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에 속했던 유럽연합(EU) 신규 회원국들과 러시아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악화되고 있는 EU와 러시아 관계가 좀처럼 해빙의 계기를 찾지못하고 있다.

EU와 러시아는 18일 볼가강변 휴양지 사마라에서 정상회담을 열어 관계개선의 실마리를 찾으려했으나 EU 순회의장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이의 가시돋친 설전으로 분위기가 더 냉랭해졌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정상회의를 마친 후 푸틴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당국이 사마라에서 시위를 벌이려던 러시아 반체제 운동가들을 체포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메르켈 총리는 엄격한 표정을 풀지않은 채 "일부 인사들이 사마라에 오지 못하고 저지당한 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할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앞서 러시아 당국은 체스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 등 인권 운동가들을 모스크바 공항에서 체포했다.

이들은 사마라에서 러시아 정부의 인권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시위를 앞두고 자국 경찰이 취한 예방조치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면서 "반 크렘린 시위대들이 때때로 경찰의 행동을 부추기곤 한다"고 맞받았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는 경찰이 잠재적인 폭력시위대를 다루는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어떤 사람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았고 단순히 시위를 하러 오고 있는데 이를 막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푸틴 대통령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등 구 소련 위성국이었다가 EU에 가입한 신규 회원국들에서 러시아 소수민족의 인권이 탄압받고 있다면서 "이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유럽답지 않은 행위"라고 역공에 나섰다.

그는 특히 지난달 에스토니아 당국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러시아인 1명이 사망한데 대해 "그들은 시위대를 단순히 해산시킨 것이 아니라 시위참여자 1명을 살해했다. 그는 다쳤지만 도움을 받지못해 죽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에스토니아 거주 러시아인들은 지난달 말 에스토니아가 옛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소련군 참전 기념동상을 전격 철거한데 항의시위를 벌였다.

러시아는 당시 EU가 러시아에 대해 에스토니아의 내정을 간섭하지 말라면서 에스토니아 편을 든데 대해 격분했다.

에스토니아외에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등 구 소련권에 소속됐다 EU에 가입한 신규 회원국들과 러시아 사이에도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러시아의 육류 금수조치로 심기가 불편한 폴란드는 EU가 러시아와 포괄적인 경제협력을 위한 동반자 관계 협상을 시작하는 것을 막고 있다.

폴란드에 이어 리투아니아도 동반자협상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가세하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가 10개월 동안 자국 발전소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90년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시절에 체결된 EU와 러시아간 현 동반자협정은 올해 만료된다. EU 관리들은 협상을 시작하지 못하면 양측 모두 당혹스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신규 회원국들이 러시아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하도록 EU가 설득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은 "러시아는 EU가 단결의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신규 회원국을 두둔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러시아와 EU는 신규회원국 문제말고도 코소보 독립,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방어시스템 구축 문제 등을 놓고도 갈등을 빚고 있다.

이에 따라 양측은 이번 회담에서 동반자 관계 협상 등 주요 현안에 아무런 합의도 도출하지 못했으며 공동선언도 채택하지 못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을 연출했다.

EU 지도부는 러시아가 올 연말과 내년 봄 총선과 대선을 치를 예정이어서 관계개선이 쉽게 이뤄지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베니타 페레로-발트너 EU 대외관계 담당 집행위원은 "러시아가 선거를 앞두고 있어 민족주의적 감정이 분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브뤼셀=연합뉴스) sangi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