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는 말 그대로 ‘싸우는 사람’이다.
싸워야 하기에 투사는 앉아 있지 않는다. 또한 투사는 좋은 옷을 즐겨 입지 않는다.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을 들고 물을 마시는 자를 선택하여 전쟁에 임하셨다. 창을 놓고 물을 마시는 자는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싸우는 자는 항상 일어나 두 눈 부릅뜨고 적을 살핀다. 따라서 눈 감은 자나 드러누운 자는 투사가 될 수 없다. 호의호식을 바라는 자도 싸울 자가 아니다. 투사는 화려한 옷을 입지 않는다. 그저 허기를 채울 주먹밥 한 덩이면 족하다. 싸움에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은 투사가 아니고, 먹을 것을 싸고 지고 다니는 자는 싸울 자가 아니다.
투사는 싸울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진흙탕 속이든 메마른 산언덕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늘을 찾아, 편한 자리 편한 안식을 바라는 자는 싸우려는 의지가 없는 자이다.
투사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 칼이든 총이든 창이든 장소와 시기에 적합한 무기면 된다. 그래서 투사는 욕설도 마다하지 않는다. 상대를 흥분시키는 방법에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그저 다만 효율적으로 치고 베면 그것이 최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붉은 좌익들은 이 투사론에 정통한 자들이다. 그래서 상대의 약점을 찾아 가장 효율적인 공격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우익들은 성인군자를 원한다. 더럽고 치사한 짓을 마다하지 않는 좌익들에게 그들은 무력한 존재다. 빨갱이들의 치열한 공격에 외면하다가 결국 모두를 빼앗기고 만다.
그래서 문약한 선비나 인의(仁義)를 말하는 자들은 투사가 되지 못한다. 지금 이 나라는 성인군자가 아니라 공산좌익들로부터 나라를 지킬 투사가 필요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이렇게 한탄하였다.
“사내답지 못하게 칼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구나. 돗자리 깔고 인의(仁義)만 외치다가 왜적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구나.”
총을 든 일본군에게 무례를 따지는 그 옷기는 짓. 무력은 언어를 앞세우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본의 침략을 보고, 인의(仁義)롭지 못함을 따진다 한들 한갓 노예가 될 뿐이다.
그래서 나라는 투사가 지키는 법이다. 성인군자가 지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성인군자를 이야기 하고, 인의도덕을 말하고 싶으면, 투사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야 한다. 그리고 굴종의 길을 떠나야 한다.
전교조와 이를 에워싼 민노, 민주당을 비롯한, 민노총, 범민련, 실천연대, 한대련, 전교조 등 무수한 좌익들이 이전투구를 바라는데, 어찌 군자(君子)만 외우고 있을 것인가. 자 우익들이여, 나라를 지키기 위해 비단옷을 버리고, 흙탕물 속을 뒹굴며, 시궁창물을 마시지 않겠는가.
눈을 핏발을 세우고,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부으며, 총칼을 휘두르며 태극기를 호위할 생각 없는가?
(데일리안 광주전라=정재학 편집위원)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