원, 당 간부 등인 슈퍼 대의원들도 최근 속속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고 있다.
힐러리는 올해 초만 해도 슈퍼 대의원 경쟁에서 훨씬 앞섰지만, 이제는 힐러리 254명, 오바마 230명(CNN 집계)으로 거의 비슷해졌다. 최근 추세라면 슈퍼 대의원 지지도 오바마가 머지않아 앞서나갈 전망이다.
게다가 힐러리는 자금력의 열세마저 심화되고 있다. 선거자금 모금에서 오바마의 절반 수준에 그치는 반면 지출이 많아 선거 빚이 쌓이기 시작한 것으로 3월 재정보고서에서 드러났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들이 겹치면서 힐러리에 대한 중도 사퇴 압박은 갈수록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소모적인 경선 혈투를 계속하기보다는 빨리 후보를 결정해 11월 본선에 대비해야 한다는 당내 요구가 벌써부터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힐러리가 이 같은 사퇴 압박을 어떻게 이겨내며 반전의 기회를 마련하느냐가 남은 과제인 셈이다.
힐러리의 전략도 불리한 경선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고가면서 언젠가 찾아올 반전의 기회를 노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경험이 부족한 오바마가 그런 과정에서 결정적 실수를 한다면 힐러리로서는 역전의 기회를 잡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직 하다.
◇ 앞서가는 매케인, '여유 만만' = 일찌감치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오바마와 힐러리의 접전을 은근히 즐기는 표정이다.
오바마와 힐러리의 명운이 달린 경선 투표가 실시된 22일 매케인은 펜실베이니아주 인근의 오하이오를 방문해 민생문제를 챙기며 11월 본선을 겨냥한 대선 행보를 계속했다.
이번 주 '행동의 시간(Time for Action)' 투어에 나선 매케인은 전날 앨라배마의 시골지역인 '블랙벨트'를 방문한데 이어 이날은 오하이오의 쇠퇴해가는 철강산업 노동자들을 만나 자신이 경선전에서 기사회생한 것처럼 교육훈련을 통해 일자리를 되찾고 지역경제를 되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매케인의 입지가 단단해지면서 선거자금 모금도 꾸준히 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그는 오바마와 힐러리 두 사람 중 누가 11월 본선 상대가 될 것인지 느긋하게 기다리며 기선 제압을 위한 대선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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