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국회 시민사회 사이의 지속적 대화를 통한 합의, 대타협만이 국가 장기 비전의 생명력과 안정성을 보장해 줄 수 있다"
파블로 구에레로 세계은행 부총재 자문관은 3일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세계은행이 공동 주최하는 '21세기 국가 장기 발전 비전과 전략' 국제회의 참석에 앞서 공개한 발제문을 통해 이같이 강조했다. 아일랜드, 핀란드, 일본 등에서 참석한 해외 전문가들도 자국의 장기 비전 수립사례를 소개하며 사회적 합의를 위한 끊임없는 토론과 국가 지배구조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내 발표자들은 '비전 2030'의 달성을 위해 공적 제도와 기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기획예산처가 후원하는 이번 회의는 오는 4~5일 이틀에 걸쳐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KDI 대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다.
◇ 다양한 이해집단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구에레로 자문관은 "국가 비전은 정부 및 민간부문을 포괄하며 다양한 이해집단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을 때 더 효과적이고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며 "사회적 타협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협상력이 약한 이해당사자들을 배려해 대등한 참여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신뢰 구축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대부분의 혁신은 민간부문에서 창출되는만큼 비전 개발과 실행에 민간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강력한 유인 체계가 필요하다"며 민간과 공적 영역의 협력을 강조했다. 로난 라이언스 포르파스 경제연구위원은 아일랜드의 80년대 이후 성공적 사회적타협과 장기 비전 수립 현황을 소개했다.
라이언스 위원에 따르면 아일랜드는 20년~60년대에는 독립과 자급자족을, 80년대 들어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세계화를 내세워 전략적으로 미국 기업 유치 등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그러나 80년대 후반 노.사.정을 비롯한 여러 계층간 '사회적 협약'을 도출한 뒤 짧은 시간에 '켈트의 호랑이'로 불리며 경쟁력을 갖춘 국가로 성장했다.
21세기 초 다시 아일랜드는 지식과 교육 부문의 혁신을 통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장기 비전으로 정립하고 연구.개발(R&D)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카 매너마 매너마미래연구소장은 국가 장기 비전 수립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선구적 위치에 있는 핀란드의 경험을 소개했다. 핀란드는 지난 93년 정부가 제출한 '핀란드의 미래 선택' 보고서를 심의하기 위해 의회 안에 '미래위원회'를 따로 설치했고, 2002년 이를 상임위로 격상시켜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미래 연구를 시작했다.
매너마 소장은 "대의 민주주의 제도에서 미래 연구는 최소 20년의 관점에서 이뤄지는데 비해 정치는 최대 4년의 의원 임기에 좌우된다"며 정치적 이해 관계를 초월한 미래지향적 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카즈유키 모토하시 동경대 교수는 지난해 4월 발표된 일본의 21세기 비전의 내용을 주로 소개했다.
모토하시 교수는 일본의 비전이 ▲ 인구 감소를 대비한 생산성 중심의 경제 성장 ▲ 개방 경제를 통해 세계화된 사회로 이행 ▲ 국민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작고 효율적 정부 등 세 가지 전략을 기초로 삼았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21세기 비전에서 잠재성장률 예측이 과연 적정한지, 삶의 질 문제와 관련한 불평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세계화가 일본의 사회적 가치와 어떤 갈등을 빚을지 등에 대해서는 보다 심층적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며 일본의 비전 수립이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레르난도 빌라란 페루 컨설팅회사 SASE 대표는 페루의 경우 전 독재정권의 부패후유증, 불평등한 분배구조, 취약한 공공서비스 등으로 민주화가 지연되고 사회적 갈등이 커졌으나 최근 정부 및 정당, 시민단체 등 14개 기관이 미래비전 구축을 위한 국가 프로젝트 수립에 합의했다고 소개했다.
◇ 비전 2030 성공의 관건은 사회적 신뢰 회복
국내 주제발표자들은 '비전 2030'의 성격과 의의, 비전 달성을 위한 방법론 등과 관련 다양한 의견을 내놨다. 특히 '비전 2030'의 5대 전략 과제 가운데 하나인 '사회적 자본 확충'을 위해서 는 우선 공적 제도 및 기관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태종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사회적 자본은 네트워크, 제도, 규범, 신뢰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국가 비전 수립에 있어 그 자체로 중요한 정책 목표이자 여타 전략 과제와 중요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회적 신뢰, 특히 공적 제도에 대한 신뢰가 낮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지난 2001년 현재 한국의 사회적 신뢰 수준이 2.73으로 스웨덴의 6.63은 물론 일본 4.31, 미국의 3.36 등에 비해 매우 낮다는 한 연구기관의 분석 결과를 소개했다. 그는 "1980년대와 비교해 행정부와 입법부에 대한 사회적 신뢰 저하가 두드러지고 사법부, 군대, 경찰 등의 공적 기관들에 대한 신뢰도 떨어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며 "사회적 자본 확충을 위한 정책 과제로 정책 평가제도 개혁 및 역량 강화, 공적제도 개선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전 2030'과 같은 장기비전 전략 수립에 앞서 넓은 의미에서 국가 지배구조(거버넌스)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전략 수립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임영재 KDI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의 40%가 지방 R&D 예산에 배분되고 있지만 실제 지방 R&D 예산을 집행하는 주체들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효과적 거버넌스 구조가 결여돼 비효율적 측면이 많다"며 "장기비전 전략 수립이 의미를 가지려면 효과적인 거버넌스 구조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임 연구위원은 "국가 거버넌스 구조에 있어서는 단순히 정부 내 거버넌스 뿐만 아니라 정부-시장-시민사회 삼자간 상호 신뢰 관계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는 기업의 정부에 대한 신뢰, 일반 시민의 정부 및 기업에 대한 신뢰가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이념.빈부갈등 보다 실용적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김동영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정책 수립 및 집행에 있어 공공 갈등이 심할수록 그 국가 또는 사회의 효율적 문제 대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며 "공공 갈등 해결 능력의 향상은 국가 거버넌스 시스템 발전과 장기 비전의 핵심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우선 공공 갈등 해결에 있어 이념, 지역, 빈부 갈등 등의 근본적 갈등 해결에 집중하기 보다 실용적 문제 해결에 역량을 모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울=연합뉴스) 신호경 박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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