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박종면편집국장]대학 저학년 시절 시를 많이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하룻밤에 시집 한 권을 읽은 다음 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대학노트에 옮겨 적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하니까 대학노트가 시집이 되었습니다. 김수영과 보들레르를 좋아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이 생각나 서점에 들른 김에 시집 하나를 사서 읽어봤습니다. 한 편도 채 읽지 못하고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 채 엉뚱한 생각만 하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 현실에 매달리지 않는 대담함과 창조성, 이런 게 많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시 읽기 만한 게 없는 데 20년 만에 다시 시집을 꺼내들었지만 시는 이미 멀리 달아나 있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요즘은 산문집을 읽고 있습니다. 김수영의 산문 가운데 1966년에 쓴 '벽'이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김수영의 작품에는 아내에 대한 얘기가 많은데 '벽'도 그중 하나입니다. 김수영이 1921년생이니까 46세에 쓴 글이고, 저같은 중년들에겐 특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 집 여편네를 보니까 여자는 한 마흔이 되니까 본색이 드러난다. 이것을 알아내기에 근 20년이 걸린 셈이다. 한 사람을 가장 가까이 살을 대가면서 알게 되기까지 이만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여자의 화장본능이 얼마나 뿌리 깊은 지독한 것인가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벽'을 보면 된다. '벽'이란 그 사람의 한계점이다. 고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숙명이다. 수없이 '벽'에 부딪치다 보면 인간 전체에 대한 체념 같은 것이 생긴다.
아내는 로션 마개를 노상 돌려놓지 않고 그대로 걸쳐 둔다. 아내가 닫고 나가는 방문은 늘 10센티가량 열려있고, 머리를 빗고 나간 자리에는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머리카락을 축축한 걸레로 훔쳐낼라치면 자개장에 박힌 자개를 떼내기보다 더 어렵다. 쥐어도 쥐어도 안 잡힌다. '벽'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면 나만 손해를 본다. 그래도 눈앞이 캄캄해지도록 화가 날 때가 많다. 이것도 또 나의 '벽'이다."
21명의 공기업 감사가 연수를 핑계로 남미 관광여행을 다녀왔다 해서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서울지역 7개 구청장은 용기있게도 남미로 출장을 가서는 공기업 감사들조차 포기한 그 유명하다는 브라질의 이과수폭포까지 보고 왔습니다.
출장이나 연수를 간다며 공공예산에서 비용까지 지원받은 다음 관광이나 하고 골프나 치는 일은 공기업 감사나 구청장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비단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요.
이들을 죽어라고 비난하는 국회의원도, 교수도, 기자도 다 고만고만합니다. 해외 유명 대학에 가서 1~2년씩 연수를 받거나 학위를 따겠다면서 비용을 지원받은 다음 장기 휴가를 보내고 오는 일도 흔합니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게 모두 우리 공직자의'벽'이고 정치인의 '숙명'이고 기자의 '한계점'이고 우리사회의 '막다른 골목'입니다.
언론에 대해 관심과 애정, 기대가 크다고 하면서도 앞뒤 가리지 않고 기자실을 통폐합하겠다고 나선 대통령이나 신생지라며, 인터넷매체라며 출입을 제한하는 등 여전히 폐쇄적으로 기자실을 운영하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 없이 기자실 통폐합만 비난하는 일부 기성 언론의 행태에서도 '벽'과 '한계점'을 봅니다.
40년 전 시인 김수영이 그랬듯이 결국엔 우리사회에 대해 체념 같은 것을 하게 되고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합니다. 화를 내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이게 나의 '벽'입니다.
박종면편집국장 m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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